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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미국이라는 나라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광대한 영토에서 무수한 인종과 족이공존하는 나라인 만큼 다양한 정의가 가능할 것이다. 1년간 미국에서 연수하며 느낀 바를 바탕으로 필자 나름의 정의를 내려 본다면 미국은 ‘메모리얼(memorial)의 나라’라고 하겠다. 가는 곳마다 크고 작은 추모 시설과 마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연수지였던 수도 워싱턴DC는 국가적 차원의 추모 시설이 밀집한 곳이었다. 도시의 중심인 내셔널 몰(National Mall)에 역대 대통령과 참전 장병을 기리는 시설이 그야말로 쇼핑몰처럼 밀집해 있다. 종교시설인 워싱턴 국립 대성당에도 태평양전쟁 당시 이오지마 섬 스리바치 산 정상에 해병대원들이 성조기를 꽂는 유명한 장면을 스테인드글라스로 묘사해 놓았다. 기념과 추모에 대한 미국인들의 집요하기까지 한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이들만 추모의 대상이 되는 건 아니다. 동네의 평범한 도서관, 산책로의 벤치나 화단에서도 작은 표지판이나 비석을 숱하게 볼 수 있었다. 태어나 닷새 만에 숨진 아기, “특유의 유머로 이웃을 웃게 했던 사람”, “사랑받는 아내이자 헌신적인 어머니”처럼 이름없는 누군가를 기리는 표식들이었다. 유명하든 그렇지 않든, 한 인간에 대한 기억의 전승(傳承)을 중시하는 것이다.
이런 메모리얼은 또한 미국의 건축과 디자인을 바라보는 키워드가 되기도 했다. 워싱턴DC를 넘어 미국의 상징이 된 링컨 메모리얼이나 조지 워싱턴 기념탑부터 공원 벤치의 작은 명판에 이르기까지, 메모리얼은 일종의 ‘물질로 구현된 기억’이자 다양한 차원에서미국인의 일상 공간을 점유하는 축조 환경(built environment)이기 때문이다. 이에 이 글에서는 미국에서 건축을 다루는 시각을 메모리얼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살펴보고, 한국의 현실과 비교해 시사점을 찾아보고자 한다.
2. 건축을 대하는 미국의 시선 – 메모리얼을 중심으로
(1) 아이젠하워 메모리얼에 대한 워싱턴포스트의 보도 – 건축을 보는 비평적 시각
아이젠하워 메모리얼(Eisenhower Memorial)에 대한 워싱턴포스트의 보도를 중심으로 미국 언론이 건축을 다루는 관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기념관은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전쟁 영웅이자 미국의 제34대 대통령이었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1890~1969)를 기리는 장소로 내셔널 몰에 가장 최근 조성된 메모리얼1)이다. 1999년 의회에서 건립 계획이 승인되고 프리츠커상을 받은 세계적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디자인을 맡았다. 게리가 처음 제안한 디자인은 아이젠하워의 유산을 과소평가했다는 등의 논란에 휘말렸고, 수정 과정을 거쳐 2020년 9월 개장했다.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설계로 유명한 게리는 불규칙한 곡선의 비정형 디자인이 장기인 건축가지만 이 메모리얼은 직선 위주 간결한 형태의 태피스트리(걸개그림)와 조각상 같은 장치를 활용해 아이젠하워의 일생을 구현했다.
문화 콘텐츠는 언론에서 다루는 분야 가운데 기자의 판단과 감상이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 영역이다. 어떤 영화와 책이 나오고, 어떤 공연과 전시가 열렸다는 사실 자체보다 기자가 바라본 그 내용이 어떠했는지가 문화 분야 기사의 핵심을 이룬다. 기자들은 별점이나 한줄평부터 심층 리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문화 콘텐츠를 여과, 선별하는 역할을 해왔다. 물론 문화 콘텐츠에 대한 판단이나 해석에 한 가지 정답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기자들의 판단이 항상 옳은 것도 아니며 기자의 해석과 시각이 반론에 부딪치기도 하지만, 그 반론까지 아우르는 담론의 형성 과정 자체가 독자들의 문화 생활을 보다 풍요롭게 하는 데 기여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림 1. 워싱턴DC 내셔널 몰에 조성된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메모리얼. 교육부 건물 전면에 태피스트리(걸개그림)를 세우고 양 옆에 아이젠하워의 일생을 묘사한 조각상을 세웠다.
