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Off the Record
- 저자윤석홍
- 발행LG상남언론재단
- 발행일1996-08-22
서문
언론은 자유만큼 책임도 갖는다. 이 명제는 오늘날 한국의 언론상황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말이다. 한국의 언론은 과거 권위주의 정권 당시와 비교할 수 없는 언론의 자유를 구가하고 있다. 과거 정권이 일방적으로 보도 내용을 정하면, 그 안에서라도 최대한의 언론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던 상황과는 별개의 환경을 맞고 있다.
이젠 언론이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스스로 책임을 지고 보도할 내용을 결정해야 하는 시대를 맞았다. 이에 따라 언론 스스로 능동적이고 책임있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는 독자들의 요구에 접하게 되었다. 이제 언론을 둘러싸고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언론 시장의 자유화에 따라 시장을 둘러싼 경쟁도 치열해졌다. 다수의 독자를 확보하기 위한 신문의 質(질) 경쟁도 격렬하다.
이런 상황에서 언론의 취재방법 및 보도자세와 관련해 새로운 도전으로 등장한 것이 ‘오프 더 레코드’(Off the Record) 문제이다. ‘오프 더 레코드’는 언론의 자유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은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는 고민할 필요가 없는 문제였다. 권력이 정하면 이를 따라야 했으며, 언론의 보다 본질적인 고민은 정권의 정당성 자체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런 ‘오프 더 레코드’가 언론의 자유화가 진전되면서 새롭게 언론의 과제로 떠올랐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1995년 8월 발생한 徐錫宰(서석재) 전 총무처장관의 ‘4천억설 발언’이다. 徐 전장관의 발언은 전직 대통령 구속으로까지 연결되는 등 큰 파장을 일으켰지만, 언론 내부적으로도 여러 가지를 생각케 하는 계기가 됐다.
우선 기자들의 ‘오프 더 레코드’에 대한 안이한 태도이다. 현장에 있었던 기자 중 상당수는 ‘오프 더 레코드’ 발언 내용 자체를 회사에 보고하지도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일부 데스크는 보고받은 내용에 대해 기사화 결정을 내리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회의 현상을 정확히 판단하고 정확히 전달해야 할 기자들이 큰 오류를 범한 것이다. 물론 이런 오류는 새로운 언론 환경에 대한 책임감있는 고찰과 언론 자체의 ‘오프 더 레코드’에 대한 인식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오프 더 레코드’는 실제 언론으로서는 必要惡(필요악)이다. 언론의 자유와 ‘알 권리’라는 입장에서 볼 때, 이런 권리를 잠시 제한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취재 현장에서 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를 만나기도 한다. 실제 언론이 만나야 하는 ‘오프 더 레코드’ 상황은 천차만별인 만큼, 개별적인 상황에서 판단을 내려야 한다.
이 책은 이런 점에 주목, 실제 언론이 ‘오프 더 레코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를 가이드하는 데 중점을 두고 만들었다. ‘오프 더 레코드’가 갖는 특징과 문제점을 인식하고, 현장에서 실제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데 도움을 주려는 것이 그 목적이다. 이를 위해 될 수 있는 한 사례를 중심으로 기술하려고 노력했다. 특히 미국과 일본의 사례는 다양한 경우가 망라된 만큼, 상당한 참고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 拙稿(졸고)가 국내 언론이 ‘오프 더 레코드’를 합리적으로 처리하는 데 一助(일조)하게 된다면 그것으로 큰 보람이 될 것이다.
제1장머릿말
언론의 본질은 良質(양질)의 정보를 독자들에게 공급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정보의 流通(유통)을 제한하려는 시도가 있어서는 안된다. 이것이 자유민주사회의 언론의 원칙이다.
‘情報在民’(정보재민)의 원칙
그렇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정보가 곧 힘인 정보사회에서 한편으로는 일반인들의 정보에 대한 욕구가 점점 강해지지만, 그와는 반대로 정보를 쉽게 공개하지 않으려는 움직임도 명백히 존재하고 있다. 이때 정보의 공개를 요구할 수 있는 궁극적인 권리는 ‘알 권리’요, 언론의 자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른바 ‘情報在民’(정보재민)의 원칙이다.
언론은 이런 원칙 위에서 취재를 하게 된다. 정부에게, 또는 각종 취재원에게 정보의 제공을 요청할 수 있는 궁극적인 힘도 이런 원칙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그러나 실제 언론의 취재현장에서 이런 원칙을 1백% 적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보를 내놓지 않으려는, 때로는 정보 조작을 통해 여론을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려는 시도와 부딪히게 된다. 하지만 언론에게는 위에서 말한 추상적인 원칙만 있을 뿐, 정보의 공개를 강제할 구체적인 物理力(물리력)이 없다. 단지 기자와 취재원과의 적절한 관계 설정을 통해 정보를 입수하는 방법뿐이다.
‘알 권리’와 ‘취재 편의’의 接點(접점)
이런 가운데 보다 많은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사용되는 취재 방법가운데 하나가 이른바 ‘오프 더 레코드’이다. ‘모든 정보를 곧바로 보도할 수 있다는 기본 원칙’(On the Record)에 반해, 독자들의 ‘알 권리’를 일단은 제한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프 더 레코드’는 ‘알 권리’와 취재의 편의, 즉 보다 많은 정보를 입수한다는 두가지 대명제의 接點(접점)에 해당하는 취재 방법인 것이다.
분분했던 ‘오프 더 레코드’ 논의
국내외적으로 1995년은 ‘오프 더 레코드’에 관한 사건이 집중적으로 일어난 한해였다. 이에 따라 언론사상 ‘오프 더 레코드’를 둘러싼 가장 집중적인 논의가 이루어진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미국의 경우 1995년 1월부터 코니 정의 뉴트 깅리치하원의장 모친 인터뷰건, 힐러리 클린턴 백악관 회담 ‘오프 더 레코드’ 사건 등 ‘오프 더 레코드’를 둘러싸고 언론계 안팎에서 의견이 분분했다.
1995년 8월에는 국내에서 徐 전장관의 ‘전직 대통령 4천억 비자금’ 발언이 보도되면서 국내의 ‘오프 더 레코드’ 상황을 다시 한 번 점검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10월에는 江藤(에토) 일본 총무청장관의 ‘오프 더 레코드’ 발언이 한일 양국에서 보도되면서 양국의 외교적 마찰로까지 발전하는 등 큰 파장을 불러 왔다.
취재-보도가 부자유했던 권위주의 정권 시절
이런 가운데 국내 언론계에서는 ‘오프 더 레코드’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오프 더 레코드’와 언론의 자유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오프 더 레코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 부족이 드러났다. 이런 상황은 과거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기사의 취재와 보도가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고, 그 결과 ‘오프 더 레코드’를 언론이 자율적으로 운영할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회의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언론이 ‘오프 더 레코드’ 취재 방식을 스스로 결정해야 할 시기를 맞았으나, 이에 대한 준비가 부족했던 것이다.
아직 국내의 언론은 ‘오프 더 레코드’ 취재에 있어 확실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 미국처럼 기자가 취재한 모든 것은 쓸 수 있다는 ‘온 더 레코드’가 기본인지, 아니면 일본처럼 취재원으로부터 “써도 좋다”는 말을 들은 것만 쓸 수 있는 폐쇄적 취재방식이 기본인지가 불분명하다. 언론인들의 이 문제에 대한 깊은 성찰 자체도 없는 상태이다.
언론계의 혼란
궁극적으로 ‘오프 더 레코드’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다루는가는 언론 자체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느냐와도 밀접하게 연관된다. 결국 언론의 자유를 중시하느냐, 아니면 취재원 보호와 프라이버시에 무게를 두느냐는 차원의 문제로 귀결된다.
한쪽으로 ‘오프 더 레코드’ 자체에 대한 기술적 분석도 아직 미흡하다. 취재 현장에서 ‘오프 더 레코드’라고 할 때, 과연 그 ‘오프 더 레코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개념이 서 있지 않다. 단순히 익명을 요구하는 것인지, 아니면 배경설명인지, 그것도 아니면 완전히 기사를 쓸 수 없는 것인지. 이런 문제에 대해 가장 훈련이 철저하게 돼 있어야 할 언론인들이 이에 대해 아무런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언론사 자체의 문제도 간과할 수 없다. 미국 언론사의 경우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거치면서 ‘오프 더 레코드’ 문제를 심도있게 논의한 뒤, 상당수의 언론사에서 ‘오프 더 레코드’ 처리와 관련한 가이드 라인을 만들어 두었다.
日本新聞協會의 ‘오프 더 레코드’ 가이드 라인
일본의 경우 이미 1960년대 新聞協會(신문협회) 차원에서 ‘오프 더 레코드’ 처리를 위한 가이드 라인을 마련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오프 더 레코드’를 어떻게 다루라는 처리 지침을 두고 있는 언론사는 하나도 없는 형편이다. 각 언론사별로,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언론단체에서 ‘오프 더 레코드’의 기초적인 가이드 라인이라도 마련해 두어야 하는 상황이다.
앞으로는 ‘오프 더 레코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면 언론사 자체에도 큰 부담이 될 가능성이 높다. 취재원은 명예훼손, 약속파기 등을 이유로 소송을 통해 언론사를 압박해올 수 있다. 미국의 경우 실제 이런 상황이 진행되고 있다.
설사 ‘오프 더 레코드’를 지켰다고 하더라도, 나중에 그 사실이 밝혀질 경우 언론이 독자들의 ‘알 권리’를 침해했다는 따가운 시선을 받게 될 것이다. 물론 언론의 궁극적인 힘이라고 할 수 있는 언론에 대한 독자의 신뢰도 땅에 떨어질 것이다.
국내에서 연구가 부족한 ‘오프 더 레코드’
이 글에서는 아직 ‘오프 더 레코드’에 대한 국내의 연구가 부족한 점을 감안, ‘오프 더 레코드’에 관한 제반 사항을 기술하려고 했다.
글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
첫번째 부분에서는 ‘오프 더 레코드’란 무엇인지, ‘오프 더 레코드’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왜 ‘오프 더 레코드’가 사용될 수밖에 없는지를 다루었다.
두번째 부분에서는 미국, 일본, 한국 등 3국의 대표적인 ‘오프 더 레코드’ 사례를 선정, 이를 소개하는 사례 중심의 기술방식을 택했다. 이를 위해 ‘오프 더 레코드’의 처리-운용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각국의 취재 환경을 앞부분에 추가했다. ‘오프 더 레코드’라는 개념 자체를 만들어내고, 이미 ‘오프 더 레코드’의 처리에 대한 논의가 어느 정도 정착 단계에 들어간 미국의 경우는 사례를 시대별로 열거하면서 설명했다.
이를 통해 언론자유와 私人(사인)간의 合意(합의)라는 두가지 큰 원칙을 통해 균형을 유지하는 미국 언론의 ‘오프 더 레코드’ 처리 방식을 알 수 있도록 했다. 일본의 경우는 폐쇄적인 취재방식과 ‘오프 더 레코드’ 처리를 둘러싼 문제점을 지적해 보려고 했다. 한국의 경우는 徐錫宰(서석재) 전 총무처장관의 ‘오프 더 레코드’ 처리 과정과 이에 대한 언론계의 반응을 고찰하는 방법을 이용했다. 여기서 인용되는 사례는 구체적으로 취재현장에서 일어난 사건을 기술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 취재시에도 참고가 될 만한 것이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언론인에게는 必要惡(필요악)이라고 할 수 있는 ‘오프 더 레코드’의 폐해를 지적하고, 이를 합리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했다.
제2장‘오프 더 레코드’
1) ‘오프 더 레코드’의 定義(정의)
기자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는 뉴스를 정확하고 심도있게 취재-보도하는 것이다. 여기에 각종 자료나 정보를 통해 그 뉴스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해설하는 기능도 추가된다. 이런 과정에서 기사의 신뢰도를 최대한 높이면서 취재원까지 보호할 수 있다면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
이런 理想(이상)과 달리, 현실은 훨씬 복잡하다. 실제 취재를 하다 보면 수많은 장벽에 부딪히게 된다. 적극적으로 정보를 감추려는 사람들로부터, 거짓 정보를 흘리는 취재원까지, 수많은 상황을 접해야 한다. 부정확한 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 東奔西走(동분서주)해야 하는 상황도 비일비재하다. 이 모든 것은 정확한 정보를 독자들에게 신뢰감있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입수한 정보를 많이 쓴다고 독자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확한 기사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어떤 기사가 정확하고, 독자들에게 신뢰감을 주는 기사인가. 원론적으로 ‘시간, 장소, 배경과 함께 실제 그런 발언을 한 사람의 신원이 명확한 기사’라는 답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초창기 미국 언론은 취재원을 밝히지 않고 기사를 쓰는 것, 취재를 해놓고 이를 쓰지 않는 것은 언론자유의 적으로 받아들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기자들이 취재원 모두를 밝히며, 취재한 내용을 즉시 기사화한다는 것은 이상론에 가깝다. 실제 취재원을 밝히지 못하고 기사를 써야 할 경우, 취재를 했다고 하더라도 정확성에 대한 의문 때문에 기사화하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미국도 출처 불명의 기사 비중이 30%
기자가 입수한 모든 정보를, 가능한 한 취재원의 실명을 밝히라고 독려하고 있는 미국의 경우도 익명 등 출처가 명확하지 않은 기사의 비중이 전체기사의 약 30% 가까이 된다는 조사도 있다. (서동구, 신문과 방송, 1995년 10월호, 7쪽)
언론이 취재원을 밝히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우선 취재원에게 어떤 정보를 밝히라고 강요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사찰권이나 수사권이 없는 언론으로서는 최대한 사실을 알아내기 위해 취재원과의 합의가 필요하다. 그런 합의 내용 중에는 잠시 취재원으로부터 입수한 정보를 보도하지 않거나, 취재원의 신원을 밝히지 않고 보도하는 것도 포함된다. 통상 언론계에서는 이런 취재 방식을 ‘기록하지 않는다’라는 뜻에서 ‘오프 더 레코드’(Off the Record)라고 한다.
대부분의 언론인들이 위와 같은 이유 때문에 ‘오프 더 레코드’를 취재의 테크닉으로 인정하지만,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뉘어지는 형편이다.
오리건대 로렌 케슬러 교수의 정의
미국 오리건 대학의 신문학과 로렌 케슬러 교수는 ‘오프 더 레코드’의 개념을 세가지로 꼽고 있다.
“첫째, 어떤 형태로든 정보를 그대로 신문과 방송에 공개할 수 없다. 둘째, 취재원을 밝히지 않는다면 정보를 인용할 수 없다. 셋째, 취재원을 명백하게 알리지 않는 한, 그 정보를 가지고 다른 취재원에 접근해 내용을 확인한 뒤, 독립된 기사를 만들 수 있다.”(신문과 방송, 1995년 10월호, 4쪽 재인용)
뉴욕 타임스 기자 출신의 정의
뉴욕 타임스 기자 출신인 세무어 허쉬는 극단적으로 다음과 같이 ‘오프 더 레코드’를 정의하고 있다.
