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연수까지 와서 방구석 넷플릭스족이 되는 게 썩 바람직하지 않지만, 우리는 신문 방송 종사자로서 미디어에 대한 탐구 의식을 본능적으로 갖고 있을 것입니다. KBS 한국방송 직원인 저는 방송 미디어의 미래가 날이 갈수록 불투명해지는 상황 속에서, 도대체 미디어 선진국 미국은 어떻게 판이 형성되어 있을까라는 궁금증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리서치(Research) 차원에서 미국의 한국 대비 값비싼 OTT 구독을 과감히 시도해서, 그들의 허와 실을 파악해보는 실험을 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미국 OTT는 마치 다양한 대형 마트를 골라서 생필품을 소비하는 미국 특유의 장바구니 문화와 마찬가지로, ‘골라보는 재미’가 톡톡했습니다.
스포츠 기자인 저는 의무감에서 일단 전세계 최고의 스포츠 방송 미디어 기업으로 꼽히는 ESPN을 구독 신청했습니다. 스포츠의 천국 미국이 자랑하는 전문 스포츠 OTT의 위력은 명불허전이었습니다. 일단 보고 싶고, 봐야만 하는 콘텐츠가 너무 풍성했습니다. 메이저리그 야구와 NBA 농구부터 PGA투어 골프와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테니스 메이저 대회 방송을 원없이 결제 금액 약 4만원 정도를 내고 즐감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미국의 압도적 1강 스포츠로 군림하고 있는 프로풋볼(NFL) 시즌인 9월부터 1월까지는 ESPN의 구독률이 가장 치솟을 때라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ESPN 구독을 하며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은 미국의 대학 스포츠 중계 현황이었습니다. 한국과 달리 미국은 대학 스포츠가 굉장히 인기가 있고 상업적인 콘텐츠로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NCAA라고 불리는 전미대학리그는 각 종목별로 다양하게 있는데, 대학풋볼과 대학농구리그는 사실상 미국의 4대 프로스포츠 못지 않은 존재감을 과시합니다. 프로풋볼 시즌에 돌입하면 주말 이틀은 풋볼로 점철됩니다. 토요일은 대학풋볼, 일요일은 성인 무대인 프로풋볼이 ESPN과 일부 공중파 방송의 생방송 중계를 타는데, 우리나라의 한국시리즈나 축구 A매치만큼 뜨거운 열기를 뿜어냅니다.

스포츠 중계만 보고 살수는 없으니, 다른 콘텐츠들도 즐겨야 하는데 당연히 미국도 지구촌 최강 OTT인 넷플릭스가 대세이긴 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미국 OTT 업계도 중대한 분기점에 돌입한 것 같습니다. 넷플릭스의 경쟁자인 디즈니 플러스의 공세가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넷플릭스라는 공룡 앞에서 디즈니가 취한 전략은 ‘합종 연횡’이었습니다. 디즈니플러스는 영화와 IP에서 강점을 보이고 있었지만, 드라마와 예능에서 넷플릭스의 물량 공세를 당해낼 수가 없었죠. 그래서 꺼내든 계책이 바로 결합 상품의 출시였습니다.
디즈니플러스는 드라마 시리즈에 강한 훌루(HULU)에다가 자사가 보유하고 있는 킬러 생방송 콘텐츠인 ESPN, 이렇게 3가지 전혀 다른 OTT 서비스를 묶음 상품으로 출시해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개별 가입자 수로는 넷플릭스의 적수가 아니었지만, 3가지 번들 합산 가입자는 넷플릭스를 위협할 정도의 위력을 보이고 있습니다.
디즈니 플러스의 번들 전략은 우리나라 OTT 업계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포츠 라이브 중계를 즐겨 보는 아빠(ESPN), 성인 취향 드라마물의 애호가인 엄마(HULU), 디즈니 캐릭터와 애니메이션을 찾는 아이(디즈니플러스)의 기호를 전부 다 잡아낼 수 있기 때문에, 무엇보다 심리적 잠금 효과, 즉 구독을 끊는 이탈률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저 역시 ‘이왕 ESPN 볼 거 돈 좀 더 들여서 디즈니 영화까지 보자’고 무심코 구독한 3개 번들 상품에서 좀처럼 구독 해지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디즈니가 취한 OTT 번들 작전은 1년 내내 세계 최고 스포츠 리그를 생중계할 수 있는, 또 그에 대한 흥행성이 너무나도 풍부한 미국 시장에서 통할 수 있는 특화된 전략 상품일 것입니다. 하지만 넷플릭스의 최근 행보 역시 WWE 프로레슬링 독점 중계 등 스포츠 쪽으로 외연 확장을 꾀하고 있는 건 부인할 수 없습니다. 미래 OTT 전략에서 스포츠가 결정적 변수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다만 미국 OTT 즐기기가 한국과 비교해 영 개운치 않은 부분도 있습니다. 광고입니다. 미국은 워낙 광고 시장이 크고 활발하다보니 구독 옵션인 OTT 상품에서도 시청자들이 상당히 긴 광고를 수시로 봐야 하는 불편함이 있습니다. 이 광고 자체를 아예 안 보려면 일반 구독료보다 훨씬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하는데, 그렇게까지 큰돈 들이기는 주저하게 됩니다.
아무튼 넷플릭스와 디즈니가 펼치는 OTT 전쟁의 최종 결과가 어떻게 될지 정말 궁금해집니다. 미국도 한국처럼 기존 레거시 방송국의 영향력과 존재감이 점점 하락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추세더군요. 일말의 불안감을 뒤로 하고, 저는 오늘도 거실 TV를 켜고 어떤 OTT에서 어떤 양질의 콘텐츠를 시청하여, 의미있는 연수 시간을 만들지 고민해보겠습니다. 너무 OTT만 봐도 남는 게 없겠죠? 책도 좀 읽고, 유튜브 통해 올라오는 올드 미디어 소비도 좀 해야겠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