아이젠하워 메모리얼에 대한 워싱턴포스트 보도는 문화 콘텐츠에 대한 이런 접근 방식에서 건축 역시 예외가 아님을 보여준다. 분석 대상으로 워싱턴포스트를 택한 것은 이 신문이 아이젠하워 메모리얼이 위치하고 있는 워싱턴DC 지역 기반의 유력 언론이기 때문이다. 보도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개관 약 한 달 전인 2020년 8월7일자의 기사2)다. ‘리뷰’로 분류된 이 기사는 설계자인 프랭크 게리와의 전화 통화를 거쳐 작성된 것이지만, 인터뷰 형식을 통해 건축가의 발언을 그대로 전달하는 데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게리의 발언은 디자인 의도를 설명하는 게 아니라 그간의 논란에 대한 소회나 아이젠하워에 대한 개인적 존경심을 드러내는 장치로 인용되고 있다.
디자인에 대한 내용은 기자의 직접 서술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기사는 일대 다른 메모리얼들과 달리 업무용 빌딩에 인접한 부지 특성에 대한 해답으로 태피스트리가 등장했지만 낮에는 반사광 때문에 메시지가 명확히 전달되지 않는 한계가 있다고 전하고 있다. 반면 밤이 되면 태피스트리와 일련의 동상들이 낮보다 훨씬 더 연극적인 장면을 연출한다고 평가한다. 이어 이 작품이 “지나간 시대의 마지막 메모리얼”인 듯한 느낌이 든다고 서술하는데, 이는 “아이젠하워가 승리로 이끌었던 나라는 지금 다른 나라들처럼 국민들을 바이러스로부터 지키지 못하는 무기력한 조롱거리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이는 코로나 대응을 비롯해 트럼프 행정부의 행보에 대한 기자의 우회적 비판이다. 여기에 대해 “미국을 ‘무기력한 조롱거리’로, 워싱턴을 ‘한때 자유세계의 수도였던 실패한 도시’로 언급한 것은 부적절했으며 예술 비평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지적한 독자의 의견3)도 지면에 싣고 있어, 건축물을 둘러싼 논쟁과 담론을 형성하는 데 신문이 기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작성자인 필립 케니코트(Philip Kennicott)는 워싱턴포스트 소속으로 2012년 퓰리처상 언론분야 비평 부문에서 최종후보에 올랐고 2013년에는 같은 부문에서 수상했다. 당시 퓰리처상 위원회는 “예술에 대한 웅변적이고 열정적인 에세이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사회적시각으로, 늘 그의 주제를 독자와 연결시키는 비평가”4)라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케니코트는 “예술과 건축을 담당 분야로 결합해 이 나라의 수도에서 발견되는 모든 시각적 대상에 집중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소개하는데, 신문사 소속의 기자인 그가 비평가로서 건축을 시각예술의 하나로 바라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로 2013년 퓰리처상 수상작 중에도 미술과 함께 건축 기사5)가 포함돼 있다.
