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4월 현재, 도널드 트럼프가 이끄는 미국을 바라보는 세계인의 시선은 차갑다. 이란 전쟁의 명분과는 별개로 호르무즈 해협이 막히며 기름값 등 일상에 미치는 파장은 적지 않다. 가치에 기반한 동맹을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청구서를 내미는 노골적인 행태는 낯설다. 미국의 소프트파워가 흔들리는 것이 패권국 쇠퇴의 신호라는 분석도 이어진다. 지도자 한 명에 따라 국가의 진폭이 이토록 요동치는 모습은 민주주의의 구조적 한계를 드러낸다.
그럼에도, 이곳에서 미국이 여전히 우리가 알던 미국임을 느끼게 하는 순간들은 분명 존재한다. 특히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그렇다. ‘노 키즈존’이 낯설지 않은 한국과 달리, 미국은 적어도 아이들이 환영받지 못하는 사회는 아니다. 일상 속 몇몇 장면에서 체감되는 온도 차는 생각보다 크다.
어린이의, 어린이를 위한
어린이 보호와 배려는 특별한 일이 아니라 일상이다.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을 관람하던 날, 인터미션 중 몸이 불편한 아이가 엄마의 손을 잡고 화장실로 향했다. 붐비던 사람들은 자연스레 길을 터줬다. 한 신사는 아이가 혼자 움직이기 어려워 보였는지, 별다른 망설임 없이 도움을 자청하며 함께 들어갔다. 계산된 배려라기보다 몸에 밴 반응에 가까웠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잠시 한눈을 판 사이 둘째를 놓쳤는데, 처음 보는 한 남성이 다가와 “저쪽으로 달려가는 아이가 있어 걱정됐다”고 알려줬다. 고맙고 부끄러웠다. 이곳에서는 아이를 ‘남의 아이’로 두지 않는구나 싶었다.
스쿨버스는 말 그대로 도로 위의 절대적 존재다. 아이를 내려주기 위해 정차하면, 중앙분리대가 없는 도로에서는 반대편 차량까지 멈춰야 한다. 이를 어기면 높은 벌금과 면허 정지 처분이 뒤따른다. 규정이 엄격해서라기보다, 그 규정을 모두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더 인상적이다.
승부 이전에 경험을, 이후에는 격려를
이곳 아이들은 주말이면 하나 이상의 스포츠를 즐긴다. 클럽 스포츠가 일상처럼 자리 잡아 있다. 두 아들도 축구를 한다. 경기장에서 느낀 분위기는 한국과 사뭇 달랐다. 부모들은 내 아이와 남의 아이를 가리지 않고 이름을 부르며 응원하고 격려한다.
더 인상적인 건 경기 운영 방식이다. 특정 연령대까지는 포지션을 고정하지 않고 돌아가며 경험하게 한다. 승패보다 다양한 경험을 먼저 쌓게 하겠다는 의도가 분명하다.

경기가 끝나면 양 팀 부모들이 마주 서서 손을 들어 터널을 만든다. 결과와 상관없이 아이들은 환하게 웃으며 그 사이를 뛰어 지나간다. 경쟁은 있었지만, 적대는 남지 않는 구조다.
지도자는 흔들려도, 아이를 대하는 방식은 흔들리지 않는다. 민주주의의 진짜 내구성은 정치가 아니라, 일상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