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권해외특파원 취재 수첩
- 저자문명호, 김숙현
- 발행LG상남언론재단
- 발행일2001-08-27
책 머리에
사실 워싱턴이나 도쿄, 파리 등 국제뉴스의 현장에서 특파원으로 활동한 훌륭한 선배들을 두고 이 글을 쓴다는 것은 외람되고 따라서 주저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필자의 해외취재 경험을 정리할 생각을 갖게 된 것은 필자가 순회특파원 또는 상주특파원으로 일했던 1970, 80년대의 외환사용 규제 시대와는 달리 지금은 세계로 뻗어가는 한국 경제와 함께 한국 미디어도 세계 곳곳에 특파원을 파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해외에서 보내는 뉴스와 정보 하나 하나가 우리들에겐 귀중한 정보가 되고 한국이 세계로 더욱 뻗어가는 데 자료와 지침이 되고 있다. 말하자면 세계 현장의 뉴스는 한국사회를 국제사회로 이끄는 견인차가 된다. 필자가 워싱턴에 나가 있을 때만 해도 서울의 각 언론사들이 파견한 특파원은 1명씩이었다(TV방송사만 카메라 기자 포함해 2명). 그런데 일본의 대부분 언론사 워싱턴지국에는 7, 8명 내지 현지 고용 스트링어까지 약 10명이 활동했다. 주목되는 것은 어느 일본 미디어도 7, 8명 중에 경제전문기자와 과학기술 담당 전문기자를 파견해 놓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들 전문기자들은 한국기자들이 미처 커버 못하는 의회나 무역위원회의 청문회 같은 데 반드시 나가 전과정을 취재, 상세한 기사를 보냈으며 또 현장에서 입수한 정보를 본사에 보냈다. 과학기술 전문기자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텍사스의 인공위성 발사 현장이나 캘리포니아의 실리콘밸리 같은 첨단산업단지를 수시로 방문해 미국의 새로운 과학기술을 취재, 본국에 송고했다. 오늘날 일본이 세계 최강국의 위치에 오르게 된 데는 국제경제의 흐름과 선진 과학기술 정보와 뉴스를 그때그때 재빨리 캐치해 보도한 것이 크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중국도 이를 열심히 뒤따르고 있으며 놀라운 발전을 해 나가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해외에서 활동하는 특파원들의 취재활동은 국제사회의 뉴스를 곧바로 전한다는 의미도 중요하지만 국가 이익을 위해 일익(一翼)을 담당하고 있다는 의미도 있다. 이 책의 1부에선 기사로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필자의 해외 취재 경험과 과정을 기술했으며, 2부에선 이론적이며 학술적인 접근방법으로 해외 취재 활동을 다루었다. 이 책자가 해외로 나가 활동할 기자나 기자지망생뿐 아니라 정부나 기업체 같은 데서 해외로 파견되는 직원들과 세계 뉴스에 관심 있는 일반 독자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끝으로 이 책의 출판을 지원해 준 LG상남언론재단에 감사를 드린다.
더 중요한 요즘에는 전혀 적절하지 못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인터넷 기업인 야후(Yahoo)의 가치가 어디 있는가라고 하면, 야후가 가진 서버와 같은 장비보다는 야후라는 브랜드 자체가 훨씬 더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자체적으로 개발한 브랜드 자산의 가치를 반영하지 못하는 현 회계제도는 문제점이 있으며, 이를 어떤 식으로 든 회계에 반영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는 상황이다. 실제 영국의 일부 기업에서는 대차대조표상에 브랜드 자산을 포함시키는 기업이 있으며, Rank Hovis McDougall사의 경우 1988년 자사의 60개 브랜드 가치를 모두 12억 달러로 평가해 대차대조표에 올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디어 쪽에서도 루퍼트 머독은 자신 소유의 기업을 매매하면서 집요하게 브랜드가치를 포함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면 브랜드 가치는 무엇인가? 일단은 같은 마케팅 노력, 즉 흔히 4p(Product, Price, Place, Promotion)가 동일했 을 때 브랜드 상품과 브랜드가 없는 상품간에 벌어지는 이익의 차이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동일한 품질과 기능을 갖고 있으면서도 브랜드 가치가 낮은 상품에 대해 100만 원어치 광고를 했을 때 매출 이 3,000만 원이 발생했다. 그런데 브랜드 가치가 높은 상품에 대해 100만 원어치 광고를 했더니 매출이 5,000만 원이 었다면 이 경우 브랜드가 매출에 기여한 액수는 2,000만 원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브랜드를 실제 정확하게 회계적 가치로 반영하기 위해서는 선행되어야 할 작업이 브랜드의 가치를 매기는 작업 이 필요하다. 브랜드의 가치를 매기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영국의 인터브랜드사(http: //www.interbrand.com)를 비롯해 국내에서 사이버 브랜드 증권시장을 운영하는 브랜드스톡(Brandstock)까지 나름대로의 브랜드 가치 측정법을 개발해 사용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어떻게 브랜드 가치를 평가하고 그 가치를 매길 수 있는지, 그리고 이를 어떻게 적 용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1) 대체(代替)비용 측정방법
가장 간단한 브랜드 가치 측정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기존의 브랜드에 필적하는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 들어가는 비용을 측정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어떤 제품을 개발해서 완벽하게 자리잡은 브랜드가 되기까지의 성공 확률이 약 25%라고 가정하자. 그리고 제품의 개발비에서부터 시장에 자리잡는 데 드는 비용이 약 1,000억 원이라고 하면 대체로 이 제품의 브랜드 가치는 약 4,000억 원으로 볼 수 있다. 적어도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어 성공한 브랜드와 같은 가치 를 가지려면 4,000억 원 정도를 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미디어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면 CATV 채널이나 특정 신문, 잡지가 어느 정도의 인지를 갖고 자리 잡기 위해서는 투자 비용은 물론이고, 동종의 채널이나 신문과의 경쟁 등에서 이겨야 한다. 이 경우 경쟁에서 살아 남는 확률이 20%이고, 투자비용이 100억 원일 경우, 이와 동일한 브랜드를 갖도록 하는 데 드는 대체 비용은 약 500억 원이라고 보는 방법이 다. 그러나 이 대체비용 측정방법은 지나치게 단순화되어 있다는 점이 문제다.
2) 소비자 행동 조사를 이용한 방법
소비자 행동을 통한 브랜드 가치의 측정방법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다. 예를 들어 동일한 인터넷 사이트 내용을 보여주 고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어느 정도 가격을 지불할 용의가 있는지를 질문을 한다. 이 경우 인터넷 사이트의 이름을 알 수 없도록 하는 것이 전제가 된다. 그 다음 동일한 인터넷 사이트에 대해 소비자들에게 이름을 보여주고, 사이트 내용 을 또한 보게 한 다음 어느 정도 가격을 지불할 용의가 있는지를 조사한다. 결국은 두 가격의 차이를 브랜드 가치로 볼 수 있다. 같은 기사 내용이라도 월스트리트 저널이라는 유료 사이트에서 나오는 기사에 대한 신뢰가 출처가 불분명 한 곳의 경제기사보다 훨씬 신뢰를 받을 것이다. 당연히 독자들도 신뢰할 만한 사이트 기사에 대해 더 많은 돈을 지불 하려고 할 것이다.
또 다른 소비자 행동조사를 통한 방법으로 소비자들이 그 브랜드 이름만 듣고 해당 브랜드의 상품을 구입하려고 하는 의향이 있는가라고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새로 신문을 구독하려는 사람 1,000명을 대상으로 신문의 이름을 들려주고 과연 어느 신문을 구독할 의사가 있는지를 물어본다. 예를 들어 A신문이라고 응답한 사람이 약 500명, B신문이라고 응 답한 사람이 300명, C신문이라고 응답한 사람이 200명, D신문 0명이라고 하자. 그리고 신문 전체를 구독하는 사람이 종합적으로 1,000만 명이라고 가정하자. 이 경우 각 신문 한부에서 발생하는 이익이 똑같이 100원(판매와 광고를 합쳐 서 - 실제는 광고단가도 부수에 따라 다르므로 신문마다 단위 이익이 다를 수 있다. 따라서 부수가 늘어날 경우 단위 당 이익이 더 커진다고 할 수 있다)씩이라고 가정하면 어느 특정일 하루의 브랜드 가치를 A신문의 경우 5억 원, B신문 의 경우 3억 원, C신문의 경우 2억 원, D신문의 경우 브랜드 가치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신문, 방송, 잡지의 경우 이런 브랜드 가치가 장기간에 걸쳐 일어나기 때문에 한번 구입하면 상당기간을 사용하는 내구재와는 차이가 있다 . 따라서 브랜드 가치를 처리할 때 이런 점도 고려해야 한다.
한편 소비자들의 행태에 대해 확률을 통해 브랜드의 가치를 측정하는 방법도 있다. 예를 들면 상품을 인지하는 단계, 친숙하다고 느끼는 단계, 구매의사를 갖는 단계, 구매가 가능한 단계 등에 대한 확률을 구하고, 단지 기능만 따질 때 선택할 해당 제품 또는 서비스가 선택될 확률을 구해 브랜드의 가치를 구한다. 이 경우 브랜드 가치 = 브랜드 매출이 익 × 브랜드 때문에 올라간 구매 확률이 될 것이다.
3) 주가를 이용한 브랜드 자산 평가법
시카고 대학의 교수인 사이먼(Carol J. Simon)과 설리번(Mary W. Sullivan)은 소비자 행동에 의한 조사를 할 경우 조 사자의 임의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소비자가 스스로 어떻게 행동할 것이다라고 하는 것을 소비자들에게 물어 보 았자 별로 신뢰할 만한 것이 못된다는 논리였다. 그래서 이들은 주가를 평가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보았으며, 특히 주가는 미래에 대한 가치까지 반영되어 있다는 점을 중시했다. 이들은 주가를 토대로 하고 시장점유율, 광고마케팅비 등 구체적인 수치로 잡히는 것들만 사용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이들의 방법을 보면 우선 주가와 주식수의 함수라고 할 수 있는 기업 주식의 시장에서의 가치를 계산한다. 여기에서 공장과 설비, 재고와 현금 등의 유형자산의 대체비용을 제하면 무형자산 부분이 남게 된다. 이 무형자산의 가치를 브 랜드 자산의 가치, R&D나 특허와 같은 브랜드 외적인 요소, 정부의 규제나 기업집중 같은 산업요소의 가치 등 세 부분 으로 나눈다. 그리고 브랜드 가치를 결정짓는 요소로 광고비의 크기(지금까지의 누적 광고량), 브랜드의 나이(시장진 입 연한과 순서), 마케팅 비용절감에 의해 창조된 시장점유율 등이다. 마케팅비용 절감에 의해 창조된 시장점유율은 마케팅비용을 절감한 만큼 물건값이 싸지고 그것 때문에 시장점유율이 높아진다고 가정할 때 이같이 높아진 점유율이 바로 ‘마케팅 비용 절감에 의해 창조된 시장 점유율’이다.
4) 파이낸셜 월드의 계산방법
파이낸셜 월드(Financial World)는 1992년부터 매년 세계 유명 브랜드의 가치를 계산하고 있으며, 그 결과를 매년 발 표하고 있다. 이들이 사용하는 방법은 전문가들에게도 많이 애용되고 있는데, 이들은 특히 자신들의 브랜드 가치 계산 노하우를 감추지 않고 공개함으로써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들이 사용하는 것은 재무제표와 주가를 이용한 방법이다. 우선 과거 영업이익 중 브랜드의 지명도가 기여한 부분을 측정한다. 여기에 미래의 현금창출 능력과 할인률 등을 고려한 계수를 곱해서 미래현금 흐름의 현재 값을 계산한다. 이를 위해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이 PE 또는 PER(Price Earning Ratio - 주가를 주당이익으로 나눈 비율)이다. 이처 럼 브랜드가 창출한 영업이익 이익에 PE를 곱한 값을 브랜드 가치라고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유명 인터넷 사이 트가 낸 영업이익과 브랜드가 전혀없는 사이트가 낸 영업이익의 차이가 10억 원이라고 계산하고 브랜드가치가 있는 사 이트의 PE가 10배라고 하면, 이 회사의 브랜드가 가치는 100억 원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계산에는 문제가 있다. PE라는 것이 기업의 총체적인 돈 버는 능력을 평균적으로 나타낸 지표이지, 그 회 사가 가지고 있는 특정 브랜드의 돈 버는 능력을 나타내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PE비율을 일부 조정해 줄 필요가 있다. 이 부분이 가장 어려운 부분으로 브랜드의 특성, 시장의 특성, 회사의 정책 등 여러 가지를 반영해야 한 다. 이것이 바로 PE±α(마케팅적인 요소)이다. 마케팅적인 요소를 위해 파이낸셜월드는 인터브랜드가 제공하는 평가 방법을 동원해 α에 해당하는 부분을 계수화한다. 인터브랜드의 평가 방법은 각 브랜드의 마케팅적인 요소를 리더십, 안정성, 시장성, 국제화, 트랜드, 지원, 보호 등을 평가하여 PE에 적절한 수치를 더하거나 빼서 브랜드의 가치를 구한 다.
그러나 마케팅적 요소에 리더십, 국제화 등 브랜드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부분도 일정 정도 포함되어 있어 브랜드 가치가 너무 적게 포함되는 경우도 있다는 비판도 있다.
5) 국내 적용의 한계
순수한 마케팅적인 접근 방법을 제외하고는 현실적으로 파이낸셜 월드 모델이라든지 주가를 이용한 브랜드 가치 측정 법의 국내 적용에는 난점이 많다. 우선 국내의 경우 인터넷 기업이나 일부 방송과 신문을 제외하고는 주식의 시장가치 를 정확하게 측정하기 어렵다. 상장이 되어 해당 미디어의 시장가치가 평가를 받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디어가 갖는 브랜드가 가치는 더욱 커질 것이 명확하기 때문에 이를 측정해 미디어 전체의 가치에 포함시 키는 작업을 꾸준히 전개할 필요가 있으며, 미디어 경영자들도 회사의 브랜드 가치를 높일 수 있는 다양한 전략을 구 사할 필요가 있다. 궁극적으로는 국내의 미디어도 시장의 판단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주식시장의 공개도 점점 가시화 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현재로서는 국내 기업의 경우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한 조직을 두고 있지 않으며, 광고 비 등 브랜드 가치를 파악하기 위한 정확한 자료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지 못하다. 현재 국내 미디어 기업의 브랜 드 관리 단계는 브랜드에 대한 각종 이미지를 분석하는 정도에 불과하며, 이를 좀더 개선해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 한 조사도 병행할 필요가 있다.
제1부현장을 뛰어라
워싱턴을 정복하라
1981년 3월이다. 미국 동부의 매사추세츠 주 케임브리지 시 900번지 2층에 있는 원룸 아파트에서 밤 11시가 지나 막 잠이 들려고 하는데 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 목소리를 듣고보니 워싱턴의 강인섭 선배(당시 동아일보 워싱턴 특파원)였다. 서울 본사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내가 강 선배 후임으로 워싱턴 특파원으로 발령났다는 소식이었다. 순간 가슴이 뛰었다. 얼마나 바라던 자리였는가. 당시 나는 미국 정부의 풀브라이트 프로그램으로 1년간 케임브리지(보스턴 지역권)의 하버드 대학교 페어뱅크 동아시아연구소에 연구원으로 가 있었다.
강인섭 특파원과 전화가 끝난 후 잠시 워싱턴 특파원으로 뛰는 내 모습을 그려 보았다.
그로부터 두달 후인 5월, 뉴욕에서 갈아탄 이스턴 셔틀(워싱턴-뉴욕, 뉴욕-보스턴을 시간마다 운항하는 이스턴 항공 여객기)이 워싱턴D.C. 상공에 이르자 눈앞에는 펜타곤(국방부)과 링컨기념관 그리고 백악관 의회 건물이 포토맥 강과 워싱턴을 둘러싸고 달리는 벨트웨이와 함께 들어왔다. 순간 마음 속엔 “내가 저 건물 안의 모든 뉴스를 정복해야 한다”는 마치 점령군과도 같은 심정이 들었다. 그리곤 이상하게도 1974년 10월, 당시 베트남과 베트공, 월맹군과의 막바지 전투가 벌어지고 있던 사이공 탄손누트 공항에 내리면서 느꼈던 자신감이 온몸에 솟구쳤다.
나는 진철수 권오기 이웅희 강인섭 선배들에 이어 동아일보의 5대 워싱턴 특파원으로 부임했다. 사무실은 대부분 외국 특파원들의 사무실이 있는 워싱턴D.C. 42번가 F스트리트에 있는 내셔널 프레스 빌딩 10층에 있었다. 백악관과는 두 블럭 정도로 걷는 거리였다.
내가 워싱턴에 부임해 우선 먼저 신경을 쓴 것은 워싱턴 지리를 빨리 익히는 일이었다. 그래야만 의회, 국무부, 국방부 등 매일같이 들러야 할 곳을 달려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무부 정오 뉴스 브리핑을 다녀올 때도 한길만 말고 다른 길로 돌아오는 등 길을 익혀 나갔다. 그 다음으로 신경을 쓴 것은 미 행정부나 의회연구소 등 취재 기관에 알 만한 사람들이 있는가를 체크하는 일이었다. 뉴스 소스(News Source)를 만들어 놓기 위한 것이었다. 뉴스원을 빨리 만들어 놓을수록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있고 또 급할 땐 전화 취재도 가능하도록 해야 했기 때문이다.
국무부 백악관 뉴스 브리핑이 끝나 송고할 만한 뉴스가 없으면 기자실에 들러 그곳 고참 기자들과도 인사를 나누고 방해되지 않는 한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하며 얼굴을 익혀 나갔다. 또 일본의 <아사히>(朝日)신문 특파원이나 홍콩의 <파이스턴 이코노믹 리뷰> 특파원 등 아시아권 기자들과 얘기도 나누고 가끔 국무부 카페테리아에 내려가 함께 점심도 했다. 그러는 사이 혹시 뉴스 브리핑에 늦거나 다른 데 취재가 있어서 브리핑에 못 가게 될 경우 서로 브리핑 내용도 주고받는 사이가 됐다. 물론 나도 성실하게 해줬다.
겨울이 되면 크림슨 빛깔의 하버드 대학 목도리를 일부러 길게 걸치고 국무부 건물 안을 돌아다녔다. 혹시 하버드 출신들이 나를 곧 알아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과연 이 전략은 맞아떨어져 다음 해 동아일보 창간 기념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의 특별 회견을 성공시키는 데 크게 도움이 됐다.
동아일보 창간 62주년 기념일은 4월 1일이었다. 나는 부임 초부터 레이건대통령과의 인터뷰를 추진해야겠다고 계획했다. 먼저 백악관 대변인에게 계획을 알리고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할지를 물었다. 그는 미국 대통령과의 특별 회견 신청은 미국 미디어들과 전세계 미디어들로부터 백 건 이상 들어와 있다며 먼저 공식 신청서를 내는 것이 순서라고 알려 줬다. 물론 서울 본사엔 아직 알리지 않았다. 가능성도 별로 없는 데다 어느 정도 진전이 되어야 알릴 생각에서였다.
곧 동아일보 워싱턴 특파원 명의로 1982년 4월 1일자 동아일보 창간62주년을 기념하는 레이건 대통령과의 특별 회견 요청서를 만들어 백악관 대변인실로 발송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는데 아무 소식이 없었다. 그런데 마침 국무부 아시아태평양국 대변인이 잘 아는 관리였다. 그는 하버드 대학에서 새뮤얼 헌팅턴 교수가 소장으로 있던 국제문제연구센터(CFIA)에 연구원으로 가 있었기 때문에 같은 기간에 페어뱅크 동아시아 연구소에 가 있던 나와 세미나도 같이 하고 비교적 친숙한 사이였다.
나는 국무부 8층에 있는 그의 방에 가끔 들렀다. 어느 날 그에게 동아일보가 내년이면 창간 62주년을 맞는다는 것, 레이건 대통령과 창간 기념 특별회견을 갖고 싶다는 뜻과 회견 신청서를 백악관에 보낸 사실을 얘기했다.
그러자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회견 신청서만으론 안되며 그도 백악관대변인과 잘 아는 관계이니 추천서를 보내주겠다는 것 그리고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서울의 주한 미국 대사 추천서라는 것을 알려줬다. 미국 대사 추천서에 레이건 대통령과의 특별 회견이 한·미 우호 증진에 큰 보탬이 되리라는 것과 동아일보의 역사와 영향력에 대해 언급된다면 더욱 효과적일 것이라는 조언이었다.
조금은 가망이 있어 보였다. 즉시 서울 본사에 인터뷰 계획과 백악관에 이미 회견 신청서를 보냈다는 사실을 알리고 본사에서 미국 대사관에 대사 추천서를 국무부에 보내주도록 요청하는 발행인 명의의 공문을 보내주도록 연락했다. 며칠 후 국무부 대변인은 백악관 대변인에게 나와의 관계와 한국에서 동아일보의 영향력에 대해 자세히 얘기해줬다고 알려줬다.
그로부터 한 달 가량 지난 후 백악관은 국무부를 통해 특별 회견 신청이 수락되었으나 직접 만나는 회견은 이미 여러 국내외 미디어와의 회견들이 잡혀 있어 어려우며 대신 서면 회견이 좋겠다고 알려왔다. 좀 실망스러웠으나 어쩔 수 없었다. 평소 백악관 공식 기자 회견장에서 한국 기자에게 질문권이 거의 주어지지 않는 것을 생각하면 서면 회견도 사실 대단한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레이건 대통령과의 특별 서면 회견이 이루어졌으며 회견 내용은 1982년 4월 1일자 동아일보 1면을 크게 장식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회견기와 함께 ‘동아일보의 창간 62주년을 축하합니다’라고 자필로 쓰고 서명한 자신의 사진을 선물했는데 이 레이건 대통령 축하 사진은 동아일보 접견실에 오래 동안 걸려 있었다. 사족을 달자면 레이건 대통령과의 회견을 성사시킨 공로로 회사는 내게 특종상을 주었다.
1983년 전두환 대통령과 일행이 공식 방문한 버마(현재 미얀마)의 랭군에서 폭파 테러사건이 발생했을 때다. 사건이 사건인 만큼 한국뿐 아니라 워싱턴에서도 아연 긴장했다. 과연 누구의 소행일까. 북한일까, 국제 테러리스트 아니면 자유민주운동 단체일까. 누구보다 의혹이 크게 가는 곳은 북한이었고 한국군과 주한미군엔 비상이 걸려 있었다. 서울 본사로부터도 미국 정부의 정보를 신속히 취재하라는 지시가 와 있었다. 이때 평소 가끔 들러 얘기를 주고받던 정보 소식통이 생각났다. 결국 이 뉴스 소스로부터 버마 현지 미 국방부 정보국(DIA)이 입수, 워싱턴에 보고해온 ‘북한 소행’이란 정보를 캐냈다. 물론 이 뉴스는 서울에서 특종 보도됐다. 미국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서남아시아뿐 아니라 대 중국 정보를 위해 버마지역에도 DIA 요원들을 파견해 놓고 있는데 서남아지역 군사 정보에 관한 한 DIA는 중앙정보국(CIA)을 앞지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 좋은 인연이 미국 대통령과의 인터뷰를 만들어 주고 고급 정보를 얻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으며 이렇게 나의 워싱턴 취재 영역은 하나씩 하나씩 넓혀져 갔다.
정확한 뉴스 소스를 찔러라
국내에서건 해외에서건 취재에서 부딪히는 어려움의 하나는 어디를 어떻게 찔러야 뉴스가 나오는가 하는 것이다. 마치 고기 낚시에서 고기들이 있을 목을 찾아 낚시를 드리워야 하듯이…. 물론 노력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뉴스가 나올 만한 데를 정확하게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말하자면 뉴스 냄새가 나는 곳을 잘 맡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세계 어느 곳에서 취재를 해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국제 정치의 중심이자, 곧 국제 뉴스의 중심인 워싱턴에선 겉돌기 쉽다.
필자의 취재 경험에서 한 사례를 들겠다. 지난 80년대 초 있었던 미국산 쌀의 고가 수입 파동 때 한국 정부의 조달청장이 주한 미국 대사관측에 한국이 계약 조건을 위반했다고 자인, 국내에서 큰 말썽과 분노를 일으켰던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한국 정부의 조달청장이 이 계약 위반을 자인한 사실은 미국 대사관에 의해 즉시 워싱턴에 보고되었다.
여기서 한 가지 참고로 덧붙일 사항이 있다. 한국 사회는 기록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나 기록 문화가 소홀하지만(옛날 우리 선조들의 기록 문화는 훌륭했었다) 서구나 일본 사회의 기록 문화는 대단히 높다. 특히 행정부, 의회 등 관리 사회에선 기록에 대한 인식이 철저히 확립되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우리나라를 침범한 왜국 수군의 주방장이 기록으로 남긴 일지가 발견되어 오늘날 당시 배의 형태나 항해술, 전투 양상 등을 연구하는 데 훌륭한 사적 자료가 되고 있다는 얘기도 있다.