워싱턴포스트 보도 가운데는 정식 개관 전 조각상이 설치된 일을 계기로 메모리얼의 조각가에 집중한 기사6)도 발견된다. 아이젠하워 메모리얼에서 인물의 업적을 보여주는 핵심 장치의 하나로 조각상이 활용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기사는 인터뷰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건축가가 아닌 조각가를 대상으로 선정함으로써, 건축물이라는 대상을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입체적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새 건축물의 디자인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역사적 의미에 대한 해석을 시도한 기사들도 눈에 띈다. 개관 직후인 9월22일자의 칼럼7)은 아이젠하워가 재임했던 1950년대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한다. 기사는 미국인들에게 1950년대가 풍요롭고 평화로웠던 시기로 기억되지만, 내부에서 인종 갈등이 고조되고 외부적으로는 소련과의 우주 경쟁을 비롯해 냉전이 심화되던 ‘괴로움, 분노, 의심의 시대’였다고 지적하면서 아이젠하워는 그 시대를 헤쳐나간 지도자였다고 평가한다. 새로 조성된 메모리얼은 현재의 미국이 직면한 격동의 상황에서 아이젠하워의 리더십을 재조명하고 있다고 전했다.
같은 날 다른 지면에 실린 기사8)는 새롭게 개관한 아이젠하워 메모리얼과, 비슷한 시기 여성 연방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사망(2020년 9월18일) 이후 애도하는 시민들의 꽃다발 등이 놓여 자연발생적으로 조성된 ‘메모리얼’을 나란히 비교하고 있다. 여성 인권을 강조한 아이젠하워의 생전 발언을 소개하면서 두 인물이 “리더십과 도덕성이라는 본질적 자질에 있어서는 쌍둥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사관학교 출신 전쟁 영웅인 아이젠하워와 양성평등을 비롯한 진보 성향 판결을 주도했던 여성 대법관 긴즈버그 사이에 공통점이 없어 보이지만, 두 인물 모두 분열을 치유하는 리더십을 보여줬으며 이것이 어느 때보다도 심하게 양분된 현재의 미국 사회에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는 것이다.
종합해볼 때 아이젠하워 메모리얼을 다룬 일련의 워싱턴포스트 기사들은 특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기자의 해석과 판단을 자유롭게 활용하여 건축물의 디자인뿐 아니라 역사적 의미에 이르기까지 다각적인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이는 건축가 인터뷰라는 형식에 한정해 건축물을 소개하는 데 그치고 있는 한국 언론과 대조를 이루는 접근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2) “The new Eisenhower Memorial is stunning, especially at night. But is this the last of the
‘great man’ memorials?”, Washington Post, 8/7/2022
3) Ike’s complex – and Kennicott’s, Washington Post, 8/22/2022
(2)한국 언론의 건축 보도 관행
여기에서는 한국 언론의 건축 보도 관행과 그 한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앞서 분석한 워싱턴포스트의 아이젠하워 메모리얼 보도와 동일선상에서 한국도 전직 대통령 추모시설을 비교 대상으로 설정하는 게 이상적일 것이나, 한국에서 기념관을 비롯한 전직 대통령 관련 건축물은 디자인에 대한 진지한 분석보다는 해당 인물에 대한 정치적 호오(好惡)에 따른 소모적 논쟁으로 소비되고 있으며 국민적 합의에 도달한 전직 대통령 추모시설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한계가 있다.
추모 시설이라는 성격을 공유하는 전쟁기념관 건립 과정에 대한 국내 최대 신문사 조선일보의 보도를 살펴보면 건축가 이성관·곽홍길의 설계공모 당선 소식을 1989년 10월7일자에 단신으로 전했을 뿐 이후로는 건립을 둘러싼 정치권의 논의를 중계하거나, 기념관 개관 이후 이곳에서 열린 각종 전시, 행사의 장소로만 언급하고 있는 것이 확인된다. 건축물을 도시와 시민의 미감(美感)에 영향을 미치는 디자인 작품이 아니라 사건의 배경 내지는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로만 바라보고 있음이 확인된다.