“‘오프 더 레코드’에 대한 해석은 기자마다 제각각이다. 어떤 기자에게 ‘오프 더 레코드’는 이름을 밝히지 말고 인용하라는 뜻이고, 또 다른 기자에게는 정부의 고위 관리라는 형태로 기사를 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Brian S. Brooks, George Kennedy, Daryl Moen, Don Ranly, News Reporting and Writing, St. Martin’s Press, p141)
이와 같이 미국에서는 ‘오프 더 레코드’라고 하면, 기자가 입수한 내용을 일반적으로 누구로부터 입수했는지를 밝히지 않고 보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취재원을 인용하지 못하는 대신, 그 내용은 보도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런 의미에서의 미국의 ‘오프 더 레코드’는 익명 보도까지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의 칼럼니스트인 리차드 리브스처럼 입수한 내용 정보를 어떤 형태로도 사용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日本新聞協會(일본신문협회)의 공식 견해
한편 언론 환경의 차이를 반영하듯, 일본의 경우 ‘오프 더 레코드’는 日本新聞協會(일본신문협회)의 공식 견해에 따라 어떤 형태로든 전혀 보도를 하지 못하는 것을 뜻한다. ‘오프 더 레코드’를 보도하려면 취재원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언론계를 지배하고 있는 논리이다.
日本新聞協會는 1996년 30여년 만에 ‘오프 더 레코드’에 관한 견해를 개정하면서 그 뜻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오프 더 레코드’는 뉴스 소스와 기자측이 상호 확인하고 납득한 상태에서, 외부에 이(그 내용)를 누설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이(‘오프 더 레코드’)는 취재원의 승낙 없이는 이(그 내용)를 밝히지 않는, 취재원 보호와 같은 차원의 것이다.”(讀賣新聞, 1996년 2월 15일자)
한국 외국어대 김우룡 교수의 정의
국내의 경우 아직 ‘오프 더 레코드’가 무엇이냐에 대한 통일된 견해가 없는 상태다.
외국어대 김우룡 교수는 ‘오프 더 레코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오프 더 레코드’는 은밀하게 기자에게 제공되는 자료다. 이 사실을 이해하고 자료를 받게 되면 뒤에 쓰는 기사의 일반적 배경으로 이 자료를 쓸 수는 있지만 직접 인용할 수 없게 된다.”(김우룡, 신문과 방송, 1995년 10월호, 8쪽)
인용은 하지 못하는 대신 배경설명 기사로는 쓸 수 있다는 미국의 견해와 거의 비슷하다.
‘오프 더 레코드’란
이같은 각종 ‘오프 더 레코드’에 관한 견해를 종합해 볼 때, ‘오프 더 레코드’가 무엇이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오프 더 레코드’는 취재원의 이름을 밝히고 취재했을 경우 취재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취재원을 보호하고, 공적으로 알 수 없는 本心(본심) 또는 眞實(진실)을 끌어내기 위해 예외적으로 사전협의에 근거, 취재를 하는 것이다. 단, 이렇게 취재한 내용을 전혀 쓰지 못하는지, 아니면 출처를 밝히지 않고 배경설명으로 이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취재원과의 합의하에 정할 수 있다.”
2) ‘오프 더 레코드’의 必要性(필요성)
앞의 ‘오프 더 레코드’의 정의에도 밝혔듯이 ‘오프 더 레코드’는 취재원을 보호하고 공개적으로 알 수 없는 사실을 취재하는 데 사용하는 취재의 테크닉이다. 여기서는 이런 개념 정의에서 한발 더 나아가 기자들이 왜 ‘오프 더 레코드’를 사용하는지를 보다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실제 상당수의 기자들은 ‘오프 더 레코드’를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취재 관행으로 받아 들이고 있다.
① 충분한 정보를 얻기 위한 수단
많은 취재원들이 실제 자기 이름이 언론에 실명으로 보도되는 경우를 극히 꺼린다. 그 내용에 따라서는 심지어 자기의 자리까지 위협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취재원과 ‘오프 더 레코드’를 전제로 취재를 한다면 실명화를 전제로 취재했을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사실을 알아낼 수 있다.
미국의 권위지일수록 불명확한 출처
실제 미국의 경우 권위있는 신문일수록 출처를 명확히 밝히지 않은 기사가 많다는 조사 결과도 나와 있다. 1975년 오하이오대학의 휴 컬버스턴 교수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조사기간중 뉴욕 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는 전체 기사의 54%가 출처가 불분명한 것이었다. 이는 같은 조사에 포함된 지방신문의 비율(30%)보다 훨씬 많은 것이다. 이 조사를 통해 많은 취재원들이 권위있는 신문에 의견이나 정보를 제공하고 싶어하지만, 그 상당수는 출처가 드러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오프 더 레코드’는 기사를 쓰는 데 필요한 정보를 보다 충분히 수집할 수 있는 매력 있는 취재기법이다. 또한 당장은 기사화하기에는 불충분하지만 후일 보충 취재를 통해 유용한 정보를 입수하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다.
미국 언론학 교과서의 권고
이 때문에 미국의 언론학 교과서에서도 이런 점을 인정, 상대방이 ‘오프 더 레코드’ 취재를 요구할 경우, 그것이 회사 정책에 위반되지 않는 한에서는 적극적으로 응하라고 권하고 있다. 실제 어떤 경우 취재원들은 최대한 아는 사실을 공개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오프 더 레코드’에 의한 배경설명을 충분히 듣고, 추후에 보다 정확한 기사를 쓰는 것이정황을 전혀 모르고 쓰는 것보다 훨씬 유리하다는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실제 많은 기자들이 충실하지 못한 기사를 보다 정확하고, 실책없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오프 더 레코드’ 정보를 사용하고 있다.
미국 ‘다이아나 도슨’ 사례
다음은 ‘오프 더 레코드’를 요구한 취재원을 통해 훌륭하게 취재를 한 사례로 미국의 언론학 교과서에 인용되는 다이아나 도슨의 사례다.
나는 테네시州(주) 멤피스의 건강 문제를 담당하는 마이크 맨서 기자와 약 한달에 걸쳐 취재하고 있었다.
그러다 우리는 州의 보건 시스템에 완전히 질려 있는 두명의 의사를 만났다. 그 두사람은 볼리비아(註:테네시州에 위치한 도시)에 있는 테네시 주립병원에 자문역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이런 식으로 말했다. “우리의 이름을 쓰는 등, 우리라는 단서를 줄 수 있는 것은 어느 것도 써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그 곳의 직원들과 계속 일을 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테네시州 서부 지역을 커버하는 병원이면서도 정식면허가 있는 정신과 의사는 한명도 없다”고 했다. 또한 “환자 수에 비해 의사 수가 턱없이 적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이를 계기로 우린 병원의 人事(인사) 파일을 검토했고, 마침내 면허가 있는 정신과 의사가 없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리고 의사 對(대) 환자수를 비교해 보았다. 정신병 환자가 병원응급실에 입원한 후 제대로 진료도 받지 않고 몇시간 만에 퇴원한 자료도 찾았다. 우리는 이를 7부로 나누어서 기사화했다. 그 기사는 테네시 UPI의 ‘공공보도 부문’ 대상을 받았다. (Brian S Brooks,George Kennedy, Daryl Moen, Don Ranly, News Reporting and Writing, St. Martin’s Press, p140)
이처럼 ‘오프 더 레코드’를 요구한 취재원으로부터 중요한 취재의 단서를 제공받아 훌륭한 기사를 쓸 수 있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기자에 게는 ‘오프 더 레코드’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직업적으로 다룰 수 있는가라는 능력이 요구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서 정보를 정확하게 선별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또한 취재원과 ‘오프 더 레코드’를 통한 정보를 제공받을 때도, 제공받은 정보를 기본으로 확인 취재로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을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
② 고급 취재원 확보
두번째로 고급 취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상대측의 ‘오프 더 레코드’를 들어 주어야 할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아이젠하워를 수행하던 미국 기자들은 대통령 당선자로서 그가 한국을 방문한 사실 등을 기사화하지 않았다. 만약 작은 ‘오프 더 레코드’를 지키고 취재원에게 큰 신뢰를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이 장래에 큰 도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프 더 레코드’와 정보원
실제 그리 중요하지 않은 ‘오프 더 레코드’ 기사가 누설되어 중요한 정보원을 잃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며, 그런 경우 기자에게도 큰 타격이 될 수 있다. 현재 별로 가치가 없는 소스가 장차 시장이나 장관, 총리, 대통령, 대기업의 회장이 되지 않는다고 누구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 중요한 취재원 한명을 확보하는 것은 실제 취재현장에서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현장 경험이 있는 기자들은 누구나 공감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오프 더 레코드’는 취재의 편의, 언론의 편의라는 측면이 반영된 것이다. 이 때문에 ‘오프 더 레코드’로 처리해야 할 때도 신중을 기해야 한다.
③ ‘發表(발표) 저널리즘’ 문제의 극복
발표 저널리즘은 한국과 일본의 언론 관행을 定義(정의)하는 키워드(Key Word) 중의 하나이다. 발표 저널리즘이란 말이 처음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말 일본에서이다. 이 말이 그후 국내에도 수입되어 사용되었다.
‘발표 저널리즘’이란
발표 저널리즘을 간단히 말하면, 관청이나 경찰 등 출입처의 발표에 따라 기사를 만드는 것이다. 물론 언론의 기본원칙에 입각, 기자들이 개별 취재를 진행하는 스타일의 취재가 과거에도 존재했다.
그러나 뉴스 소스의 홍보체제가 1970년대 이후 강화되면서 상당수의 기사가 홍보실, 대변인실을 통해 흘러 나오게 되었다. 홍보실을 통해 흘러나오는 정보의 양이 점점 증가하면서 기자들이 발표된 기사를 처리하기도 바쁜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발표 저널리즘’의 함정
이같은 경향은 특히 한국과 일본처럼 어느 정도 기자 클럽이나 기자단이 활성화된 상황 하에서는 더욱 두드러졌다. 기자단과 홍보실이 상호 기사의 양까지 조절하는 경우까지 생긴 것이다. 기사가 많은 중앙 관청의 경우 1년에 1천여건 이상의 보도 자료를 발표한다는 조사도 나와 있다. 이러다 보니 신문의 이름만 가리면 어느 신문인지 구별이 불가능하다는 독자들의 얘기까지 흘러나오게 됐다. 이와 같은 발표 저널리즘에는 획일성 외에도 또하나의 문제점이 도사리고 있다. ‘발표’된 정보 속에 잠재되어 있는 정보 조작의 가능성이다. 홍보실 등에서는 자기에게 불리한 뉴스는 일단 발표하지 않는다고 보아도 틀림없다.
물론 많은 자료가 다양하게 발표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정보의 量(양)이 아니라 質(질)이다. 어떤 정보가 어떤 이유로 그렇게 발표됐는가에 대해서 기자는 이를 확실하게 간파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다면 단지 정보를 실어 나르는 ‘짐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발표 저널리즘은 획일적이고 정보조작이 쉽다”
실제 1993년 일본의 신문기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조사대상 기자들의 약 73.7%가 “발표 저널리즘은 획일적인 보도로 연결되기 쉽다”고 답했다. 또 64.9%가 “정보 조작이 용이하게 된다”는 사실에도 동의했다.
신문의 획일화와 정보조작의 문제점을 없애기 위해 1970년대 이후 도입되는 취재방법이 ‘탐사보도’(Investigative Reporting)이다. 탐사보도는 어떤 조직이나 단체·공인의 드러나지 않은 사실, 혹은 적극적으로 은폐된 사실을 언론이 사회정의와 공평, 공공복지라는 입장에서 이를 발표하는 것이다.
‘발표 저널리즘’과 ‘탐사보도’
그런데 이같은 탐사보도의 가장 큰 특징은 상당수의 증언자들이 배경 설명이나 익명의 상황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때로는 증언자들이 ‘전면 오프 더 레코드’를 조건으로 정보를 제공하는데, 이를 단지 취재의 방향을 잡는 데만 이용하기도 한다. 잘 알려진 워싱턴 포스트의 워터게이트 사건 보도도 사실상 ‘오프 더 레코드’를 효과적으로 활용한 것이다.
이와 같은 점을 중시, 미국의 탐사보도 관련 언론학 교과서에서도 ‘오프 더 레코드’를 취재기법의 하나로 활용하도록 권하고 있다.
“만일 ‘오프 더 레코드’나 익명으로 보도를 하겠다고 하면 많은 취재원들이 정보를 줄 수도 있다. 그렇게 취재한 내용은 이름 등을 밝히지 않고, 적절하게 사용될 수 있다. 나아가 ‘오프 더 레코드’로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온 더 레코드’를 전제로 또다른 취재원에게 질문을 할 경우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기자가 이미 상당 부분 내용을 알기 때문에, 취재원도 정확히 답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Benjamin, Investigative Reporting, Iowa State Univ., p108)
④ 공익 차원의 ‘오프 더 레코드’
기자들 중에서 자기가 얻은 정보 전부를 쓸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기사를 쓰다 보면 실제 國益(국익)이나 公益(공익)이라는 측면에서 입수한 정보를 취재원의 요구에 따라 쓸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국익과 ‘오프 더 레코드’
예를 들어 2차 세계대전중 아이젠하워의 D-DAY(디-데이)는 ‘오프 더 레코드’ 조건 하에 브리핑되었지만, 실제로 그 ‘오프 더 레코드’를 깬 기자는 아무도 없었다.
월남전의 경우 정부의 보도통제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전황 보도는 착실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이루어졌다. 미국 언론이 진실을 보도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 결과였다. 그러나 인질로 잡힌 병사 문제에 있어서는 언론도 정부가 브리핑을 끝낸 후 ‘오프 더 레코드’ 요구를 철저히 수용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이런 종류의 ‘오프 더 레코드’일 경우, ‘오프 더 레코드’ 여부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은 언론 내부에서 내리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유괴사건에 관한 일본의 ‘오프 더 레코드’ 지침
일본의 경우 각종 유괴 사건이 발생하면 제공받은 정보를 기사화하지 않는 등 일부 사안에 대해서는 ‘오프 더 레코드’를 철저하게 지키고 있다. 나아가 新聞協會(신문협회)에서 유괴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오프 더 레코드’ 준수 지침까지 두고 있다.
“유괴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 사건을 보도함으로써 피해자의 생명에 중대한 위협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을 경우, 보도 기관은 수사 기관으로부터 단시간 내에 그 정보를 제공받아 사건의 내용을 검토한다. 그 결과에 따라 보도자제 협정을 맺는다. 단, 이런 방식이 수사상 편의를 위해 남용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취재와 보도, 日本新聞協會, 1993년, p46)
이 때의 협정은 해당 기자 클럽의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체결하며, 기자들은 수사기관의 보도통제 내용을 自社(자사)에 보고해 허락을 받는다. 만약 이를 어길 경우, 해당 기자는 상당한 정도의 비판과 징계를 받게 된다.
3) ‘오프 더 레코드’의 種類(종류)
‘오프 더 레코드’의 定義(정의)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오프 더 레코드’가 정확히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나라마다 사람마다 의견이 천차만별이다. 미국의 경우 1960년대에는 ‘오프 더 레코드’가 배경설명과 같은 것으로 해석되었고, 그후에도 ‘오프 더 레코드’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오프 더 레코드’는 일종의 언론 관행
‘오프 더 레코드’는 기본적으로 법률적인 용어가 아니라 미국을 중심으로 확립된 일종의 언론 관행이다. 따라서 ‘오프 더 레코드’가 걸린 내용을 어디까지 보도하지 말아야 하는가라는 문제는 기본적으로 기자 개인이 취재의 상황에 입각해 판단해야 할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취재시 보도 내용이 ‘오프 더 레코드’인지 아닌지, 그리고 ‘오프 더 레코드’라고 하더라도 상대방이 생각하는 ‘오프 더 레코드’는 어느 정도까지 보도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하는지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특히 기자들은 취재원이 “제가 한 말을 쓰지 마십시요”라는 다분히 추상적인 주문을 받게 되면 당황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런 때를 위해서라도 확실히 ‘오프 더 레코드’에는 어떤 종류가 있는지를 정확하게 알아둘 필요가 있다.
