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로부터 연수 마무리 준비 관련 메일을 받았다. 개인적으론 곧 한국으로 보낼 짐을 정리해서 부칠 예정이다. 그렇다. 결국 귀국의 시간은 오고야 마는 것이다. 아직 두 달가량 남았지만, 기승전결의 마무리 국면인 만큼 연수 1년의 의미를 갈무리해도 괜찮겠다. 먼저 연수를 다녀온 회사 선배는 “금단의 열매를 맛 봤다”고 했다. 내 삶에서 두 번은 없을 시간, 내게는 무엇이 남았을까.
금연과 조깅
고3때부터 담배를 피웠다. 골초였다. 하루 한 갑 반을 피웠다. 글 쓰는 사람의 숙명 같은 것이라 우겨댔다. 출국 한 달 전 즈음 부비동염, 그러니까 축농증 수술을 받았다. 이때 ‘미국에선 담뱃값도 비싸다는데, 끊자’고 작심했다. 연수생의 스트레스는 취재 현장의 그것과는 비할 성질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비교적 수월하게 작별했다.

군 복무 때의 구보를 제외하면 내 인생에서 절대 없을 것 같은 조깅을 시작했다. 연수 초기 어느 날 집 근처 공원을 갔는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제 상황과 처지에 맞게 뛰더라. 빨리 뛰는 남성, 걷다시피하는 할머니…. 아무 생각 없이 슬금슬금 따라 뛰어봤다. 얼마 못 가 헉헉댔지만 뿌듯했다.
아마존에서 조깅화를 산 뒤, 사는 곳 주변을 탐색했다. ‘북쪽 숲(North Woods)’이라는 직관적인 이름의 숲길이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었다. 이 길을 자주 뛰었다. 솔잎 냄새, 새 소리, 나무 사이의 빛. 말을 걸어오는 사람도 없고, 답해야 할 메신저도 없었다. 훗날 노스캐롤라이나 채플힐에서의 생활을 떠올릴 때면 나는 이곳이 자주 생각날 것 같다.
가족과 이웃
아직 꼬맹이인 아들 두 녀석을 잘 안다고 생각했다. 좋든 싫든 부대끼는 시간이 확 늘어나니 내가 알고 있다는 건 착각이고 자만이었다. 큰 애는 소갈비보다 돼지 등갈비를 더 맛있게 먹는다. 버섯은 참 싫어하더라. 둘째는 처음 본 음식도 겁없이 집는다. 그런데 여전히 포크나 젓가락보다 손이 먼저 나간다. 둘 다 억울한 상황을 못 참는다. 큰놈은 눈물을 참느라 벌게진 눈으로 조근조근 얘기한다. 둘째는 목에 힘줘 따지고 우긴다. 크로키처럼 희미하게 보이던 캐릭터의 윤곽에 채색을 입힌 느낌이랄까. 지금 이 시기의 두 녀석 모습을 못 본 채 시간이 흘러갔으면 내 삶은 얼마나 건조했을까.

서울의 아파트에 살던 내게 이웃도 생겼다. 건너편 조이스 할머니는 83세인데도 허리가 꼿꼿하다. 쿠키를 만들면 “애들 맛보여주라”며 갖다 준다. 동갑내기 남편인 톰은 내가 골프를 치고 올 때면 “버디 했냐?”고 묻는다. 지난 성탄 때는 동네 한국 아이들을 모아 말 구유의 아기 예수 이야기를 연극으로 꾸며 공연했다. 아, 그 연극은 무언극이었다.
타국 살이의 피곤함 때문일까. 한국 이웃들도 끈끈했다. 아이들은 스스럼없이 문을 두드리며 “놀 수 있어요?”라며 친구를 불러낸다. 이웃으로 지내다 6개월 먼저 귀국한, 엄마이기도 한 한 부장판사는 “‘응답하라 1988’속에서 살다 갑니다”라는 인사말을 남겼다.
결국 연수라는 게 대단한 무언가를 새롭게 배우기보다, 잊고 지낸 것들을 되살리는 시간에 가까웠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에 돌아가면 기사 마감과 사람들, 끝없이 울리는 메신저 속으로 또 들어가겠지. 그래도 채플힐의 숲 냄새, 톤 높은 아이들의 목소리, 노부부의 환한 웃음…. 종종 이 일년의 기억이 문득 생각나지 싶다. 벌써 그리워지는 건 글랜케런 잔에 있는 버번 한 잔 때문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