추모시설이 아니지만 아이젠하워 메모리얼과 비교할 만한 한국의 건축물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가 있다. 한국에서도 건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비교적 최근에 진행된 프로젝트이자, 프랭크 게리와 비견할 만한 여성 최초 프리츠커상 수상자 자하 하디드의 작품으로 국내에서 큰 관심을 모았기 때문이다. 하디드는 세계적 스타 건축가라는 점뿐만 아니라 비정형의 곡선을 특징으로 하는 디자인에 있어서도 게리와 비견될 만한 건축가라고 할 수 있다. DDP는 파격적인 디자인으로 논란의 중심에 섰다. 그 과정에서 게리의 아이젠하워 기념관이 그랬던 것처럼 반복적인 보도의 대상이 됐는데 이는 국내 건축물 중에서는 흔치 않은 경우다. 보통 건축 기사가 단발성인 데 비해 DDP의 경우 비정형 패널 공법을 심층 소개하거나, 불규칙한 내부 공간에 대한 탐방 안내를 보도하는 등, 독특한 디자인으로 논란을 불렀던 이 건물이 지속적인 관심의 대상이 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
DDP를 다룬 기사들을 살펴보면 몇 가지 특징이 도출된다. 우선 보도의 상당수가 발주처발(發)이라는 점이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 키워드로 검색되는 첫 기사(2007년 2월20일자)는 서울시가 발표한 ‘디자인산업 육성안’을 소개한 것이다. 이를 포함해 서울시 발표 내용을 바탕으로 프로젝트의 진행 과정이 단계마다 반복적으로 보도됐다. 또한 동대문운동장 자리에 들어서면서 DDP가 역사 훼손 논란에 휘말린 가운데, 그 건립 당위성을 주장한 서울시 현직 간부의 글이 독자투고의 형식으로 게재되기도 했다.
건물의 디자인에 대한 기사는 설계자인 자하 하디드의 인터뷰 형식으로 보도됐다(2014년 3월12일자). 하디드는 이 기사에서 설계 의도를 설명하고, 주변 맥락을 무시했다는 지적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준공을 앞두고 방한한 하디드의 단독 인터뷰는 종합 1면~8면에 걸쳐 보도돼 이 세계적 건축가의 인터뷰 자체에 큰 뉴스 가치를 부여했음이 확인된다.
기사 안에 기자의 시각과 판단을 담는 데는 유보적인 태도를 유지한다는 특징도 있다. 이 건물은 워낙 큰 논란을 부른 탓에 개관 당시(2014년 1월 22일자), 개관 1주년(2015년 4월2일자), 개관 5주년(2019년 3월18일자)에 반복적으로 사내외 필자들의 칼럼 주제로 등장했는데,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성패는 건축물의 파격적 발상에 걸맞게 창의적인 내용을 채우고 매끄럽게 운영할 수 있는가에 달렸다”,“한 살 먹은 DDP가 보물이 될지 골칫거리가 될 것인지는 좀 더 지켜볼 일”, “DDP가 명실공히 디자인 창의 산업 육성을 위한 전략적 거점이 되려면 독창적인 비즈니스 모델과 콘텐츠 개발이 절실하다”와 같은 표현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적극적인 개입과 판단을 유예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준공 전에 DDP의 디자인 특징을 소개한 문화면 기사(2013년 3월8일자)에서도 디자인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서는 찬반 양론을 나란히 전달하는 방식으로 개입을 최대한 자제했다.
이상을 종합해볼 때 한국의 건축 보도는 인터뷰 형식을 통해 건축물의 디자인 의도를 전달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기자의 판단과 해석은 개입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보도 방식은 그간 한국에서 좀처럼 조명받지 못했던 ‘건축가’라는 존재를 예술가이자 전문가로 호명(呼名)한다는 특징이 있다. 영화에서 감독이, 연극에서 연출가가 창작자로 인정받는 데 비해 건축에서는 설계자로서 건축가보다는 그 건물의 주인이 주목받아왔다. 이런 상황을 감안할 때 건축가 인터뷰라는 형식은 아직 대중에게 생소한 건축가라는 존재를 알리고 소개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한국 건축 기사의 형식이 건축가 인터뷰로 귀결되는 데에는 건축 콘텐츠를 제작할 때 시각적인 스펙터클이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된다는 제작 현장의 관행이 영향을 미친다. 신문의 지면을 구성할 때 건축 기사에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요건은 ‘지면을 화려하게 장식할 사진’이다. 이것은 회화를 비롯한 다른 시각예술 분야 작품과 달리 건축 사진이 특유의 박력(迫力)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건축적 의미를 따지기 전에‘그림이 멋진’건축물이 기사화될 가능성이 높으며 그 과정에서 기사는 건축가의 코멘트를 인용하는 방식으로 디자인 의도를 전달하는 형식을 취하게 된다.