‘오프 더 레코드’의 종류
학자나 언론인들에 따라 ‘오프 더 레코드’의 종류를 통상 3가지에서 4가지로 분류한다.
가령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셜리 비아기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오프 더 레코드’는 ▲익명 보도(Not For Attribution) ▲배경(Back-ground) 설명 ▲심층배경(Deep-background) 설명 ▲‘오프 더 레코드’ 등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신문과 방송, 1995년 10월호, 10쪽)
미국 국무성의 경우는 ‘오프 더 레코드’를 세 가지로 나눠 설명한다. 국무성이 직원들에게 배포한 내용을 보면 이렇다.
“▲내용 자체가 보도가 불가능한 것(협의의 ‘오프 더 레코드’) ▲취재 내용을 기사화할 때 참고로 사용하며, ‘∼로 보인다’ ‘∼라고 알려졌다’는 식(디프 백그라운드)의 설명 ▲그리고 인용은 허용하지만 취재원을 ‘정부 당국자’ ‘∼소식통’ 등으로 하는 경우(백 그라운드)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한편으로 익명보도와 심층배경설명 간의 차이를 분간하기 어렵다는 반응도 있다. 여기서는 셜리 비아기 교수의 분류처럼 ‘오프 더 레코드’를 네 종류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① ‘오프 더 레코드’(협의의 ‘오프 더 레코드’)
좁은 의미의 ‘오프 더 레코드’는 뉴스원이 제공한 정보를 개인적인 배경과 앞날을 전망하는 데 이용할 뿐 이를 절대 기사화하지 못한다.
협의의 ‘오프 더 레코드’는 논란이 많다
狹義(협의)의 ‘오프 더 레코드’라도 과연 ‘오프 더 레코드’로 말한 내용을 바탕으로 다른 취재원을 통해 취재를 한 뒤 別件(별건)의 기사로 쓸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정보의 소스로도 이용이 불가능한 것인지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다.
미국의 경우 협의의 ‘오프 더 레코드’라고 하더라도 제공받은 내용을 토대로 별도의 확인 작업을 거치고, 직접 ‘오프 더 레코드’로 내용을 제공한 사람을 언급하지 않는 한 기사화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반면 일본의 경우 미국에서 말하는 狹義의 ‘오프 더 레코드’보다 그 범위를 더 좁게 보고 있다. 즉 어떤 형태로든 ‘오프 더 레코드’ 정보는 취재원의 허가 없이는 절대 기사화할 수 없는 것을 뜻한다.
② 심층배경(Deep-background)
기사의 배경으로 해설기사 등의 정확성을 높이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정보이다.
미국 워싱턴의 관리나 정치인들이 주로 이용하는 방법으로, 취재원이나 기사의 출처는 일체 밝히지 못한다. 가령, 정부의 한 관리와 같은 일반적인 용어도 쓸 수 없다. 통상 ‘∼로 보인다’ ‘∼ 전망이다’와 같은 형식으로 보도할 수 있다.
경우에 따라 추상적인 명칭을 사용할 수 있는데, 워싱턴 포스트의 칼 번스타인과 밥 우드워드 기자가 워터게이트 사건을 보도할 때 인용한 ‘딥 드로트’(Deep Throat)도 심층배경의 사례로 볼 수 있다.
③ 배경설명(Background)
배경설명은 심층배경이나 뒤에서 설명할 익명보도가 독자나 시청자들의 신뢰를 떨어뜨린다는 점을 감안, 가능한 한 기사의 신빙성을 확보하기 위해 취하는 방식이다. 이런 경우 정보를 이용할 수 있고, 직접적인 인용도 가능하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방식이다. ‘외무부의 한 관리에 따르면∼’ ‘청와대의 고위 소식통에 따르면∼’과 같은 식으로 인용이 되는 것이다.
‘오프 더 레코드’와 ‘온 더 레코드’의 중간
뉴스위크의 경우 앞의 심층배경을 통한 정보를 보이지 않는 취재원이라고 하는 반면, 배경설명에 등장하는 취재원은 ‘보이는 취재원’(Visible Source)이라고 한다. 제공한 정보를 인용하되 취재원의 이름과 직함을 쓰지 않고, 취재원의 지위나 직책을 독자들에게 미루어 짐작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다.
이런 취재 관행은 미국에서보다는 직업공무원제가 확립된 영국 등에서 정치인이 아닌 관리들의 이름을 익명으로 처리하기 위해 사용되던 것이 2차 세계대전후 널리 보급된 것이다. 취재원도 어느 정도 밝히면서, 직접 인용도 하는 방식으로, 사실상 ‘오프 더 레코드’와 ‘온 더 레코드’의 중간 정도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④ 익명보도
기사를 쓸 때 인용은 하되 지극히 광범위하고, 추상적인 단어로 취재원을 표시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건현장 관련 기사를 쓸 경우 ‘목격자는 ∼라고 말했다’라든지, ‘경찰은 ∼라고 말했다’라는 방식으로 처리하는 방법이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취재원중 한명만이 그런 이야기를 할 경우 인용부호를 붙이지만, 그렇지 않고 다수가 그런 말을 했을 경우 인용부호로 처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4) ‘오프 더 레코드’의 성립요건
‘오프 더 레코드’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취재원의 일방적 요구만 있으면 ‘오프 더 레코드’가 성립하는가. 권위주의 하의 언론에서는 정부나 취재원이 ‘오프 더 레코드’를 일방적으로 정하고 언론은 이를 따라야 하지만, 자유민주사회의 언론으로서는 이를 받아들이기 힘들다.
전제돼야 할 최소한의 환경
최소한 다음의 환경이 조성되지 않으면 ‘오프 더 레코드’가 성립하기도, 지속되기도 힘들다는 것이 일반적인 판단이다.
우선 기자가 반드시 동의해야 한다. 가장 간단한 것 같은 이 원칙도 실제 현장에서는 잘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취재원이 일방적으로 자기가 ‘오프 더 레코드’로 정하고, 일방적으로 기자에게 ‘오프 더 레코드’임을 통보하는 행태가 실제 취재 현장에서 많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기자 클럽의 문제점
특히 기자 클럽이 활성화된 경우 기자단의 간사나 조정자가 나서, 취재원과 일방적으로 ‘오프 더 레코드’로 해 버리는 경우가 있다. 이렇게 되면 사실상 기자 개개인의 의견은 반영되지 않는 셈이다. 결국 기자 개개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오프 더 레코드’가 체결이 되는데, 과연 이럴 때 각 기자가 모두 ‘오프 더 레코드’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사실상 ‘오프 더 레코드’가 성립이 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일단 ‘오프 더 레코드’ 정보는 나중에 쓰게 될 기사의 배경으로만 이용할 것을 전제로 한다. 언론의 입장에서 수십년이 지나도 전혀 기사의 배경으로도 쓰지 못하는 ‘오프 더 레코드’는 응할 필요조차 없다. 최소한 ‘오프 더 레코드’에 응했을 때는 어떤 형태로든 그것이 기사로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기사화하는 방법 등에 대해서는 취재원과 협의를 통해 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음과 같은 경우 취재원이 ‘오프 더 레코드’를 요구했다고 하더라도 기자로서는 이를 명백히 거부할 수 있다. 즉, 이같은 경우 ‘오프 더 레코드’에 대한 의무를 지지 않아도 되며, 이런 경우 외에는 취재원과 합의를 통해 ‘오프 더 레코드’를 정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명백한 공문서는 ‘오프’ 불성립
우선 ‘오프 더 레코드’를 요구한 내용이 명백한 공문서일 경우 그것을 구태여 지킬 필요가 없다. 이런 주장의 바탕에는 기본적으로 모든 공문서의 궁극적인 주인은 국민이라는 ‘情報在民’(정보재민)의 이념을 바탕에 깔고 있다. 사실 행정의 정보공개는 민주사회의 기본적인 전제이다.
그런데 이런 정보를 관리들이 독점하고, 이를 공개하는 것을 막기 위해 ‘오프 더 레코드’를 사용한다면 구태여 이를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극단적으로 언론의 자유와 행정의 공개를 주장하는 입장을 취하는 쪽에서는 공인의 공적활동의 기록도 ‘오프 더 레코드’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또한 ‘오프 더 레코드’가 걸린 상태라고 하더라도 언론의 자체 판단에 따라 이를 깰 수 있다는 주장이다. 다만 공적활동이 아니라 개인의 정치적 견해에 대해서는 ‘오프 더 레코드’를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 東京(토쿄) 주재 외신기자협회 회장을 지낸 앤드류 홀버트 씨도 이와 관련,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쓸지 말지를 결정할 권리는 보도하는 측에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오프 더 레코드’를 깨고 쓸 수도 있다.”(創, 1996년 3월호, p94)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도 ‘오프’ 불가
두번째로, 그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라면 ‘오프 더 레코드’가 성립하지 않는다. ‘오프 더 레코드’는 기본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정보를 특정한 사유에 의해 공개를 유보하는 언론의 관행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을 ‘오프 더 레코드’로 하려는 것은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려는 시도로밖에 볼 수 없다. 이럴 경우 ‘오프 더 레코드’가 성립되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다음과 같은 사례는 이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93년말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은 르네상스 위켄드 그룹이라는 모임의 회원들을 대상으로 한 호텔에서 연설을 했다. 이 때 기자 10여명이 ‘오프 더 레코드’를 조건으로 참석했다.
그런데 이 자리에는 기자들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참석했다. 기자들은 자신들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들은 내용을 단지 ‘오프 더 레코드’라는 이유로 기사화하지 않았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당시 현장에 있었던 기자들은 맹렬한 비판을 받았으며 언론계 전체가 들썩거렸다. 당시 언론 관련 잡지인 ‘에디터 앤 퍼블리셔’(Editor & Publisher)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문제점을 지적했다.
“일반인들도 참석한 자리에서 취재원이 기자를 상대로 ‘오프 더 레코드’를 요청했다면, 그것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이를 받아들인 것은 저널리스트로 기본적인 양식을 망각한 행위이다. 설령, ‘오프 더 레코드’ 조건으로 참석했다고 하더라도 클린턴이 공인인 이상 이를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가 기자에게는 없다. 그런 식으로 ‘오프’를 지킨 행동은 언론이 백악관과 현직 대통령에게 정치적 이유로 우호적이라는 일부의 비판을 정당화할 뿐 아니라 언론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를 훼손하는 행위이다.”
기자가 직접 목격한 것도 ‘오프’ 불성립
세번째로 기자가 직접 목격한 것은 ‘오프 더 레코드’가 되지 않는다. 취재원을 통해 입수한 정보가 아니라 기자가 직접 목격한 것을 ‘오프 더 레코드’로 하려는 것은 두번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려는 시도로밖에 해석할 수 없다.
뒤늦은 ‘오프’ 요구는 거부해야
네번째로 흔히 기자에게 말을 한 뒤, 뒤늦게 필요에 따라 ‘오프 더 레코드’를 거는 것은 ‘오프 더 레코드’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 정설이다. 미국의 경우 일단 발설한 말은 그 직후에 ‘오프 더 레코드’를 요청했다고 하더라도 ‘오프 더 레코드’가 성립될 수 없다. 이에 해당하는 케이스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이 각국의 사례에서 소개될 ‘거겐 케이스’이다. 일단 중요한 기사거리를 발설하고 나서, 나중에 ‘오프 더 레코드’를 거는 경우는 여론 관측용으로 흔히 동원되는 수단이기 때문에 언론의 확고한 태도가 요구된다.
다른 취재원을 통해 확인하면 ‘온 더 레코드’
다섯번째로 다른 취재원을 통해 동일한 사실을 확인했을 경우, ‘오프 더 레코드’가 될 수 없다.
다만 이럴 경우 별도의 취재원을 통해 ‘오프 더 레코드’의 내용과 동일한 사실을 확인했음을 밝히고, 정식으로 ‘오프 더 레코드’를 해제한다는 사실을 취재원에게 주지시킬 필요가 있다.
공익과 ‘오프 더 레코드’
여섯번째로 현저히 공익을 해칠 우려가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 ‘오프 더 레코드’가 될 수 없다.
미국의 언론인인 마이클 판쳐 씨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공익 때문에 ‘오프 더 레코드’를 깬 경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25년 동안 직업 언론인으로서 단 한 번 ‘오프 더 레코드’를 깬 경우가 있다. 몇 해 전 급진 환경주의자가 칼럼니스트 한명에게 ‘오프 더 레코드’를 전제로, 시위 계획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그들은 불법적이고, 심지어는 사람들의 생명에 위협을 줄 수 있는 시위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칼럼니스트는 그들에게 ‘오프 더 레코드’ 요구에 동의한 사실에 스스로 매우 화가 나 있었다. 나는 그 칼럼니스트 대신 그 환경 단체에 가서 ‘오프 더 레코드’를 깨고, 시위 계획을 경찰에 보고하겠다고 했다. 결국 그들은 시위계획을 변경해 평화적인 시위를 전개했다.”(The Seattle Times,1995년 2월 5일자)
이처럼 공익을 해칠 현저한 위험이 있는 경우는 ‘오프 더 레코드’가 지속될 수도 없으며, 언론의 판단에 따라 이를 깨는 것도 가능하다.
5) ‘오프 더 레코드’ 취재시 유의사항
취재원과 ‘오프 더 레코드’를 하기로 했다고 하더라도 실제 ‘오프 더 레코드’ 취재시 다음과 같은 사항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1 대 1’ 취재와 ‘오프 더 레코드’
우선 ‘1 대 1’로 취재를 하는 것인지를 확인해야 한다. 기자 클럽을 비롯, ‘1 대 1’ 인터뷰가 아니라 ‘1 대 다수’의 취재일 경우 ‘오프 더 레코드’가 파기될 가능성을 항상 내포하고 있다. 이 때문에 될 수 있는 한 ‘오프 더 레코드’ 취재는 ‘1 대 1’ 방식으로 하는 것이 좋다.
어쩔 수 없이 ‘1 대 다수'의 방식으로 ‘오프 더 레코드’ 인터뷰를 할 경우, ‘오프 더 레코드’의 동의 여부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추후 분쟁의 소지를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1 대 다수의 상태에서 ‘오프 더 레코드’로 취재할 경우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다른 참석자들이 녹음기로 녹음을 하고 있다든지, 아니면 수첩에 발언 내용을 적고 있으면 ‘오프 더 레코드’가 지켜질 가능성이 극히 낮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오프 더 레코드’라도 수첩엔 반드시 정리
또한 ‘오프 더 레코드’라도 취재가 끝난 뒤에는 취재내용은 될 수 있는 한 수첩 등에 정리를 해 놓아야 한다. 뒷날 동일한 취재원과의 협의 하에 다시 기사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프 더 레코드’의 의미 자체가 기사화를 자제하는 것이지, 기자 개인의 기록을 남겨 놓지 못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오프 더 레코드’라고 하더라도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종류가 다양한 만큼, 취재원에게 ‘오프 더 레코드’의 종류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확인해 둘 필요가 있다.