미국의 해외 주재 외교관들도 그들이 만나는 주재국 관리 등 인사들과의 대화를 일일이 기록한 것을 보고하는 것이 상례다. 한 예로 지금은 비밀이 해제된 미국과 중국의 국교 정상화 전의 홍콩 주재 미국 총영사관 외교관의 대중국 요인 접촉 결과 보고서를 보면 놀라울 정도로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가령 홍콩의 어느 장소에서 은밀히 만났는데 방의 벽 색깔은 어떤 색이고 꽃병엔 무슨 꽃이 꽂혀 있었으며 커튼 색깔은 어떤 색으로 방 분위기가 주는 대화 분위기가 아주 안온하고 정감적이었다는 기술로 시작되고 있다. 이 대화 분위기에 대한 묘사는 워싱턴 본부에서 이 보고서를 읽는 데스크로 하여금 접촉 분위기, 대화의 진실성 여부까지도 판단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런 다음 “우리는 무슨 칵테일을 한 잔 들고 무슨 운동 얘기부터 시작했다”는 식으로 자세한 보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조달청장이 주한 미 대사관측에 한국이 계약 조건을 위반했다고 자인한 대화 내용 역시 한 자도 빠지지 않고 보고서로 작성돼 그 즉시 워싱턴에 보고되어 있었다. 국무부는 한국 조달청장의 이 계약위반 자인 보고서를 대외 쌀 판매 청문회를 준비중인 의회의 요청에 따라 의회에 보냈다. 의회에서 대한 쌀 판매 청문회가 열린 1982년 3월, 기자는 복도에서 만난 쌀·설탕·면화 분과 위원장을 따라 붙었다. 기자는 위원장에게 계속 질문을 던졌다. “이것은 순전히 미국 곡물업자들간의 싸움이 아닌가”, “한국이 계약을 위반했거나 흑막이 있다는 증거가 있다면 밝혀 달라”고. 마침내 그 위원장은 기자에게 “내 보좌관을 만나 국무부에서 보내온 서류를 보여 달라고 하라”며 자신의 명함에 서류를 보여주라는 메모를 적어 주었다. 바로 그날, 물론 이 국무부 문서 내용은 ‘조달청 계약 일부 위배로 4만t의 비싼 값에 약정’, ‘주한 미 대사관에서 하원에 보낸 김 조달청장 설명에서 밝혀져’란 제목으로 1982년 3월 13일자 동아일보의 1면 톱을 장식했고 국회에선 쌀 도입 진상규명 특별위원회가 구성돼 조사가 진행되는 등 일대 파동이 일어났다.(주한 미 대사관 비밀 메시지 참조)
또 이런 일도 있었다. 1982년 한국의 레바논 파병 얘기가 서울에서 조심스럽게 나오던 때였다. 하루는 내 귀에 워싱턴의 모 대학 국제문제연구소 책임을 맡고 있는 레바논계 미국인 교수와 국제 금융기관의 역시 레바논계 미국인 모 씨가 바시르 제마엘(Bashir Gemayel) 대통령의 대미 정책을 요리하는 인물들이란 고급 정보가 들어 왔다. 순간, 한국 파병 요청이 이들의 아이디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곧 전화를 들어 정확한 중동뉴스 소스를 찔렀다. 과연 이 소스로부터 제마엘 대통령이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 이들 정책 브레인들로부터 나온 한국과 네델란드 등 몇 개국 레바논 파병 요청안이 백악관과 협의되었다는 얘기가 자세하게 빠져 나왔다. 제마엘 대통령의 워싱턴 방문계획과 미국 대통령과의 회담 등 공식 행사중의 말 한 마디에서부터 제스처 하나 하나가 모두 이들 대미 정책 브레인들로부터 나온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워싱턴에서 한 달 전 한국 파병안이 협의됐다는 뉴스가 해설과 함께 동아일보에 나가자 외무부는 파병 요청을 받았다는 사실을 서둘러 발표했다.
이 두 가지 경우는 모두 정확한 뉴스 소스를 파고 든 결과다. 워싱턴에 있으면 자신이 국제 정치의 중심에 와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하루라도 국제 뉴스로부터 눈을 돌리게 되면 곧 국제적 흐름으로부터 뒤처지게 된다. 이 국제 뉴스의 중심에서 뛰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경쟁이 치열하기도 하지만 기자로서 분명 활력과 살맛 나는 일이었다.
(당시 내가 입수한 주한 미 대사관 비밀 메시지 전문은 다음과 같다.)
*다음 메시지를 존브로 의원(민주, 루이지애나)에게 전해주기 바란다.
*블로 농무장관의 방문 직전인 1981년 10월 9일 도착한 귀하의 메시지에 대한 회신이 늦어졌음을 양지바람. 블로 장관의 방문중 더 많은 쌀과또다른 미국산 농산물 판매에 대한 우리의 요망이 한국인들에게 여러 차례 전달되었음. 농무장관 방문 이래 우리는 귀하가 말씀하신 한국의 쌀 구매에 관해 상세한 정보를 구하려 노력해 왔음. 본인의 농업 고문이 방금 모든 한국 쌀 수입의 채널이 되고 있는 조달청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통보를 받았음.
*다음은 김주호 한국 조달청장의 공식 설명서임.
(1) 1981년 1월 23일 조달청은 퍼미 사와 20만t(5% 가감 가능)의 남부미를 t당 4,499달러에 구매하기로 계약했다. 조달청은 퍼미 사와의 계약이 미국 정부에 대한 한국의 약속을 충족시킬 것이기 때문에 더이상 남부미를 구매하지 않겠다고 퍼미 사측에 말했다.
(2) 1981년 2월 12일 조달청은 코넬 사로부터 t당 4,499달러에 10만t의 남부미를 다시 구매했다.
(3) 퍼미 사는 2차분 10만t을 선적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코넬 사가 그들이 계약한 10만t을 충당하기 위해 이미 물량을 확보했기 때문이었다.
(4) 퍼미 사는 남부미를 더이상 구매하지 않겠다는 약정을 깨뜨린 것이 조달청이기 때문에 조달청과의 계약에 있는 최종 선적일을 연기해 주도록 요청했다.
(5) 조달청은 퍼미 사측의 약정을 승인했다. 남부미 10만t의 최종 공급은 4만t의 남부미와 7만t의 캘리포니아 쌀로 대체됐다. 남부미의 인도는 1981년 말 이전에 이행되도록 되어 있고 캘리포니아 쌀은 1982년까지 인도하도록 되어 있다.
(6) 한국 조달청은 퍼미 사와 t당 4,499달러의 가격으로 맺은 원계약을 존중해왔다. 왜냐하면 퍼미 사가 추가 10만t의 인도를 이행할 수 없었던 것은 퍼미 사의 과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기자는 가장 좋은 뉴스 소스다
어느 현장에 취재를 가나 신문사나 기자처럼 가장 빠르고 또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뉴스 소스는 없다. 즉 기자는 1차적 뉴스 소스라는 것이다. 그 때문에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을 취재하러 오는 외국 기자들도 정부 관리나 경제인 또는 사회 주요 인사를 만나기 앞서 유력한 신문의 기자들을 만나 그 나라 국내 정세나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다. 한 한 시간 정도 만나 얘기를 듣게 되면 그 나라의 돌아가는 상황을 대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뉴스를 거저 줍는다고 할까. 경우에 따라 더 구체적인 내용을 묻게 되면 친절한 에디터나 고참 기자들은 각 부처에 나가 있는 기자나 동료들에게 전화를 걸어 자세한 내용을 알아봐 주기도 한다.
내가 동아일보 편집국이나 논설실에서 일하고 있을 때도 이따금 외국 기자들이 찾아왔다. TV 미디어들은 직접 코멘트를 따 내보내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될수록 도움이 되도록 노력했다. 왜냐하면 나 자신도 외국 취재 때 외국 동료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최근 <백악관의 맨 앞줄에서(Front Row at the White House)>를 펴낸 미국 UPI통신 여기자 헬렌 토머스도 내가 백악관을 출입하던 때(1981~1985년) 나를 도와주던 기자 중 한 사람이다. 잘 알다시피 헬렌 토머스는 1961년부터 백악관 담당 기자로 케네디 대통령에서부터 클린턴 대통령까지 8명의 대통령과 그들의 백악관 보좌관들을 취재해 온 79세의 노기자다. 헬렌은 지난해 5월 UPI통신사를 사임, 현재 허스트 뉴스 서비스의 워싱턴 주재 기고가로 일하고 있다. 헬렌은 백악관에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질문을 놓친 한국 관련 문제를 대변인이나 보좌관에게 확인해 주기도 하고 브리핑 중 뉴스 송고를 위해 잠시 브리핑장을 떠난 나에게 주요 내용을 알려주기도 했다. 친절한 대기자였다.
헬렌 토머스는 그의 저서에서 “진실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라. 이것이 미국 언론인들의 신조다”라고 말하고 있다. 헬렌은 또 사회적 위치를 우월하게 생각한 나머지 마치 재판관 또는 배심원인 체하는 기자에게 “가능하면 사실을 객관적으로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야말로 국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와 국익에 봉사하는 최선의 방법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나도 똑같은 말을 하고 싶다. 즉 언론은 사실과 진실을 충실히 전하고 판단은 독자와 국민에게 맡기는 것이다.
1988년 5월 나는 지아 울 하크 대통령의 군사 독재 정부가 무너진 뒤 선출된 모하마드 칸 주네죠 수상과의 특별 인터뷰를 위해 파키스탄으로 날아갔다. 수도인 이슬라마바드에서 주네죠 수상과의 회견을 마친 나는 마침 소련군과 소련의 지원을 받는 친소련 아프간 정부군에 대항, 독립을 위해 아프간 내전을 벌이고 있던 아프간 전사들의 취재를 위해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국경 도시인 페샤와르로 달려갔다. 물론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다. 이슬라마바드에서 전세를 낸 파키스탄 차와 운전기사 모하마드 와리스뿐이었다.
당시 파키스탄은 반정부 아프간 전사들을 지원하고 있었는데 페샤와르의 아프간 난민촌 촌장들로부터 반정부 아프간 전사들의 전투 본부로 가려면 고대 중국과 서방을 잇는 실크로드(동서 통상로)로 유명한 카이버 령을 넘어가야 한다고 들었다. 나는 모하마드 와리스와 함께 카이버령을 넘어가기 위해 국경지역으로 달려갔다.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국경엔 “카이버 관리소의 특별 허가가 없는 외국인은 이 지점을 넘어 들어 가선 안된다”는 경고 표지뿐이었다. 국경 초소도, 카이버 관리소도 어디에 있는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카이버령을 바로 눈 앞에 두고 돌아갈 수도 없었다. 와리스만을 믿고 카이버 산길로 차를 몰았다. 한참을 달려가는데 파키스탄 쪽으로 넘어오는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을 만났다. 그들은 카이버 지역의 아프간 전사들은 이미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으며 카이버 산길엔 밀수꾼들을 노리는 산적들뿐이라며 위험하니 돌아가라고 말해 주었다. 하는 수 없이 현장 취재를 포기했다. 페샤와르로 돌아와 무작정 이곳 유력지 <프론티어 포스트(The Frontier Post)> 신문을 찾아갔다.
마침 편집부국장인 페레즈 콰지(Perez Qazi) 씨를 만났다. 그는 아프간 전투 상황과 아프가니스탄을 둘러싼 국제 정세를 소상하게 설명해 주었으며 아프간 전사들의 비밀 집결지(매일 이동되고 있었다)도 귀띔해 주었다. 국적은 달라도 뉴스를 쫓는 동료 의식에서였다. 나는 곧바로 국경지대의 비밀 집결지로 차를 몰았다. 거기에서 막 전투지역으로 출동하는 아프간 무자히딘 이슬람 연맹군의 지휘관급인 골바딘 히크마탸르와 파를 라크만 전사 등과 생생한 현장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페샤와르 국경지대에서 송고한 이 기사는 1988년 5월 16일자 동아일보에 게재됐다.
이렇게 신문사나 기자를 통한 취재는 가장 빠르고 정확할 수 있다. 그러나 신빙성 있는 뉴스원을 잡아야 신뢰할 수 있는 뉴스를 캐내듯이 이 경우도 신뢰할 수 있는 취재원을 잡아야 함은 물론이다.
1974년 10월, 공산군에 패망되기 직전의 베트남에 파견됐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베트남은 티우 대통령의 장기 집권과 관리들의 부정부패에 항의하는 카톨릭, 불교계, 학생, 언론계, 야당의 반티우 세력들의 시위와 데모가 한 달째 계속되고 있었다.
사이공에 도착한 나는 우선 정확한 국내 정세부터 파악해야 했다. 그래서 파크 호텔에 짐을 풀고 외국 특파원들에게 알아보니 티우 정부에 비판적인 최대 야당지 <다이단 톡>(월남어로 대민족이란 뜻)지가 발행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는 무조건 <다이단 톡>이 있는 지아롱가로 달려 갔다. 경찰관들이 길목마다 눈에 들어 왔다. <다이단 톡>지의 발행인이자, 편집인으로 언론계에서 반독재 기수로 활약하고 있는 보 롱 트리우 씨는 막 인쇄된 신문을 펼쳐 들고 있었다. 찾아 온 목적을 얘기하자, 그는 흔쾌히 베트남 국내외 정세와 사회 정세를 설명해 주었다. 보 롱 트리우 편집인은 당시 월남의 3대 비판지 <다이단 톡>, <디엔 틴>, <송탄>을 중심으로 29개의 월남언론들이 언제든 신문을 압수당할 각오로 언론 자유를 위해 용기있는 투쟁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상에 깊이 남는 것은 신문사 밖에 사복 경찰과 정보기관원들이 왔다갔다 하는데도 전혀 두려운 기색이 없어 보였던 담담함이다. 설명을 다하고 난 보 롱 트리우 편집인은 당시 티우 정부에 비판적이던 정계 지도자 부 반 마오 씨나 트란 반 튜엔 씨를 만나보라고 권했다.
보롱 트리우 편집인에게서 얻은 연락처에 전화했더니 마침 부 반 마오는 사이공에 부재중이었다. 다시 트란 반 튜엔 씨에게 연락했다. 그는 마침 사이공 시내에 있는 그의 집에 있었다. 기자는 날듯이 달려가 그를 만났다. 평생을 베트남 독립운동과 민주화 운동으로 보낸 그는 의외로 조그만 체구의 노인이었다. 그는 베트남이 공산화가 되지 않는 길은 티우 대통령의 사퇴와 민주화밖에 없다고 열변을 토했다. 트란 반 튜엔 씨와의 인터뷰도 <동아일보>에 크게 게재됐다. 며칠 후 티우 정부 대변인이 트란 반 튜엔과의 인터뷰 기사에 대해 한국 정부에 유감의 뜻을 전해 왔다는 말을 들었다. 사실 티우 대통령은 한국 입장에서 보면 친한(親韓) 인물로 군사·경제 협력 등 한국과 베트남 협력에 기여한 대통령이었다. 그 배경엔 미국의 군사학교를 함께 다닌 당시 주베트남 한국 대사관의 이대용 공사(사이공 패망 후 공산군에 의해 몇 년간 억류돼 고초를 겪다 정부 노력으로 귀환했다)와의 친분도 있었다. 트란 반 튜엔 씨는 월남 패망 후 공산군에 의해 정신 재교육장에 끌려가 오랫동안 고생하다 풀려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가장 확실하고 빠른 취재원은 역시 항상 뉴스를 좇고 뉴스와 더불어 사는 기자다. 그리고 확실한 취재원을 잡는다는 것은 취재에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다.
다양한 계층과 접촉하라
미국을 움직이는 다양한 계층을 뚫고 들어가 이들과 접촉을 유지하는 일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무척 어려운 일이다. 시간과 경비와 노력이 들기 때문이다. 그보다 이들의 백인 사회가 그들과 피부색이 다르고 교육 문화 종교적 배경 등이 다른 사회에서 온 ‘이방인’, 특히 유색인을 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것이다. 미국 사회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미국 사회,적어도 정치·경제·사회·문화에 영향을 미치는 기성 엘리트사회(Established Society)에 파고들려면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들 사회를 알고 친숙해지려면 어쩔 수 없다. 물론 그렇다고 이들 사회의 일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 관계가 더 믿을 수 있고 친밀해진다는 뜻이다. 노력을 기울인 만큼 좋은 뉴스 거리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나도 처음 워싱턴에 부임해 갔을 때 마침 사택도 있고 해서 주말이면 주요 부서 관리나 학자, 문화계 인사들을 집으로 초대해 저녁을 같이 하며 좋은 시간을 가졌다. 이런 경우엔 반드시 부부를 함께 초대하기 때문에 가족간의 유대도 생기기 시작했다.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다 보니 본사에서 매달 송금해 주는 빠듯한 체재비에 구멍이 나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이 저녁 초대 회수를 줄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꼭 만나보아야 할 사람이면 점심 때 한국 식당으로 초대했다.
물론 성과는 있었다. 한번은 서로 신뢰하게 된 한 고위 외교 관리와 점심을 하는 자리에서 이런 얘기를 들었다. 당시 하원 외교위원회 아시아태평양 소위원회의 스티픈 솔라즈 위원장은 한국 일본 중국 등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었다. 아시아태평양 소위원회에선 미국의 정책에 대한 청문회가 거의 1년 내내 열렸으며 소위원회의 대정부 권고안, 결의안은 외교위원회와 본회의를 거쳐 국무부나 상무부 등에 보내져 정책에 반영됐다. 그래서인지 한국에서 워싱턴을 방문하는 의원이나 외교팀, 고위 인사들은 한국 대사관을 통해 어떻게든 솔라즈 위원장을 만나 사무실이든 청문회장 복도에서든 그와 사진 한장을 같이 찍고 돌아갔다. 한국 국회의원 등이 찾아올 때마다 그가 먼저 “사진 찍읍시다”고 포즈부터 취할 정도였다.
이 고위 외교 관리의 정보는 스티픈 솔라즈 위원장이 북한을 방문하기 위해 북한과 접촉중이며 평양도 좋다는 뜻을 전해 왔다는 것이었다. 북한으로선 대북 강경 정책을 견지하고 있는 공화당의 레이건 행정부보다 유연성 있는 민주당 의회 지도자와 대화를 가져보려 했을 것이다. 여하간 80년대 중반 당시만 해도 미 행정부나 의회 고위 관리가 북한을 방문한 적이 없던 때라, 이는 귀가 번쩍 뜨이는 큰 뉴스 거리였다. 더구나 솔라즈 의원이 방북 조건으로 북한에 제시하고 있는 내용이 서울에서 판문점을 통해 들어간다는 것과 미국 기자 두세 명과 함께 들어가겠다는 것이었다. 만일 성사만 된다면 당시 냉랭하기만 하던 미국과 북한 관계에 대화의 기회가 열릴 수도 있었으며 판문점을 넘어 오는 솔라즈 위원장은 미디어의 각광을 크게 받았을 것이다. 당연히 1면 톱감의 큰 뉴스였다. 그러나 이 고위 관리의 정보는 어디까지나 ‘오프 더 레코드(Off the Record)’였다.
그 며칠 후 나는 같은 취재원으로부터 북한이 솔라즈 위원장의 판문점 통과와 평양에서 다시 판문점을 통한 서울행은 좋다고 했으나 미국 기자 대동은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아 방문 계획이 무산됐다는 정보를 다시 들었다. 물론 또 다시 ‘오프 더 레코드’였다. 나는 약속에 따라 이 ‘오프 더 레코드’를 철저히 지켰다. 만일 이를 깨뜨렸다면 이 고위 관리와 기자간의 신뢰는 깨지고 말았을 것이다.
지의 발행인으로 유명한 헨리 루스(Henry Robinson Luce)의 미망인 클레어 루스(Clare Boothe Luce) 여사 댁 만찬에 아내와 함께 초대되어 갔을 때도 ‘오프 더 레코드’로 좋은 얘기들을 많이 들었다. 여기서 클레어 루스여사에 대해 잠시 설명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미국의 입지전(立志傳)적인 여성지도자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집안 출신의 연극무대 코러스 걸이었던 그녀는 타고난 재능과 미모로 극작가 저널리스트 하원의원 대사까지 되어 워싱턴 정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었다. 헨리 루스와 함께 시사주간지 <타임>(Time)지와 <라이프>(Life)지의 공동 창간자이기도 한 그녀는 열렬한 공화당원으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외교정책을 비난했으며 2차대전이 끝나자, 소련의 위협을 경고하기도 했다. 루스 여사는 아이젠하워, 닉슨, 포드, 레이건 대통령의 외교정책 자문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루스 여사의 가까운 친구들만해도 장개석, 더글러스 맥아더, 앙드레 모로, 서머셋 모옴, 월터 리프먼, 죠셉 케네디 등이 있다. 워싱턴D.C.에 있는 루스 여사의 자택엔 이날 캐스퍼 와인버거 국방장관 부부, 진 커크패트릭 주유엔 미국대사, 유명한 시사만화가 래넌 루리 씨 등 워싱턴 사교계 인사들이 초대됐다. 남편인 루스 회장은 돌아갔지만 워싱턴 정계와 미·중국 관계 등 국제 사회에서 영향력이 크고 워싱턴 사교계의 여왕으로 명망 높은 루스 여사는 이날 만찬에서도 대화를 이끌었는데 레이건 행정부의 대중국 외교가 화제의 중심이 됐다. 이날 대화 내용 중에도 좋은 기사 거리가 있었지만 관례적으로 비보도가 전제된 모임이라서 직접 기사를 쓰지는 않았다. 물론 도움은 많이 됐다. 그날 저녁 모임을 보고 워싱턴 고급 사회의 장막 뒤에서 대화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게 됐다.
한국의 정치 경제 외교나 취재 등 각 분야에서의 대미 접촉 행태와 다른 나라 외교관이나 관리 경제인 등의 미국인 접촉 행태를 살펴보면 비교되는 점이 있다. 즉 한국인들은 미국의 고위 관리나 고위 인사들부터 접촉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 점은 특히 워싱턴을 방문하는 정부 관리들이나 국회의원들에게서 곧잘 볼 수 있다. 서울의 고위 관리들은 백악관으로 미국 대통령과 부통령을 예방하려 하고 상·하원의 공화, 민주의 양당 총무, 외교위원장 또는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 같은 거물들만을 만나려고 한다.
이같은 한국인들의 어프로치엔 “높은 곳과 접촉하면 된다”는 식의 수직적 접근법이랄까, 한국적인 인식이 깔려 있다. 그러나 미국 사회는 수직적 접근보다 수평적 접근이 더 효과적인 사회다. 한국과 같은 수직 사회라기보다 수평 사회이기 때문이다.
미국 정계의 거물이던 마이크 맨스필드 상원 외교위원장을 인터뷰하기 위해 그의 보좌관과 접촉했더니 그러기 위해선 내가 서부의 몬태나 주를 한 번 다녀와야 한다고 조언해 주었다. 맨스필드가 몬태나 주 출신 의원인데 그곳 상공회의소 대표 같은 인물이 강력한 추천을 하게 되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맨스필드 같은 거물도 선거구에서 영향력이 있는 인사의 말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영화 <몬태나의 별>에서만 본 허허벌판의 서부 몬태나 주 헬레나를 다녀왔다. 그곳 한국인의 소개로 상공회의소 추천을 받았으나 맨스필드가 주일 대사로 떠나는 바람에 결국 인터뷰는 하지 못했다.
이 이야기는 미국이 수직으로만 통하는 한국 사회와는 다르다는 점을 보여 준다. 이같은 미국 사회의 장점을 잘 알고 선용하는 나라가 일본이나 대만이다. 예를 들면 한국 관리나 실업인들은 한·미간에 어떤 통상 마찰 등 경제적 문제가 생기면 상무부 등 해당 부서의 차관이나 국장을 만나려 급하게 움직인다. 그러나 일본 관리들은 평소 관계가 있는 부서의 담당 관리와 만나 일본 문화와 예술도 얘기하고 일본의 캔디 같은 것을 맛보도록 책상에 올려 놓고 온다. 아무 부담없이 맛볼 수 있는 몇 개들이 한 통이다. 국무부에서 오찬시간을 이용해 일본의 스모(일본 씨름) 경기를 보여주는 이벤트도 있었다. 물론 일본인들의 일·미(日·美)우호협회 같은 단체에서 온 일본인 스모선수들을 초청, 소개하는 경기였다. 평소 이런 식으로 문화와 스포츠 등을 통해 유대 관계를 맺어 놓으면 문제가 생겼을 때 훨씬 접촉하기가 쉽다. 또 대만도 무슨 문제가 있으면 워싱턴의 상·하원 의원들이나 정치인들을 만나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평소에 대만에 수출품을 내보내는 지방의 상공인을 만나 대만의 입장을 설명하는 등 유대를 맺는다. 이들을 통해 워싱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워싱턴을 직접 공략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다.