여기에는 보도에 사용되는 사진을 비롯한 시각 자료를 언론사에서 직접 생산하기 어려워 건축 전문 작가들이 촬영한 사진을 건축가를 통해 공급받는 제작 현실도 영향을 미친다. 기사 제작에 필요한 자료를 거의 전적으로 건축가에 의존하게 되기 때문에 기사의 내용이나 형식 또한 건축가에 경도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물론 건축가 인터뷰라는 형식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는 할 수 없으나, 코멘트를 그대로 전달하는 방식이 ‘객관적’으로 보일 수 있는 데 비해 자칫 건축가를 일방적으로 대변(代辨)하게 될 우려가 있는 만큼, 특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유연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앞서 언급한 워싱턴포스트의 필립 케니코트는 게리의 설계안이 논란에 부딪치면서 수정안의 필요성이 제기되던 2012년(5월11일자)에도 관련 기사9)를 작성했다. 여기에서는 게리가 아이젠하워 메모리얼의 설계자로 적합하지 않다는 의견도 있지만 이는 게리가 즉흥적인 인상에 의존하는 건축가라는 오해에서 비롯하는 것이며, 실제로 게리는 기술에 대한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자세를 중시하는 건축가이며 설계자로 지명된 이후 아이젠하워라는 인물에 대한 깊은 탐구에 들어갔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는 기자가 파악한 건축가론(論)을 바탕으로 논란의 디자인에 대한 우회적 지지를 표명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준공 사진이라는 시각적 장치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언론이 건축에 다각도로 접근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4) https://www.pulitzer.org/winners/philip-kennicott
5) 2012년 국립건축박물관(National Building Museum)에서 1982년 프리츠커상 수상자인 케빈 로치의
전시회가 열렸을 때 작성한 전시 리뷰이자 건축가론(論)이다.
6) Forever ready for Battle, Ruane, Michael E.,Washington Post, 1/22/2020
7) What Eisenhower memorial asks of us, David Von Drehle, Washington Post, 9/22/2020,
A21
8) Memorials show a nation less divided than it seems, Dvorak, Petula, Washington Post,
9/22/2020, B1
(3)건축 박물관에서 열린 총기 희생자 추모전 – 건축을 보는 유연한 시각
Project’ 전시 현장.
이 장에서는 워싱턴DC소재 미국 국립건축박물관(National Building Museum)에서 2021년 4월부터 2022년 9월까지 열린 총기 범죄 희생자 추모전 ‘Gun Violence Memorial Project’를 소개하고자 한다. 역시 메모리얼을 주제로 한 이 전시가 언론과는 약간 다른 각도에서 박물관이라는 문화적 주체가 건축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잘 보여줬기 때문이다. 이 프로젝트는 유리로 700칸의 선반을 만든 4개의 구조물 안에 총기 범죄 희생자들의 유품을 전시한 것이다. 4개의 구조물은 사각형을 이루는 벽 위에 집을 연상시키는 박공 지붕을 올린 단순한 형태를 띠고 있다. 700이라는 숫자는 미국에서 매주 총기 범죄로 희생되는 이들의 수를 의미하며, 유품을 하나하나 살펴보는 동안 관람객들은 이들이 사망자 집계(death toll) 속 숫자가 아니라 관람객 자신과 다를 바 없는 하나의 인간이었음을 직관적으로 자각하게 된다.