아울러 ‘오프 더 레코드’를 들어 주었을 경우, 그것을 지켜야 할 취재원보호의 의무가 생긴다는 점도 명심해야 한다. 취재원 보호는 성문화된 조문은 아니지만, 외부의 압력으로부터 언론의 취재활동을 보호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제3장'오프 더 레코드'의 사례
‘오프 더 레코드’를 보다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개별적인 ‘오프 더 레코드’ 사건이 어떻게 적용되는가, 그에 따른 문제는 무엇이며, 언론계 나아가 사회의 반응은 어떤 것이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실제 기자들이 취재 현장에서 접하는 ‘오프 더 레코드’의 문제는 종합적인 이론보다는 개별적인 사례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과 일본의 언론관
이 章(장)에서는 이런 목표를 위해, 미국과 일본의 사례를 소개하는 방식을 택했다. 미국과 일본의 사례를 주로 다루는 이유는 우선 두 나라의 언론관이 국내의 언론에 크든 작든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양국의 언론 환경과 ‘오프 더 레코드’를 대하는 관점이 완전히 對蹠点(대척점)에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차가 크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모든 것을 쓸 수 있다는 ‘온 더 레코드’(On the Record)가 중심인데 반해, 일본의 경우 이와는 반대로 취재원이 허가한 것만 써야 한다는 ‘오프 더 레코드’(Off the Record)가 기본이기 때문이다. 이같이 ‘오프 더 레코드’와 관련한 언론의 기본적인 행태가 다른 것은 결정적으로 양국의 언론이 처한 언론 환경과 역사, 그리고 취재관행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때문에 양국의 ‘오프 더 레코드’의 사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프 더 레코드’와 관련, 이에 영향을 주는 취재 환경을 명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본 章에서는 이같은 논리에 따라 양국의 구체적인 ‘오프 더 레코드’ 사례를 소개하기에 앞서, 양국의 취재 양태를 우선 설명하는 방식을 택했다. 양국 언론의 취재행태를 이해한다면 ‘오프 더 레코드’의 처리 상황도 이해하기 쉬울 것이기 때문이다.
양국의 사례를 소개한 뒤, 마지막 부문에서는 국내의 ‘오프 더 레코드’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하는 방식을 택했다. 구체적인 사례로는 1995년 8월 徐錫宰(서석재) 전 총무처장관의 ‘4천억 비자금설’ 발언을 다뤘다.
1) 미국
⑴ 언론 상황
미국의 ‘오프 더 레코드’ 사례는 광범위하게 보장된 미국내 언론자유만큼 다양하다. 또 ‘오프 더 레코드’도 취재의 한 형태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탐사 저널리즘(Investigative Reporting)의 발달과 함께 記名(기명)으로는 공개되기 어려운 정보를 ‘오프 더 레코드’를 이용해 이끌어 내기도 한다.
‘온 더 레코드’가 기본원칙
그러나 미국에서는 ‘오프 더 레코드’는 예외이며 모든 취재내용은 ‘온 더 레코드’임을 전제로 한다. ‘오프 더 레코드’는 기자가 듣기만 하고 기사화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그렇게 얻은 정보는 비밀로 해야 하기 때문에 많은 기자들이 ‘오프 더 레코드’로 취재를 하지 않는다. 또한 대다수의 기자들은 취재원들이 ‘오프 더 레코드’를 전제로 얘기를 하려고 할 때, ‘온 더 레코드’로 하도록 설득한다. (Gene Goodwin and Ron F. Smith, Groping for Ethics in Journalism, Iowa State Univ. Press, America, p148∼149)
이같은 ‘온 더 레코드’ 중심의 취재 태도는 이미 20세기 확고하게 뿌리를 내렸다. 20세기초 미국의 기자들은 취재의 한계를 의식하지 않았다. 기자들은 취재원들이 이야기한 것을 다소 부정확하더라도 직접 인용하는 형식으로 기사를 썼다. 그게 일종의 관행으로 굳어졌는데, 이런 취재 태도는 입법부, 법원, 그리고 정부기관과 기업체의 취재에 그대로 적용되었다.
뉴스거리를 제공한 사람은 기사에 실명으로 등장했다. 또한 뉴스원이 한 말은 그대로 직접 인용되었다. 만약 취재원이 엄청난 분량의 자료를 내놓고 기자들이 자료를 연구하도록 며칠간의 기간을 두자고 제의할 경우 엄청난 반대에 직면했다. 언론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였다.
또한 취재원이 뉴스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이름이 인용되는 것은 기피한다면, 그런 취재원은 즉각 선동가(Propagandist)라고 심한 비난을 받아야 했다. (John Hohenberg, 1973, The Professional Journalist, Holt Rinehart And Winston Inc., p329)
그러나 이런 ‘온 더 레코드’의 대원칙도 그 이후 큰 변화과정을 겪는다.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정부의 언론통제가 강화됐는데, 종전 후에도 이런 움직임이 계속됐다.
언론자유와 ‘알 권리’
이에 언론계 내부에서 스스로 언론자유라는 커다란 흐름을 창출해 냈다. 바로 ‘알 권리’라는 개념이었다.
이 개념은 AP통신의 켄터 쿠퍼 사장이 2차 대전후 미국 역사상 뿌리깊게 내려져 있는 ‘언론자유’라는 개념을 되살린 것이었다. 민주 제도가 건전하게 기능하기 위해서는 주권자인 국민은 국정을 비롯, 그 외의 것들에 대해서도 알 필요가 있다는 생각은 미국인들에게는 뿌리 깊은 것이었다.
1791년 확정된 연방헌법 수정안 1조도 언론의 자유를 강력하게 보장하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제 2차 세계대전중 전쟁 목적으로 보도통제를 상례화한 정부기관이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를 일상화하려고 했다. 이에 따라 미국 신문편집인협회(ASNE) 정보자유위원회가 1953년 ‘국민의 알 권리’라는 이름의 글을 발표해 이를 저지했다.
그러다 1962년 4월의 미국의 쿠바 침공 계획, 1962년 10월의 소련의 핵미사일 배치 등 일련의 ‘쿠바 위기’ 사건이 발생했으나, 이런 움직임의 일부밖에 국민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 국무성 대변인은 “국가 위기의 경우 정부는 이를 국민에게 알리지 않아도 될 권리를 갖고 있다”고 발표했다.
미국의 ‘정보자유법’
이를 계기로 언론 내부에서 적극적으로 정보의 공개를 촉진하자는 이른바 ‘정보자유법’(Freedom of Information Act)이 활발하게 논의되기 시작했다. 정보자유법은 1946년 제정된 ‘연방행정절차법’을 수정하는 형태로 1967년 발표되었다. 그러나 워터게이트 사건 등이 터지면서 비밀 행정에 대한 경종이 울렸다. 이에 따라 정치인, 고급 공무원, 재판관의 윤리문제 등 거의 모든 부문의 공적 관련 활동에 대한 정보의 공개를 의무화하는 정도까지 정보자유법의 적용이 확대됐다.
이처럼 미국 언론의 경우 정부와의 갈등을 통해, 언론의 자유와 ‘알 권리’를 확보한 만큼 기본적으로 미국 언론은 ‘오프 더 레코드’를 최소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과 함께 정보의 양도 많아지고, 이를 해석하는 것도 복잡해지면서 ‘오프 더 레코드’ 방식의 취재도 실제 다양하게 이용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면 ‘오프 더 레코드’와 관련된 미국의 언론상황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례별로 살펴보도록 하자.
⑵ 사례
① ‘金(금)본위 제도’ 도입과 익명 보도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미국의 경우 정부가 언론에 개입하는 것을 지극히 못마땅해 하는 것이 언론의 분위기였다. 그러나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단시간 내에 사안을 파악해 기사를 전달하는 것이 불가능해지기 시작했다.
발언자를 익명으로 처리
이에 따라 배경설명(Background Briefing)이라는 형태로 발언자를 밝히지 않고 기사를 쓰는 광의의 ‘오프 더 레코드’가 1934년 처음 등장했다. 당시 미국은 ‘금본위 제도’를 채택하려고 했는데 백악관 출입기자들이 스티브 얼리 대변인을 찾아가 이 조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배경설명을 요청했다. 대변인은 재무부 간부를 불러 금본위 제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강의, 기사작성을 도왔다. 그러나 대변인은 재무부 관리의 이름과 직함을 밝히지 않도록 요구했다.
이런 취재방식, 즉 발언자를 익명으로 처리하는 방식은 유럽, 특히 영국의 취재전통을 차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영국의 경우 미국과는 달리, 내각제인 관계로 職業公務員制度(직업공무원제도)가 확실하게 정착돼 있어 직업 관리들은 항상 익명으로 남는 것이 대원칙이었다. 또한 모든 책임은 선출직 각료들이 져야 했다. 반면 대통령제에 따라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수천개의 자리가 바뀌는 미국에서 이런 취재방식은 한동안 확립되지 못하다가 30년대 들어서야 도입됐다.
② 아이젠하워의 ‘오프 더 레코드’
좁은 의미의 ‘오프 더 레코드’, 즉 취재 내용을 전면적으로 보도하지 않는 ‘오프 더 레코드’가 등장한 것은 2차 세계대전 중이었다. 일종의 戰時(전시) 보도통제의 한 방편이기도 했다.
2차대전중 연합국 사령관이었던 미국의 아이젠하워 장군은 북아프리카 작전 도중 시실리섬 침공을 계획했다. 기자들이 이미 전황에 대해 깊숙하게 취재를 했기 때문에, 기자들이 미리 그의 상륙작전을 눈치채고 기사화할 수도 있다고 아이젠하워는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낭패라고 여긴 그는 기자들을 불러놓고 사실을 공개했다.
그대신 ‘오프 더 레코드’를 걸었다. 戰勢(전세)를 바르게 예측하기 위해 정보는 주지만 상륙작전이 성공할 때까지는 일체 말하지도 쓰지도 말아 달라는 조건이었다. 이 과정에서 국익을 생각해 달라는 요구도 곁들였으며, 기자들은 장군의 요구를 존중해 약속을 지켰다. 이후 아이젠하워는 수차례 ‘오프 더 레코드’를 사용했다.
③ 린들리 룰(Lindley Rule)
1960년대 들어서면서 일반화된 ‘오프 더 레코드’ 방식은 이른바 ‘린들리 룰’이었다. ‘오프 더 레코드’라고 하면 곧바로 이 린들리 룰을 떠올렸다. 린들리 룰은 ‘오프 더 레코드’를 ‘강제성이 있는 표절’이라는 말로 표현한 뉴스위크의 어네스트 린들리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어떻게 정보를 얻었는가만 쓰지 않으면 된다”
그가 설명하는 ‘오프 더 레코드’는 정보를 어떤 방식으로 얻었는가에 대해 쓰지만 않는다면 무엇이든 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엄밀히 말해 심층배경 정보와 같은 것으로 취재원이나 출처를 밝히지 않는 대신 기사는 완전히 풀어서 쓸 수 있는 방식이다. 따라서 이는 반은 ‘오프 더 레코드’, 반은 ‘온 더 레코드’ 방식이다.
1961년 뉴욕 타임스의 제임스 레스턴도 이런 방식으로 케네디 대통령과 후르시초프 간의 비엔나 정상회담 결과를 기사화했다. 레스턴은 회담이 끝난 뒤 직접 케네디 대통령과 이야기를 나눴지만 이런 사실을 기사화하지 않고, “대통령은 후르시초프가 베를린 위기를 이용하려고 하기 때문에 매우 우울하다”는 내용만으로 회담의 결과를 지면에 반영했다. 1960년대에 ‘오프 더 레코드’는 곧 바로 린들리 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④ 키신저와 ‘오프 더 레코드’
1970년대 들어오면서 ‘오프 더 레코드’가 다종 다양하게 이용되기 시작했다. 특히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사람이 키신저였다.
‘오프 더 레코드’를 적극 활용한 키신저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중에도 끊임없이 주요 신문에 ‘백악관 고위관리’라는 표현이 계속 등장했다. 그런 기사들은 주로 미국 정부가 파키스탄을 두둔하는 정책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아리조나주 출신 공화당 상원의원인 골드워터 씨는 이 ‘백악관 고위관리’가 당시 닉슨의 안보보좌관이었던 키신저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고 키신저가 약 50여명을 상대로 익명 보도를 전제로 브리핑했다는 사실을 공식으로 의회기록에 포함시켰다.
애초에 키신저의 브리핑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시작됐다. 백악관 대변인인 로널드 지글러는 기자들에게 키신저를 소개한 뒤 브리핑과 관련된 기본원칙을 정했다. “키신저가 말하는 것은 배경설명이다. 백악관 관리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지만, 곧바로 키신저라고 인용하는 것은 안된다”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진행되던 브리핑이 골드워터 의원에 의해 충격적으로 밝혀지자 그후 키신저는 기자 전체를 상대하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 배경설명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소수로 제한하기 시작했다. 키신저는 소수의 기자를 불러 닉슨과 프랑스 퐁피두 대통령의 회담 결과를 배경설명 형식으로 알려줬다.
“소련이 파키스탄과 전쟁중인 인도와의 관계를 적절하게 제어하지 않고 계속 지원한다면, 소련과의 관계를 전면 재검토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키신저와 워싱턴 포스트 간의 긴장
당시 배경설명에 참여하지 못한 워싱턴 포스트는 키신저의 배경설명 내용을 입수한 뒤 키신저의 이름을 넣어 이를 기사화했다. 뉴욕 타임스도 워싱턴 포스트와 같은 방식을 취했다. 이런 상황에서 키신저를 보호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결국 백악관은 키신저의 발언 내용을 부인했다.
밴자민 브래들리 워싱턴 포스트 편집국장은 이 사건을 계기로 배경설명이나 ‘오프 더 레코드’를 “정부가 자기 구미에 맞는 기사만 실리도록 하는 수레나 마찬가지”라며 이런 관행을 비판했다. 그리고 워싱턴 포스트의 편집정책은 “취재원을 명백히 밝히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임을 천명했다.
또한 “‘오프 더 레코드’나 배경설명이라는 迷妄(미망)에 너무 오래 빠져 있었으며 이에 따라 독자에게도 불성실했다”는 사실을 기자들에게 주지시켰다. 한편으로 뉴욕 타임스의 로젠탈 편집국장은 “수긍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을 때만 배경설명에 참석하도록 주문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키신저와 워싱턴 포스트의 ‘오프 더 레코드’를 둘러싼 긴장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오프 더 레코드’ 전제로는 취재 못한다”
워싱턴 포스트의 부로더 기자는 75년 여름 포드 대통령이 소련에서 망명한 반체제 작가 솔제니친을 백악관으로 불러 접견할 계획이지만, 키신저가 이를 반대한다는 소식을 입수하고 키신저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기사를 썼다. 키신저는 소련 지도자들과 화해협상을 진행중인 마당에 소련에서 쫓겨난 솔제니친을 환대한다면 데탕트 외교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이에 반대한다는 논리였다. 이에 대해 브로더는 키신저의 논리는 국무부 정책의 취약성을 드러낼 뿐 아니라 포드 대통령의 위상을 고려하지 않은 잘못된 판단이라고 비판했다. 칼럼이 나간 뒤 크게 흥분한 키신저는 브로더를 불렀으며, 자신의 입장을 설명했다. 이에 부로더 기자는 그의 발언 내용을 그대로 받아 적기 시작했다. 키신저가 “‘오프 더 레코드’를 전제로 이야기를 할 수 없다면 대화를 계속할 수 없다”고 못박았고, 부로더 기자는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키신저의 ‘오프 더 레코드’나 인용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한 배경설명은 그후에도 계속됐는데, 중동협상 당시 기자들에게 배경설명을 하면서, ‘국무장관 비행기에 동승한 고위관리’라는 수식어를 사용하도록 요구했다.