미국 사회는 기사를 뽑아내기 위해서도 높은 관리들을 만나는 것보다 평소 미국사회에 영향력 있는 다양한 계층과의 접촉과 유대를 갖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된다.
현장을 지켜라
워싱턴에서 백악관을 출입할 때다. 백악관 대변인실은 낮 12시경에 매일 뉴스 브리핑을 한다. 그런데 이 시간은 국무부의 ‘정오 뉴스 브리핑’(Noon Briefing) 시간과 겹쳐 있어서 시간이 잘 맞지 않는다. 백악관 브리핑이 끝나면 부리나케 ‘포기 버텀’(국무부의 별칭)으로 달려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백악관과 국무부 뉴스 브리핑을 다 커버할 수 있는 편리한 방법은 외국 특파원들의 사무실이 있는 내셔널 프레스(National Press) 빌딩에 있는 포린 프레스 센터(Foreign Press Center)에 가 앉아 있는 것이다.내셔널 프레스 빌딩 8층에 있는 포린 프레스 센터 브리핑 룸엔 백악관 기자실, 국무부 기자실과 ‘브리핑 파이핑’(브리핑 중계) 시설이 갖춰져 있어(80년대 중반에 갖추어졌다) 현장을 가지 않고 그곳에 편안히 앉아서도 뉴스 브리핑을 들을 수 있다. 실제로 FPC에서 취재하는 것이 편리하고 시간도 절약할 수 있다. 잘 모르는 것이 있으면 FPC의 USIA 공보관들에게 물어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 달 또는 두 달에 한 번 열리는 대통령의 기자회견도 백악관 이스트 룸 기자회견장에 30분 전부터 미리 입장해 앉아 있는 것보다 FPC에 앉아 대형 화면으로 중계되는 기자회견을 보며 간접 취재하는 것이 훨씬 편리하다.
왜냐하면 백악관 회견장에 가 앉아 있으려면 회견 30분 전부터 입장해 앉아 있어야 하고 더욱이 일단 회견이 시작되면 끝날 때까지 회견장에서 나올 수 없기 때문에 한국 관계 중요한 기사 거리가 나온다고 해도 회견이 다 끝날 때까지 꼼짝없이 기다려야 했다. 공교롭게도 서울과 워싱턴 시차가 13시간, 또는 섬머 타임이 실시되는 때면 시차는 14시간으로 서울에서 막 석간 마감시간이 걸려 있는 그야말로 불꽃이 튀는 시간이다. 서울 본사 데스크에선 미국 대통령의 공식 회견인만큼 때에 따라 1면 톱 또는 중간 톱, 최소한 국제면 톱을 비어 놓고 워싱턴 기사를 기다리고 있는 시간이니 톱 거리가 나올 경우, 애가 바짝바짝 타는 순간이다.
이럴 경우 FPC에 앉아 있으면 대통령의 답변이 떨어지기 무섭게 FPC 안에서도 서울 본사에 콜렉트 콜로 기사를 부를 수 있고 전화기가 다 점령당했다 해도 10층의 내 사무실로 달려가면 된다. 하지만 백악관에 있으면 회견이 끝나자마자 달려나와 기자실에 있는 전화기를 잡고 콜렉트 콜로 서울을 불러내 숨가쁘게 기사를 불러대야 한다. 더욱이 다른 외국 기자들에게 전화기를 선점당했을 때는 문제가 심각한 것이다. 그쪽의 기사 송고가 다 끝나야 전화를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백악관 기자실엔 AP, UPI, 뉴욕 타임스, ABS TV 등의 출입기자 전용 박스와 전화기는 있지만 박스가 없는 기자들은 10여 개의 공중전화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대통령 기자회견이 끝난 직후의 공중전화 박스는 항상 붐빌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같은 불편에도 불구하고 나는 대통령 기자회견이 있을 때마다 항상 현장에 가 있었다. 기자는 현장을 지켜야 한다는 선배들의 말도 있었지만 나 자신 오랜 취재 경험으로부터 기자의 위치는 항상 현장이라는 것을 스스로 체험했기 때문이다. 대통령 기자회견장에 가 있다고 해도 아시아 기자들에게 질문 기회가 주어지는 일은 거의 없다. 대통령의 간단한 발표가 끝나고 질문이 시작되면 대통령은 관례에 따라 앞줄에 앉은 UPI의 헬렌 토마스 같은 고참 기자나 영향력 있는 미국의 신문·통신·TV 기자들, 그리고 영국의 <더 타임스> 등 두세 명의 외국 기자들에게 질문 기회를 주게 마련이다.
대통령의 눈을 끌기 위한 이런 일도 있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부인인 낸시 여사를 끔직히도 사랑했다. 어디를 가나 항상 같이 다녔고 잠시라도 떨어져 본 적이 없다. 그런데 낸시 여사는 빨간색을 좋아해 공식 연회 때면 빨강 드레스를 곧잘 입곤 했다. 이 점에 착안, 백악관의 여기자들은 기자회견 때면 빨간색의 옷을 입고 나왔다. 레이건 대통령의 눈을 끌어 질문 지명을 받기 위해서다. 치열한 직업 정신이었다.
현장에 가 있는 데 따른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현장을 지키게 되면 현장에 없는 기자들이 얻지 못하는 것을 얻는 경우가 있다. 무엇보다 백악관 공보관들 그리고 기자단과 얼굴을 알게 되고 친숙해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당시 공보실의 한 여 공보관과 잘 알게 됐는데 밖에서 궁금한 일이 있을 때 전화를 걸어 부탁하면 대변인에게 확인도 해주고 필요한 자료가 있게 되면 친절하게 잘 챙겨 주었다. 서로 친숙해진 일본 대만 홍콩 등 아시아지역 기자들과도 정보를 교환하고 브리핑에 늦으면 자료를 서로 챙겨주기도 했다. 이런 것들은 현장에 있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것들이다.
또 있었다. 레이건 대통령의 기자회견이 열렸을 때였다. 대통령의 발표가 끝나고 질문을 하기 위해 기자들이 손을 들었는데 대통령이 뒷줄에 앉은 한 기자를 가리켰다. 그런데 대통령이 가리킨 기자가 일어서기 앞서 그 옆에 있던 다른 기자가 자신을 지명한 줄 알고 재빨리 일어섰다. 그는 남아프리카 연방공화국 기자였는데 남아프리카 연방에 대한 유엔의 경제 제재가 부당하지 않은가, 미국이 이를 해제하기 위해 앞장서 줄 의사는 없는가 하는 난데없는 질문이었다. 순간 대통령 뒤에 서 있던 대변인이 그 기자가 아니라고 손을 흔들었지만 이미 그 기자의 질문은 쏟아졌고 TV 카메라들은 일제히 그 기자를 비추고 있었다. 백악관으로선 전혀 예상하지 못한 돌출 질문에 당황한 대통령은 미국은 아직 해제를 고려해보지 않았다고 짤막하게 답변하고 넘어갔다. 물론 그 후론 이 남아공 기자에게 질문을 허용하는 지명이 돌아가지 않았다. 이같은 해프닝은 TV 중계를 보아선 전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오직 현장에서만 알 수 있는 해프닝이다.
유엔을 취재할 때 일이다. 워싱턴의 한국 특파원들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열리는 9, 10월이면 자주 뉴욕으로 날아간다. 특히 70, 80년대 당시엔 국제 무대에서 남북한이 치열한 외교 대결을 벌이고 있을 때라 남북한 관련 문제가 안보리 회의에 오르게 되면 뜨거운 논쟁과 격론이 벌어지곤 했다. 나는 머리숱이 적어 머리칼이 날리기 때문에 항상 모자를 쓰고 다녔는데 백악관에서도 그랬지만 유엔 공보실에서도 항상 모자를 쓰고 있는 나를 다른 기자보다 쉽게 알아보았던 모양이다. 유엔이나 북한대표부 등에서 한국 관계 자료가 나오면 먼저 알려주기도 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1985년에 귀국해 외신부장으로 일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유엔 공보국장으로부터 한 통의 초청장이 왔다. 유엔 주최로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아시아지역 언론인 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해 달라는 초청이었다. 나는 기꺼이 이를 받아들여 싱가포르 회의에 참석해 팔레스타인 문제와 지역 보도 문제를 함께 토론했다. 그 회의에서 나는 기자 생활중 만난 가장 지적인 인물 중의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당시 팔레스타인 유엔 대표부 대표인 테지르 박사였다. 원래 의사로 외교관이 된 테지르 박사는 팔레스타인이 처한 국제적 상황 등을 호소력 있게 설명해 언론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후일 뉴욕에 간 길에 유엔에 들러 어떻게 나를 초청하게 됐는가고 물었더니 한국 언론인 한 명을 초청하게 됐는데 바로 모자 쓴 미스터 문이 생각나 초청하게 됐다는 얘기였다. 항상 현장에서 왔다 갔다 한 것이 눈에 띈 것이다.
백악관이나 국무부나 기자가 뉴스 현장에 가 있는 것은 취재의 제 1조다. 다만 앞서 말한 대로 더 능률적인 취재와 빠른 송고를 위해 파이핑을 듣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현장을 지켜 취재원에 일단 얼굴을 알려 놓으면 동료 외국 기자들이나 취재원과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가 자연 주어진다. 연말이 가까워 오면 백악관이나 국무부 출입기자들은 국무장관이나 수석 보좌관 등 고위 관리를 초청해 송년 디너나 리셉션 같은 모임을 갖는다. 그런데 이 자리엔 정규 멤버(Regular Member)라고 하여 매일같이 출입 부서에 나와 취재하고 일하는 정규 멤버들만 초청되고 중요 기사가 있을 때 들리는 비 멤버(Regular Member)들은 초청되지 않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중요한 점은 이 송년 디너나 리셉션에 국무장관 등 최고의 뉴스원이 나와 기자들과 어울리게 되면 이들 고위관리들과 나누는 얘기가 비록 오프 더 레코드거나 백 그라운드라고 해도 정책 방향과 워싱턴의 정치 외교 흐름을 캐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 친분을 갖게 되는 기회도 된다. 나도 자주 현장에 얼굴을 보인 덕인지 정규 멤버가 아닌데도 국무부의 송년 모임에 몇 번 참석하게 됐다. 돌아간 개스턴 시거 국무부 동아시아 태평양 담당 차관, 아이솜 한국과장 등 몇몇 고위 관리들과 친분을 갖게 된 것도 바로 이런 기회 때문이었다.
사족을 붙이자면 대통령 선거 전 캠페인이 한창이었을 때다. 관례적으로 민주, 공화 양당의 당 예비선거(Primary)가 제일 먼저 시작되는 동부 뉴 햄프셔 주 엑스터에서 취재를 마치고 공항으로 가기 위해 호텔 정문에서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한 신사가 나를 보더니 “백악관 출입기자가 아닌가”고 묻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 신사는 TV 회견에서 가끔 보았다며 자기도 공항으로 손님을 맞으러 가는 길이니 함께 가자고 해 아주 편하게 공항으로 갈 수 있었다. 현장을 지켰던 덕을 본 것이다. 찬스를 놓치지 말라
기자가 ‘기사 찬스’(기사 거리)를 포착하는 것은 사냥꾼이 잡을 짐승을 포착하는 것과 같다. 만일 짐승을 한번 놓치게 되면 다시 포착하기가 어렵다. 기사 역시 마찬가지다. 한번 놓친 기사 거리는 여간해 다시 잡기 어렵다. 더구나 사진 취재는 그 순간을 놓치면 그만이다. 세기적 특종 사진들이 바로 이 찬스를 놓치지 않고 잡은 것이다. 그러니 일단 기사 찬스를 잡게 되면 절대 놓치지 말고 잡아야 한다. 과감히 달려들어 물어야 한다. 이 취재 원칙은 해외 취재에서도 마찬가지다. 실례를 드는 것이 좋겠다.
1977년 1월 당시 동아일보에 근무하던 나와 사진부의 홍성혁 차장(현재 Gamma Press 서울특파원)은 신년기획 시리즈 ‘세계의 얼굴’ 취재차 북유럽을 거쳐 베를린에 와 있었다. 이른바 ‘동백림 사건’이 난 후 오래 지나지 않은 당시만 해도 한국인들이 동베를린에 들어가는 것은 사전에 우리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으며 실제로 들어가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동독 정부가 입국 허가를 안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인만큼 한국 기자로서는 동베를린 르포가 매력있는 취재 거리였다.
우리는 차를 빌려 타고 서베를린의 프리드리히 가에 있는 서방측 검문소, ‘체크 포인트 찰리’를 통해 동베를린 검문소로 들어 갔다. 그러자 동독 경비병이 심사에 필요하다며 나와 홍 기자의 여권을 가져가며 우리를 대기실에 앉혀 놓았다. 그곳엔 동독에 살고 있는 가족과 친척들을 만나러 가는 서독인들이 앉거나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창 너머로 동독 경비병들이 여권을 심사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 순간 가만히 앉아 있던 홍성혁 기자의 반코트 앞자락 단추가 열리더니 카메라 렌즈가 슬그머니 나왔다. 홍 기자는 초조하게 기다리고 앉아 있는 서독인들에게 카메라 렌즈를 맞추더니 옷 속에서 살짝 두 번 셔터를 눌렀다. 나는 셔터 소리가 나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검문소에선 물론 사진 촬영이 금지돼 있었으며 촬영금지 경고가 벽에 붙어 있는 상황이었다.
잠시 후 동독 여 병사가 나오더니 우리 여권을 돌려주며 들어갈 수 없다고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이유냐고 물으니 “동독과 한국은 외교 관계가 없다”는 설명이었다. 여 병사는 홍 기자와 나를 동독 검문소 밖, 서베를린 검문소 입구까지 친절하게 데려다 주었다. 우리는 동베를린에 못들어간 것은 서운했지만 들키지 않고 사진 촬영을 한 것에 마음이 놓였다. 아찔했던 순간이었다. 홍 기자가 사용한 카메라는 독일제 라이카 M4로 렌즈가 밝고 셔터 소리가 크지 않은 카메라였다. 등에 식은 땀이 나는 경험이었다. 서베를린으로 무사히 돌아 온 후 홍 기자에게 두렵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씩 웃으며 “그 순간엔 찍는다는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고 털어 놓았다. 기사 찬스를 놓치지 않은 무서운 직업 의식이었다.
기자가 좀처럼 잡기 어려운 특종 사진을 애석하게도 놓친 경험이 있다. 이 애석한 경험 이후 기자는 어디를 가나 카메라와 녹음기를 항상 갖고 다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1985년 2월 세계 언론으로부터 ‘철의 여인(Iron Lady)’으로 불리운 영국의 마가렛 대처 총리가 레이건 대통령과 회담을 갖기 위해 워싱턴을 방문했다. 2월 20일 백악관에서 회담을 마친 대처 총리는 상·하원 합동회의의 연설을 위해 의사당을 방문했다. 영국 총리의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은 1952년 1월 17일 윈스턴 처칠 총리의 연설 이후 처음이었다.
나도 의회로 달려 갔다. 프레스 갤러리(기자실)를 통해 2층 기자석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아 회의장을 내려다 보니 대처 총리의 옆 모습과 상·하원들이 앉은 회의장 전체가 잘 들어 왔다. 대처 총리의 연설 내용은 레이건 대통령의 대외 정책과 ‘별들의 전쟁(Star Wars)’에 대한 영국의 강력한 지지 표명이었는데 나는 열심히 대처 총리의 명연설을 메모했다. 보통 외국의 저명한 정치 지도자들이 미국 의회에서 연설을 하는 경우 미리 준비한 원고를 읽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대처 총리는 미리 준비한 한 장의 원고도 없이 연설을 했다. 과연 뛰어난 정치가의 명연설이었다.
그런데 연단에 서서 한 30분쯤 연설을 하던 대처 총리에게서 재미있는 일이 눈에 띄었다. 대처 총리는 신고 있던 한쪽 발을 하이힐에서 빼더니 맨발(물론 스타킹을 신은 발이다)을 하이힐 위에 올려 놓는 것이 아닌가. 한 30분 가량 서서 연설을 하니까 발이 불편했던 모양이다. 이 모습이 연단에 가려 정면의 TV 카메라엔 잡히지 않았으나 2층 뒷자리에선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야말로 기막힌 특종 사진 거리였다. 그런데 보통 의회 취재 때 그러하듯이 카메라를 갖고 오지 않은 것이다. 이런 낭패가 있을 수 없었다. 대처 총리는 한참이나 하이힐을 벗고 한쪽 맨발을 구두 위에 올려 놓고 있었다. 발을 동동 굴렀으나 나는 기막힌 특종 사진을 눈 앞에 놓고도 놓칠 수밖에 없었다.(이 장면을 다른 미국 기자들도 놓친 것은 대부분 기자들이 프레스 갤러리의 자기 부스에 앉아 TV 중계를 보며 기사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뒤로 나는 어디를 취재 가나 카메라를 반드시 갖고 다녔다. 그러나 ‘미의회 연설중 한쪽 구두를 벗은 대처 총리의 발’과 같은 기막힌 사진 특종 거리는 찾아볼 수 없었다.(후기 : 귀국 후 대처 총리가 인촌기념회와 동아일보 공동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 롯데호텔 크리스탈 볼룸에서 특별 강연회를 갖게 됐다. 마침 내가 청중들에게 대처 총리를 소개하게 됐는데 백악관에서 만난 일들은 간단히 소개했으나 생각했던 ‘구두 벗은 발’ 얘기는 차마 꺼내지 못했다)
현장에서 좋은 사진 취재를 했으나 보안에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취재 필름을 빼앗긴 경험을 덧붙인다. 1974년 말,베트남이 공산 베트공과 월맹군에 의해 패망되기 직전, 사이공에선 매일같이 티우 대통령 정부의 부패와 무능에 항의하는 대학생들의 가두시위가 열렸다. 시위는 중심 번화가인 르 로이 가(街)에서 주로 시작되곤 했는데 물통과 소금,카메라와 취재수첩을 든 나(당시 동아일보 동남아 순회특파원)는 시위대를 쫓아 뛰어다녔다. 갈증이 나면 소금과 물을 마셨다. 그러다 학생 시위는 갑자기 나타난 경찰들에 의해 구타당하고 일부는 붙들려 연행당하기도 했다.
나는 재빨리 그 모습을 낱낱히 카메라에 담았다. 그러다 너무 가깝게 접근해 많은 장면을 취재하다 사복의 정보 경찰에 붙들렸다. 한국 기자라고 설명해 보았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들은 내 카메라를 빼앗아 취재한 필름을 빼내 구두발로 짓이겨 버렸다. 더이상 현장에 있으면 체포하겠다는 위협을 하며 카메라는 돌려주었다. 설마 베트남을 도와 파병까지 하고 있는 우방의 취재 기자까지 방해할까 하고 생각했던 나의 판단 착오였다.
그러나 낱낱이 잡은 경찰의 폭력적 진압 취재 사진 일부는 깨끗하게 보존됐다. 혹시 경찰에 붙들리는 사고가 있을 경우를 대비해 몇 장을 찍은 필름을 재빠르게 빼내 포켓 속에 넣고 두번째 필름을 넣었던 것이다. 빼앗 긴 두번째 필름은 서너 장밖에 찍지 않은 거의 새 필름 그대로였다. 아무리 좋은 기사 거리를 취재했어도 이를 본사에 안전하게 보내 보도하지 못하면 소용없는 일이다.
나는 사이공 르 로이 가의 시위 현장에서 몇 장면만 잡고 재빨리 현장을 빠져 나왔거나 정보 경찰로부터 좀 떨어진 안전한 곳에서 취재를 했어야 했다. 취재 의욕에 넘쳐 다 잡은 현장 사진(사냥감)을 빼앗긴 경험이다. 일단 내 손에 잡은 기사는 절대 안전하게 지켜 무슨 수단을 쓰든 본사로 송고해야 한다.
송고 수단을 먼저 확보하라
요즘엔 이런 말이 거의 필요 없을지 모른다. 북극 지방의 함메르페스트에 있거나 아프리카의 마다가스카르에 있거나 일단 국제전화 수단만 있으면 PC로 작성한 기사를 서울이나 부산 본사로 순식간에 송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현대 전자통신 수단이 발달했다고 해도 송고 수단이 어려움에 맞닥뜨릴 때가 있을 것이다. 가령 브라질 아마존 지역의 전기도, 통신수단도 전혀 없는 밀림지대로 들어가 그곳에 사는 부족들이나 환경 문제를 취재할 때나 역시 송신 수단이 어려운 러시아 극동지역의 연해지방이나 캄차카 주 같은 데를 취재하러 갔을 때 같은 경우다.
러시아 같은 세계 대국에서 통신에 어려움이 있을까 하고 믿지 않을지 모르지만 내가 직접 경험한 사실이다.
1996년 해군 구축함을 타고 블라디보스톡을 갔을 때다. 1940년대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한 한인 동포들의 연해주 복귀 현황과 나호드카 경제 특구 취재를 위해 나호드카 시를 방문, 어렵게 시장을 만나 인터뷰한 일이 있다. 그런데 이 경제 특구에서도 국제전화는 말할 것도 없고 전기 사정이 좋지 않았다. 인터뷰를 마치고 시청 고위 관리의 안내를 받아 가장 좋은 식당엘 갔는데 식사중 전기가 몇 시간이나 나가 촛불을 켜고 식사를 해야만 했다. 우수리스크로 들어가선 사정이 더했다. 하는 수 없이 나호드카 시장 인터뷰와 경제 특구 기사는 돌아와 쓸 수밖에 없었다. 특히 해외 취재에 나간 현장 기사는 현지에서 그 즉시 작성해 보내야 글도 잘 나가고 현장감도 살릴 수 있다.
기자는 어디에 취재를 가든 먼저 송고 수단부터 확보해 놓아야 한다.
1974년 사이공에서 하루 종일 뛰고 숙소인 파크 호텔에 돌아오면 그야말로 몸이 녹초가 되다시피됐다. 그러나 다음날 신문에 나갈 기사를 작성해야 했다. 들어오면서 사온 빵 몇 조각으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먼저 가져간 200자 원고지에 한글로 기사를 쓴다. 그런 다음 본사에 송고할 한글 기사를 영자 타이프로 로마나이즈해야 한다. 이 작업이 다 끝나면 거의 밤 10시 가까이 된다. 그러면 이 로마나이즈된 기사 원고를 갖고 전신국으로 달려간다. 그곳엔 외국 특파원들의 원고를 텔렉스로 펀칭해(텔렉스 펀칭에 익숙한 기자들은 직접 펀칭을 했다) 본사로 보내주는 ‘미스 하’라고 불리는 베트남 아가씨가 있었는데 어떤 때는 송고 기사들이 많아 늦게까지 기다려야 했다.
또 하나 애로는 ‘미스 하’가 영어로 작성된 기사는 쉽게 펀칭을 하는데 한글을 로마나이즈한 한글 기사는 익숙하지 않아 시간이 더 걸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별 도리가 없었다. 행여 ‘미스 하’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펀칭이 다소 늦더라도 눈 하나 찡그려선 안되었다. 물론 ‘미스 하’는 항상 친절했다. 마침내 밤 11시, 때론 12시 가까이 본사에 텔렉스 송고를 다 마치고 숙직중인 본사 통신과 동료로부터 ‘Well RCVD,sugo maneusimnida’(잘 받았음, 수고 많으십니다)라는 회신 텔렉스를 받고 나면 기운이 쭉 빠진 중에도 새로운 힘이 솟아 올랐다. 내일 신문엔 잘 나가겠지 하고…….
1976년 12월, 새해 첫 날 1면에 나갈 세계 최북단 도시 함메르페스트 취재 기사를 인편에 서울로 보낸 때였다. 인편에 보낸 것은 사진 원고 때문이었다. 우리 취재팀은 어느 곳에 도착하든지 먼저 서울 인편부터 알아보는 것이었는데 마침 노르웨이 다음 취재지에 도착했을 때 K 대사의 부인이 그 다음 날 서울로 들어 갈 예정이었다.
우리는 첫번째 취재 기사와 사진을 K 대사 부인에게 부탁했다. 그런데 다음 날 취재를 마치고 호텔에 돌아와 깊은 잠이 든 밤 1시경 K 대사로부터 급한 전화가 왔다. 대사 부인이 파리 공항에 도착해 짐을 찾아보니 짐 가방 하나는 분실되고 기사봉투를 넣은 다른 가방이 열려져 있더라는 얘기였다. 기사 봉투가 안전한가 물었다. K 대사는 파리 공항에서 걸려 온 전화로는 기사 봉투가 그대로 있는 것 같은데 혹 확실한가를 알아보기 위해 대봉투를 뜯어 보아도 좋은가고 물어왔다. ‘세계의 얼굴’ 제 1신으로 나갈 함메르페스트 기사는 다시 써보내도 되지만 사진 취재한 현상 필름(홍 차장은 만일을 염려해 현상 약을 갖고 다니며 그날 취재한 것을 호텔 방에서 그날 바로 현상했다)이 큰 걱정이었다. 만일 없어졌다면 모든 일이 허사가 되는 것이다. 나는 봉투를 뜯어 보고 필름이 제대로 들어있는가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로부터 2시간. K 대사로부터 전화가 다시 올 때까지 우리는 입술이 바짝바짝 탔다.
