미국에 온 뒤로 병원에 갈 일이 세 번 있었습니다. 한 번은 아이의 유치를 뽑으러, 두 번째는 눈 다래끼로, 세 번째는 기침감기 때문이었죠. 모두 아이 때문에 동네 현지 병원을 갔는데 그때마다 깜짝 놀랐습니다. 약 처방이 약하고 너무나 느긋한 의사들의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한국에선 증상이 심하다고 얘기하면 항생제 처방이 바로 들어갔는데 이곳에선 달랐습니다.
첫 번째는 치과에서였습니다. 아이의 앞이빨이 흔들렸을 때입니다. 치실로 묶어서 뽑자는 얘기만 꺼내도 아이가 난리법석을 떠는 통에 치과에 가기로 했습니다. 예약은 금방 잡을 수 있었습니다. 미국 병원에선 진료 받으려면 오래 기다려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던터라 지레 겁을 먹고 있었는데 아니었습니다. 집 근처 치과를 검색해 온라인으로 일단 예약한 뒤 병원에 전화해 일정을 당겨줄 수 있는지 문의하니 원하는 때로 예약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치과에 갔을 때였습니다. 의사 앞에 누운 아이는 아픈 게 싫다며 이를 뽑지 말아달라고 계속 이야기했습니다. 당연한 반응이었고 저는 내심 의사가 빨리 좀 뽑아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의사는 엑스레이 촬영 후 손으로 이를 흔들어보더니 뽑지 않는 게 좋겠다고 하더군요. 유치는 저절로 빠질 수 있는데, 괜히 억지로 뽑았다가 아이가 평생 치과 치료에 대한 트라우마만 가질 수 있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정 뽑고 싶으면 어린이 전문 치과에 가보라고 권했습니다.

흔들리는 치아를 빨리 뽑아주지 않았다가 덧니가 생기면 어쩌냐는 걱정에는 모든 사람의 치아 모양은 다 다르며 유치를 늦게 뽑는다고 해서 덧니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치아 엑스레이를 찍고 30분 넘게 진료를 봤지만 비용은 청구하지 않고 그냥 저희를 보내더군요. ‘애가 성가셔서 그냥 돌려보낸 건가’, ‘저 의사는 돈 벌기가 싫은가’ ‘지나치게 마음이 약한 것 같다’ 하는 별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물론 이때 못 뽑은 치아는 얼마 뒤 식사 중 심하게 흔들리던 날, 제가 손으로 흔들어 뽑았습니다. 이가 너무 흔들려 불편해지니 아이가 직접 뽑아달라고 하더군요.
얼마쯤 뒤 또 병원을 가야할 일이 생겼습니다. 아이 눈에 다래끼가 난 것이죠. 퉁퉁 붓고 가려워해서 도저히 병원을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집 주변 현지 소아과를 예약해서 병원에 갔습니다. 그런데 의사는 환부를 손으로 만져보고 몇가지 아이에게 물어보더니 바르는 연고만 처방해주었습니다. 저는 먹는 약을 받아서 빨리 낫게 해주고 싶었는데 말이죠. 기대에 못 미치는 속도이긴 했지만 그렇게 약을 바르며 기다리니 며칠 뒤 가라앉기는 했습니다. 답답함은 저의 몫이었습니다.
그리고 최근 아이가 기침감기 증세가 있어 다시 병원에 가야했을 때엔 의사를 바꿔보았습니다. 치료에 느긋한 게 지난번 의사의 개인적 성향 때문은 아닐까 싶어서 다른 의사로 바꿔본 것이죠. 그런데 이번에 만난 의사는 더 심했습니다. 제 기준에서는 아이의 기침 소리가 그리 좋지 않았고, 시판되는 감기약을 4일 정도 먹어도 소용이 없어서 빠른 치료를 원했는데 의사는 아무런 약 처방 없이 그냥 집으로 저희를 돌려보냈습니다. 아이의 목과 귀를 들여다보고, 청진기를 대 본 뒤 내놓은 결과였습니다. 감기 바이러스 때문인 것 같고 목이 부어있기는 한데 심하지 않다고. 그러니 따뜻한 물을 자주 먹이고 욕조 목욕을 자주 시켜주고 푹 쉬게 하라는 말과 함께요. 오늘 처방하는 약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정 약국에서 약을 사고 싶다면 기침을 진정시켜주는 크림 같은 걸 사서 자기 전에 가슴에 발라주라는 이야기만 덧붙이더군요.

충격적인건 저희가 병원을 방문한 게 수요일인데, 다음주 월요일 정도가 되면 자연스럽게 나을 거라는 의사의 말이었습니다. 의사의 느긋한 태도가 그렇게 당황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한국에선 감기로 소아과를 가면 무조건 약 처방에 3일 뒤에 다시 보자는 말을 들었는데 여기선 약 받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인가 싶었습니다. 너무 답답해서 한국에 있는 의사 지인에게 상황을 얘기하니 원래 미국 의사들이 아이들에게 약 처방을 보수적으로 하며, 한국에서도 원래 그래야 하지만 부모들의 요구나 분위기 때문에 약을 강하게 쓰는 편이라고 하더군요.
결국 약을 못 받은 저는 며칠간 아이 간호에 신경을 써야 했습니다. 영양식을 해먹이며 아이가 스스로 낫기만을 기다려야 했지요.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의사가 언급한 월요일이 되자 증세가 눈에 띄게 호전됐습니다. 의사가 용했던 걸까요 아님 시간이 약이었던 걸까요.

아직도 의사가 약을 써줬으면 더 빨리 나을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쉬운 마음은 듭니다. 하지만 미국살이가 끝날 때까지 제가 적응해야겠지요. 아프면 워크 인으로 바로 동네 병원에 가서 처방받을 수 있었던 한국이 그립습니다. 결론은 장기 체류 중 아파선 안 되겠다는 것. 가져온 상비약들을 그대로 한국에 가지고 가는 걸 목표로 건강 관리에 힘써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