이처럼 자기 이름이 인용되는 것을 꺼리면서도 배경설명을 남발한 키신저에 대해 아트 부츠왈드는 다음과 같이 그를 비난하기도 했다.
“곱슬머리에 뿔테 안경을 쓰고, 독일식 영어를 사용하면서 익명을 요구한 백악관의 고위관리는 ∼라고 말했다.”
⑤ 포드 대통령의 사례
백악관을 둘러싼 ‘오프 더 레코드’ 사건은 1975년 또 한번 큰 전기를 맞는다. 포드 대통령은 뉴욕 타임스 편집 관련 데스크들과 점심을 하면서 CIA가 외국원수 암살계획에 연루되어 있다고 말을 했다. 당시 대변인이었던 론 네센은 이 광경을 목격하고 이 내용은 ‘오프 더 레코드’라고 했다. 뉴욕 타임스는 이 문제를 놓고 내부 격론을 거친 끝에 비밀을 지키기로 했다.
한편 이 내용을 별도로 입수한 다니엘 스코러 기자는 윌리암 콜비 CIA 국장에게 이 사실을 확인한 후 CBS 이브닝 뉴스에 특종보도했다. 결국 이 사건은 의회에서 CIA가 카스트로와 기타 제3세계 지도자 암살 계획에 연루된 사실을 조사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⑥ 데이비드 거겐 사례
워싱턴의 언론 전통은 관리들이 일단 말을 꺼낸 뒤에는 ‘오프 더 레코드’를 걸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레이건의 공보 담당이었던 거겐이 이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말을 꺼낸 뒤 ‘오프 더 레코드’는 무효”
어느 주말 워싱턴의 한 호텔에서 미국내 광고회사 대표 1백5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강연회가 열렸다. 거겐은 그 자리에서 약 30분에 걸쳐 강연을 하면서 관리로서는 상당히 솔직한 태도를 취했다. 기자들과 평소 접할 때보다 훨씬 개방적인 태도였다. 질의 응답시간이 되자 참석자 중의 한명이 동유럽 대학생들의 반핵운동을 어떻게 보느냐고 물었다. 한참 얘기를 하던 중 갑자기 거겐이 “이건 ‘오프 더 레코드’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때 AP의 마이크 파인실버 기자가 “아니오”라고 답했다. “어디 소속입니까”라고 거겐이 물었다. “AP요.” “그러면 배경설명으로는 안될까요.” “안됩니다.”
이 거겐의 사례는 ‘오프 더 레코드’와 관련, 대표적으로 인용되는 사례이다. 이 사례를 통해 일단 말을 꺼낸 뒤에 ‘오프 더 레코드’를 요구하는 것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다시 한 번 확인됐다.
⑦ 밀턴 콜먼의 사례
공익 우선의 비교형량 원칙
1970년대말 이후 ‘오프 더 레코드’를 깨는 사례가 더욱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를 위한 논리로 등장한 것이 “뉴스를 알리는 것이 비밀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논리였다. 이른바 公益(공익) 우선의 比較衡量(비교형량)의 원칙이었다.
이렇게 ‘오프 더 레코드’가 쉽게 깨지게 된 이유는 키신저를 비롯, 관리들이 ‘오프 더 레코드’를 남발한 데다, 워터게이트 사건 등 정부의 비밀행정에 대한 불신이 높아진 상황을 반영한 것이었다.
“유태인을 비속어인 ‘히미’라고 불렀다”
워싱턴 포스트 정치부 기자로 활동하던 밀턴 콜먼은 어느날 민주당 대통령후보 지명전에 뛰어들었던 제시 잭슨에게 초청을 받았다. 제시 잭슨은 역시 흑인인 콜먼에게 “흑인 대 흑인으로 얘기합시다”라고 제안했다.
콜먼은 제시 잭슨이 그런 이야기를 하면 그것이 ‘오프 더 레코드’를 의미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콜먼은 잭슨이 유태인을 비속하게 부르는 ‘히미’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히미타운에서 그들이 얘기하는 것은 이스라엘 점령지뿐이다’라고 얘기했다. 콜먼은 제시 잭슨이 한 얘기를 정확하게 기억해 두었으나 곧바로 기사화하지는 않았다. 두서없이 한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콜먼은 제시 잭슨과 유태인과의 나쁜 관계에 대해 기사를 쓰던 동료에게 자신이 들은 얘기를 했다. 동료 기자는 콜먼의 멘트를 인용, “잭슨이 사적인 자리에서 뉴욕을 히미타운, 유태인을 히미라고 불렀다”고 썼다. 애초에 이 기사는 별 주목을 끌지 못했으나, 워싱턴 포스트가 사설로 제시 잭슨의 발언을 문제삼아, 해명을 요구하면서 문제는 확대됐다. 잭슨은 애초에 그렇게 발언한 사실이 없다고 부인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결국 그의 발언이 분별없는 것이었음을 인정하는 선으로 후퇴했다.
콜먼은 그가 동료 기자에게 잭슨의 발언내용을 언급한 것을 지극히 타당한 행동이라고 여겼다. 제시 잭슨이 미국 최고의 자리인 대통령에 도전하고 있고, 미국 유권자의 특정집단을 모략하는 발언을 했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이 공익에 부합한다는 논리였다.
⑧ 노스 중령의 사례
거짓 증언과 공익
콜먼의 케이스와 함께 공익이라는 명분하에 ‘오프 더 레코드’를 깬 사건으로 인용되는 것이 ‘올리버 노스 케이스’이다.
레이건 정부하에서 올리버 노스 해병중령은 이란으로 무기를 수출한 대금으로, 중남미 反共(반공) 게릴라에게 무기를 제공하는 데 깊이 관여했다. 이런 사실이 밝혀져 의회에 불려가게 되자 그는 의회에서 거짓 증언을 한다. 의회가 이를 알아차리고 위증을 문제삼았다. 그러자 노스 중령은 의회에서 너무나 많은 정보가 유출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조치임을 강조했다. 그리고 의회에서 정보가 누출된 몇가지 사례를 들었다. 많은 기자들이 노스의 주장을 듣고 깜짝 놀랐다. 기자들의 상당수가 실제 그런 정보를 흘린 장본인이 바로 노스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뉴스위크에서는 내부 논의를 거친 끝에 ‘오프 더 레코드’를 깨기로 결정했다. 뉴스위크의 편집인은 다음과 같이 회사의 입장을 밝혔다.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을 감안, 우리는 실제 정보를 유출한 사람이 바로 올리버 노스 중령이라는 사실을 밝혀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낀다.”
콜먼과 노스의 사례처럼 공익을 더욱 중시해서 ‘오프 더 레코드’를 깬 경우는 기자들이나 언론 관계자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이런 경향에 제동을 거는 사회적인 분위기도 동시에 생겨났다. 이를 반영한 것이 코헨 케이스이다.
⑨ 댄 코헨 케이스
1982년 지방정부의 부지사 선거를 앞두고 있을 당시, 공화당 간부인 댄 코헨은 민주당 부지사 후보로 나선 말렌 존슨에 관한 정보를 4명의 기자들에게 비밀로 해 줄 것을 전제로 제공한다. 4명의 기자들 역시 비밀로 하기로 하고 코헨의 얘기를 듣는다. 그 내용은 그녀가 약 12년전에 절도를 했으며, 그로 인해 벌금을 물었다는 것이었다. 기자들이 사실확인을 하는 과정에서 말렌 존슨이 그녀의 아버지 사망으로 경황이 없는 가운데 바느질 도구를 산 돈 6달러를 갚지 않아 절도죄 처벌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에 이런 정보를 안 WCCO-TV는 기사를 보도하지 않았다. AP는 코헨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기사를 내보냈다.
스타 트리뷴 편집간부들의 격론
그러나 스타 트리뷴지 간부들은 이런 종류의 폭로는 반드시 취재원의 이름을 밝혀야 한다고 여겼다. 15명의 편집간부들이 격론 끝에 12년 전의 경미한 사건은 기사가 되지 않으며, 오히려 공화당이 더러운 선거전략을 사용하고 있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다른 기자를 시켜 취재한 결과, 수년 전 존슨의 절도사실을 취재한 사람이 공화당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람임이 드러났다.
스타 트리뷴지는 기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취재원을 실명화해 기사를 썼다. 또다른 신문인 파이어니어지도 비슷한 결론에 입각해 취재원의 이름을 밝히는 기사를 썼다. 결국 댄 코헨은 파렴치범으로 지목돼, 다니던 광고회사에서 해고됐고, 두 회사를 상대로 거액의 소송을 걸었다.
이에 1차 판결에서는 양사에 대해 코헨에게 20만 달러를 제공하라는 판결을 내렸으나, 2차 미네소타주 대법원 판결에서는 코헨이 패배했다. 결국 연방대법원까지 소송이 진행됐고 1991년 6월 24일 최종판결이 나왔다. 결과는 5 대 4로 코헨측의 승리였다. “언론은 취재원과 맺어진 약속을 파기할 수 있는 언론의 자유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 판결의 취지였다.
코헨의 승소와 ‘오프 취재’ 규정 재정비
승소 판결을 내린 바이런 화이트 대법관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계약은 비록 그것이 일시적으로 언론의 취재와 보도기능을 제한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판단을 내렸다. 한편 소수 의견을 낸 데이비드 대법관은 “코헨의 이름을 밝힘으로써 유권자들에게 후보자를 결정하는 데 필요한 지평을 열어 주었다”며, “따라서 이는 언론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보호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판결이 나오자 언론계에서는 엄청난 파장이 일어났다. 우선 두회사를 대표해 소송을 진행했던 렉스 하이케 변호사는 “기존의 기자들이 ‘오프 더 레코드’의 정의를 애매하게 한 상태에서 취재를 한 뒤 이를 기사화하는 방식을 버리라고 고객 언론사에게 충고할 것”이라고 말했다. 제인 커틀리 언론자유를 위한 기자연합회장은 “법원이 언론문제에 간섭하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강력히 비판했다. (St. Louis Post Dispatch, 1991년 6월 25일자)
언론계, ‘오프 더 레코드’ 관련 규정 재정비
이런 비판이 인 가운데 언론계 내부에서도 각사별로 ‘오프 더 레코드’ 관련 취재 규정을 재정비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됐다. 우선 많은 신문들이 기자들에게 익명을 요구한 사람들의 이름과 이유를 상사에게 보고토록 했다.
내쉬빌의 ‘테네시안(The Tennessean)’ 紙는 ‘오프 더 레코드’에 관한 요구가 과연 타당한지를 편집국 간부들이 직접 검토하도록 했다. 만약 간부들이 ‘오프 더 레코드’나 익명처리하는 것이 좋지 않을 것같다는 판단을 내릴 경우, 기자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정했다. 물론 이 같은 규정이 실효성이 없다는 현장기자의 지적도 나왔다.
1990년대 들어 언론과 취재원간의 ‘오프 더 레코드’를 둘러싼 상호 긴장관계가 형성됐다. 이로 인해 큰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았다. 그러다 1995년 CBS앵커우먼인 코니 정의 깅리치 하원의장 어머니 인터뷰사건과 힐러리 클린턴 간담회의 ‘오프 더 레코드’를 뉴욕 타임스가 깬 사건으로 인해 ‘오프 더 레코드’가 다시 주목을 끌었다.
⑩ 코니 정 사례
“힐러리는 잡년” 보도
중국계 미국 여성으로 미국 3대 네트워크중의 하나인 CBS의 앵커우먼 코니 정. 그녀는 ‘Eye To Eye’라는 자신의 프로그램에서 미국 하원의장 뉴트 깅리치의 어머니 캐서린을 등장시키기 위해 인터뷰를 했다. 당시 뉴트 깅리치는 미국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을 이끌고 압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백악관과 정면대결 자세를 취해, 미국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던 시기였다.
이런 와중에서 코니 정이 깅리치의 어머니와 인터뷰를 하게 된다.
코니 정은 깅리치의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깅리치가 힐러리에 대해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하더냐”고 묻자, 깅리치의 어머니인 캐더린은 대답을 꺼렸다. 그러자 코니 정은 “우리 둘만 살짝 알면 되지 않느냐(Why don’t you whispher between you and me?)”고 말했다. 캐더린은 그제서야 “잡년(She is a bitch.)”이라고 말했다.
깅리치와 백악관에 큰 파장
이 방송은 1995년 1월 5일 방영되었다. 캐더린의 발언은 백악관과 깅리치에 큰 파장을 미쳤다. 결국 깅리치측이 사과를 하면서 사태가 마무리됐다. 깅리치측은 자신의 어머니가 그 내용이 방송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다며 그런 행동은 멸시당할 만한 것이라고 코니 정에 대해 혹평을 했다.
코니 정에 대한 비판
언론 내부에서의 문제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코니 정의 양식을 질타하는 소리가 높아졌고,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의견에 동조했다. 그러나 CBS측은 캐더린이 CBS뉴스 카메라 앞에서 명백히 방송이 되는 줄 알면서 그런 말을 꺼냈기 때문에 사실상 ‘오프 더 레코드’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명백히 텔레비전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는 상태에서 함부로 얘기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의문이라는 의견을 한편으로는 펴면서, 양식있는 방송이라면 적어도 그 방송이 생방송이 아니었기 때문에 캐서린에게 그 내용을 재확인하고 본인이 원하지 않는다면 삭제해야 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⑪ 힐러리 클린턴의 사례
코니 정의 사건이 일어난 지 나흘 뒤인 1월 9일 힐러리 클린턴이 미국 주요 일간지 스타일 담당기자와 칼럼니스트 10여명을 초청해 점심 식사를 했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뉴욕 타임스의 마리안 부로스 기자는 힐러리가 “그간 정책을 다루는 데 서툴렀고, 실패투성이였다”는 말을 인용해 기사화했다.
뉴욕 타임스만 기사화
그날 힐러리의 비서진들은 사전에 이날 대화 내용이 ‘오프’라고 통보했으나, 실제 대화 중간중간 ‘오프’를 해제했다. 이때 참석했던 다른 기자들은 뉴욕 타임스 기자와는 달리 힐러리의 패션 스타일에 대해서만 기사화했다. 부로스의 기사가 나가자 힐러리는 엄청나게 화를 냈다. 다른 기자들도 부로스 기자를 비판했다. 뉴욕 포스트의 칼럼니스트인 신디 아담스는 “부로스가 힐러리의 신뢰를 저버림으로써 앞으로 취재할 수 있는 기회를 완전히 봉쇄당해 버렸다”고 기사에다 적었다.
하지만 뉴욕 타임스는 단호한 입장을 택했다. “‘오프’였다, 아니다 하는 불분명한 상황에서 보도를 한 것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언론계 내외에서 많은 논란이 있었다. 대체적인 결론은 당시의 상황을 고려한 것이라는 평가였다. 힐러리의 주도로 이루어진 의료보장제도가 중간에서 좌초되자, 많은 사람들이 힐러리를 비판하던 때였고, 당연히 그녀의 발언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국정을 이끌어 가는 사람에 대한 유권자들의 관심은 당연한 것이고, 뉴욕 타임스는 국민들의 ‘알 권리’를 충족시켜 주었다는 것이었다.