어떻게 된 일일까? 몇 가지 추측이 가능했다. 첫째 공항에서 일하는 중동계 외국 노동자들의 소행, 둘째 K 대사가 우리 기사 내용을 알아보기 위한 연극, 셋째 북한이 매수해 놓은(당시는 유럽에서 북한 외교관들의 마약밀수 사건 등 은밀한 활동이 많았다) 공항 직원들의 짓 등…….
마침내 파리로부터의 회답은 사진 필름, 기사 모두 안전하다는 것과 나머지 짐도 찾았고 아마 중동계 외국 노동자들의 소행 같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 회답을 들은 후에도 그 다음 날 본사로 친 텔렉스 문의 회신을 그 다음 여행지에서 받아 보고 기사가 잘 도착한 것을 알 때까지 마음은 완전히 놓이지 않았다.
소련 시절 모스크바에서도 서울 본사와의 전화 연결을 위해 한밤중 몇 시간씩 기다리느라 잠을 설쳐야 했으며 동구권에서도 같은 경험을 했다.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통신 수단이 서방 자유주의와 같을 것으로 생각했다가는 큰 낭패를 당하기 쉽다. 특히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취재와 송고는 미리 송고 수단을 강구해 놓아야 한다.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나 현지 진출 한국 대기업의 통신 수단 등을 협조받는 방법도 있다. 만일 급한 글이 아니면 서방사회로 나와 보내는 방법도 있다. 모스크바를 떠나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해 공중전화에서 그 즉시 서울 본사와 통화를 하는 순간, 자유 세계의 소중함을 새삼 느꼈던 일이 기억난다.
해외 취재에서 아무리 큰 특종을 뽑아 내고 좋은 인터뷰를 했어도 그 기사를 본사 데스크에 안전하게 송고하지 못하면 헛일이 된다. 따라서 해외 취재에선 취재도 중요하지만 송고 수단을 항상 먼저 생각해 두어야 한다.
한 마디 덧붙이고 싶은 말은 자신의 취재 기록을 반드시 남기라는 것이다. 언제 어느 때 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기자라면 취재 수첩은 일기장처럼 잘 보관할 것이다. 그런데 한참 현장을 뛰다보면 자신의 취재 기록 사진엔 신경을 쓰지 않아 놓치는 수가 많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1975년 4월 베트남이 패망되기 몇 개월 전 사이공의 독립궁에서 가까운 파크 호텔엔 외국인들이 다 빠져나가고 투숙 손님이 거의 한 사람도 없었다. 르로이가의 몇몇 호텔에만 외국특파원들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매일 밤 전선에서 쿵쿵 들려오는 포성을 들으며 몇 시간 눈을 붙이고 아침이면 달려 나가 취재 활동을 하고 저녁에 들어왔다. 쉴틈도 없이 곧 기사 작성 후 전신국으로 달려가 밤 늦게까지 서울 송고를 마치고 돌아오곤 했다. 제대로 식사할 시간도 없었다. 매일같이 이렇게 생활하는 나를 보고 저녁이면 문 밖에 등의자를 내어 놓고 앉아 쉬곤 하던 호텔 주인(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은 “미스터 문 당신 같은 기자는 처음 보았다. 좀 쉬고 즐기면서 일하라”면서 “호텔 나이트 클럽에 올라가면 미인들도 있다. 함께 술도 마시고 마음대로 놀아라. 프리(무료)로 해주겠다”고 친절을 베풀기까지 했다. 공산 베트남의 지도자 호치민(胡志明)을 민족주의자라고 하던 그 호텔 주인의 친절이 고마웠지만 물론 그럴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지금도 후회되는 것은 아침부터 뛰어다니며 취재하던 그 당시 사이공 현장에서의 자신의 취재활동 사진 한 장을 찍어 놓지 못했다는 아쉬움이다. 하다 못해 호텔 주인과 파크 호텔 앞에서라도 기념사진 한 장을 찍어둘 것을, 수십 년이 지나 당시를 생각하며 아쉬움이 여간 크지 않다. 특히 일생의 기록이 될 역사적 현장에 파견된 기자들은 자신의 사진 기록도 반드시 남겨두면 후일 아주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이다.
혼비백산, 소련 국경선에서의 탈출
1976년 12월, 나와 동아일보 사진부의 홍성혁 차장은 신년 1월 1일자에 게재할 기획 특집 ‘세계의 얼굴’ 1회 함메르페스트 편 취재를 마치고 핀란드에 와 있었다. 핀란드는 동으로는 소련, 서로는 독일과 국경을 접한 나라로 소련의 침공을 받아왔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 소련과 밀접한 외교·경제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온 나라다. 취재 목표는 소련과의 외교 경제 교류로 살아가는 지혜를 소개하려는 것이었다. 지정학적으로 중국과 소련, 일본에 둘러싸인 한반도의 운명과 비슷했기 때문에 생존의 지혜 같은 것을 얻기 위해서였다.
한 예로 핀란드는 호수와 삼림국가로 전국에 목재가 풍부하면서도 소련으로부터 다량의 목재와 석탄을 대량 수입해 썼다. 물론 자국의 삼림자원을 아끼고 보존한다는 의미도 있었지만 소련산 목재 등의 수입으로 소련과의 우호적 관계를 유지시키기 위한 ‘생존 전략’에서였다. 소련으로 오고가는 국도엔 소련으로부터 목재 등을 싣고 오는 트럭들 뿐이었다. 철도 수송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철도역과 목재 집하장, 상무부 등 관련 기관 취재를 마쳤다. 다음 목적지인 스웨덴으로 가기엔 아직 하루 정도가 남아 있었다. 갑자기 나는 긴장과 갈등없이 살아가는 강대국 소련과 약소국 핀란드의 접경은 어떻게 되어 있나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국경지대로 가면 좋은 기사가 나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문제는 안내와 차량이었다. 요즘처럼 전문 관광 가이드가 없는 때였다. 마침 헬싱키에 유학와 언어학을 연구하던 고송무 교수는 다른 사정이 있어 한국 대사관의 총무과장으로 있던 C 씨가 국경지대를 좀 알고 있어 안내를 해주게 됐다.
우리 일행은 헬싱키로부터 소련 국경지대를 향해 차를 달렸다. 중간에 한 휴게소에서 차를 마셨다. 도로변엔 집들도 휴게소도 아무 것도 없었으며 오로지 백양나무 숲과 또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무들만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헬싱키 동남쪽 2백여㎞ 떨어진 하미나 읍을 지나 한 시간 가량 달렸을까. 핀란드, 소련과의 마지막 마을 바아리마에서 불과 4㎞, 도로변엔 알 수 없는 핀란드어 그리고 아마도 러시아어로 된 듯한 조그만 표지가 보였다. 우리는 물론 읽을 수도 없었다. 길 가운데 노랗고 붉은 색칠을 한 차단기 같은 것이 보이는 순간 갑자기 도로 양측에서 기관총 같은 것을 든 군인들이 불쑥 튀어나와 우리가 탄 차를 응시했다. 불과 1백여m 앞이었다. 바로 핀란드와 소련의 국경선이었다. 나는 순간 “차 돌려요!” 하고 소리쳤고 C 과장은 ‘삐이익…’ 미끄러지는 소리를 내며 차를 돌렸다. 그리고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고 달려 나왔다. 외교관인 C 과장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얘져 있었다. 국경선엔 기차 철로 차단기 같은 것 하나만 세워져 있던 것이었다. 그것이 국경선 표지였다. 그 너머로 광활한 소련 영토가 흰눈 속에 덮여 있고 소련 군인들의 국경 초소 같은 것이 보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차가 휙 돌아서는 긴박했던 순간 홍 차장은 순간적으로 소련 국경선과 차단기를 카메라에 담았다. 무서운 직업 의식이었다. 만일 우리가 모르는 순간 국경선을 넘었다면 우리는 가차없이 억류되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등골이 서늘한 순간이었다. 그 긴박했던 때의 취재 현장은 1977년 1월 13일자 동아일보 3면 전면에 ‘바이니칼리아, 동서 문물이 교차하는 핀란드와 소련 국경지대’라는 제목으로 이렇게 게재됐다.
“헬싱키 동남쪽 2백㎞ 떨어진 하미나를 지나 핀란드와 소련 국경의 마지막 마을 바아리마에서 불과 4㎞. 경비 초소와 세관 너머로 광할한 소련 영토가 흰눈 속에 덮여 있고 소련 군인들의 국경 초소가 보인다. 이곳이 국경임을 알려주는 것은 노랗고 붉은 색칠을 한 차단기와 총을 멘 군인들뿐, 눈 덮인 전나무 우거진 이쪽 땅이나 저쪽 땅은 다른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다른 것은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공산주의에 대한 강한 불신과 적의감마저 갖고 있으면서도 이를 드러내지 않고 표면으로 웃으며 살아 가고 있는 모습, 이것이 핀란드인들의 얼굴이다.”
하이메 신 추기경 인터뷰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특별 선언에 의해 공포된 비상조치에 따라 옥내외 집회 및 시위가 일체 금지되고 언론·출판 보도 및 방송은 엄격한 사전 검열을 받았다. 이른바 ‘10월 유신’ 체제가 작동된 것이다. 비록 11월 21일 국민투표에 의해 통과된 유신 헌법하에서 비상계엄령은 해제되었지만 언론은 유신 체제를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어떤 기사도 자유롭게 쓰지 못하는 숨막히는 국내 정치 상황에 놓여 있었다.
필리핀도 마르코스 대통령의 장기 집권과 거의 독재 통치나 다름없는 억압된 분위기에 놓여 있었다. 간헐적으로 대학생들의 반(反) 마르코스 데모가 일어났으나 조직화되지 못해 곧 무산되고 말았다. 그같은 필리핀에서 유일하게 마르코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곳이 카톨릭이었으며 수십 명의 카톨릭 교도들이 반정부 활동으로 구속되어 있었다.
바로 이 마르코스 비판의 중심에 마닐라 교구장인 하이메 신 대주교(현재 추기경)가 있었으며 대주교는 국민 대부분이 카톨릭 신자인 필리핀에서 정신적 지주였다. 1974년 동남아시아를 순회하며 현장 보도를 하고 있던 나는 말레이시아의 콸라룸푸르에서 마닐라로 날아갔다. 필리핀 카톨릭의 마르코스 비판 목소리와 민주화 외침을 보도함으로써 유신 체제에 대한 간접적 비판을 하기 위함이었다.
마닐라 만이 탁 트인 로하스 가의 알로하 호텔에 자리잡은 후 먼저 전화로 마닐라 카톨릭 대교구에 연락하여 찾아온 목적을 설명하고 하이메 신 대주교와의 인터뷰 마련을 요청했다. 그러나 답변은 신 대주교의 바쁜 일정 때문에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해할 만은 했다. 사전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온 한국 기자의 요청은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대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사실 당시 필리핀 정부는 외국 기자가 대주교와 인터뷰를 못하도록 보이지 않는 압력을 행사했으며 대주교와의 인터뷰가 허용된다고 해도 만날 수 있을지 의문인 상황이었다. 대주교관 주위를 경찰 등이 엄중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 끝에 나는 일단 부딪쳐 보기로 했다. 택시를 한 대 전세내어 타고 마닐라 중심에서 좀 떨어져 있는 대주교관으로 무조건 찾아갔다. 대주교관으로 달려가는 길에 택시 기사는 오른쪽에 있는 어마어마하게 넓은 대지를 가리키며 “저 땅도 다 마르코스 일가의 땅이다”라고 설명해 줬다. 한 20분쯤 달려 만들루옹 쇼우 가에 있는 대주교관이 가까워지자 나는 택시 기사에게 부탁했다. 만일 대주교를 만나게 되면 30분정도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고, 그렇지 못하고 경찰에 붙들리게 되면 어떻게 하든 빠져 나올 테니 주교관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잘 숨어있으라고…….
나는 차에서 내려 대주교관으로 다가가며 주위를 살폈다. 경찰들로 보이는 사복들이 주위를 왔다갔다 하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대주교관을 방문한 카톨릭 신자처럼 몸을 낮추고 경건히 기도하는 자세로 정문으로 다가갔다. 다행히도 정문엔 사복들이 보이지 않았다. 재빨리 열대식물이 가득 찬 넓은 대주교관 안으로 들어가 대주교 집무실을 찾아갔다.
마침 하이메 신 대주교는 마닐라 대성당에서 있을 미사에 가기 위해 조용히 명상중이었다. 머뭇거릴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나는 한국에서 찾아왔으며 이렇게 불쑥 찾아온 이유와 한국에서도 필리핀 카톨릭의 양심의 목소리를 잘 알고 있다는 것과 하이메 신 대주교를 존경하고 있다는 것, 한국의 카톨릭 신자들을 위해 인터뷰하고 싶다는 말을 순식간에 했다. 신 대주교는 내 두 손을 덥석 잡으며 한국 카톨릭 교도들의 소식과 카톨릭 신자인 김대중 씨의 안부부터 물었다. 나는 아는 대로 답변해 주었다.
약 40분간의 인터뷰를 마치자, 신 대주교는 “필리핀의 카톨릭 신자들이 한국의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해서도 기도한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하이메 신 대주교의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기도한다”는 인터뷰 기사와 사진, 그의 한국 카톨릭 교도들에게 보내는 기원은 동아일보(1974년 11월 9일자)에 전문 게재됐다.
이렇게 해서 거의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했던 하이메 신 대주교와의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신 대주교와 인터뷰를 마친 후 대주교관을 무사히 빠져나오는 데는 사제와 함께 나오는 연극이 필요했으며 인터뷰 사진 필름은 택시에 타는 즉시 빼내 감추었다. 혹시라도 정보를 사후에 알게 된 경찰의 검색과 압수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기도한다”는 하이메 신 대주교의 인터뷰 기사는 카톨릭 교도 등 많은 사람들이 읽고 좋은 반응을 보였는데, 당시 당국의 엄중한 가택 감시를 받고 있던 고 천관우(千寬宇) 선생(동아일보 전 편집국장이자 주필)께서도 찾아간 나에게 “좋은 인터뷰였다”고 말씀해 주셨다.
전화 취재를 적극 활용하라
잘 아는 얘기지만 미국처럼 전화가 잘 발달되고 편리하고 빠른 나라가 없다. 워싱턴에 앉아 다이얼만 돌리면 백악관으로부터 콜로라도의 미 전략공군본부, 앵커리지의 관제탑 등 순식간에 연결되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러니 웬만한 취재는 내셔널 프레스 빌딩의 사무실에 앉아 다이얼만 잘 돌리면 빠르고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단 이 경우 상대방이 취재 기자를 잘 알고 있다면 취재는 반 이상이나 이루어진 것과 같다. 가령 한국 관계 기사로 백악관이나 국무부의 논평이 필요할 경우 대변인실에 다이얼을 돌리면 이에 응해 주거나 미국 정부로서 논평할 얘기가 못되면 “논평할 것이 없다”(No Comment)라는 답변이라도 해준다. 물론 이 “논평할 것이 없다”는 자체가 때론 기사가 되기도 하지만…….
그런데 이런 경우 취재 기자를 상대방이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은 큰 차이가 난다. 평소 취재 기자를 잘 아는 경우, 공식으로 “논평할 것이 없다”고 답변하게 되는 경우도 ‘오프 더 레코드’를 걸어 왜 이 같은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는지, 배경 설명을 곁들여 준다. 물론 이 배경 설명은 크게 도움이 된다. 또 한국 관계의 어떤 문제에 대한 공식 코멘트가 나왔을 경우 켄 베일리스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국 대변인(현재 동아태국 공보국장)은 기자가 체크하기 전에 기자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코멘트를 알려주거나 부재시엔 녹음으로 남겨놓기도 한다. 백악관처럼 국내외 출입기자가 3, 4백 명씩 되는 곳은 바쁜 경우 자료를 잘 챙겨줄 수도 없다. 그러나 평소 얼굴을 아는 출입기자라면 바쁜 중에도 반드시 자료를 챙겨 놓아준다.
군사기밀 사항이 많고 따라서 제약이 많은 국방부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정례 브리핑 등 한 주일에 한두 번씩이라도 들러 얼굴을 아는 기자의 요청은 콜로라도의 전략공군사령부나 하와이의 태평양지구사령부나 어디든 연결해 취재에 협조해준다.
따라서 현장에 자주 얼굴을 드러내 대변인 등과 인사라도 나누고 얼굴과 소속사를 익히도록 해놓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이런 경우도 있다. 별다른 기사가 눈에 띄지 않는 날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출입처 대변인실에 전화 다이얼을 돌려 인사라도 나눈다. 그러면 저쪽에서 “이 코멘트 필요하지 않습니까”라며 코멘트를 알려준다. 물론 그 코멘트를 들어보고 몇 군데만 추적해 보면 무슨 사건이라는 것을 곧 알 수 있다. 자칫 빠뜨릴 뻔한 기사를 전화 체크로 알게 되는 것이다.
연말이 가까워오면 으례 서울 본사에선 신년 특집으로 저명한 학자 등의 신년 특별 기고를 받도록 전문이 온다. 그런데 그 학자들이 자택에 있으면 좋은데 마침 여행중이면 보통 낭패가 아니다. 물론 자택에 있는 경우도 엄청나게 비싼 원고료를 요구하는 사람도 있어 교섭이 되지 않을 때도 있다. 이런 때 가령 하버드 대학 연구원 때 일본사 수강과 세미나 등으로 나와 가까웠던 에드윈 라이샤워 교수는 보스턴의 겨울을 피해 따뜻한 캘리포니아에 가 있으면서도 전화로 부탁을 하면 기고를 해준다. 어떤 땐 시간이 급할 경우 전화로도 원고를 불러준 적도 있다.(당시엔 팩시밀리가 없었다) 해외에서 특히 시간과 교통수단에 쫓기는 특파원에겐 전화처럼 편리한 취재 무기가 없다.
전화를 적극 활용하라, 궁금한 일이 있으면 곧 전화를 들어 다이얼을 돌려라, 영어(또는 해당 외국어)가 좀 세련되지 못하다고 해서 머뭇거려선 안 된다. 기사를 움켜쥐기 위해선 덤벼 들어야 한다. 어치피 상대방은 내가 비 영어권 기자인만큼 영어가 좀 서툴러도 다 알아듣기 마련이다. 특히 미국은 다민족 국가이고 이민자들이 많기 때문인지 다소 서툰 영어에 대해 인내심이 강한 듯하다. 나도 처음엔 전화 취재를 망설였지만 차츰 워싱턴 취재 환경에 적응해 가자, 주저 없이 전화 취재에 달려 들었다. 한국 문제에 대한 상·하의원 학자들의 논평이라든가 전문가들의 견해, 사건의 진행상황 등은 거의 다 전화취재에 의존했다. 몇 사람의 논평을 잘 엮으면 좋은 기사가 됐다.
1981년 11월 한국외환은행이 미국의 뉴욕 리퍼블릭 내셔널 뱅크(RNB)로부터 들여오던 미화 2백만 달러가 뉴욕에서 증발된 사건이 발생했다. 대한 항공 화물기에 적재, 서울로 운송된 현금행낭 다섯 개를 외환은행 본점에서 받아 개봉해 보니 현금 대신 백지뭉치가 들어 있었다. 나는 이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뉴욕 미 연방 수사국(FBI)의 책임 있는 수사관과 수시로 통화, 혐의자에 대한 단서를 포착했다는 특종을 뽑아냈다. 범인은 현금 수송을 맡았던 아머드 익스프레스사 직원이었다.
80년대 초 또 뉴욕주 웨체스터에서 당시 유엔주재 북한 대표부 외교관의 미국 흑인 여성 성추행 미수사건이 있었다. 나는 이 사건을 맡은 웨체스터 검찰의 담당검사에게 전화를 연결해 수사 진전 상황을 비교적 상세히 취재, 보도할 수 있었다. 물론 북한 외교관의 외교특권 문제는 유엔과 국무부에 취재했다. 뉴욕의 북한대표부에도 끈질기게 연결하려했으나 “우리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는 반응뿐이었다. 이 모든 취재가 워싱턴 내 사무실에서 전화로 이루어졌다. 당시 북한 외교관들은 대사 외엔 가족을 데려 올 수 없어 북한 대표부 건물에서 합숙 생활을 하고 있었다. 북한 대표부는 법정에 출두하라는 웨체스터 법원의 소환 요청에 외교관 면책특권을 내세워 이를 거부했다. 결국 변호사와 국무부 법원 유엔의 막후협의로 문제의 북한 외교관은 법정에 출두했으며 며칠 후 추방 조치됐다.
취재를 위한 전화는 뉴욕은 물론 미국 태평양 지구 사령부가 있는 호놀루루, 우주 센터가 있는 휴스턴 등으로 수시로 연결됐다. 사실 어떤 경우엔 직접 얼굴을 대해 기사거리를 캐내는 것 보다 전화를 통해 캐는 것이 더 적극적이고 단도직입적인 취재를 할 수 있다.
오프 더 레코드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
내가 워싱턴에 파견돼 근무한 5년 동안 미국 정부의 고위 관리나 한국 관리들로부터 가장 믿을 만한 놀라운 고급 정보를 캐치한 적이 여러번 있다. 물론 기사화하면 당연히 1면 톱 거리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중 몇 개는 끝까지 기사화하지 않았다. 뉴스원으로부터 오프 더 레코드를 전제로 들은 정보였기 때문이다.
1980년대 초는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소련을 가리켜 ‘악의 제국’(Evil Empire)이라고 부르고 이른바 ‘별들의 전쟁’(Star Wars) 계획으로 소련을 놀라게 만드는 등 미·소 관계가 긴장이 고조된 시기였다. 마찬가지로 미국과 북한 관계도 냉랭했다. 특히 1983년 버마(현 미얀마)를 공식 방문한 한국 대통령 일행에 대한 북한의 랭군 폭파 테러 사건이 발생한 이후 미국은 북한을 국제 테러리스트국으로 지정, 인도적 물품 거래를 제외한 일체의 통상을 금지시키는 등 관계가 악화된 상태였다.
그런 때 어느 날 미국의 고위 관리와 만난 자리에서 깜짝 놀랄 만한 정보를 들었다. 당시 하원 외교 위원회 아시아태평양 소위원회 위원장으로 영향력이 큰 스티픈 솔라즈 위원장이 판문점을 넘어 북한을 방문하는 계획이 진행되고 있다는 정보였다. 이 고위 외교관의 위치로 보아 그 정보는 틀림없는 것이었다. 북한은 이미 솔라즈 위원장의 판문점 통과 방북을 받아들였으며 솔라즈 위원장이 요구하고 있는 또 다른 방북 조건을 검토중이라는 말이었다. 그 조건은 솔라즈 위원장이 TV 등 미국의 미디어 기자 두세 명과 동행한다는 것이었다. 뉴욕 주 출신의 솔라즈 의원에게는 성사만 된다면 뉴스의 각광을 받고 뉴욕의 한국 교민 등 많은 지지를 모을 수 있는 극적인 장면이 될 것이었다.
이만한 정보만 되도 서울로 송고하면 1면 톱 거리였다. 그러나 나는 모처럼 건진 이 특종 기사를 보내지 않았다. 그 고위 관리로부터 오프 더 레코드로 들었기 때문이다. 헤어져 사무실로 돌아와 몇 시간을 고민했지만 결론은 오프 더 레코드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며칠 후 솔라즈 위원장의 미국 기자 동행 판문점 통과 요구는 북한이 완강하게 거절했으며 결국 솔라즈 의원의 방북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 사실 자체도 큰 뉴스였다. 그러나 역시 오프 더 레코드로 들었기 때문에 기사를 쓸 수 없었다. 만일 당시 솔라즈 위원장의 방북이 이루어졌다면 미·북 관계엔 어떤 대화의 돌파구가 열렸을지 모른다.
1983년 9월 1일 대한항공 747 여객기가 사할린 남단 해상에서 소련 전투기에 의해 격추된 사건이 발생했다. 이날 아침 일찍, 워싱턴 교외의 베데스다에 있는 자택에서 보좌관으로부터 KAL 여객기 실종과 격추 가능성을 긴급 보고받은 조지 슐츠 국무장관은 서둘러 국무부에 도착했다. 그 시간 일본 북부지역에 있는 미·일 도청 기지는 소련 공군 조종사가 KAL 여객기를 미사일로 격추시킨 후 러시아어로 “목표물은 파괴됐다”고 극동군 기지에 보고한 라디오 송신을 잡아놓고 있었다.