왜 건축 박물관에서 총기 희생자 추모전을 할까. 이는 이 박물관에서 건축의 의미를‘건물’에 한정하지 않고 자연환경과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축조 환경(built environment)으로 확대해서 이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집의 형태로 디자인되고 그 안에 전시한 유품으로 구현된 메모리얼은 비록 건물이 아닐지라도 공간을 점유하는 축조 환경의 일부로서 박물관이 다루는 주제에 부합하게 된다.
축조 환경이라는 관심 분야는 광범위하고 다소 모호할 수 있지만, 희생자를 추모하고 남겨진 유족들의 아픔에 공감한다는 주제는 매우 구체적이고 명확한 것이다. 그 주제의식에 공감하는 순간 관람객은 건축을 포함한 축조 환경이 인간의 심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며 이는 ‘우리가 짓고 디자인한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한다(inspires curiosity about the world we design and build)’는 박물관의 설립 이념과도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최근 들어 서울도시건축전시관이 문을 열었고 세종시에 국립도시건축박물관도 2025년 개관을 목표로 조성 중이다. 서울시는 2년마다 도시건축비엔날레를 개최한다. 건축에 대한 관심이 적어도 양적으로 성장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런 시설이나 행사가 건축이라는 콘텐츠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한 예로 2017년 시작된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의 주제는 ‘공유도시’(2017년), ‘집합도시’(2019년), 그리고 도시와 도시 사이의 연결과 교류를 강조한 ‘크로스로드’(2021년)였다. 이 행사는 여느 비엔날레와 달리 건축뿐 아니라 도시 차원의 문제를 고민한다는 취지로 출범했다. 이에 따라 미래의 도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그 방향에 부합하는 국내외 건축가들의 작품이나 콘셉트를 망라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그러다 보니 다소 선언적인 작품들도 다수 출품됐고 결국 ‘이해하기 어렵다’‘추상적이다’와 같은 반응이 나오는 가운데 대중적으로 큰 반향을 얻지 못했다.
한국 건축계 일각에서는 한국 건축의 갈라파고스화(化)에 대한 우려가 나오고 있다. 건축에 대한 논의가 건축계 안에서 건축가들끼리만 이루어지고 대중과의 소통에 실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차적으로 건축계와 건축가들의 문제가 있겠지만, 대중적 담론의 형성이 언론의 역할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언론도 보다 적극적인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건축가들이 내놓는 ‘작품’이나 그들이 제시하는 현란한 미래상에 시야를 한정하지 않는 유연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3. 맺는말
연수하면서 만난 사람들에게‘신문사 문화부에서 건축을 담당한다’고 필자를 소개하면 기자(reporter)와 비평가(critic) 중에서 어느 쪽인지 되묻는 이들이 있었다. 사실의 전달과 비평이라는 언론의 역할을 구분해서 본다는 의미인 동시에, 언론에서 그 역할을 함께 담당해야 한다는 의미로 들렸다.
지금까지 현장에서 전달자의 역할에만 충실하지 않았나 돌아보게 된다. 그동안 한국에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건축 콘텐츠를 발굴하고 소개한다는 보람이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현장에 복귀하면 시각을 담은 기사로 건축 담론을 풍요롭게 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늘 써 왔던 기사, 늘 해 왔던 취재에 얽매이지 않는 유연함으로 비평가의 역할까지 해내야 할 것이다.
국내 일간지에서 건축을 전문으로 다루는 기자는 매우 드물다. 이는 건축이 지금까지 독자적인 취재 영역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수용자가 적극적으로 찾고 누려야 하는 화예술의 다른 영역과 달리 건축은 국토와 도시의 미관을 직접적으로 결정하며 건축 애호가가 아닌 이들에게도 일상적으로 향유하는 대상이 된다는 특징이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건축이야말로 가장 적극적인 비평과 논의가 필요한 분야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담론이 형성되는 데 언론인으로써 기여한다면 지금껏 언론 현장에서 미술의 하위영역 정도로 여겨져 왔던 건축이 어엿한 독자 영역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