‘오프’를 가급적 줄이려는 미국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미국의 경우 언론의 기본적인 태도는 ‘오프 더 레코드’를 인정하지 않는 데에서부터 출발했다. ‘오프 더 레코드’는 예외였다.
그러던 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오프 더 레코드’도 많아지고, ‘오프 더 레코드’가 국민들의 ‘알 권리’, 언론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비판도 거세게 되었다. 현재는 양자 간의 긴장관계에 의해 ‘오프 더 레코드’를 될 수 있으면 줄이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2) 일본
⑴ 언론 상황
“일본은 기사에 취재원을 밝히는 일이 희박하다”
일본의 경우 ‘오프 더 레코드’의 사용이 일상화된 취재 관행으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 간담회, 오찬 등 각종 취재 관련 모임이 있지만 이런 자리에서 논의된 내용이 기사화되는 경우는 기사화되지 않는 경우 보다 적다는 것이 일본 기자들의 자기진단이다.
일본의 언론인 니시야마 다케노리(西山武典) 씨는 이렇게 비판한다.
“일본의 신문에서 취재원을 기사에 명시적으로 밝히는 습관이 아주 희박하다. 취재원을 명백히 함으로써 무책임한 정보가 뉴스로 바뀌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인데도 일본 신문업계는 특히 이런 노력이 부족하다.” (西山武典, 1996, 誤報, 虛報そして情報操作, 現場からみた新聞學, 學文社, p73)
그리고 일본은 일단 ‘오프 더 레코드’가 걸리면 상당히 잘 지켜지고 있는데 ‘오프 더 레코드’를 어겼을 경우 취재원으로부터 뿐 아니라 직접 몸담은 언론사로부터도 제재를 받기 때문이다. 이는 취재원과 언론사와의 관계를 장기적으로 정보를 주고 받는 관계로 보는 언론관이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는 데 기인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미국의 ‘개방적’ 취재와 판이한 일본
한마디로 일본 기자들은 미국 기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입장에서 취재한다고 볼 수 있다. 미국에서는 취재원이 특별히 ‘오프 더 레코드’를 요구하지 않는 한 취재원의 이름뿐 아니라 모든 사실을 밝힐 수 있는 반면 일본은 이와는 정반대이다. 즉 일본에서는 취재원의 적극적인 동의가 없이는 취재원과 취재내용을 기사화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日本新聞協會(일본신문협회) ‘取材(취재)와 報道(보도) - 新聞編集(신문편집)의 基準(기준) 개정 2판’의 ‘취재원 보호’편에 다음과 같이 이를 명백히 밝히고 있다.
“신문 기자는 취재 상대방의 승락 없이, 취재원을 밝힐 수 없다. 이런 룰이 깨지면 취재원은 안심하고 사실과 의견을 신문기자에게 말할 수 없게 되고, 그렇게 되면 신문에 제공되는 정보도 극히 제한된 것이 된다. 결국 취재기반이 상실되며, 국민의 ‘알 권리’도 제한받게 된다.”(取材と報道, 1993, 新聞編集の基準, 日本新聞協會, p165)
이와 같이 미국의 취재관행이 개방적 취재라면 일본의 취재 관행은 폐쇄적 취재라고 볼 수 있다. 폐쇄적인 일본의 취재 관행은 일본의 言論史(언론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본 언론의 경우 2차 세계대전 이전엔 언론이 극심하게 정부에 종속되어 있었다. 자유주의적 언론관이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정부에 의한 언론 통제가 극심했다. 사실상 언론이 정부의 정책을 알리는 기관지와 같은 성격으로 전락했다. 특히 통신사 등의 경우 제국주의 시절에는 정부의 정보 수집기관 역할까지 병행했다.
또한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언론인의 위상이 관리에 비해 형편없이 낮았다.
‘情報在官’(정보재관)이라는 편법이 지배하는 상황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보도’와 ‘비판’이라는 양 날개를 가진 언론 보다는 단지 사실(Fact) 전달만을 중시하는 언론의 자세를 지니게 되었다. 언론에 대한 정부의 우위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지금까지도 지속적으로 지켜져 오고 있다는 것이 일본 언론인들의 평가이다.
최근에는 특히 官給記事(관급기사)를 통해 정부에서 언론을 다루고 있다는 분석이다. 관급기사에 대한 비중이 높다 보니, 결국 정보를 쥔 官(관)을 비롯한 취재원에 대해 언론이 열세를 면치 못하게 됐다는 주장도 상당히 설득력이 있게 받아들여진다.
특히 일본의 경우 미국에 비해 ‘정보가 곧 힘’이라는 관료들의 인식이 뿌리깊게 내려 있고, 정보공개법도 1990년대 들어서야 논의되기 시작해 기자들의 입장자체가 취약하다. 한마디로 ‘情報在民’(정보재민)이라는 원칙보다는 ‘情報在官’(정보재관)이라는 편법이 지배적인 상황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당연히 ‘오프 더 레코드’도 기자와 취재원간의 합의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취재원 쪽에서 일방적으로 정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외에 ‘오프 더 레코드’와 관련,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각 출입처마다 있는 기자 클럽이다. 총리 관저나 각 부, 주요 정당의 기자 클럽은 공식 기자회견과는 별도로 간담회 등의 명목으로 ‘오프 더 레코드’ 형태를 띤 취재가 자주 진행된다. 기자 클럽은 각종 취재의 조정 뿐 아니라 클럽 내의 약속을 어겼을 경우 가맹사들에 대해 일정 정도의 처분까지 내릴 수 있는 상당히 강한 권한을 갖고 있다. 물론 ‘오프 더 레코드’도 기자 클럽 내부에서 정하기도 한다.
일본의 ‘기자 클럽’
기자 클럽에 관해 일본 産經新聞(산케이신문) 서울 지국장 구로다 가쓰히로(黑田勝弘)는 ‘신문과 방송’ 1995년 10월호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일본에서는 기자들이 개인 행동이 아니라 다른 기자의 움직임을 신경쓰면서 비슷한 행동을 취하려고 하는 집단지향성이 있다. 따라서 간담회 등을 통해 ‘오프 더 레코드’를 처리함에 있어서 그것을 무시함으로써 다른 기자로부터 고립되고, 정보원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 한다. 일본의 ‘오프 더 레코드’에도 일본적인 특징이 나타나 있다.”
日本新聞協會(일본신문협회)는 기자 클럽 운영과 관련, ‘오프 더 레코드’ 처리 문제를 다음과 같이 하도록 밝히고 있다. 1962년 작성된 ‘오프 더 레코드’ 처리 준칙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프 더 레코드’는 취재원으로부터 외부로 밝히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제공된 정보에 대한 도덕적 의무를 의미한다. 만약 약속을 깬다면 기자와 취재원간에 이를 해결하는 것이 당연하다. 단, ‘오프 더 레코드’를 남용, 부당하게 취재원에게 뉴스 선택권을 주어서는 안된다”고 밝히고 있다. (日本新聞協會, 取材と報道-新聞編集の基準, 1993, p124)
그러나 이 규정의 앞 부분에도 나와 있듯, 기자 클럽에서 실제 비중을 두는 것은 ‘오프 더 레코드’의 남용에 대한 경계 보다는 도덕적 의무의 준수에 훨씬 무게를 두고 있다. 이 규정에 의거해 실제 ‘오프 더 레코드’를 깼다고 기자 클럽에서 판단을 내릴 경우 해당 기자에게 주의, 기자 클럽 출입정지, 기자 클럽 축출 등의 제재를 가한다.
‘오프’ 파기와 ‘기자 클럽’의 제재
일본의 경우 실제 취재의 상당 부분이 기자 클럽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기자에게는 치명적인 징계일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언론인들은 “서로 다른 언론사의 기자들이 제재를 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이며, 운영 자체도 폐쇄적이다”라는 이유를 들어 기자 클럽의 해체를 주장하기도 한다.
기자 자신들이 갖는 기자 클럽에 대한 인식도 부정적이다. 93년 日本新聞協會(일본신문협회)가 기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복수 응답)에 따르면, “기자 클럽을 통해 감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응답은 불과 15.1%인 반면, “획일적 보도와 연결되기 쉽다”는 응답은 73.7%, “정보조작이 되기 쉽다”는 반응은 64.9%나 됐다.
“국민의 ‘알 권리’를 침해한다”
이밖에도 기자 클럽 차원에서 정보를 취급하면서 각종 약속과 협정을 남발해 결과적으로 국민들의 ‘알 권리’를 침해하고 있는 점, 취재원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취재원의 동향을 감시하고 알리는 기능을 상실하는 점, 그리고 기자 클럽에서 제공하는 정보에만 의존함으로써 독자적인 취재능력이 상실된다는 점을 들어 기자 클럽을 맹비난하는 경우도 있다. (田村紀雄-林利隆, 1995, ジャ-ナリズムまなぶ人の ために, 世界思想社, p118)
이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기자 클럽은 지속적으로 존재하며, 사실상의 정보를 독점하는 정보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다.
이와 같이 언론 전반의 분위기가 ‘오프 더 레코드’를 중요시하는 분위기임에도 불구하고 ‘오프 더 레코드’의 내용이 외부로 유출되지 않는가 하면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다. 이른바 이중적인 정보 유통구조를 통해 실제 ‘오프 더 레코드’ 정보가 버젓이 유통된다.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직접 ‘오프 더 레코드’ 내용이 보도되는 것이 아니라, 잡지나 情報誌(정보지) 등을 통해 유출되는 것이다.
일본의 이중적인 정보 유통구조
사실 일본의 경우 취재 행태상 간담회의 발언은 익명 처리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간담회의 발언 내용은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에 따라 정식 기자회견은 형식적으로 그치고 간담회의 내용은 ‘오프 더 레코드’가 된다. 그러나 ‘오프 더 레코드’로 걸린 내용은 일정 시간이 지난 뒤 잡지나 출판물을 통해 그 내용을 게재한다.
특히 일본의 경우 신문-방송과는 별도로 文藝春秋(문예춘추) 등의 잡지를 비롯한 강력한 출판시장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런 것이 가능하다. 또한 구치코미(口コミ)라고 해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소문의 형태로 외부에 흘리는 경우도 있다. 이런 정보는 다시 각종 정보 잡지를 통해 흘러나가게 된다. 심지어 신문에서 발행하는 몇몇 유력 주간지에서도 ‘오프 더 레코드’ 정보라는 타이틀로 이를 보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잡지에 실린 내용은 누구도 공적으로 문제삼지 않는다. “기억이 없다”는 식으로 무시하는 선에서 취재원도 끝을 낸다.
정계 실력자의 비공식 발언을 잡지에 소개
다음과 같은 사례가 전형적인 일본의 ‘오프 더 레코드’ 유통구조이다. 일본 정계의 실력자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씨는 기자회견을 싫어하는 막후 정치가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그 실상은 좀처럼 알기가 쉽지 않은데, 오자와씨를 담당하고 있는 정치부 기자가 그의 비공식 발언을 모아서 잡지에 소개했다. 그 내용은 보도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한 간담이라든지 개인적인 잡담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오자와씨의 대단히 정직한 발언으로 이른바 ‘본심’이었다. 예를 들어 그가 소속된 당의 간부 자리에 있는 호소카와(細川)씨나 하타(羽田)씨 등에 대해 ‘무능하다’ ‘바보다’라는 발언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오자와씨의 감정이 담긴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발언을 소개함으로써 오자와라는 인물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모든 것이 ‘오프 더 레코드’를 전제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 기사를 쓴 기자는 오자와씨와의 결별을 각오하고 ‘오프 더 레코드’의 내용을 폭로했다. 오자와씨의 정치가로서의 실상을 독자에게 알려야겠다는 이른바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오프 더 레코드’를 무시했던 것이다.
‘오프’를 깰 경우 감수해야 할 비난과 불이익
그러나 언론계에서는 몇 가지 이유로 그의 노력을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우선 스스로 소속되어 있는 신문을 통해 오자와씨의 실상을 폭로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왜 잡지에 썼는가. 기자로서 노력 부족이라는 것이었다.
또한 그 기자가 소속된 신문사에서는 취재원과의 신뢰관계를 손상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결국 그는 신문사 내에서 좌천이 되었다. 일종의 징계를 내린 것이다. (구로다 가쓰히로, 일본의 ‘오프 더 레코드’, 신문과 방송, 1995년 10월호, p12)
이처럼 일본에서는 무슨 이유에서든 ‘오프 더 레코드’를 깰 경우 기자 개인은 엄청난 비난과 개인적인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이로 인해 ‘오프 더 레코드’가 깨지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대신 ‘오프 더 레코드’가 깨졌을 경우 엄청난 파문을 불러 오기도 한다.
⑵ 사례
다음에 소개할 에토 장관과 호수야마 장관 사건은 1995년 10월부터 약 1개월 동안 발생한 사건으로 ‘오프 더 레코드’가 깨지면서, 그 결과 장관 2명의 사임으로까지 연결되었다. 이로 인해 언론계 내부에서도 약 30여년 만에 ‘오프 더 레코드’ 처리 문제에 관한 입장을 정리하는 등 일련의 움직임이 있었다.
① 나카소네 퇴진 발언
아사히신문의 오보
1989년 5월 20일자 朝日(아사히) 신문 夕刊에 1면 7단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나카소네(中曾根)씨 정계 은퇴’ ‘리쿠르트 사건 책임지고’라는 제목이었다.
기사의 내용은 크게 두 부분이었다. 나카소네씨가 총리로 있었던 시기에 벌어진 리쿠르트 사건(의원 등에 대한 뇌물 공여)에 책임을 지고 정계를 은퇴하겠다는 생각을 굳혔다고 단정하는 대목이 기사의 앞부분에 나와 있었다. 하지만 기사의 본문에는 ‘차기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굳힌 것으로 보인다’ ‘나카소네씨는 이런 의향을 다케시타(竹下登)씨에게도 전달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식의 간접적인 표현이 이어졌다.
그러나 실제 다음날 나카소네씨는 국회 출입 기자단과의 간담회를 통해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현재의 직책을 수행해 가겠다”고 말하며 은퇴 보도를 부인했다. 그후 나카소네씨는 실제 정치도 계속했고, 의원직도 계속 유지했다.
주변 인물들의 비공식 발언을 토대로 단정
이렇게 오보가 된 사건의 발단은 朝日(아사히) 신문 기자가 나카소네씨의 동정을 캐면서 본인으로부터 직접들은 내용이 아니라, 나카소네 주위 인물들의 비공식 발언 등을 모아 기사화한 것이 점차 단정적으로 변해 기사화된 것이다. 이 기사에는 어느 누구의 발언도 직접인용된 것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마치 기자가 현장에 있었던 것처럼 기사화한 것이다. 이에 대해 일부에선 기자는 나카소네의 마음까지 들어갈 수 있느냐고 비판하기도 했다. (西山武典, 1996, 誤報, 虛報そいて情報操作, 現場からみた新聞學, 學文社, p73) 이와 함께 익명보도를 방패로 무책임한 취재를 하는 언론에 대한 질타도 거세게 일었다.
이에 대해 朝日(아사히) 신문에서는 취재당시의 나카소네씨의 행적을 일일이 기사화한 뒤, 왜 그렇게밖에 기사를 쓸 수 없었는가를 밝히는 변명조의 오보정정 기사를 내보내야 했다.