슐츠 장관은 캘리포니아 산타바바라에서 휴가중인 레이건 대통령에게 사건을 긴급 보고한 후 “미국은 이같은 공격에 강력하게 대처할 것이다”는 강력한 성명을 발표했다. 평소 기자들로부터 ‘곰’ 소리를 들을 정도로 감정이나 표정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슐츠 장관도 분노를 억제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희생된 269명의 KAL 승객들 가운데는 조지아 주 출신의 래리 맥도널드 하원의원 등 미국인 승객 21명과 일본인 승객 27명도 들어 있었다. 한국 정부는 소련의 만행을 규탄하고 국제 여론을 일으켜 사건 조사 등 필요한 조치가 취해지도록 미국과 협력, 9월 2일 미국은 일본, 캐나다와 함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긴급 소집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9월 3일부터 안보리 회의가 열렸다.
조지 슐츠 국무장관은 진 커크패트릭 주유엔 대사에게 유엔이 소련의 행위를 규탄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키도록 외교력을 다하도록 훈령했다. 안보리 회의는 12일간 6차에 걸쳐 열렸는데 한국은 유엔 회원국은 아니었지만(남북한은 1991년 9월 17일 동시 가입) 피해 당사국이었기 때문에 김경원 주유엔 대사가 연설을 통해 소련의 만행을 규탄하고 소련에 대한 5개항의 요구 사항을 제시했다. 미국 대사와 소련 대사간에도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발언한 총 46개국 중 42개국이 소련을 규탄하는 한국의 입장을 지지해 주었다. 싱가포르의 토미 코 유엔 대사(현재 순회대사)도 한국 입장을 지지, 소련 대표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설득력 있게 비판해 한국 입장을 지지해 주었다. 토미 코 대사는 내가 만난 세계의 외교관 중 탁월한 외교관이었으며 높은 지성인이었다.
미국 등 17개 우방국은 공동 명의로 민간 항공기에 대한 무력 사용을 규탄하고 유엔 사무총장과 국제민간항공기구(ICAO)의 사건 진상 조사 및 보고를 촉구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제출했다. 물론 소련은 이 결의안에 강력 반대했다. 미국은 유엔 건물 맞은 편에 자리잡고 있는 미국 대표부와 유엔 플라자 호텔을 중심으로 15개 안보리 회원국들 중 소련을 제외한 다른 회원국들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막후 로비 활동에 나섰다.
워싱턴 국무부에서 안보리회원국들을 잘 아는 특별 지원팀이 파견돼 외교적 노력이 전개되는 동안 결의안 상정은 전략상 늦추어졌다. 나는 매일같이 유엔과 한국 미국 일본 대표부 등을 뛰어다니며 ‘오늘까지 몇 표가 확보됐는가’를 취재하는 것이 일과였다.
긴장된 나날의 연속이었다. 마침내 결의안 채택에 필요한 9표가 확보됐다. 나는 유엔 최고위 외교관으로부터 미국이 마지막으로 설득에 성공한 나라가 키프러스이며 상당한 경제 협력을 대가로 약속했다는 확실한 정보를 들었다. 당시 키프러스의 유엔 주재 대사는 유엔 경력이 긴 노회한 외교관으로 사안에 따라 서방측에도 기울고 공산권에도 기우는 인물이었다. 이 키프러스 외교관의 흥정엔 그를 설득하고 나온 미국 외교관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정도였다. 이같은 우방국들의 외교적 노력 끝에 대소련 규탄 및 사고 진상 조사 결의안은 9월 12일 제 16차 회의에서 가9 대 부2(기권 4표)로 채택되기 직전이었으나 결국 소련의 거부권 행사로 채택되지 못했다.
내가 취재한 키프러스 표 확보와 미국의 상당한 경제 지원 약속은 송고하면 물론 1면 톱 뉴스 거리였다. 그러나 나는 이 특종 기사를 송고하지 않았다. 결의안 표결을 앞두고 이 기사가 나갔을 경우 과연 국가 이익에 도움이 될 것인가 하는 고려와 그보다 이 정보를 오프 더 레코드로 들었기 때문이다.
오프 더 레코드를 지키느라 특종 기사를 쓰지 못한 경우 기자로서 말할 수 없이 가슴 아프고 고통스럽다(마치 옥동자를 유산한 산모의 아픔 같다고 할까). 그러나 비록 기사를 못 쓰고 취재 성과를 올리지 못한다고 해서 오프 더 레코드를 깨뜨려선 안된다. 그것은 기자와 취재원 사이의 약속과 신뢰를 깨뜨리는 일이다. 물론 이를 깨뜨리고 기사를 터트려 빛날 수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한때의 일이다. 한번 신뢰를 잃은 기자가 더 좋은 정보, 더 큰 기사를 캐낼 수 없다. 기자는 오프 더 레코드를 지킨 데 대해 보다 더 값지고 큰 것으로 보상받을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믿음이고 이에 대한 보상으로 또 다른 중요한 정보와 기사를 얻게 된다. 나도 오프 더 레코드를 지켜준 고위 관리로부터 더 크고 중요한 기사를 취재할 수 있었다. 또 일단 신뢰를 얻게 된 뉴스 소스의 소개로 또 다른 새로운 뉴스 소스를 소개받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 새로 알게 된 뉴스 소스로부터도 좋은 기사를 얻을 수 있다.
다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국내에서나 해외에서나 취재 활동에 있어서 기자와 뉴스 소스간엔 믿음과 신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감춰진 기사의 보고, 국립공문서보관소
기사는 어디에나 있다. 단지 찾아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1983년 6.25 한국 전쟁 33주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때쯤 되면 본사 데스크에서도 그렇지만 이번엔 무슨 특집을 할까, 타지가 생각지 못한 좋은 기획물이 없을까 하고 아이디어를 짜기 시작한다. 이같은 사정을 잘 아는 워싱턴은 더 일찍부터 기획물을 생각해 본다. 지난 해엔 한국 전쟁 당시 주한 미군 사령관을 역임한 맥스웰 D 테일러 장군을 찾아내 인터뷰를 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갑자기 의회 취재를 가면 항상 보게 되는 컨스티튜션 가의 국립공문서보관소(National Archives)가 생각났다. 가서 찾아보면 무엇인가 나올 것 같았다.
간단한 스트레이트 기사 몇 건을 송고하고 난 후 프레스 빌딩에서 멀지 않은 국립공문서보관소를 찾아 갔다. 워낙 방대한 문서들이 다 보관되어 있는 곳이라 어떤 문서가 어느 방 어느 곳에 들어가 있는지조차 찾아내기 어렵다. 어느 곳에 분류되어 있다는 것을 찾아낸 다음에도 어느 파일에 분류되어 있는지 작업을 하려면 한두 시간 갖고 되는 일이 아니다. 물론 비밀 해제된 문서들만 일반의 열람이 허용된다.
처음엔 몇 시간이면 되겠지 하던 일이 오후 내내, 그리고 그 다음 날엔 모든 일을 제쳐놓고 하루 종일 문서 더미 속에 들어가 찾는 작업을 계속해야 했다. 또 한 가지를 찾아내면 관련된 문서를 다른 방이나 다른 파일에 가서 찾아내야 하는 끈기와 노력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이렇게 며칠간 공문서보관소를 출입한 끝에 한국전 관련 몇 가지 특종을 찾아냈다. 북한이 남한을 침공하기 위해 휴전선 가까운 몇 개 지역에 군사용 비행장을 건설했다는 정보 보고였다. 당장 이 문서를 복사해 사무실로 돌아와 기사를 작성, 본사로 송고했다. 물론 톱 기사였다.
그 이후 나는 한동안 틈만 나면 공문서보관소를 찾는 단골 방문객이 됐으며 국립공문서보관소에선 자료조사원(Researcher)이란 임시 패스도 내주었다. 한 달 이상 자료 조사 작업을 하다보니 어느새 상당히 익숙해져 어떤 자료는 어느 방 어떤 파일을 조사해야 하는지, 또 관련 다른 파일은 어떻게 찾아내야 하는지를 어느 정도 알게 됐다. 뿐만 아니라 아시아과 관리들도 친숙해졌다. 그렇게 해서 몇 개의 특종 기사를 뽑아 냈다. 미국이 38선을 분할하기 전 원산과 평양을 잇는 남북 분활선을 계획한 미합동참모본부의 기획(그중 기획자 한 사람이 케네디 행정부 당시 국무장관이던 딘 러스크 중령이다), 미국이 한국전 휴전 당시 통일 정부의 안보를 위해 압록강에 비무장지대를 설치하겠다는 계획, 한국전중 낙동강 이남으로 밀릴 경우 미군의 한반도 철수 계획 등…. 특히 한국 전쟁 당시 미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 국무부의 기록과 평가 등은 한국 정부의 기록과 다른 내용도 있어 이 모든 관계 자료를 찾아내 분석한다면 과거 잘못된 기록을 수정해야 할 내용도 적지 않았다.
‘Top Secret’, ‘Confidential’, ‘Your Eyes Only’ 등으로 분류된 한국 관련 문서들 가운데는 별의별 내용이 다 들어 있었다. 기사화 못한 것들도 있다. 가령 주한 미국 대사관에서 본부로 보고한 한국 지도자들의 인물평 가운데는 정치 사회 등 각계 지도 인물들에 대한 미국의 평가도 있었다. 가령 자유당 시절,제 2인자로 불리던 이기붕 씨의 ‘서대문 경무대’에 누가 잘 찾아가고 누가 가서 무슨 말을 하고 한 내용들이 소상히 보고되어 있었다. 문서보관소에서 한국과 한반도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친 비밀 문서들을 찾아내 읽으면서 광복과 건국을 전후한 시대, 당시 국제 사회의 소용돌이 가운데 휘둘려진 우리 민족의 운명이 비감스러웠다.
미 국립공문서보관소는 기사의 보고이기에 앞서 귀중한 역사의 보고다. 나는 광복 전후인 1940년과 1950년대의 비밀 해제된 문서들만을 주로 찾아 보았지만 해마다 비밀 해제되는 미국 정부 공문서 더미들에선 우리가 전혀 모르고 있는 사이 강대국들간에 일어난 한반도 관련 정책 결정 기록들이 수없이 많이 숨겨져 있다.
비록 4, 50년대의 지나간 문서들이라도 공개됐을 경우 국가 이익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내용이거나 국가간 ‘예민한 문제’의 기록들은 공개되지 않고 있다. 이 역사의 보고를 드나들며 정부는 전문 관리나 학자들을 파견해 한국 관련 중요 기록 문서들을 복사해 와야 한다고 생각했다.(한국전 관련 자료들은 입수해 왔을 것이다)
미국 공문 기록도 중요하지만 지난 날 한반도 역사에 미친 주변 강대국들의 공문 기록도 입수해 올 수 있는 대로 입수해 와야 한다. 1989년 동아일보와 소련 노보스티통신과의 업무 협력 추진을 위해 내가 모스크바에 갔을 때 모스크바 대학을 방문했다. 그곳에도 남북한 관련 자료가 있었다. 아마도 구소련 정부의 비밀 해제된 외교·군사 공문서들이나 구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기록들 가운데는 남북한에 관한 귀중한 역사적 자료들이 쌓여 있을 것이다. 러시아어로 기록된 그 방대한 문서들 가운데서 귀중한 자료들을 찾아내고 입수해 오는 작업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지만 이는 1차적으로 정부나 어느 학술기관에서든 해야 할 일이다. 특히 광복과 분단을 전후해 소련이 개입하고 결정한 대한반도 정책은 우리에게 더 할 수 없이 중요한 역사적 자료가 된다. 이런 귀중한 역사적 자료들이 훼손되고 없어지기 전에 빨리 보존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겨야 한다. 중국과 일본 등 한반도와 관련 있는 주변국의 공문서 기록도 중요하다는 것은 더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마유미, 신이치를 좇아라
1987년 11월 29일, 승객과 승무원 115명이 타고 바그다드에서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KAL) 858편 보잉 707기가 버마 벵골만에서 마지막 교신을 한 뒤 갑자기 실종됐다는 정보가 들어 왔다. 당시 나는 동아일보 외신부장이었다.
국제사건 주무 부서인 외신부, 사회부 등 전 편집국은 아연 긴장했다. 후속 정보가 들어올 수 있는 데는 대한항공 본사에 설치된 비상대책팀과 외신, 현지 대사관들과 정보기관의 정보망뿐이었다.
버마 현지에 기자를 특파했으나 단서가 될 만한 정보가 잡히지 않았다. 공중 폭발 가능성이 높다는 추측만 나왔다. 다시 사건 기자를 급히 버마 태국 국경지대에 파견했다. 사건 발생 48시간 만인 12월 1일 교통부를 출입하던 본사 기자가 교통부 사고대책본부의 칠판 한 귀퉁이에 쓰여 있는 ‘일본인 남녀 아부다비에서 내림’이란 내용을 보고 이를 추적, KAL 바레인 지점이 텔렉스로 보낸 전문을 입수했다.
전문엔 실종 항공기의 사고 직전 기착지인 아부다비 공항에서 일본인 남녀 승객 2명이 내렸으며 여자 승객이 서울 법무부의 블랙 리스트에 올라 있다는 사실도 캐냈다. 이들은 사고 당일 새벽 5시 20분(한국 시간) 바그다드에서 사고 항공기에 탑승, 오전 7시 40분 아부다비 공항에 내린 것이다. 탑승자 카드 성명 기재란엔 신이치, 마유미란 이름만 써 놓았을 뿐 기내에서 입국 신고서 작성도 거부한 채 내린 것으로 되어 있었다.
조회 결과 야카베 마유미(27)란 일본 여자가 외국인 블랙 리스트에서 확인돼 이들의 행방을 추적중이었다. 문제의 일본인 남녀는 아부다비 공항에서 내린 뒤 걸프 에어 003편으로 바레인으로 떠났으며 바레인 시내 리젠시 호텔에 투숙해 있다는 것이 확인됐다. 현지 KAL 지점에서 접촉을 시도하자 이들은 면담을 거부하고 다만 2일 로마로 떠날 예정이라고만 말했다는 보고였다. 이같은 정보는 ‘기피 일본인 탔다가 내렸다. 한국 입국 금지 여성 등 폭발물 장치 가능성’이란 제목으로 동아일보에 특종 보도됐다.
이때부터 취재 아닌 국제 추적 수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마유미의 신원은 다시 ‘하치야 마유미’란 인물임이 확인됐다. 나는 동경지사장과 특파원에게 아사히(朝日) 신문과의 취재 협력을 지시하고 직접 바레인 주재 한국 대사관에 국제 전화를 걸었다. 리젠시 호텔 611호실에 들어 있는 두 사람의 동태를 감시할 것과 우리 외교관이 직접 이들을 만나 신원을 확인해 보라고 요청했다. 정부로부터도 같은 훈령을 받았는지 모른다.
대사관에선 두 명의 외교관을 호텔방으로 보내 문제의 남녀를 만나도록 했다. 잠시 후 다시 전화를 바레인 대사관에 연결, 결과를 물어보니 두 사람은 유럽을 여행중인 일본인 부녀로 별 수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답변이었다. 나는 바레인 대사관의 김정기 대사대리 등과의 전화 취재를 통해 하치야 신이치, 마유미 두 사람이 가짜 여권을 소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으며 이같은 진전 상황들은 속속 2판에 상세히 보도돼 타지보다 앞서 나갔다.
본사 외신부와 사회부, 바레인 대사관, 동경지사간의 입체 취재가 숨가쁘게 돌아갔다. 동경지사장도 직접 바레인 리젠시 호텔에 전화를 걸어 문제의 하치야 신이치와 통화, 이들의 여행 목적과 일정 등을 알아냈다. 물론 하치야 신이치의 말은 거짓이었다. 현지에서 입수된 신원은 곧바로 동경지사를 통해 아시히 신문의 사회부에 전해졌다. 아사히 취재팀이 하치야 신이치의 주소지인 동경 에비스로 달려간 결과 2년 전에 주소지를 옮긴 사실이 확인됐다. 취재팀이 다시 옮긴 주소를 찾아갔을 때 하치야 신이치라는 실재 인물이 그곳에 살고 있었다.
이같은 사실을 보고 받은 나는 즉시 바레인의 김정기 대사대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때 김정기 대사대리는 마유미 등이 이날 낮 12시 반 호텔을 나서 공항으로 향하고 있다는 KAL 바레인 지점의 연락을 받고 현지 일본 대사관에 가짜 여권 소지 혐의로 마유미의 체포를 요청하던 중이었다.
나는 김 대사대리에게 “신이치도 가짜 여권을 갖고 있다. 실재 인물이 동경에 살고 있다. 신이치를 놓치면 큰일나니 빨리 쫓아 나가서 꼭 잡아라. 만일 놓치면 모두 대사관 책임이 될 것이다”고 독려했다. 말이 독려이지 편집국이 떠나가도록 소리소리 질렀다.
동경에 실존하고 있는 하치야 신이치는 미야모토 아키라(宮本明)라는 친구에게 여권을 빌려준 사실이 밝혀졌다. 미야모토 아키라는 ’84년까지 동아일보를 우편 구독해 보던 재일 한국인 독자라는 사실도 확인돼 하치야 신이치와 미야모토 아키라와의 관계, 여권 대여 사실, 여권 위조 가능성 등이 특종으로 보도됐다. 이날 저녁 하치야 신이치와 마유미가 공항에서 체포되자 음독, 하치야 신이치는 사망했다는 현지 속보가 외신을 타고 들어왔으며 이들의 범행이 확인됐다.
이렇게 취재는 때로 당국의 수사보다 앞질러 가기도 했는데 각 부서가 긴밀한 협력으로 효과적 입체 취재를 벌인 결과였다. (이상 동아일보 동우지 ‘KAL기 추락 사건 취재 후기’ 참조)
국제시각을 가져야 한다
기자가 아무리 취재를 잘 하고 글을 잘 쓴다고 해도 사건 또는 사태를 보는 눈이 ‘기자의 눈’, 즉 ‘기자의 시각’에서가 아니면 좋은 보도를 할 수 없다. 한 사건을 어떤 시각을 갖고 보는가에 따라 보도 방향은 확연히 달라질 수 있다. 그러면 기자의 시각을 갖도록 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필자가 처음 기자가 되었을 때 고 千寬宇 선생(전 동아일보 주필, 사학자) 등 선배 언론인들로부터 귀가 아프게 들은 말이 “기자는 역사 의식, 문제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었다.
즉, 사건을 역사적인 잣대 또는 문제를 제기하는 관점에서 보라는 것이다. 이 말은 내가 36년간 일선에서 언론활동을 해오는 동안 한결같은 지침이었다. 요즘 한국과 일본간에 벌어지고 있는 일본의 역사왜곡 논쟁이야말로 바로 역사의식과 문제의식에서 보아 뉴스의 초점으로 제기할 수 있는 대표적 사례가 된다.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일본이 역사적 사실을 부인하고 이를 왜곡 기술하는 것은 역사의식, 문제의식에서 보아 당연히 문제를 삼고 국제적 여론을 일으켜 시정을 촉구해야 할 일이다. 그 점에서 역사적 사실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왜곡하는 일본의 일부 보수적 지성인과 언론인은 지성인 언론인으로 보기 어렵다.
사건을 역사의식, 문제의식에서 보는가, 아니면 단순히 평면적 시각에서 보는가에 따라 사실 보도나 논평의 내용은 크게 달라진다. 그 때문에 언론 선배들은 “이 기사는 문제의식이 없다”고 지적하던가, 역사적 시각을 갖고 보도록 후배 기자들을 바로 잡아주고 가르치는 것이다. 여기에 나는 해외특파원이나 해외 취재에 나가는 기자들에게 하나를 더 주문하고 싶다. 그것은 국제적 시각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국제적 시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 사건을 그가 살고 있는 한 사회나 한 나라의 눈으로만 보지 않고 국제적 흐름 속에서 보고 파악하는 시각을 말한다. 가령 국제사회에서 발생한 한 사건을 서구적 가치, 즉 자유민주주의적 시각에서 보느냐, 아니면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보느냐에 따라 보도의 내용 해석 평가가 달라지는 것이다. 때로는 제국주의적 시각일 수도 있다. 가장 좋은 예가 베트남전이다.
자유민주주의의 시각에서 보면 베트남전은 베트남과 아시아에서의 공산세력 팽창과 궁극적인 공산화를 막기 위한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전이라고 할 수 있다. 서방의 보도는 다른 시각도 있었지만 대체로 이같은 시각을 견지했다. 그러나 민족주의적 시각에서는 베트남전을 ‘민족해방 운동’이라고 부른 것이다. 그들의 시각에서는 호치민(胡志明)도 공산주의자가 아닌 민족주의자였다. 사회주의권과 제3세계의 미디어들이 대체로 이같은 시각에서 베트남전을 보도하고 평가했다.
또 좋은 예는 중동전과 중동의 갈등을 보는 보도시각이다.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석유 자원과 전략적 이해등 열강들의 갖가지 이해가 걸려 있어 제국주의적 시각에서 사건을 보는 것과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사건을 보는 정반대의 보도 태도를 볼 수 있다. 가령 미국의 통신, 신문 등 미디어들 가운데는 이스라엘의 입장에 기울어져 있는 미디어도 있다. 자연 중동 갈등의 해결책도 이스라엘 입장을 반영한 보도를 엿 볼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세계적 통신이라고 해도 적어도 중동문제에 있어서 AFP통신의 입장은 다르다. AFP통신은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아랍국가들의 입장을 상당히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중동의 갈등을 보는 데 있어서 객관적 시각을 유지하자면 미국, 영국 등 서방국들의 미디어에만 의존해선 안 된다. 이집트, 이란 등 중동국가들의 미디어 보도는 물론 인도, 인도네시아 등 아랍권에 정통한 제3세계, 비동맹국 등의 미디어를 반드시 참고하는 것이 사태 판단에 크게 도움이 된다. 유고슬라비아의 탄유그통신도 중동문제에 관한 한 비교적 정확하고 객관적인 자세를 유지해 왔다.
객관적 시각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힘든 일인가는 문제가 되고 있는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한 보도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일본의 다수 신문들이 국수주의적 입장에서 역사 왜곡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정당화하는 데 가세하고 있는데 반해 아사히(朝日)신문만은 일본 보수세력의 역사왜곡을 비판하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할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객관적이고 책임 있는 퀄리티 페이퍼(Quality Paper)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최근 발생한 미 해군 정찰기와 중국 공군기의 충돌 사건을 예로 들어본다. 이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새로 들어선 미국의 부시 행정부와 중국과의 관계는 한 때 심각한 갈등을 보였다. 그러나 이 사건은 미국과 중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은 전략적 요충인 대만과 동지나해에서의 지배권을 확대해 나가는 중국의 군사력을 강력히 견제하고 있으며 중국은 중국대로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의 기존 패권을 지키려는 미국을 견제하고 있는 데서 충돌이 발생한 것이다. 따라서 미·중국간의 갈등이 해결되지 않고 군사적 긴장으로 확대된다면 그 여파는 곧 한반도와 일본, 아시아 주변국들에게 비화될 수 있었다. 만일 미국이 대 중국 군사행동에 들어갔다면 안보동맹국인 일본도 군수지원 등 어떤 형태의 군사적 지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같은 상황에 이르면 그 불똥은 곧 한반도에 튀게 되며 한반도엔 또 다시 긴장이 불어닥쳤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비록 한국이 미국과 안보동맹국이지만 미국의 입장에만 기울여져선 안 되며 그렇다고 중국의 입장에 기울여져서도 안 된다. 보도의 방향은 엄밀한 사건분석과 국제법에 입각한 상호 피해보상 및 처리를 촉구해야 한다. 또한 미·중 양측이 갈등과 긴장상태로 나가는 것을 단호히 막고 아시아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양측의 합리적 처리와 최대한의 자제를 촉구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능성이 희박한 추측에 지나지 않지만 기자의 문제의식에서 이 사건의 배경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중국을 ‘전략적 경쟁자’로 보고 있는 부시 행정부가 과연 중국이 어느 정도로까지 나올 수 있는가를 테스트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중국 영해 가까이 접근, 사건을 유도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과 반대로 중국이 미국의 대응을 테스트하기 위해 의도적 근접비행으로 사건을 촉발시키지 않았는가 하는 가설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나타난 사건의 정황으로 보아 어디까지나 개연성이 낮은 가설일 뿐이다. 그러나 날카로운 기자의 문제의식에서 보면 일단 추적은 해 볼만한 사건이다.
좋은 예가 1983년 사할린 상공에서 소련의 미사일 격추로 추락한 대한항공 대참사 사건이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비행사가 항로를 잘못 입력, 소련 영공 가까이 비행해 들어간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워싱턴 내셔널 프레스센터 내 사무실 바로 옆에 사무실에 있던 미국의 세이머 허쉬(Seymour Harsh)는 그의 저서 「목표물은 파괴됐다(The Target is Destroyed)」에서 미 정보기관이 개입된 의도적 비행, 즉 스파이비행 가능성을 제기했었다. 언론계에서 탐사보도로 유명한 세이머 허쉬의 이같은 가설을 뒷받침할 객관적 자료는 그 후에도 발견되지 않았다. 허쉬의 가설은 어디까지나 가설과 추측에 불과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언론인으로서 허쉬의 문제의식과 끈질긴 추적정신만은 높이 살 만하다.
아시아국들간에 문제가 되고 있는 일본의 역사왜곡 문제만 해도 그렇다. 이를 한국-일본관계, 일본-중국관계에서만 보면 양국의 우호협력 관계가 손상되는 양국 문제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좀 더 넓게 국제적 시각에서 보면 이 문제는 한·일 양국간의 문제만이 아니라. 한·미관계, 한·중관계 크게는 미국과 아시아관계에까지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건인 것이다. 미국의 공화당은 전통적으로 일본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조지 부시 행정부는 중국,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과 안보동맹을 더욱 강화해 나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이 일본의 역사왜곡을 모른 체하고만 있으면 결국 2차대전 후 미국의 잘못된 전후청산 문제가 다시 제기되고 일본의 침탈을 당한 아시아국들과 미국과의 관계에도 손상이 가게 될 것이다.
국제 마인드, 국제 시각은 이렇게 중요하다. 워싱턴이나 도쿄, 베이징 등 해외에 나가 취재활동을 하는 해외특파원들에게 국제적 시각이 없다면 한쪽만 본 보도를 하기 쉬우며 또한 독자나 시청자들에게 아무런 비전도 주지 못할 것이다.
가장 어려웠던 인터뷰
1983년 1월, 신년휴가로 모처럼 가족과 함께 플로리다의 디즈니랜드를 다녀왔더니 서울 본사로부터 인터뷰 지시가 날라와 있었다. 최초로 인공심장을 개발해 세계적 주목을 받고 있는 유타대학의 레이 재빗 박사를 인터뷰해 기사를 보내라는 것이었다. 당시 세계의학계에선 인공심장을 발견한 유타대학의 재빗 박사 등의 연구업적과 인물이 큰 화재였으며 단연 매스컴의 톱 뉴스였다. 또 한 인물은 최초로 인공심장 수술에 성공한 남아프리카연방의 스미스 박사 얘기였다. 본사 데스크의 지시는 당장 현지로 떠나 최단시일 내에 인터뷰 기사를 송고하라는 것이었다.
참으로 막막하기 짝이 없는 인터뷰 취재였다. 그 동안 수많은 인터뷰를 해왔지만 인공심장같은 전문적 분야의 인터뷰를 아무런 기초 상식 없이 어떻게 한단 말인가. 막막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본사에서 온 전문을 보니 유타대학 인공심장 팀에 한국인인 김성완 박사가 있다는 정보가 있었다. 이젠 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곧 전화를 들어 유타대학의 김성완 박사에게 연결. 내 소개와 함께 곧 그곳으로 떠난다는 뜻을 일방적으로 알렸다. 그리곤 세인트 루이스를 거쳐 유타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솔트 레이크 시티에 도착하자마자 곧 바로 김성완 교수 연구실을 찾아갔다. 마침 김 교수는 연구실에 있었다. 나는 다짜고짜 김 교수 인터뷰에 들어갔다. 그에 관해 아는 것이라곤 인공심장을 세계에서 처음 연구 개발한 윌램 J. 롤프 박사와 한 연구팀이라는 것과 한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유타대학으로 간 것이라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인터뷰의 기초가 되는 것부터 묻기 시작했다. 그가 그 어려운 생체의공학 분야를 연구하게 된 동기부터 인공심장 연구에서 중요한 혈액응고 문제를 연구해낸 결과를 자세히 설명 들었다. 김성완 박사와의 인터뷰는 김 박사 자신이 다음 질문 내용을 하나씩 떨어뜨리며 가도록 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가 설명하는 가운데서 나는 일반적 질문과 생체의공학적 질문의 꼬투리를 찾아내는 것이다. 즉 상대방으로부터 끊임없이 다음 질문을 유도해 내는 인터뷰 요령이다. 그래도 몇 시간의 귀중한 시간을 뺏는 것이 가능했던 것은 김 박사가 같은 한국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나는 김성완 박사를 인터뷰하며 김 박사에 대한 질문뿐 아니라 다음 번에 할 콜프 박사와의 인터뷰 질문도 대개 갖추어 놓았다.
이렇게 든든한 무장을 한 다음 콜프 박사를 만났다. 콜프 박사는 세계 최초로 인공심장을 개발, 생명이 거의 끊어져가는 바니 클라크 박사에게 인공심장을 이식해 생명을 살려 놓은 세계 학계로부터 ‘인공심장의 창시자’로 불리던 학자였다. 그가 소장을 맡고 있는 유타대학 생체의공학 연구소엔 내과의 외과의 기계공학자 화학자 물리학자 수의학자 등 연구진이 모두 소속되어 있었는데 나로서는 모르는 분야들이었다. 당시 71세의 노학자와의 인터뷰는 콜프 박사의 자상한 설명으로 잘 진행됐으며 그는 ‘뇌 말고는 인체의 모든 부분이 인공 가능하다’고 생체의공학의 발전을 예측했다. 과연 현대 생체의공학의 발전은 일찍이 콜프 박사가 예측한 말대로 가고 있다.
그의 생활 철학은 ‘인간이 고통 없이 행복하고 활기에 찬 삶을 갖도록 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는 인공심장 개발에서 김성완 박사의 혈액응고 연구가 크게 기여했다고 몇 번이나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기자생활을 하며 그 동안 수많은 인터뷰를 해온 산 경험에서 보면 역시 좋은 인터뷰의 요령은 꾸밈없이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상대방과 갖는 것이다. 인터뷰에 앞서 우선 상대방에게 인간적인 신뢰감을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야 상대방도 기자를 믿고 솔직한 얘기를 하게 된다. 그러자면 기자의 말과 몸짓 하나에서부터 상대방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특히 상대방의 말을 함부로 끊어선 안 된다. 본 줄기에서 크게 벗어 났거나 장광설이 되는 경우말고는. 기자라고 해서 무슨 특권이라도 있듯이 마구 덤벼들어선 안 된다. 나는 가령 국가 안보와 관계된 민감한 얘기가 나올 인터뷰에선 미리 상대방에게 “말씀을 하시다 보도를 해선 안 되는 내용이 있으면 오프 더 레코드(Off the Record)를 걸어주십시오”라고 말해주거나 “이 대목을 보도해도 좋겠습니까”하고 몇 번이나 확인하곤 한다. 아주 드문 경우지만 고위공직자가 국가 안보상에 미칠 영향을 미처 생각지 못하고 아주 민감한 내용을 밝혔을 경우 “이 문제는 아주 민감하기 때문에 오프를 거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고 환기시켜 주기도 한다. 물론 이런 경우 기자로서 기사를 못 쓰거나 특종을 놓치게 되지만 보도될 경우, 남북한 관계 또는 주변국들과의 관계에 결정적으로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사를 쓰지 못한 대신 상대방 고위 공직자와의 신뢰는 두터워져 그 후부터 더 많은 고급 정보와 배경설명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인터뷰에 다 같은 접근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가령 어렵게 성사된 자민당 전 간사장 가토 고이치(加藤紘一) 같은 거물 정치인과의 인터뷰는 당초부터 15분 간이란 시간 제한이 주어졌기 때문에 앉자마자 속사포 같은 질문을 퍼부어 댔다. 결국 답변을 물고 늘어져 보완질문(Follow Up)을 연발했기 때문에 인터뷰는 30분을 넘어섰다. 또 인터뷰 대상에 따라 일부러 화를 돋우거나 과찬으로 치켜올려 말문을 트이게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국경지대에서 아프간 전사들과의 인터뷰는 산악지대로 행군을 함께 해가며 한, 땀나는 인터뷰 역시 요점만을 간결하게 묻는 그런 식이었다.
세계적 경제학자인 미국 하버드대학의 존 케네드 갈브레이드(John Kenneth Galbraith) 박사와의 인터뷰도 무척 어려웠던 인터뷰 중의 하나였다. 경제 전문 분야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물론 갈브레이드 박사를 만나러 가기 앞서 그의 대표적 저서인 「대붕괴(The Great Crash)」와 「불확실성의 시대(The Age of Uncertainty)」, 「신생 공업국가(The New Industrial State)」 등을 잠시 읽어보았다.
하버드 캠퍼스 안이나 마찬가지인 케임브리지의 프란시스가 30의 적막한 갈브레이드 교수 저택을 찾아가자 노교수는 정원이 보이는 서재로 안내했다.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 건강에 관한 질문을 던지려 하고 있는데 옆집의 노여사가 정원을 통해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갈브레이드 교수는 잠깐 실례한다며 나갔다 왔다. 바로 옆집의 노여사는 미국의 유명한 반핵운동가, 환경보호 운동가였다. 반핵 캠페인을 또 시작할 텐데 참여하지 않겠느냐는 요청이었다. 전부터 이 운동에 앞장서 왔던 갈브레이드 교수는 물론 참여의 뜻을 말했다며 “대단한 분입니다”고 빙그레 웃었다. 나는 옳다구나 싶어 국제적 반핵운동의 연대와 환경, 인류의 장래문제에서부터 얘기를 풀어 나갔다.
갈브레이드 박사는 참으로 진지한 분이었다. 기자의 질문 하나 하나를 진지하게 듣고 생각해 답변하는 그런 스타일이었다. 과연 1987년 미국 버몬트에서 소련의 언론인이며 경제평론가인 스타니슬라브 멘쉬코프(Stanislav Menshikov)와 ‘자본주의, 공산주의 그리고 공존’을 주제로 ‘세기의 대 토론’을 벌였던 세계적 석학다웠다. 내가 잘 모르는 수량경제쪽으로 화제가 들어가자 노교수는 어려운 경제 용어 하나하나를 일일이 설명해 가며 질문에 응했다. 비록 어려운 인터뷰였지만 이렇게 해서 동아일보 한 면 전체에 게재된 갈브레이드 교수 인터뷰를 잘 마칠 수 있었다(후기 : 당시 인터뷰 고료로 5백 달러를 드렸으나 갈브레이드 교수는 보통 미국인답지 않게 이를 사양, 본인의 희망에 따라 보스턴의 한 양로원에 교수의 이름으로 기부했다).
내가 또 곤욕을 치른 인터뷰는 역시 유명한 경제학자로 당시 명저 「제로 섬 사회(Zero Sum Society)」로 유명한 MIT대학의 레스터 더로(Rester Thurow) 교수와의 인터뷰다. 이 인터뷰도 신년 특집으로 기획,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경제학자로부터 새해의 세계경제 전망을 듣는 것이었다. 본사 경제부로부터 온 몇 가지 질문과 하버드대학의 경제사회학도들에게 자문을 구해 20여 개의 질문을 준비해 갔는데 더로 교수의 전문적 설명이 너무 어려워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니 보완 질문은 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다 강의와 집필, 연구 등으로 눈코 뜰 사이 없는 더로 교수에게 얻은 시간은 1시간 정도였다. 그의 설명을 수첩에 따라 적는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래서 메모는 포기하고 대신 녹음기를 바짝 갖다 대 놓고 준비해 온 20여 개의 질문을 모두 퍼부었고 더로 교수의 답변을 모두 녹음기에 충실히 담았다.
교수도 내 의도를 이해했는지 녹음기에 입을 가까이 대고 답변을 해주었다. 만일 녹음이 잘 안 됐다면 신년 기획은 펑크가 나는 것이었다. 사무실로 돌아와 녹음을 들어보니 천만다행으로 잘 되어 있었다. 그 내용을 이틀을 꼬박 새우다시피하며 풀었다. 그런 다음 그 내용을 하버드 경제학도에게 다시 의뢰, 추가 질문을 만든 다음 케임브리지의 더로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비서에게 지난 번 더로 교수의 인터뷰 설명 중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며 교수와의 연결을 요청했다. 한두 시간 후 더로 교수는 워싱턴 사무실로 전화를 해왔다. 나는 전화와 녹음기를 다시 연결시켜 놓고 다시 보완 질문을 했다. 결국 이에 대한 더로 교수의 답변만도 30분이 넘게 걸렸는데, 이렇게 해서 더로 교수와의 인터뷰도 힘은 무척 들었지만 잘 해낼 수 있었다.
제2부국제보도 : 이론과 실제
국제 보도는 언론의 견인차
우리 나라의 초창기 신문인 <한성순보>, <한성주보>를 펼쳐 보면 외국에 관한 보도로 가득차 있음에 놀라게 된다. 언론이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이라는 고전적인 가정에 근거해 당시 신문의 내용으로 우리 사회의 성격을 규명하려고 하면 후기 조선 사회는 세계화에 앞장선 듯한 착각까지 들게 된다. 그러나 <한성순보>가 나오기 불과 20년 전만 해도 쇄국정책으로 인해 은둔 국가로 알려졌던 조선 왕조가 짧은 기간에 ‘은둔’에서 ‘세계화’로 변신했다고는 볼 수 없다.
초기 신문에 국제 뉴스가 중요한 메뉴였던 까닭은 조선 왕조가 은둔에서 나와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려는 의지를 반영했다고 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한성순보>의 창간사에 그 의지가 잘 나타나 있다.
“산천이 막혔고 문물과 제도가 달라서 덕이 베풀어지거나 힘이 이르지 않기 때문에 선왕들은 먼 곳까지 경락하는 데 마음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선박이 전 세계를 누비고 전선이 서양까지 연결되는 데다가 공법(公法)을 제정하여 국교를 수립하고 항만 포구를 축조하여 서로 교역하므로 남북극, 열대, 한대 할 것 없이 이웃 나라와 다름이 없으며, 사변(事變)과 물류가 온갖 형태로 나타나고 차복기용(車服器用)에 있어서도 기교가 일만 가지여서 세무(世務)에 마음을 둔 사람이라면 몰라서는 안될 것이다.”
신문을 발간했던 목적 중 으뜸가는 것은 외국의 보도를 번역하고 알리는 것이었다.
국제 뉴스가 집중 조명되는 사례는 우리 나라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영국의 최초 일간지인 는 외국 간행물 소식을 많이 번역해 실었다. 특히 창간호에는 소식을 입수해 올 예정인 외국 간행물의 목록까지 소개했다.
물론 <한성순보>, <한성주보>에 국제 뉴스가 무성했던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서구에서 시작되고 이웃 나라인 중국과 일본이 받아들인, 필요하지만 생소한 신문이라는 제도를 우리 나라에 이식하는 과정에서 인프라 구축이 안돼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소프트웨어는 중국 신문에 보도된 외국에 관한 기사들에 의존했던 것이었다. 따라서 <한성순보>는 거의 외국에 관한 기사로 가득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한성주보>부터 국내 뉴스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초기 언론매체들은 외국 보도에 인색하지가 않았다.
외국 보도에 인색하지 않은 경향은 해방 후 한국 전쟁을 거쳐 경제 발전, 민주화, 세계화를 외쳐댄 시기에도 크게 달라진 바가 없다. 다만 시대상을 반영하듯이 <한성순보>에는 중국, 월남, 프랑스, 영국 등에 관한 기사가 <한성주보>에는 일본, 중국, 미국, 러시아에 관한 기사가 많았다. 특히 일제시대에는 일본에 관한 기사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이런 나라들이 미국으로 대체되었다.
역사적으로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에 관한 기사가 많은 언론지상에 반영된 것을 보면 국제 뉴스는 강대국 및 인접한 나라를 선호하는 특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학자들은 국제 뉴스는 강대국으로부터 그렇지 않은 나라로의 수직적 유통 현상을 보인다고 하며, 따라서 언론에 나타난 세계 지도는 실제의 세계 지도와는 다르다고 비판한다.
이런 현상은 언론이 환경 감시의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며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앞으로도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같은 지역(Region)에 있는 나라들끼리의 협력이 모색되어져야 하기 때문에 아시아 지역 뉴스 등 우리와 비슷한 상황에 있는 나라들의 뉴스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이제 ‘잠’에서 깨어나 발전으로 향해가고 있는 아프리카에도 눈을 돌려야 한다.
나는 국제 뉴스가 지면이나 방송 뉴스 시간을 많이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많은 기자들이 정치부나 경제부에 배치되는 것을 환영하고 국제 뉴스 담당자가 되는 것을 이른바 ‘물먹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역사적으로 살펴봐도 앞에서 설명한 대로 국제 보도의 필요성은 언론을 활성화시켰으며, 지정학적으로 외국과의 관계가 중요한 우리 나라는 국제 뉴스에 민감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외국에 관한 보도 명칭은 초창기 신문의 ‘각국근사(各國近事)’로부터 시작하여 ‘외신 보도’ ‘국제 보도’ 그리고 심지어 ‘세계 뉴스’로 바뀌어 왔다. ‘외국’이라면 우리와 ‘다른’이란 뜻을 내포하고 있으며 ‘국제’는 국가간의 관계를 중요시함을 나타낸다. ‘세계’는 국경 개념이 퇴색한 가운데 단위 국가 보도보다는 여러 나라의 사건이나 현상을 하나로 묶어 보도하는 경향이 내포돼 있는 용어다.
콘텐츠의 변화
주목할 것은 시대에 따라 국제 보도의 콘텐츠가 달라져 가고 있는 세계적인 현상이다. 몇 년 전만 해도 국제 보도의 주제는 미·소(美·蘇) 대립관계 구도하에서 정치와 군사적인 측면에서의 갈등, 이란에서 엘살바도르에 이르기까지의 정변소식 그리고 핵전쟁의 위협이나 핵사찰 같은 것이 주를 이루었다. 뉴스 소스들은 주로 정부관리나 엘리트 집단에 속해 있는 공식 소식통이었다. 국제 뉴스 독자나 시청자들도 주로 엘리트들이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과거의 국제 보도는 정치와 군사적인 측면에서의 갈등 보도가 주를 이루었고, 뉴스 소스는 정부관리 같은 공식 소식통, 그리고 독자나 시청자들 역시 엘리트 계층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정보기술이 발달하고 데탕트 분위기가 짙어지고 있다. 정보화와 세계화로 국경이 사라져 가고 있으며 국제 교류와 왕래의 기회는 엘리트층만이 아니고 보통 사람들에게도 많이 열려 있다.
이에 따라 국제 뉴스도 변화하고 있다. 우선 경제 뉴스가 많아 졌다. 좀 씁쓸한 이야기이지만 사람들은 ‘사회적 동물’도, ‘정치적 동물’도 아니고 ‘경제적 동물’이 아닌가 착각할 정도로, ‘돈 버는 것’과 ‘경제’에 관심을 보인다. 국제 뉴스 중 경제 뉴스가 많아진 이유는 요즘 말하는 ‘세계화’의 물결이 영향을 미치는 분야는 기업이나 경제이기 때문이다. 세계 금융시장의 변동, 미국의 나스닥 주가의 등락, 미국연방준비은행의 금리 인하 같은 것이 국내 경제에 그대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국경을 넘어선 기업의 합병 또한 활발하다.
나는 이런 젊은이를 만나보았다. 한국 어머니와 독일 아버지를 둔 이 청년은 대학 1학년생으로 증권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아르바이트도 독일 대도시의 증권거래소에서 하고 있다. 그는 <월스트리트 저널> (Wall Street Journal)지의 경제 칼럼을 인터넷으로 애독한다. 여기서 얻은 정보로 앞으로 유망하다고 판단되는 주식을 독일에서 산다. 인터넷을 통해 실시간(real time)으로 얻은 정보이기 때문에 독일의 주가는 큰 변동이 없다. 그러나 다음 날, <월스트리트 저널>을 종이 신문으로 받아 본 미국에서는 이 유망주의 주가가 올라가기 마련이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그는 독일에서 산 주식을 인터넷으로 미국에 판다. 경제 외에 테크놀러지 및 종교 연예 음식 등 외국 문화에 관한 기사, 외국의 생활 이야기 등이 새로운 기사거리로 각광받고 있는 것은 세계적인 추세이다.
오랜 동안 국제 뉴스는 중요하지만 일반 사람들의 관심 밖이라고 생각되어 왔다. 그래서 미국 언론에서조차 독자나 시청자가 많아야 광고 수입을 올릴 수 있는 현실 속에서 국제 뉴스는 홀대를 받은 것이 사실이다. 이런 고정관념을 타파한 것이 CNN이다.
최근에는 국제 뉴스의 열독률이 날로 높아가고 있다는 견해가 나오고 있다. “사람들은 가족, 경제, 일하는 직장을 통해 다른 나라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고 <필라델피아 인콰이러>(Philadelphia Inquirer)지의 폴 너스바움 국제부장은 말한다. <필라델피아 인콰이러>지의 조사에 의하면 인기면에서 국제 뉴스는 독자들에게 지역 뉴스와 전국 뉴스 다음인 세 번째로 관심있는 주제로 부상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독자의 59%는 국제 뉴스에 대단한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한다. <보스턴 글로브> (Boston Globe)지의 여론 조사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다. 스포츠, 가정경제, 정치, 연예 뉴스를 앞지르고 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국제 뉴스는 독자들이나 시청자들에게 연관성이 있고 유용한 정보를 담고 있어야 하며, 그들이 동일시할 수 있는 내용을 담아야 한다. 또한 수용자가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작성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언론의 전통적인 문제제기 기능을 약화시켜서는 안된다. 언론은 중요한 국제 문제, 특히 우리와 관련된 국제 문제를 쟁점화시킬 책임이 무엇보다 앞선다. 언론은 대만 핵폐기물 문제나 종군위안부 문제같이 쟁점화되어야 할 국제 문제를 적극 취재, 보도해야 한다.
경제·정치·문화의 접목
요즘 <에코노미스트>(The Economist)라는 주간지를 열렬히 애독하며 이 주간지의 심층 보도에 대해 크게 평가 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그런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필자는 국제 보도로서 경제 뉴스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된다.
구 소련이 해체될 때 정치적 변화에 따른 경제적 변화를 실감했지만, 요즘은 세계 경제가 우리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생각이다. 미국연방준비은행의 금리 인상이나 인하는 우리의 원화 가치 그리고 수출입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미국의 나스닥 시장이 ‘기침’만 해도 한국 증시는 ‘감기 증세’를 보인다고까지 할 수 있으며, 그 영향은 선거에까지도 파급된다.
경제적 힘이 강한, 특히 구 소련의 몰락 후 정치적, 경제적으로 막강한 헤게모니를 행사하고 있는 미국도 다른 나라의 경제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국제 무역이 경제에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졌기 때문에 국제적 무역 마찰은 정책 입안자들을 곤혹스럽게 만든다고 한다.
이런 경제의 역동성 때문에 최근 미국 굴지의 언론들은 경제 뉴스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있다. 이는 비용 절감을 위해 외국에 파견하는 특파원 수를 삭감하는 추세와 반대되는 현상이다. 미국 언론들은 많은 경제 전문기자들을 해외에 파견하고 있으며, <다우존스>(Dow-Jones & Company)사는 세계 뉴스를 위한 투자를 늘리고 있다.
<워싱턴 포스트>지도 경제기사를 전담하는 기자들을 해외에 파견하고 있으며 <뉴욕 타임스>지는 국제금융 기사를 담당하는 동반구 경제부처를 신설했다. 유럽 국가들에 관해 쓸 때도 유럽의 한 국가별로 쓰는 것이 아니라 유럽을 공동 파이낸스 그룹으로 생각하고 기사를 쓴다고 한다. 이런 현상은 영국의 로이터통신이나 <파이낸셜 타임스>(Financial Times)지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실제로 <월스트리트 저널>(Wall Street Journal)지 1면에 국제기사가 올라가던 횟수는 얼마 전만 해도 일주일에 서너 번이었는데, 요즘은 매일 2, 3개 정도가 올라가고 있다. KBS는 국제 보도를 위해 보도 예산의 1/3 이상을 쓰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특파원에게 중요한 것은 전에는 외교문제에 대한 전문성이나 정치적 감각이었지만 앞으로는 경제에 대한 식견이 필요하고, 더불어 문화적 이해가 중요해질 것이다. 세계화가 진행될수록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특파원에게는 정치 경제 문화 등 이 모든 것을 통합적으로 볼 수 있는 자질이 요구된다.
얼마 전 지에 한국의 오이소박이 김치가 세계 10대 음식 리스트에 올랐다는 기사를 읽고 필자는 일반인들의 생활을 다룬 문화가 좋은 기사거리가 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이 기사에서는 오이소박이 김치가 배추김치와 달리 아삭아삭 씹는 맛과 향기롭게 톡 쏘는 맛이 일품이라고 우리의 입맛도 잘 반영하고 있다. 오이소박이 기사에는 교포 이해진씨 가족이 소개되었다. 문화에 관련된 국제 뉴스에 등장하는 인물이 평범한 시민임을 말해 준다.