② 에토(江藤隆美) 장관의 ‘오프 더 레코드’ 발언
“한일 합방은 법적으로 유효하게 체결됐다”
에토 총무청 장관의 발언은 ‘오프 더 레코드’가 깨지는 경우가 드문 일본에서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다. 결국 사건은 한-일 간의 외교분쟁과 에토장관의 사임까지 연결되었다. 물론 이를 둘러싸고 日本新聞協會(일본신문협회)를 비롯한 언론 단체에서 많은 논란이 있었다. 사건의 경과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95년 10월 11일 당시 총무청 장관이었던 에토씨는 각료회의가 끝난 뒤 총무청 담당 기자들 10여명과 정례 기자 간담회를 가졌다. 이 간담회에는 총무청 장관 본인을 비롯해 비서관 등 약 4∼5명의 직원이 배석했다. 이들 직원중 일부는 테이프를 갖고 대화 내용을 실제 녹음했다.
정식 기자회견 뒤의 각료 회의는 약 5분 만에 끝났다. 간담회가 끝날 무렵, 기자 한명이 “한-일 합방은 법적으로 유효하게 체결됐다”는 무라야마(村山) 총리를 둘러싼 논의가 국회에서 있었는가를 물었다. 에토 장관은 “없었다”고 답한 뒤 “기사화하지 말고 메모도 하지 말라. 참고로 이야기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한-일합방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내용은 “식민지 시대에 일본은 한국에 좋은 일도 했다. 반성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당시 이 자리에서 일부 기자는 메모를 계속했고, 테이프도 계속해서 돌아가고 있었다. 기자 클럽의 간사는 출석했던 기자들에게 간담 내용이 ‘오프 더 레코드’임을 확인했다.
일단 이렇게 정리된 에토 장관의 발언은 이후 11월 1일 발행된 회원제 월간지 ‘選擇’(선택)을 통해 폭로되었다. 전형적인 ‘오프 더 레코드’ 정보 유통구조를 밟은 것이다. 제목은 ‘감춰진 모 현직 각료가 한 폭언의 내용’이었다.
그 기사에는 발언자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으며, 발언도 일부 내용만 실렸다. 그러다 11월초 東亞日報(동아일보) 동경특파원 앞으로 당시 에토 장관의 발언 내용이 자세히 적힌 종이 3장이 배달됐다. 깨끗하게 워드프로세서로 친 문서였다. 東亞日報 특파원은 당시 참석했던 기자들을 상대로 확인작업을 거친 뒤, 이를 東亞日報 11월 8일자에 보도했다.
이에 대해 朝日(아사히)신문에서는 “이에 앞서 7일 東亞日報측으로부터 질의를 받았다며 실제 당시의 발언은 상당히 균형잡혀 있었으며 약 1개월 전의 일이라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한다는 응답을 했다”고 밝혔다. (朝日新聞, 1995년 12월 5일자 朝刊)
외교 문제로 비화
이와 같이 에토 장관의 발언 내용이 보도되자, 공산당 기관지인 아카하다(赤旗)가 11월 9일자에 정보 제공자를 밝히지 않은 채 발언내용 전문을 실었다. 한편 에토 장관은 8일자 東亞日報(동아일보) 보도를 접하고 “발언 내용이 정확히 전해지지 않았다. 발언 내용을 없었던 것으로 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러나 야당인 新進黨(신진당)이 에토 장관의 발언이 외교 문제로 비화할 것이라는 점을 감안, 각료 불신임 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기자 클럽의 ‘보수적’ 결론
내각 기자 클럽의 간사는 8일 저녁 대표자 회의를 열어 에토 장관의 ‘오프 더 레코드’ 내용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논의했다. 기자 클럽은 에토 장관에게 ‘오프 더 레코드’의 해제를 요청했지만, 에토 장관은 ‘오프 더 레코드’를 계속 유지하고 싶다는 의향을 비쳤다. 결국 기자 클럽은 “취재원과의 신뢰 관계에 따라 성립된 ‘오프 더 레코드’는 계속 지키지 않을 수 없다”는 최종 결론을 내렸다.
이에 따라 朝日(아사히)와 讀賣(요미우리) 신문은 서울특파원이 東亞日報(동아일보)의 보도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는 형식으로 내용을 보도했다. 반면 每日(마이니치)와 東京(토쿄) 신문은 11월 9일자 朝刊(조간)에 에토 장관의 발언 내용을 그대로 보도했다. 마이니치는 에토 장관의 발언 당시 현장에 없었지만 차후에 발언내용이 수록된 테이프를 입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每日新聞, 1995년 11월 28일자)
마이니치와 도쿄신문의 입장은 다음과 같았다.
“‘오프 더 레코드’ 발언이라고 하더라도 일단 보도된 것은 더이상 ‘오프 더 레코드’로서의 의미가 없다.”(每日新聞, 1995년 11월 14일자)
“東亞日報에 보도돼, 외교문제로 발전된 이상, 더이상 ‘오프 더 레코드’ 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東京新聞 1995년 11월 11일자)
그러나 결국 이들은 기자 클럽의 규정에 따라 11월 14일부터 1개월 동안 기자 클럽 회원으로서의 활동정지 처분을 받았다. 이와는 별도로 에토 장관의 발언은 그후 내각 기자 클럽에 가입하지 않은 文藝春秋(문예춘추)에 의해 보도되었다. 한편 에토 장관은 11월 13일 야당의 압력에 굴복, 사임하기에 이르렀다.
‘오프 파기’에 대한 비판
이런 경과를 거친 ‘오프 더 레코드’ 파기 사건은 사건 직후 언론계 안팎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다. 주류는 ‘오프 더 레코드’를 깬 것에 대한 비판이었다.
日本新聞協會報(일본신문협회보)가 1996년 2월 27일자 지면을 통해 가한 비판은 다음과 같다.
“에토 장관의 ‘오프 더 레코드’ 발언을 깬 것은 기자의 기본적인 직업윤리에 의문을 갖게 하고, 신문의 신뢰를 저해한 것으로 책임이 크다.”
産經(산케이) 신문은 12월 20일자에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한국 언론에 ‘오프 더 레코드’ 내용을 흘린 기자도 문제이지만 성실하고 머리가 좋다는 기자들의 경솔한 행동에 전율을 느낄 뿐이다. 東亞日報(동아일보)가 익명으로 온 발언 내용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당시 간담회에 참석했던 기자들이 발언 내용을 확인해 주지 않았다면, 보도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기자들은 ‘미안하지만 그 내용에 대해서는 노코멘트입니다’라고 했어야 했다.”
讀賣(요미우리) 신문은 이런 의견을 밝혔다.
“이렇게 외국 신문에 ‘오프 더 레코드’가 걸린 내용을 흘린 것은 직업상의 윤리를 스스로 짓밟은, 가장 악질적인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오프 더 레코드’ 악용에 대한 비판
위와 같은 비판이 압도적인 상황 속에서도 정치가들의 고질적인 ‘오프 더 레코드’ 악용이나 국민의 ‘알 권리’를 주장하는 글도 있었다.
1996년 1월 16일자 朝日(아사히) 신문은 ‘뉴스 三面鏡(삼면경)’에서 다음과 같이 에토 장관의 퇴임 후의 행태를 밝히고 있다.
“에토 장관은 1월 4일 자기 선거구인 미야자키 2구에서 지역 기자들과 만나 ‘일본의 잘못을 인정하지만 그래도 부산항과 인천항을 세우는 등 좋은 일도 하지 않았는가’라는 말을 했다. 현지의 한 정치학 교수는 ‘에토씨는 전혀 반성하지 않고 있으며 본심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에토씨는 그의 발언을 후원회 모임 등에서 되풀이하고 있다.”
“‘알 권리’가 ‘오프 파기’보다 중요”
慶應(게이오) 대학의 쿠사노 교수(草野厚)는 95년 11월 19일자 지면을 통해 産經(산케이) 신문이 ‘오프 더 레코드’를 깬 것을 비판한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에토 장관이 그렇게 발언한 것은 정치인으로서 상식을 벗어난 것이다. 에토 장관의 ‘오프 더 레코드’ 발언이 어떻게 깨졌는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독자들의 ‘알 권리’이다. 사실 ‘취재원 보호’보다 ‘알 권리’를 우선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보도될 것을 기대하면서 정치가나 관료가 ‘오프 더 레코드’ 취재에 응하고, 기자는 그것을 보도한 경우가 확실히 있다. 케네디 대통령이 ‘언론에 확실히 보도되길 원하면, 확실하게 ‘오프 더 레코드’로 말하는 게 좋다’고 한 조크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오프 더 레코드’가 많으면 많을수록, 미디어와 독자 사이에 정보량의 차이는 점점 커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국민에 의한 미디어 기능의 감시는 점점 약해질 수밖에 없다.
또 이미 외국 신문에 보도된 내용을 전제하지 않고, 별도로 자료를 입수,보도한 것은 타당한 것이다. 그래야만 한-일 양국의 정치적 문제로까지 발전한 이 문제의 정확한 상황을 국민들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는 별도로 자기 신문에 기사를 쓰지 않고 외국 신문에 정보를 흘린 것을 비판한 데 대한 반론도 제기됐다. 에토 장관의 발언이 불합리하다고 판단했더라도 ‘오프 더 레코드’가 걸린 이상, 이를 회사측에서 수용할 리 없다는 지적이었다.
‘오프 더 레코드’ 내용이 정확히 공개되지 못하고, 주간지 등의 이상한 형태로 떠도는 것도 이런 잘못된 분위기에 원인이 있다는 비판도 나왔다.
③ 호수야마 방위시설청 장관 ‘오프 더 레코드’ 발언
“총리의 머리가 나쁘다”
에토 장관의 발언이 있은 지 얼마뒤인 1995년 10월 18일 호수야마(寶珠山) 방위시설청 장관은 방위시설청 기자 클럽의 소속 26개사중 20여명의 기자들이 참가한 가운데 약 40분간에 걸친 기자 간담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오타(大田) 오키나와 지사가 미군 기지 강제수용을 거부한 것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이때는 ‘방위청 수뇌’라는 형태로 발언을 인용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단 “총리의 머리가 나쁘다”는 발언은 완전 ‘오프 더 레코드’로 해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그날 밤 TBS방송 ‘뉴스23’은 “방위청의 수뇌가 행정 수반의 자질에 의문이 간다고 비판했다”고 보도했다. 이어 TBS의 기자가 자민당 간부들과의 간담회에서 호수야마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면서 그의 발언에 대한 코멘트를 요구했다. 이런 내용이 보도되자 기자 클럽은 일단 ‘오프 더 레코드’를 확인했으나 결국 발언이 알려졌다는 사실을 중시, 호수야마에 ‘오프 더 레코드’ 해제를 요청했다. 호수야마는 이를 받아들였다.
기자 클럽에서는 TBS가 ‘오프 더 레코드’를 깼다고 간주하고 11월 2일부터 1개월간의 기자 클럽 사용 및 회견, 간담회 출석금지 처분을 내렸다. 이에 대해 TBS는 기자 클럽에 불만을 담은 서한을 보내는 등 강력히 항의했다. 결국 호수야마 장관은 발언 내용에 책임을 지고 사직했다.
④ 사카키바라(神原) 국장의 ‘오프 더 레코드’ 발언
“은행 합병 문제를 미국에 전달했다”
11월 16일 발행된 週刊文春(주간문춘)는 大和(다이와) 은행과 住友(스미토모) 은행의 합병문제와 관련, 大藏省(대장성)의 사카키 국장의 발언을 보도했다. 그 내용은 11월 3일 사카키 국장이 ‘오프 더 레코드’를 전제로 “합병 사실을 이미 미국 재무부 차관에도 전달했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었다.
週刊文春가 다룬 사카키 국장의 발언은 정식 기자 간담회 종료후 약 4∼5명의 기자들과 자기 방에서 간담회 형식으로 진행한 것이었다. 당시 국장은 ‘오프 더 레코드’라고 전제를 한 뒤 말했다. 그러나 週刊文春가 인용한 내용은 당시 실제 발언과 차이가 있었다. 大藏省에서는 이 점을 들어 週刊文春에 강력히 항의했다.
日本新聞協會의 ‘오프’ 관련 규정 재검토
이같이 95년말 일련의 ‘오프 더 레코드’ 발언이 실제 지면을 통해 보도되고 장관 해임 등 각종 문제가 잇따르자 이를 보다 본격적으로 다루려는 움직임도 생겼다. 우선 新聞協會(신문협회)에서 1962년에 제정된 ‘오프 더 레코드’ 관련 新聞協會의 규정을 재검토,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新聞協會는 각사 편집국장으로 구성된 편집위원회를 통해 논의를 한 뒤, 최종 결과를 이사회에 제출, 추인을 받았다.
그 결과 ‘오프 더 레코드’를 지켜야 한다는 도덕적 책임감에 중점을 둔 통일된 견해를 2월 14일 발표했다. 발표 내용은 다음과 같다.
日本新聞協會의 ‘오프 더 레코드’와 관련한 견해
최근 각료와 정부 고위 관리에 대한 취재와 관련, 이른바 ‘오프 더 레코드’ 문제가 계속 발생하고 있다. 특히 작년말 에토 전 총무청 장관의 ‘오프 더 레코드’ 발언의 일부가 외부 미디어에 누설된 것은 취재기자의 윤리적인 견지에서 볼 때 지극히 유감이다. ‘오프 더 레코드’는 취재원과 취재기자가 서로 확인하고 납득한 상태에서 외부에 누설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정보를 얻는 취재 방법이다. 이는 취재원의 승락 없이 취재원을 밝히지 않는 ‘취재원 보호’와, 취재상 얻은 비밀을 기자가 지키는 ‘증언 거절권’과 같은 차원의 것으로 이를 어겨서는 안되는 도덕적 책임이 있다.
신문 보도기관의 취재 활동은 무엇보다도 국민 독자의 ‘알 권리’에 부응하는 것을 사명으로 한다.
‘오프 더 레코드’에 의한 취재는 진실과 사실의 심층 취재, 그리고 실체에 접근하고, 그 배경을 정확히 파악키 위한 유효한 방법으로, 결과적으로 국민의 ‘알 권리’에 부응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그러나 이를 남용해서는 안되며, 뉴스 취재원에게 부당한 선택권을 부여, 국민들의 ‘알 권리’를 제한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안일한 ‘오프 더 레코드’ 취재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 日本新聞協會 편집위원회는 이번 사태를 무겁게 받아들여, 위와 같은 ‘오프 더 레코드’의 취재원칙을 재확인한다. (讀賣新聞, 1996년 2월 15일자)
‘알 권리’보다 ‘취재 편의’와 ‘취재원 보호’ 치중
이와 같이 ‘오프 더 레코드’에 대한 결론이 ‘알 권리’보다는 ‘취재의 편의’와 ‘취재원 보호’쪽에 치중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이로 인해 이를 비판하는 의견도 강력하게 제기됐다.
일부 언론 관련 전문가들은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新聞協會의 결정에 불만을 표시했다.
“1965년 1월 7일 한일회담 수석 대표가 외무성 기자 클럽에서 ‘일본이 조선을 지배했다고 하지만 일본은 좋은 일을 하려고 한 것이다’라고 발언했다. 기자 클럽은 외무성의 요청을 받아 들여 이를 ‘오프 더 레코드’로 했다. 그러나 3일 뒤인 1월 10일 아카하다(赤旗)가 이 내용을 보도했고, 한국의 신문들도 이 내용을 적극적으로 보도했다. 결국 30여년 전의 발언 양태나 에토 장관의 ‘오프 더 레코드’ 발언 때나 바뀐 것이 전혀 없다.”