문화와 문화를 연결해 주는 기사는 학자들이 언론의 중요 기능 중 하나라고 말하는 상관조정 기능을 수행한다. 환경감시, 문화전수, 오락 기능과 함께 상관조정 기능은 언론의 네 가지 고유 기능이라 일컬어진다. 상관조정 기능은 기관과 기관, 개인과 개인, 개인과 기관을 연결해 주고 상호연결 과정에서 발견되는 문제점을 조정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 국제 보도에서 상관조정 기능은 국가와 국가, 문화와 문화, 민족과 민족을 연결해 주는 것이다.
국제적 차원의 상관조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편견, 고정관념, 자민족 중심주의이다. 따라서 상관조정 기능은 다른 민족, 습관, 문화에 대한 고정관념, 편견, 자민족 중심주의를 탈피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고정관념·편견·자민족 중심주의
편견, 고정관념, 자민족 중심주의는 필요악이다. 이런 것들은 피할 수 없는 인간 속성이지만, 동시에 우리들은 이에서 탈피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인간이 갖는 편견이나 고정관념은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많은 정보를 경제적,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데 필요하다. 편견이나 고정관념을 완전히 없애려고 한다면 사람들은 스트레스로 인해 정신장애 현상까지 보일지 모른다. 편견과 고정관념은 애매모호하지 않고 명료한 생각을 갖도록 해주며 또한 자신을 방어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을 표현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인해 생긴다. 이런 심리학적 요인 외에 인구밀집도, 노동력, 자원부족 같은 사회문화적 요인도 편견을 갖는 데 일조를 한다. 사람들의 인지과정을 살펴보면 상대방을 유형화하여 해석하며 또 내 집단과 외 집단을 구별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도 편견이나 고정관념을 부추긴다. 이런 ‘필요악’적인 현상을 조성하는 데는 언론매체와 대중문화의 영향력도 크다(Baldwin & Hecht, 1995).
언론매체의 영향력이 다른 어느 것보다 강하다는 것은 한국 대학생들이 일본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이미지 설문조사에서도 나타난다. 일본에 대한 ‘가장 많은 정보’를 얻는 정보원으로서 28%가 신문이나 잡지, 21%가 텔레비전과 라디오라고 응답했다. ‘가장 많은’ 다음인, ‘많은 정보’를 얻는 정보원으로는 더 많은 응답자, 즉 67%가 신문, 77%가 텔레비전을 들었다(김무곤, 1997).
언론매체의 중요 정보원 역할은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확인된다. 국제문제 의견지도자(Opinion Leader)가 가지고 있는 외국에 대한 이미지는 텔레비전보다 신문의 영향력을 많이 받는 것 같다. 1990년대에 영국의 ‘Market and Opinion Research International(MORI)’이 한국언론재단의 의뢰로 유럽의 의견지도자들이 가지고 있는 한국 이미지를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유럽 각처에서 활동하는 국제문제 의견지도자 8백 60명 중 2/3가 일간지를 ‘중요 정보원’이라고 응답했다.
물론 요즘은 인터넷의 역할도 있겠지만 인터넷을 통해 외국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접근하려면 언어적 장벽을 극복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 따라서 우리의 인터넷세대들도 아마도 인쇄매체나 방송매체가 인터넷에 올리는 정보에 의존할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고정관념과 편견은 완전히 근절할 수 없는 인간의 속성이라고 할지라도, 문제는 이런 것들은 불완전하고 부정확하며 많은 경우 부정적이라는 데 있다. 이것들은 인간으로 하여금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하며 다른 문화권 사람들을 오해하고 그들의 행동이나 의도를 왜곡 해석하게 한다.
언론의 바람직한 역할은 편견, 고정관념, 자민족 중심주의를 타파하도록 도와주는 것인데, 반대로 언론이 이를 부추기는 역기능적인 모습을 자주 보인다. 이런 역기능은 사실을 다루는 기사보다는 드라마나 기타 오락 프로그램에서 더 심각하게 나타난다.
한국 주재 외국 대사관 공보관들은 한국 매체에 나타난 자국의 이미지가 잘못됐다고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러시아 공보관은 러시아를 ‘강도들과 도둑과 거지가 득실거리는 무서운 나라’로 보도된 것에 대해, 일본 공보관은 “일본 정부가 과거에 단 한 번도 일본 제국주의의 개입을 인정한 적이 없다”는 기사나 “일본 대사관저는 ‘무허가 건물’인 셈이다”는 표현은 사실과 다르다고 항변한다. 물론 외국 언론에 나타난 한국에 대한 이미지에도 비슷한 문제가 나타난다.
필자는 1995년 10월 덴마크에서 열린 제 3회 한국-EU(European Union) 언론 세미나에서 남북한간에 편지 왕래도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 대해 외국 언론이 ‘이상한 나라’라고 단순하게 묘사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언론은 잘못된 편견이나 고정관념을 좀더 정확하게, 유연하게 만드는 조정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 언론인들이 주지해야 할 것은 전문성이나 경험이 깊어질수록 사람들은 새로운 시각을 갖기보다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에 사로잡히기 쉽다는 사실이다.
한국과 EU 언론 세미나에서 유럽측 발표자는 언론인이나 언론 지망생들을 위한 초국가적 교육 프로그램을 소개했다. 이 프로그램은 고정관념 타파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EU의 각국에서 온 학생들은 유럽 3개국으로부터 온 교수들로부터 지도를 받는다. 학생들이 작성한 다른 나라에 대한 기사는 동료 학생들과 교수들로부터 비평을 받는데 이 과정에서 고정관념이 많이 논의된다. 1997년 세미나에서 6년간 운영된 프로그램이라고 소개되었으니 아마 지금쯤은 10년의 역사를 자랑할 것이다. EU측 발표를 맡았던 덴마크의 한스 헨릭 홈(Hans-Henrik Holm) 교수에 의하면 EU의 초국가적 언론 교육 프로그램의 결과는 아주 좋다고 했다.
그는 기자들은 좀더 융통성 있는 세계관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그는 시청자나 독자가 아직은 국가관을 갖고 있으며, 또한 고정관념을 가지는 것이 편리하기 때문에 고정관념을 타파하자는 메시지는 인기가 있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했다. 시청자나 독자도 이런 메시지를 원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언론인들은 이런 어려운 점을 극복하는 선구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발표 요지였다.
문화적응 ‘도우미’
국제 보도와 관련해 또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언론은 사람들의 타문화 적응능력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은 정보, 사람, 물자가 ‘국경 없이’ 넘나드는 시대가 되어 해외에 거주하는 한국인들과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이 증가하고 있다. 한국에 거주하게 된 사람들로 하여금 문화적응을 잘하도록 도와주는 것 또한 언론의 상관조정 기능의 하나다.
문화적응 과정은 개인 커뮤니케이션과 매스 커뮤니케이션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커뮤니케이션 과정이다. 언론은 문화와 언어학습을 도와줄 수 있다. 해외에 파견 근무를 하게 된 사람들은 주재국 사람들과 얼굴을 맞대고 직접 커뮤니케이션을 수행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무엇보다 주재국 사람들과의 접근이 용이하지 않고 만나면 긴장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이 초창기 단계에서는 매스 커뮤니케이션과의 ‘준 사회상호작용’을 통해 주재국 문화에 대한 ‘대리적 학습’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Kim Young Y., 1995)
영상 매체인 텔레비전은 대리적 학습 기능을 수행한다는 연구가 많이 나왔지만 신문이 이런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가? 필자는 그 가능성을 다음과 같은 이유로 긍정적으로 본다.
첫째, 외국에서 한국에 파견 근무를 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인 한국말과 글을 배우고 오며, 한국에 부임해서도 신문을 읽으며 한국어와 문화를 익히기 때문이다.
둘째, 국내 영자신문의 역할이 몫을 할 수 있다.
언론은 또한 한국에 오는 외국인뿐 아니라 해외에 나가는 한국인들의 타문화 적응을 도와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초창기 해외생활에는 자국의 매스컴이 제공하는 정보와 정서적 도움이 문화적응을 촉진하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 사람들의 타문화 적응능력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기사로는 외국인들의 눈으로 본 한국문화와 한국인들의 해외 경험을 통한 외국문화를 들 수 있다. 그러나 문화적응은 다른 나라의 문화에 대한 지식을 습득한다든지 또는 우리 문화의 다른 점을 이해한다는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만이 아니다. 문화적응 각 단계에서 사람들은 불확실한 상황에서 오는 불안감 좌절 실수 등을 경험한 다음 이중문화를 수용하게 된다. 이런 과정에 대해서도 언론은 관심을 보여야 한다.
바른 이름 붙이기
제한된 지면이나 제한된 시간에, 신속한 보도를 생명으로 하는 기자는 다른 나라나 다른 민족에 관해 표현할 때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무엇보다 멀리 떨어진 다른 나라의 복잡한 내부 속사정이나 역사를 기자들이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언어 표현의 문제점을 언어와 실재(Reality)와의 관계를 연구하는 일반 의미론자들(General Semantists)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첫째, 실제는 복잡한데 언어표현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예를 들면, 아시아에는 다양한 민족들이 살고 있으며 아시아 각국의 문화는 서로 다른 점이 많아도 언론에서는 한두 마디로 아시아의 특징을 언급하는 문제점이 나타난다. 더 나아가 한국, 일본, 미국, 아프리카 등 모든 국가엔 다양한 개성들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언론에서는 한국 국민은 어떻고, 미국 국민은 어떻고 등 한두 마디로 표현하고 있다.
한마디로 지나치게 일반화된 표현들이 사람들의 언어생활, 특히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언론에 난무한다. 이런 표현에는 고정관념이 반영되기 쉬우며, 또한 이런 표현들을 통해 사람들의 고정관념이 강화된다.
일반 의미론자들이 둘째로 지적하는 문제점은 실제는 변화무쌍한데 언어 표현은 정체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소련은 이미 해체되고 러시아로 바뀌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수십 년간 사용해 온 소련이란 표현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셋째로, 언어 사용에는 무의식적인 자기 투영이 있다는 점을 일반 의미론자들은 강조한다. 예를 들어, 어떤 국가가 발전한 국가인가 아닌가 하는 평가는 무의식적으로 자국의 발전 수준이 기준의 잣대가 된다는 것이다. 북한 사람들이 한국에 와 보면 ‘잘사는 나라’라고 하겠지만, 삶의 질이 높은 선진국 사람들은 또 다른 평가를 내릴 수 있다. 일반 의미론자들은 무의식적인 자기 투영을 지적하지만, 홍보 담당자들이나 정책 입안자나 정책 수행자는 의식적으로 자국의 가치관이나 자신이 속해 있는 단체의 가치관을 언어 표현에 반영한다. 깨어 있지 않으면 언론은 이를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다.
언론 자체도 다른 나라와 우리 나라의 제도가 다른 것을 유념하지 않고 외국의 상황을 우리의 제도에 비추어 보도하는 경우가 있다. 갈등이 일어나고 있는 지역을 보도하는 외국 보도를 보면 ‘Invasion’ 또는 ‘Advancement’란 표현이 헛갈리게 나올 때가 있는데 이는 자국의 견해가 반영된 것이다.
일반 의미론자들이 지적하는 네 번째 문제점은 실제는 구체적인 데 비해 언어 표현은 추상적이라는 것이다. 언론 자유라는 표현도 정부 통제로부터의 자유, 자본으로부터의 자유, 또는 굶주림으로부터의 자유 등 실제적으로는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언론 보도의 예로 살펴보자. 보스니아 전쟁이 발발하자 외신들은 이 전쟁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그리고 회교도간의 갈등으로 보도했다. 그리고 보스니아 정부를 회교 정부, 보스니아 군을 회교 군으로 표현했다. 그런데 요즘은 ‘회교도가 주도하는 정부’나 ‘회교도가 주도하는 군대’라고 표현한다. 영국의 BBC 방송이 이런 표현의 변화를 갖고 오는데 주된 역할을 한 것 같다. 영국의 BBC 방송은 보스니아 국가와 군대가 여러 인종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한 후, ‘회교도가 주도하는 정부(Muslim-led Government)’나 ‘회교도가 주도하는 군(Muslim-led Army)’라고 표현을 바꾸었다고 한다.
미국의 방송 프로그램에 출현한 영국 BBC방송의 캐시 젠킨스 (Cathy Jenkins) 기자는 “사라예보에는 회교도들만이 사는 것이 아니고,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들이 살고 있으며, 이들은 다민족 국가를 위해 전쟁에 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표현을 바꾼 이유를 설명했다.
전 주미 요르단 대사는 미국 신문에 이런 투고를 한 적이 있다. “왜 테러리스트하면 모슬렘과 아랍이 꼭 따라 다니는가? 절도범이 흑인이었다고 해서, 또 테러를 한 사람이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흑인 절도범’이나 ‘기독교 테러리스트’라고 부르는 언론이 있는가?” 그러나 모슬렘이나 아랍인이 테러를 하면 ‘모슬렘 테러리스트’ ‘아랍 테러리스트’라고 관행적으로 붙이는 것은 부당하다는 항변이었다.
우리 나라의 언론 보도와 관련해 러시아나 일본 외교관들은 자국에 대한 표현에 대해 강력한 불만을 표시하곤 한다. 한국 주재 러시아 공보관은 한국의 언론이 독립국이 된 구 소비에트 공화국 연방의 한 공화국을 러시아 연방의 한 지방으로 오인하는가 하면 러시아 연방 내의 자치 공화국을 독립국으로 서술하는 경우가 있다고 지적한다. 러시아 연방과 구 소비에트연방을 혼동한 것이다. 1991년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데모와 남북이 분단된 후 북한에 있는 친척들과 편지를 교환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해 오스트리아의 한 언론이 ‘한국은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나라’라고 보도한 것 역시 한반도의 역사적 배경을 잘 모르거나 무시한, 무책임한 보도의 한 예다.
일반 의미론의 선구자격인 알프레드 코집스키는 “우리는 언어 구조가 우리에게 행사하는 강력한 힘을 알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언어에 의해 커다란 인상을 받고 자동적으로 우리 주변의 세계에 반응한다”라고 강조하며 바른 표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특히 독자들은 직접 가보지도 않은 다른 나라에 대한 이미지나 지식을 언론 보도를 통해 갖게 된다.
바른 이름을 붙인다는 것이 언론인들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다. 신속한 보도를 해야 할 필요성도 그 이유의 하나고, 또 다른 이유는 복잡한 표현이나 설명을 독자들이 선호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사를 쓸 때나 발표, 브리핑을 할 때 중요한 원칙으로 흔히 ‘KISS’ 원칙을 든다. 여기서 말하는 KISS는 입맞춤이 아니라 ‘Keep It Simple and Short’의 약자이다. 즉 가능하면 단순하고 짧게 표현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언론인들은 항상 자신의 표현이 지나치게 단순한 것은 아닌가, 어느 특정 집단의 시각을 대변하는 것이 아닌가, 자신의 가치관을 반영한 것은 아닌가, 변화를 담아내지 못하고 구태의연한 것은 아닌가 등을 점검하는 트인 마음을 갖고 바른 이름을 붙이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야기’식 보도
다른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나 다른 나라의 생활 방식에 관해 기사를 쓴다는 것은 기자에게는 부담스러운 일이다. 미지의 세계인 다른 나라에 대한 기사로, 그곳에 가보지도 않고 특별한 관심도 가지고 있지 않은 독자들이나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아는 것만큼 읽고 본다”고 할 수 있다. 커뮤니케이션 이론 중 선택적 이론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수용자들이 자신들의 가치관, 기대, 기분, 기존 태도와 부합되는 메시지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메시지가 유용하거나 새로운 것이면 예외가 될 수 있다.
독자나 시청자들은 새로운 것을 추구하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새로운 것’은 ‘친숙한 것’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News는 그 단어가 내포하는 ‘새로운 것’(물론 News는 North East West South, 즉 동서남북 사방의 것을 의미한다는 견해도 있다)도 중요하지만 뉴스는 또한 독자들에게 친숙해야 하는 면도 있다. 뉴스는 ‘새로운 가운데 친숙’해야 하고 ‘친숙한 가운데 새로워야’ 한다.
다른 나라의 문화나 제도에 대해 보도하는 기자들이, 다른 분야를 담당하는 기자들도 마찬가지이지만, 기사 주제 선택에 있어서 제일 먼저 고려하는 것은 독자나 시청자들에게 중요하고, 그들의 관심과 흥미를 끌 만한 것인가이다. 수용자들에게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주제를 선택한 후, 독자들이 연관성이 있다거나 유용성이 있다고 느끼는 면을 찾아 여기에 갈고리를 끼고 기사를 쓰는 것이 좋다. 이렇게 내용면에서는 연관성, 유용성이 있는 부분을 퍼올리면서 스타일로는 이야기식 보도를 하는 것도 추천할 만하다.
전통적인 기사 작성 양식은 기사 내용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을 먼저 놓고 덜 중요한 내용을 다음에 놓는 역 피라미드형이 대부분이다. 반면 기획기사나 특집기사의 경우, 연대기식 기사 작성이라고 해서 사건을 오래된 순서대로 쓰거나, 아니면 요약된 부분을 제일 앞에 놓고 그 다음 사건의 과정을 연대기식으로 풀어 나가는 혼합 방식이 있다. 인물이나 사례를 중점 부각시켜 보도하는 방식도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국제 보도의 스트레이트 기사가 아닌 특집이나 칼럼기사에는 시간, 공간을 초월하여 인류가 즐겨왔던 ‘이야기’ 형식을 원용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유럽에서 신문이 생겨나기 전에는 이야기꾼들이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새로운 경험이나 자신이 들은 새로운 이야기를 뉴스같이 전하고 다녔다. <하멜 표류기>에 보면 당시 우리 나라 절의 스님들은 하멜 일행의 본국인 네덜란드나 다른 나라의 이야기를 밤새도록 듣기 좋아했다고 적혀 있다.
‘이야기식’ 보도란 커뮤니케이션 수용자들에게 다가가는 가장 좋은 방법인 이야기를 매스 미디어 내용에 맞게 현대화한 것이다. 복잡한 환경에 사는 현대 독자들에게, 이야기식 보도는 생소한 다른 나라의 문화나 사건에 대해 흥미를 느끼게 할 수 있다.
‘이야기식’ 보도를 위해서는 보도 형식이나 테크닉에 못지 않게 기자들의 태도가 중요하다. 기자들은 독자들이나 시청자들의 참여를 중요시한다. 여기서 말하는 참여란 단순히 그들의 기사를 읽고 듣는 것이 아니다. 기자들은 자신들이 진리를 소유하고 있으며 이를 전달해 주는 것이 자신들의 몫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독자들과 시청자들과 이야기를 나눈다는 생각을 갖고 기사를 쓸 것을 의미한다.
이야기식 보도의 특징은 사실 못지 않게 주제나 배경을 중시한다. 역 피라미드형 기사에서 중시되었던 사건, 뉴스 주인공들의 행위는 ‘이야기’식 보도에서는 약간 뒤로 물러나고 이런 사실적인 사건 및 행위에 대한 생각, 느낌, 경험, 상황들이 부각된다. 따라서 사람들은 기사를 통해 상황을 느끼고, 냄새를 맡고, 사물을 보게 된다. 또 ‘이야기식’ 보도를 통해 언론인들은 다양한 시각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려 주고 언론인들이 가지고 있는 시각은 그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도 제시할 수 있다. 그리고 구체적인 묘사와 분석을 기사에 포함시킨다. 이야기식 보도의 또 다른 특징은 정보 제공과 함께 오락적인 요소를 가미하는 데 있다(Anderson, Rob., et al, 1996).
이런 이야기식 보도를 고려해야 할 이유의 하나는 전쟁, 정치, 외교, 군사 등 엘리트들의 관심 분야에만 편중되어 있었던 과거 냉전시대의 국제 보도 관행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기자들은 한 시민으로서 외국을 방문, 여행하며 느꼈던 것을 기사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다채널, 다매체의 정보화 사회에서는 정보가 폭주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에 기반을 둔 정보 제공만으로는 독자들이나 시청자들에게 커다란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이런 방문 기사에는 독자들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나 선입견에 초점을 맞추고 이야기를 풀어 가면 독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터키를 방문해서는 정말 터키에는 ‘터키탕’이 존재하는가? 네덜란드를 방문해서는 ‘네덜란드는 정말 튤립과 풍차의 나라인가’를 탐구하는 것으로 시작해 자연스럽게 그곳 국민들의 역사 정치 경제 문화상, 그리고 한국과 터키, 네덜란드와의 관계 조명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독일을 방문해서는 한국의 대학생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아르바이트’라는 단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아보는 것도 독일과 우리의 문화를 비교 대조해 보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다른 나라와 우리의 생활 습관이나 문화의 다른 점이나 같은 점을 연결고리로 하여 기사를 쓰는 것은 전통적인 뉴스가치인 ‘근접성(Proximity)’을 국제화 시대에 맞게 ‘연관성(Relevancy)’으로 각도를 바꾸는 것이다. 흔히들 뉴스거리가 될 주제는 시의성, 흥미성, 중요성, 저명성, 근접성, 갈등성의 가치를 지닌다고 한다. 이 중 근접성이 국제 보도에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우리와 심리적으로 가깝게 느끼거나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의 기사가 우리 언론에 등장하는 경향이나 국제적 사건이 터졌을 때 우리 나라에 미치는 영향을 점검하는 것은 다 근접성 때문이다.
나는 1988년 올림픽 경기를 즈음해서 <로스앤젤레스 타임스>(Los Angeles Times)지에 실린 한국의 사철탕 집에 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스코트 오슬러 기자는 한국 국민의 사철탕 먹는 관습을 인도에서 신성시하는 소고기를 미국인이 즐겨 먹는 것, 미국에서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밤비’ 고기를 먹는 것과 비교하고 한국에서는 ‘애견’을 잡아 먹는 것이 아니라며 미국인들이 개고기 먹는 관습에 대해 잘못된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기자는, 특파원들은 ‘독자들의 눈, 귀, 그리고 입맛’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미국인들이 혐오감을 가지고 있는 사철탕 집을 방문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세계화 시대에는 이런 보도 시각을 가진 기자와 기사가 늘어나야 한다.
통합 보도 양식
요즘 미국 학계 일부에서 새로운 보도 태도로 논의되고 있는 에큐메니컬 저널리즘(Ecumenical Journalism)이 21세기의 저널리즘에 시사하는 바가 크기 때문에 이를 간략히 소개하고 싶다. 이에 관해서는 1996년에 미국에서 앤더슨 외 공저로 출판된 ‘저널리즘과의 대화(The Conversation of Journalism)’란 책에 소개되어 있다.
에큐메니즘(Ecumenism)은 1970년대 카톨릭계를 중심으로 일어난 여러 다른 교파들간의 협조와 이해를 증진시키는 교회통합 운동을 말한다. 일부 미국 언론학자들은 이 운동이 범세계성과 대화를 통해서 이해와 협조를 증진할 것을 강조하는 것을 높이 사 에큐메니컬(Ecumenical)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에큐메니컬 저널리즘은 뉴스를 해석하고 분석함에 있어서 다양한 목소리와 시각을 참조로 하고, 정보(Information) 제공보다는, 대화를 촉진하는 등 커뮤니케이션 행위 자체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할 것을 주장한다.
우리 말로 번역하면 통합보도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언론인들에게 국민의 알권리를 충족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기대되었던 종래의 정보 제공자나 해석자의 역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의견이나 시각을 청취하고 대화를 촉진하는 역할이 강조된다.
에큐메니컬 저널리즘 주창자들은 언론은 사람들의 비슷한 점과 다른 점에 대한 대화를 촉진시켜야 하며 따라서 다문화적이며 다학제적(多學際的·Multi-disciplinary)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에큐메니컬 저널리즘을 실천하기 위해서 언론인들은 먼저 세상에는 우세적인 집단이 있음을 주지하고 우세적인 집단과 다른 시각에서도 문제를 보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강조된다.
다문화적인 접근 방법은 언론이 단지 다른 문화나 인종에 대한 기사를 실리는 것에 안주하는 것을 경계한다. 구체적으로 언론은 다른 문화나 민족에 대해 갖고 있는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기사와 논평을 취급해야 하며, 다른 점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고, 문화적 유산을 존중하며, 사건과 사안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제공해야 함을 촉구한다. 그래서 독자들로 하여금 다른 문화권 사람들과 그들 생활의 특이한 점에 대해 효율적으로 커뮤니케이트(Communicate)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학제적인 접근 방법은 언론이 ‘인상적’인 자료에 근거해 기사를 쓰는 것에서 탈피하여 역사학자, 심리학자, 사회학자, 인류학자, 고고학자들의 방법론을 기사를 쓰는 데 적용할 것을 촉구한다. 언론에게는 문제를 제기하고 사회 내에 창의적인 토론과 생각을 이끌어내야 함이 기대된다.
다학제적인 접근 방법은 당면 문제에 대한 즉각적인 해답이 언제나 존재한다는 생각은 위험하다는 것을 언론이 인지하고 인간의 삶을 정치, 경제에만 초점을 맞추기보다 좀더 광범위한 문화와 생태학적인 측면에서 볼 것도 강조된다.(Anderson, Rob, et al., 1996) 한마디로 에큐메니컬 리포팅(Ecumenical Reporting)은 근시안적인 태도에서 탈피하자는 것이다.
인권 보도
인권 보도는 국제 보도의 중요한 한 장르이다. 탈냉전시대를 맞이하여 갈등성이나 부정성을 뉴스 가치로 내재하고 있는 국제 관계 기사가 감소하고 있으며, 전쟁이나 위기에 관한 기사보다는 경제나 문화에 관한 토픽이 부각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인권 보도는 여전히 중요한 뉴스이다.
전쟁이나 갈등이 존재하는 곳에는 언제든지 인권 문제가 국제 문제로 부각되기 마련인데 전쟁이나 갈등이 없는 세계는 인류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인권보도의 비중을 가늠할 수 있다. 인권 보도가 전쟁이나 갈등 긴장을 따라 다니는 것은 전쟁에 포로로 잡히거나 갈등 상황에서 짓밟히기 쉬운 개인들의 권리를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관점 때문이다. 또한 인권이 침해된 실상은 큰 호소력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 지도자나 언론인들에게는 중요한 문제로 보도해야 할 뉴스거리다. 2차 세계대전 후 설립된 국제연합(UN)은 인권 문제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으며, 1948년에 UN이 인권선언을 공포한 후 더욱 그렇다.
미국의 카터(Jimmy Carter) 행정부 때에는 한국 재야 인사들의 인권에 관한 문제가 세계 언론에 보도된 적이 상당히 있었다. 당시 한·미 관계가 긴장으로 치달았는데 미국의 카터 대통령은 한국 정부의 인권 탄압 완화를 요구했고 이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은 국내 문제라고 주장했다.
요즘은 북한의 인권 문제가 세계적 관심사가 되고 있다. 한국 언론도 중국에서 떠돌고 있는 탈북자, 연변으로 찾아간 한국 친척들을 만나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는 북한 주민들, 시베리아 벌목장에서 일하는 북한 벌목공의 인권에 대해 크게 보도하고 있다.
인권 보도는 당사국간에 논쟁을 불러 일으킨다. 중국과 미국의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 중국 반체제 인물들의 인권 문제가 언론에 거론되면 중국은 미국 흑인들의 인권 문제를 제기한다. 한 국가가 다른 나라의 인권을 거론하면 상대방은 내정간섭이라고 주장한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카터 행정부와 박정희 대통령 재임시에도 그러했다.
언론의 중요한 효과 중 하나는 의제 설정 기능이라는 데 매스컴 학자나 언론 종사자들은 대체로 동의한다. 언론이 독자들에게 어떤 의제에 대해 특정한 생각을 하도록 설득하는 기능은 약해도, 적어도 그 의제의 중요성은 인식시킨다는 것이다. 의제 설정을 누가 주도하는가에 대해서는 의제의 성격에 따라 뉴스 소스(News Source) 기자 독자와 시청자라고도 한다. 물가 문제 같은 민생문제의 의제 설정에는 독자와 시청자의 역할, 그리고 핵 문제 같은 의제 설정에는 정부의 역할이 크다. 많은 경우, 미디어 의제는 뉴스 소스 언론인 독자들의 상호 작용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미국의 인권 보도를 분석한 학자들은 인권 보도 분야에서는 뉴스 소스, 특히 정부의 의제 설정 역할이 크다고 말한다. 인권 보도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국제 보도의 의제 설정에는 정부의 역할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외교나 국제 문제는 기자나 일반 독자와 시청자가 직접 경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AP통신 특파원으로 남미의 인권 보도를 많이 했던 로젠블룸(M. Rosenblum) 기자는 자신의 인권 보도 취재 경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는 인권 보도는 1970년대 중반에 한 보도 장르로써 자리매김을 했다고 회고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재 특파원으로 나갔던 그는 그곳 미국 대사관의 법무 담당자로 나와 있던 미 연방수사국 요원과 점심을 하면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는다. 아르헨티나의 정보 요원들이 반정부 게릴라 활동을 벌이고 있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들을 붙잡아 헬리콥터에서 바다로 떨어뜨려 익사시킨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을 산채로 바다에 던지는데 그 이유는 바다에 떨어질 때 숨을 쉬면서 들여 마신 물로 인해 마치 돌을 묶어 던지면 그렇듯이 가라앉기 때문이라는 설명이었다.
점심이 끝난 후, 로젠블룸 기자는 이 신뢰할 만한 1차 취재원으로부터 얻은 정보의 진위를 검증하는 작업에 나섰다. 다른 뉴스 소스와 접촉한 결과 그 놀랄 만한 정보가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했지만 아무도 기사에 자신의 이름이 인용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양쪽 입장을 다 취재해야 하는 객관적 보도의 관행으로 그는 아르헨티나 정부 관리들을 대상으로 자신이 얻은 정보의 진위를 검증해야 했다. 따라서 기사에는 어쩔 수 없이 아르헨티나 정부 관리들의 ‘상투적인 부인’ 등이 포함되기 때문에 오로지 의식 있는 독자들만이 행간을 읽으면서 진실을 알 수 있게 쓸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경찰이나 군부의 잔혹 행위에 대해 제 3자가 막연하게 설명하고 아르헨티나 정부는 그런 소문에 당혹감을 감출 수 없다고 비난하는 스타일이었다. 로젠블룸에 의하면, 이런 취재 보도 과정 때문에 아르헨티나 군사 정권은 상당 기간 동안 이미지에 커다란 손상을 입지 않았다고 분석한다.
취재 보도 과정에서 기자들이 당면한 문제는 이야기의 진위를 검증하고 소스를 밝히는 일이었다. 심증만 있다고 기사를 쓸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심증으로 기사를 쓰면 오보 천국이 될 것이다. 뉴스 소스로부터 얻은 정보의 진실성을 인용과 구체적 사실로 뒷받침해야 하는데 인권보도의 경우 이것은 어려운 작업이다. 고문이나 학살에 직접 개입했던 사람들은 기자들에게 진실을 털어놓지 않기 때문에 뉴스 소스에서 배제되기 마련이다. 고문 당한 희생자들이나 가족들도 좋은 뉴스 소스인데 기자들은 그들의 진술이 진실인가, 거짓인가, 또는 과장된 것인가를 구별하기 쉽지 않다. 또한 인권 침해에 대한 정보에 접근이 가능한 사람들은 진실을 밝히려고 하다가 자칫 잘못하면 자신들의 신분이나 목숨이 위험하기 때문에 혹시 입을 열어도 익명 처리를 요구한다. 그러나 익명 보도는 기사의 신뢰성을 떨어뜨린다.
뉴스 소스들만이 위협을 느끼는 것이 아니고 기자들에게도 위협이 가해진다. 인권 취재를 하는 과정에서 기자들은 “그런 사실을 추적하면 위험하다”라는 경고를 받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기자들은 근무지를 떠난 후 기사화하기도 한다(Cassara, 1997).
북한의 인권상황에 대해선 탈북자 북한 방문자 등 그래도 뉴스 소스가 있다. 그러나 북한이 아닌 다른 나라의 인권에 관한 국제 보도를 할 때는 서구 언론기관의 보도 내용을 기반으로 할 때가 많다. 따라서 이 국제 보도가 어떤 시각, 어떤 기준에서 나왔는지 그 의미를 독자에게 전달하는데 고심할 때가 많다.
대부분의 정부가 그렇겠지만 미국이 인권 문제를 다루는 과정을 살펴보면 윤리적 차원과 전략적 차원이 고려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윤리적 도덕적 측면에서 인권은 보호되어야 한다는 순수한 인도주의적 차원과, 국제 정치적 영향력과 지역 안정을 고려해야 한다는 이중 잣대가 적용되고 있음을 본다.
앞에서 말했듯이 미국의 카터 행정부 시절에는 인권 보도가 활발했다. 카터 행정부는 인권 문제를 외교 정책의 중요 기조로 삼았다. 대통령 선거 운동 때 카터는 이를 강조했다. 그의 취임 연설에서도 인권 문제는 미국 외교 정책의 ‘정신(Soul)’이라고까지 강조됐다. 인권 침해를 감소시키는 대응책으로 카터 행정부는 군사적 지원, 경제적 지원, 다국적 개발 은행의 차관등을 지렛대로 사용했으며 마지막으로 민간 차원의 경제 제재를 취했다.
카터 행정부 초기에는 구 소련에 거주하고 있는 유대인이나 반체제 인사들의 인권이 주된 관심사였다. 그러나 소련의 지도자들은 자국의 인권 문제에 대해 미국이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것을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소련과의 관계를 위해서, 미국은 소련에 거주하고 있는 유대인이나 반체제 인사를 위한 구명 활동을 은밀하게 진행시켰다. 인권 정책이 소련과의 전략적 관계를 손상시킬 가능성이 높은 것을 고려했기 때문이었다. 반면, 전략적 이해 관계가 비교적 낮은 남미 국가에 대해서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면에서 인권 문제를 거론했다.
레이건(Ronald Reagan) 행정부 때에는 공산주의 국가와 비공산주의 국가에 대한 인권 문제를 다르게 취급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칠레, 아르헨티나, 과테말라 같은 우방의 독재체제엔 관대했으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남미 국가에 대해서는 인권 문제 때문에 원조를 삭감하지도 않았다. 미국이 인권과 연계하여 우방국에 대한 지원을 삭감하면, 그 나라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도 감소된다는 사실을 고려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Cassara, C., 1997)
외신으로 들어온 인권보도에 대한 행간을 읽을 줄 알아야만 우리가 직접 가서 취재하지 않은 나라의 인권에 대해 비교적 진실에 가깝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언론은 국제 보도 뉴스소스
외국에 나가 있는 한국 특파원들의 하루는 임지의 중요 일간지를 읽는 것으로 시작해서 야밤의 뉴스 방송을 청취하는 것으로 끝난다. 임지의 언론이 보도한 한국 관계, 지역 뉴스 및 현지 뉴스에 촉각을 세우고 있다. 현지 언론이 국제 보도의 중요한 취재원이 되는 것이다. 물론 임지에 근무하고 있는 정부 관리나 기업 간부 또는 자국에서 파견된 주재원 등 다양한 뉴스 소스가 있지만, 언론은 다른 어느 것보다 중요한 취재원이다. 이런 취재 관행은 뉴스 차용식 보도를 하거나 또는 그곳 언론의 시각에 따르게 되는 역작용을 불러 일으키지만 특파원 한 두 사람이 광대한 지역과 다양한 사안을 다루어야 하는 현실에서는 높은 효율성 때문에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외국 언론들이 한국에 관한 보도를 하면서 한국 신문이나 방송 기사를 인용하는 경우가 많다. 한 예로 1996년에 일어난 북한의 성혜림 서방잠적 사건을 보도한 지의 기사를 분석해 본다. 첫 문장은 ‘…According to South Korean news reports’로 끝나는 반면 마지막 문장은 ‘Yonhap said’로 시작한다. 쉽게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이 기사는 ‘한국 신문 보도에 의하면’으로 시작해서 ‘연합통신은 보도했다’로 끝난 셈이다. 총 12단락으로 구성된 비교적 짧은 이 기사에 등장하는 인용 출처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연합통신>이다. 언론이 아닌 인용 출처는 한국의 통일원 당국 외무부 정보기관 헤이그 주재 한국 대사관, 네덜란드이다.
현지 언론을 취재원으로 삼는 경향은 한국 주재 외국 특파원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확인되었다. 외국 특파원들 1백 67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 주요 취재원이 한국 신문과 방송인 것으로 나타났다. 복수 응답에서 37.1%가 언론, 24.4%가 정부 관계자, 16.9%가 보도 자료라고 답변했다.(송은하 외, 1995) 외국 특파원들은 다른 어느 취재원보다 현지 언론에서 정보를 얻고 있다.
특파원들에게는 방송보다 신문이나 잡지가 더 중요한 뉴스 소스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신문이나 잡지에 실린 기사가 방송 뉴스보다 더 심층적일 뿐 아니라 외국 특파원들이 방송 뉴스를 정확히 이해, 기사에 인용하기는 언어 장벽과 방송 뉴스의 찰나성과 관련, 어렵기 때문이다. 나도 워싱턴 특파원으로 있을 때, ABC 방송의 같은 프로그램의 뉴스를 경청하지만 주로 인용 대상으로 삼은 것은 <뉴욕 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월 스트리트 저널> <타임> <뉴스위크>지 등 신문과 잡지였다.
외국 언론에 한국 언론이 취재원으로 등장하는 것은 한국 관련 기사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환경 안보 경제 등 많은 문제가 상호의존적인 오늘날 지역 뉴스 등을 통해 한국 언론이나 언론인의 시각이 반영될 수 있는 폭이 넓어졌다. 내 경험을 예로 들어보면, 지는 중국과 대만간의 갈등을 보도하면서 ,갈등의 여파가 한반도 안보에 미치는 영향을 다룬 <문화일보>에 실린 필자 칼럼의 몇 단락을 인용했다.
몽고의 변화를 울란바토르 현지에서 보고 쓴 내 칼럼을 몽고의 유력지가 그대로 번역, 게재한 것을 받아 본 적도 있다. 또한 서방의 방송 매체에서도 나의 몇 마디 코멘트를 녹음해 방송한 경우도 있다. 이렇게 취재 일선에서 같이 활동하면서 기자들은 다른 나라 기자들의 시각을 접하기도 한다.
우리 언론의 보도가 외국 매체에 인용, 보도되는 기회가 확장된 것은 서구 언론들이 ‘Regional Stories’, 이른바 지역 보도라고 해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취재한 같은 주제의 기사들을 한 묶음으로 보도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국제 문제를 다룰 때, 한 국가만 다루는 단편적인 보도는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개별 국가의 단일 사건, 행사 사안에 대한 국제 보도로는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Regional Stories’를 통해 여러 국가에서 일어난 유사한 또는 상이한 사건 정책 반응을 한 묶음으로 보도해서 동향이나 흐름을 알리는 보도 양식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이렇게 언론이 곧 바로 뉴스 소스가 되는 상황에서는 외국 언론에 한국에 관한 중요한 의제가 누락되거나 잘못된 보도가 나가면, 그 책임은 한국 언론에도 있다. 리처드 워커(Richard Walker) 전 주한 미국대사는 5공 정권의 인권 탄압과 권위주의적 통치 스타일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고 미국 언론으로부터 맹렬한 비난을 받았는데, 이는 한국 언론이 자신의 발언을 보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적도 있다. <한국일보>에 실린 회고록에서 그는 “5공 당시 한국 정부에 대한 보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정책을 요구하는 나의 메시지를 한국 언론이 대부분 무시한 반면 한·미 협력과 전두환 정권을 지지하는 발언을 할 때는 대서특필하곤 했다”고 불만을 털어놓았다.(한국일보, 1997) 워커 대사의 항변은 ‘오보란 잘못된 보도만이 아니고 보도할 것을 보도하지 않는 것도 포함한다’는 학자들의 주장을 새삼 생각하게 한다.
1997년 괌에서 일어난 대한항공(KAL)기 참사 때도 한국 언론이 국제 뉴스의 취재원으로서 적절한 역할을 다 하지 못한 면이 있다. 한국 언론들이 먼저 조종사 실수의 가능성, KAL의 무리한 운항, 항공기 점검 미비를 지적했고 이런 지적은 미국의 AP통신이 한국 신문을 인용, 보도했다. 그 후 다른 미국 언론이나 사고 원인 조사 경과 브리핑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한국 언론의 견해와 시각이 외국 언론에 보도되는 것은 외국 정부나 국제기관의 의사 결정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회가 그만큼 확대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여론 형성 과정에는 언론이 사건이나 행위 사안을 조명하는 것이 꼭 포함된다. 대만의 핵폐기물 북한 반입 결정에 대한 우리의 반대 칼럼이나 사설이 이 문제에 대한 국제 여론을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처럼 한국 언론은 한국과 외국이 관련된 미묘한 사안에 있어 우리 입장에 대한 국제적 지지 내지는 여론을 조성하는 데 중요한 몫을 할 수 있다. 몇 년 전 CNN이 클린턴 대통령과 세계 언론인들의 통신위성을 통한 화상 기자회견을 주선한 적이 있다. 한국의 신문과 방송 기자들이 참가했고 나도 그 중에 한 사람이었다. 이런 기자회견이 우리가 기대하는 대로 진행되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가 몇 마디의 간단한 질문으로 처리되어 좀더 심층적인 질문을 하고 답변을 듣고 싶었던 우리의 기대가 충분히 반영되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심층성과 단순성간의 이같은 딜레마는 아마 언론이 가지는 약점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언론인들이 세계 지도자들과의 화상 인터뷰나 인터넷을 통해 상호 작용하는 기회가 확장되는 것은 우리의 의견이나 시각이 외국매체에 실릴 기회가 늘어가고 외국의 정책 결정에도 영향을 미칠 기회가 늘어난다고 기대해봄직하다.
앞으로 언론인들은 기사를 취재하고 작성하는 능력뿐 아니라 외국 언론인과 지도자들을 만났을 때 자신의 시각이나 한국의 관점을 제시, 표현할 수 있는 능력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공정하고 균형 잡힌 시각을 가져야 효율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사안을 전체적 장기적 객관적 시각에서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을 국제 보도 담당 언론인들은 갖추어야 한다.
인터넷 취재의 빛과 그림자
필자는 원고를 쓸 때 컴퓨터를 열고 닫으면서 ‘이 조그만 기계에 세계가 들어 있다’라는 생각을 한다. ‘쉰 세대’에 속한 나는 그다지 익숙하지 못하지만 인터넷 취재는 앞으로 더욱 활성화될 것이고,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이야기인데, 내가 처음 기자 생활을 할 때인 1960년대 초에는 전차를 타고 취재를 다녔다. 그 후 얼마 안 있어서 전차는 사라지고 언론사 깃발을 단 지프차를 타고 취재를 나가곤 했다. 영어로 말하면 ‘Car’를 타고 주로 취재를 하였다. 그러나 요즘 기자들은 다른 의미의 ‘CAR 취재’를 한다. Computer Assisted Reporting, 즉 컴퓨터 활용 취재를 하는 것이다. 나도 이에 익숙해지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이때마다 인터넷 같은 정보 바다에서 취재 활동을 하는 것은 처음에는 훈련과 숙달이 필요하지만, 인내심을 발휘하여 익숙해질 단계에까지 이르면 매우 효율적일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CAR 취재는 특히 국제 보도 부문에서 유용할 것이다. 인터넷을 통해 해외 언론 사이트를 열어보면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서 대강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E-mail을 통한 뉴스 소스들과의 접촉은 정보를 얻는 데 유용하다. 그리고 온 라인 토론방에 들어가 보면 다양한 시각이 존재함을 실감하고 또한 취재 아이디어도 얻을 수 있다.
전에는 외신이 타전해 주는 정보에 의존하거나 국제 행사나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곳을 직접 가서 취재했다. 물론 지금도 가장 많이 쓰이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제는 뉴스 소스들이 직접 인터넷에 띄운 정보를 기자가 검색하여 보도할 수 있다.
가장 기초적인 인터넷 취재는 취재 대상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정보를 얻는 것이다. 물론 홈페이지에는 홍보용 정보 일색인 경우가 많다는 점을 감안하여 보충 취재를 해야 하지만 홍보용 정보가 전혀 도움이 안되는 것은 아니다. 홈페이지 정보를 시작으로 다각적인 취재를 할 필요가 있다. 워싱턴 주재 한 일본 특파원의 말을 빌리자면 미 의회 의원에게 인터뷰를 요청하면 “당신은 홈페이지를 보았습니까” 하고 되묻는다고 한다. 취재원은 홈페이지를 보고 더 질문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다시 인터뷰 요청을 하라는 뜻을 전한 것이다.
미국 기관들은 홈페이지 구축이 잘 되어 있어 미국 기관이나 개인이 취재 대상일 경우 홈페이지 점검은 유용하다. 미국 대통령이 연설을 하면 30분도 안되어 백악관 홈페이지에 연설문이 뜬다. 일본신문연구소가 낸 「디지털시대 신문의 미래」란 책에는 일본의 한 신문이 미국 정부 기관의 홈페이지에서 일본에 알려지지 않은 정보를 발견하여 1면에 실었다는 사례도 소개되어 있다.
요즘은 뉴스 소스들도 웹사이트를 통해 자신들의 견해를 알리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국제 분쟁에 개입된 당사자들은 전에는 기자 등 언론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알렸으나 요즘은 바로 인터넷을 통해, 전세계로 신속하게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 코소보 사태를 취재했던 미국의 돈 노스 기자에 의하면 코소보 사태와 관련, 수십 개의 웹사이트가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세르비아 그리스정교의 한 성직자는 수도원에 설치된 인터넷을 이용, 자신의 견해를 세상에 알리고 있으며 인터넷 방송에는 학살 장면도 보도되고 있다고 한다(Kevin, 1999).
영상 시대엔 사진을 구하는 것도 중요하다. 전 같으면 수개월이 걸리던 위성촬영 사진조차도 요즘은 인터넷이나 ‘Space Imaging’ 및 ‘Spot Image’ 같은 상업 정보망을 통해 몇 시간 만에 구할 수 있다. 아주 최근의 사진이 아닌 것은 무료나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다고 한다. 인터넷을 통해 날씨 산림 화재 심지어 전세계의 군의 이동도 모니터할 수 있다.
1980년대 초반, 한국에선 오랜 가뭄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나는 미국 정부 기상청 장기예보실을 찾아가 전문가들의 세계기상 위성사진 분석을 취재, 한국에 어느 날 비가 올 것이라는 장기예보를 보도한 적이 있다. 과연 많이 오진 않았지만 미 기상청 예보는 정확했다. 그때는 첨단 취재였다. 지금은 격세지감이 있지만.
뉴스 소스와의 접촉을 위해서는 홈페이지와 더불어 E-mail 이용도 중요하다. 강성철 씨가 저술한 「정보취재수첩」에는 우리 나라의 기자가 미국의 편집장과 E-mail로 인터뷰하여 기사를 작성한 사례를 들고 있다.
외국의 취재 대상자 연락처를 알 수 없을 때 토론 그룹의 집합인 유즈넷(Usenet)을 이용하면 해결될 수 있다.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지내는 달 착륙 우주인인 닐 암스트롱의 주소를 알 필요가 있던 미국의 한 기자는 우주탐사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유즈넷에 메시지를 띄우자, 3명으로부터 주소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정보를 사용하는 데는 한계점이 있다. 토론 그룹 웹사이트 또는 E-mail을 통해 얻은 정보는 기자가 취재하려는 문제나 주제에 강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나온 것이다. 따라서 일반 여론을 반영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 다른 한계점은 인터넷에 뜬 많은 정보를 따라가다 보면 기자 자신이 정보의 홍수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는 데 있다. 정보 폭발 시대에 기자들은 독자들로 하여금 정보 폭발의 희생자가 되지 않도록 정보의 옥석을 가려주고 해석해 줌으로써 도와주어야 하는 사명이 있는데 자신이 여기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불상사가 발생한다.
이런 것을 감안하여 인터넷 정보 검색을 위해서 한 취재당 한 시간 이상을 투자하지 않는다는 미국 기자의 경험이 한국언론연구원이 펴낸 「파워 저널리즘 : 컴퓨터활용 취재 보도」에 실려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 규모가 큰 메이저 언론사에는 조사부와 함께 정보검색실이 있어 기자들은 정보 검색을 의뢰할 수 있다.
정보의 진위를 검증하는 일 또한 기자의 몫이다. 직접 얼굴을 맞대고으로 취재를 하면 상대방 마음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지만 가상 공간에 나타난 정보의 옥석을 가리는 작업은 훨씬 어렵다. 1996년 <문화일보>가 주최한 국제언론세미나에서 미주리대학의 존 메릴(John Merrill) 교수는 뉴욕 근해 상공에서 일어난 TWA기 추락사건과 관련해 일부 미디어가 미 해군 기지에서 발사한 미사일에 의해 요격되었다고 오보를 낸 사례를 설명해 주었다. 이 주장은 인터넷 이용자들이 최초로 제기한 것이었고 저널리스트들이 아무런 검증 없이 방송에 내보냈다는 것이다. 메릴 교수가 든 또 다른 사례는 지가 터뜨린 우주 공간에서의 섹스 행위에 관한 비밀 실험에 관한 보도였다. 이는 진본처럼 보이는 인터넷상의 미국 항공우주국(NASA), 메모를 기사화한 것이었는데 미국항공우주국(NASA)은 ‘이 같은 실험은 한 적이 없고 메모도 날조된 것’이라고 발표했다고 한다.
인터넷에서 낚은 정보의 가치를 판단하는 것은 철저히 기자의 몫이다. 오보가 나면 비난의 화살은 인터넷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기자에게 돌아간다. 그러므로 기자들은 인터넷에 나온 정보의 진위를 당사자나 해당 기관에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또한 공신력 있는 공공기관이나 연구소에서 제공하는 정보를 검색하는 것이 진실된 정보를 입수할 수 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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