이런 비판과 관련, 日本新聞協會에서는 1996년 4월 2일자 新聞協會報에 “‘오프 더 레코드’의 준수보다는 쉽게 ‘오프 더 레코드’를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견해를 강력히 피력한 신문도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기자들의 ‘오프’ 문제 논의 시도
신문을 실제 제작하는 기자들의 입장에서 ‘오프 더 레코드’ 문제에 접근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1996년 1월 24일 每日(마이니치) 신문 노조와 ‘저널리즘을 말하는 모임’ 주최로 열린 ‘오프 더 레코드’ 보도와 관련한 토론이 그중 대표적인 것이었다.
이 모임에는 일본 朝日(아사히), 讀賣(요미우리), 每日(마이니치) 등 신문사와 TBS 등 방송사 정치부 기자들이 참여했다. 논의 내용은 “현실적으로 ‘오프 더 레코드’의 필요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또한 이론처럼 취재 도중 상대방의 말을 끊고 ‘오프 더 레코드’냐 ‘온 더 레코드’냐를 확인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주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의 사회-문화환경으로 볼 때 관리들이나 정치인과의 대화를 도중에서 차단하고 ‘오프 더 레코드’임을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1대 다수’ 취재와 ‘오프’의 한계
‘오프 더 레코드’를 처리하는 방법상의 문제도 제기됐다. 일본의 경우 취재의 기본원칙이라고 할 수 있는 취재원과의 ‘1 대 1’ 취재보다는 취재원과 기자 클럽이라는 ‘1 대 다수’의 취재형태가 빈번하다는 현실이 지적됐다. 따라서 ‘1 대 1’ 취재의 경우 ‘오프 더 레코드’의 의미가 있으며, 또한 지킬 가치도 있는 반면 ‘1 대 다수’ 형태의 ‘오프 더 레코드’는 항상 깨질 우려가 있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따라서 기자 클럽에서 ‘오프 더 레코드’를 정하고 관리하는 방식을 지양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記者クラブとオフレコ問題を考える, 創, 1996년 3월호)
3) 한국
⑴ 언론 상황
한국의 경우 오랜 군사정권 하에서 권력에 의한 언론통제가 극심했기 때문에 ‘오프 더 레코드’와 관련한 논의가 거의 없었다. 정권이 보도할 수 있는 내용을 정하면 그 한도 내에서 기사를 써야 하는 숙명이었던 것이다. 간혹 이를 어긴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심각한 보복에 직면해야 했다. 당연히 ‘오프 더 레코드’는 취재원이 일방적으로 주문하고, 기자들이 수동적으로 접수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다 보니 ‘오프 더 레코드’를 체계적으로, 정면에서 다루려는 시도가 거의 없었다.
‘오프’의 남발과 기자들의 ‘오프 중독증’
이런 가운데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오프 더 레코드’가 남용, 남발되고 있다. 기자들을 모아놓고 중대한 상황을 얘기한 뒤, 이를 주워담기 위해 서둘러 ‘오프 더 레코드’를 요청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또한 어느 부분이 ‘오프 더 레코드’인지, 아닌지 불명료하게 한 뒤 나중에 ‘오프 더 레코드’를 어겼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민감한 정치 상황에서 ‘오프 더 레코드’를 전제로 의견을 슬쩍 흘리는 경우가 많다.
‘오프 더 레코드’의 정확한 의미도 모른 채 심지어는 ‘오픈 더 레코드’라고 말하며, ‘오프 더 레코드’를 요구하는 촌극도 실제 취재현장에서 벌어진다.
이에 대해 기자들도 아무런 거부감 없이 ‘오프 더 레코드’를 받아 들이고 있다. 이른바 ‘오프 중독증’에 걸리지 않았느냐는 의심이 생길 정도이다.
李健熙 회장, 기업은 “2류, 공무원은 3류, 정치는 4류”
이런 가운데 1995년 이후 ‘오프 더 레코드’와 관련된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1995년 4월 李健熙(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北京(베이징) 주재 한국 특파원들과의 간담회에서 “기업은 2류, 공무원은 3류, 정치는 4류”라는 취지의 발언을 ‘오프 더 레코드’ 형식으로 했으나, 그 내용이 곧바로 보도돼 재계-정계에 큰 파장을 불러왔다. 그러나 ‘오프 더 레코드’를 공식으로 요청했는지, 아니면 발언을 하고 난 뒤 ‘오프 더 레코드’를 걸었는지 등의 정황이 명백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넘어갔다. 이로 인해 ‘오프 더 레코드’ 문제를 집중 검증할 기회가 후일로 미뤄졌다.
그러다 언론계 전체에 ‘오프 더 레코드’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하도록 한 사건으로 대두된 사건이 1995년 8월의 徐錫宰(서석재) 전 장관의 4천억 비자금설 파문이었다. 徐장관의 발언 파문은 그후 검찰의 해명성 수사로 흐지부지됐다. 그후 95년도 정기국회에서 당시 국회의원이던 朴啓東(박계동) 씨가 이를 다시 폭로하면서 끝내는 全斗煥(전두환)-盧泰愚(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구속으로까지 연결되었다.
⑵ 徐錫宰(서석재) 장관 발언 파문
“전직 대통령이 가명계좌로 4천억 보유”
1995년 8월 3일자 朝鮮日報(조선일보) 1면에 ‘전직 대통령의 대리인이 4천억에 달하는 비자금을 실명화할 수 있는지를 徐錫宰 총무처장관에 타진했다’는 취지의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는 곧바로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고, 徐장관의 사표 등 일련의 사태로 연결되었다. 그러나 사회적 충격 못지 않게 언론 내부에서도 徐장관 발언보도를 둘러싼 수많은 논란이 전개되었다. 우선 당시의 정황을 살펴보도록 하자.
徐錫宰 당시 총무처 장관은 부산 지역 민자당 지역구 조직책 복귀를 앞둔 8월 1일, 그동안 안면이 별로 없었던 민자당 출입기자들을 저녁 식사에 초청했다. 저녁식사 자리에는 朝鮮日報(조선일보) 기자를 비롯, 약 7명의 기자들이 자리를 같이 했다.
徐장관은 식사가 시작되자마자 “오늘 얘기는 그 뭐라 카더라. 기자들이 기사를 안 쓰는 것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徐장관 수행인 중의 한사람이 “‘오프 더 레코드’입니다”라고 하자, “응 그래, 이 자리에서 말한 것은 전부 ‘오프’야”라고 한 뒤, 이런저런 말을 했다. 특정 사안에 대해 ‘오프’를 요구한 게 아니라, 총무처 장관으로서 정당 출입기자와 만난 것 자체를 공개키 곤란한 점을 감안한 조치였다는 것이 당시 그자리에 참석했던 기자의 얘기다.
이 와중에 徐장관은 “전직 대통령중 한사람의 실세급 대리인이 나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가명계좌로 4천억원이 있는데 2천억원을 정부에 줄테니, 나머지 2천억원을 ‘보호’할 수 있도록 해 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기자들이 그 대리인이 누구냐고 묻자 徐장관은 “기업하는 친구다. 말할 수 없다. 내가 청와대 경제수석과 국세청장에게 방법이 있는지 물어보니 도저히 없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저녁 모임이 끝난 후 일부 기자들은 이 사실을 회사에 보고하고, 일부 기자들은 보고하지 않았다. 徐장관의 발언을 보고받은 언론사 중에서 朝鮮日報를 제외한 나머지 회사는 이를 전혀 기사화하지 않았다. 朝鮮日報의 경우, 모임에 참석한 정치부 기자가 곧바로 회사에 보고했다. 당시 편집국장은 이를 기사화할 것을 강력히 주장해 8월 3일자로 기사화했다.
당시 이 사건에 대해 언론계 전반에서는 徐장관의 발언을 보도한 것에 대해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 쪽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었다.
‘오프 더 레코드’ 파기에 대한 긍정 평가
우선 徐장관의 발언이 시중에 유포되어 있는 얘기였고, 인구에 회자되는 얘기를 확인해 주는 성격이 있었다는 점이다. 순수하게 徐장관의 발언으로 비자금 사실이 처음 알려진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또한 徐장관의 발언이 공식 문건과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총무처 장관이라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공적 정보였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는 논리다. 徐장관의 발언내용이 개인의 정치적 견해나 의견을 피력한 것이라면 모르되, 그의 발언은 어디까지나 직무와 관련된 사실을 말한 것이기 때문에 ‘오프 더 레코드’를 적극적으로 보호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과연 徐장관의 발언을 ‘오프 더 레코드’로 하는 것이 국민의 ‘알 권리’와 총체적인 공익에 부합하는가 하는 의문이다. 전직 대통령이 불법으로 조성한 4천억원의 비자금을 갖고 있다고 정부의 실세가 확인해 준 것은 실제 엄청난 사건이다. 그 많은 비자금을 어떻게 조성했으며, 실명제를 피하기 위해 정부의 의사를 타진했다는 것은 실명제 존재의 의미, 정치자금 조성 등과 관련해 국가 운영의 기본을 뒤흔드는 사건이다. 徐장관의 발언을 보도하는 것과, 보도하지 않는 것 중 어느 것이 공익에 부합하는지를 살펴보면 대답은 자명해 진다는 논리이다.
“‘오프’의 전제가 되는 사건-사안이 전혀 없다”
일부 언론학자도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徐장관의 귀띔이 ‘오프 더 레코드’로서 필요충분조건을 갖추지 못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첫째, ‘오프 더 레코드’의 전제가 되는 사건-사안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두번째는 인터뷰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점을 들고 있다. 셋째는 그룹 미팅에서 나온 발언이었으며, 넷째는 회식을 하고 있는 자리였고,다섯째 이미 제공한 정보의 배경설명으로 제시한 자료가 아니라는 점이다.”(김우룡, 신문과 방송, 1995년, 9쪽)
徐장관 보도로 1995년 관훈언론상을 받은 崔靑林(최청림) 朝鮮日報(조선일보) 편집국장도 당시 徐장관의 발언을 보도하기로 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미 徐장관의 발언 내용은 시중에 소문의 형태로 유포돼 있었고, 직무와 관련한 공공적인 성격의 것이었기 때문에 공익 차원에 해당된다고 봐서 보도를 결정했다.”
이에 대해 기자협회보 등에서도 徐장관의 발언은 ‘오프 더 레코드’를 지킬 의무가 없다는 입장을 취했으며 당시 합석한 기자들의 문제의식을 비판하는 기사를 게재했다.
‘4천억설 오프’ 파기의 문제점
그러나 일부에서는 몇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우선 기자들이 徐장관이 주문한 ‘오프 더 레코드’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묵시적으로 동의한 것을 문제점으로 꼽았다. 보다 명시적으로 ‘오프 더 레코드’ 문제를 다루었어야 한다는 비판이다. 또한 ‘오프 더 레코드’에 동의했다면, 소속 정치부장과 편집국장에게 보고하고 별도의 확인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이를 등한시했다는 점이다.
적어도 미국의 주요 신문들은 신문윤리와 취재수칙에 ‘오프 더 레코드’를 반드시 보고토록 하고 있다는 점을 알았다면 보고조차 하지 않는 어처구니 없는 경우는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실제로 미국의 경우 ‘오프 더 레코드’가 직접 쓸 수는 없지만, 새롭고 중요한 취재의 시발점으로 인식되는 데 비해, 한국에서는 오히려 취재의 종착역처럼 여겨진다는 것이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이와 함께 朝鮮日報(조선일보)에 대해서도 徐장관이 직접 발언을 확인해 줄 두사람을 명시적으로 밝혔는데 徐장관의 발언을 직접 인용한 것은 문제라는 지적도 있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한국의 ‘오프 더 레코드’ 관행은 아직 정착되지 못한 상태이다. 그러나 앞으로 언론에 대한 통제가 약해지고, 정보를 보도하려는 언론의 의욕이 강하면 강할수록, ‘오프 더 레코드’ 문제가 대두될 전망이다. 일본의 경우처럼 완전히 배타적인 기자 클럽도 없고, 미국처럼 ‘개인 대 개인’ 형태의 취재가 이뤄지고 있지 않은 한국의 경우 ‘오프 더 레코드’ 문제는 보다 본격적으로 연구해야 할 테마이다.
맺음말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오프 더 레코드’는 전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이용되고 있다. 기자들 역시 ‘오프 더 레코드’를 필요악으로 인식하면서 이를 취재상의 주요한 기법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러나 ‘오프 더 레코드’는 어떤 형태로든 ‘알 권리’와 ‘정보재민’(情報在民)이라는 대원칙을 유보하는 것인 만큼 기자를 비롯, 언론 전체가 이를 적용하는 데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고 엄격함을 유지해야 할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언론은 국민의 ‘알 권리’를 상품의 형태로 충족시켜 주는 기능을 한다. 그런데 이런 기능이 등한시된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오프 더 레코드’와 ‘취재원 보호’
흔히 기자들은 ‘취재원 보호’를 지상명제처럼 교육받는다. 법정에서도 취재원의 신원을 보호하고, 처벌을 달게 받아야 한다는 얘기를 듣는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취재원의 보호가 바람직한 것인가는 한번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이다. 취재원 보호를 이유로 ‘오프 더 레코드’를 남발한다면 궁극적으로는 언론의 신뢰도를 깎아내리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최대한 취재원의 신원을 밝히도록 노력을 한 다음, 꼭 필요한 경우에만 ‘오프 더 레코드’에 동의하려는 자세를 언론은 견지할 필요가 있다. 일본의 경우 폐쇄적인 취재 관행이 심각한 문제를 노출, 미국식의 개방적 취재 시스템으로 변화하라는 각종 압력에 직면해 있다.
경험이 풍부한 기자는 취재원이 ‘오프 더 레코드’를 요구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취재원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배우들이 무대에서 소근거릴 때 관객들이 더 집중하는 것처럼, 노련한 취재원들은 자기들의 발언을 더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 ‘오프 더 레코드’를 이용하기도 한다. 노련한 취재원들은 ‘오프 더 레코드’로 기사를 흘리면 그들의 얘기가 신문에 날 경우 더 많이 잉크가 찍힐 것이라고 믿는다. 이런 상황인 만큼 ‘오프 더 레코드’를 받아 들일 때는 충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처럼 기자와 취재원과의 관계에서 성립되는 ‘오프 더 레코드’는 취재원의 의표를 간파하는 것부터 시작해, 과연 ‘오프 더 레코드’를 들어주어야 할 필요가 있는 내용인지, 취재원이 요구한 ‘오프 더 레코드’는 무엇을 의미하는지까지, 기자에게는 엄청난 판단력을 요구한다. 나아가서는 언론과 취재원과의 권력 관계, 취재환경까지 반영하기도 한다.
두 가지 ‘오프 더 레코드’ 대처 원칙
이런 상황에서 기자는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하는가. 우선 크게 두 가지 원칙을 적용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취재원과 ‘오프 더 레코드’를 얘기할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오프 더 레코드’의 종류는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하는 한편, 경험을 최대한 활용해 ‘오프 더 레코드’의 필요성에 관한 정확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
또 한가지, ‘오프 더 레코드’와 관련한 회사의 방침을 활용하고, 그 내용을 정확하게 회사에 전달해 공동으로 보조를 맞추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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