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연수 생활 중 거의 매일 가던 커뮤니티 공원에서 처음 눈에 띈 것은 추모비였다. 날개 모양의 석판엔 항공기 추락사고로 숨진 사망자들의 이름이 새겨있고, 주변엔 작은 관목들과 키 큰 침엽수가 둘러서 있다.
1988년과 1994년 아메리칸 이글 소속 소형 항공기 2편이 각각 근방에 추락했다. 그리고 참사로부터 20여년이 지난 2016년, 공원과 함께 이 작은 기념관이 만들어졌다. 재원은 가족 지원 재단의 모금액에서 나왔지만, 공원 조성엔 공공 자금인 캐리 타운의 지역 사회 투자 채권이 쓰였다. 기념관 조성 계획 수립에서부터 건립까지 6년이 걸렸다. 1988년 사고로 남편을 잃은 버지니아 로스 씨는 완공식에 참석해 이렇게 말했다.
“28년이란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을 축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슬퍼하지 않고 삶을 축하할 수 있습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10년, 20년이 지나도록 참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려는 공동체의 노력, 그리고 유가족과 생존자들을 돕는 전문 조직이 있다는 것이다.
유족과 생존자들을 도운 것은 가족 지원 교육 및 연구 재단 (FAERF : Family assistance education and research foundation)이다. FAERF는 캐롤린 코아시 (Carolyn Coarsey)박사가 설립한 비영리 재단이다. 항공사 직원 출신인 코아시 박사는 크고 작은 사고들을 목격하면서 유족과 생존자들에 대한 의미 있는 지원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껴왔고, 1985년 항공기 추락사고로 약혼자를 잃는 아픔을 겪은 뒤 관련 연구에 뛰어들어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리고 2000년 유가족과 희생자들을 위한 지원 인력을 양성하는 조직을 설립했다. 이 재단에서 교육 받은 인력은 전 세계 50개국에 진출해 참사 유가족과 생존자들을 돕고 있다.
“어떤 문제도 문제를 일으킨 동일한 수준의 의식에서는 해결될 수 없습니다.” 홈페이지에 소개된 아인슈타인의 어록엔 재단의 설립 의미와 신념이 잘 드러난다.
대형 참사를 반복 경험하면서, 재난 이후 사회 시스템의 연속성과 지속성 확보 측면에서의 ‘레질리언스(resilience)’ 개념이 재조명되고 있다. 레질리언스란 ‘시스템이 환경의 변화를 흡수하여 고유기능을 정상적으로 유지하는 능력’을 의미한다.1 당초엔 충격을 흡수하고 변화나 교란에 대응하는 재건 능력을 일컫는 생태학 용어였지만, 이젠 가족·기업·사회집단·국가 등 거의 모든 사회 단위에서의 ‘회복력’을 의미하는 용어가 됐다.
사회의 고도화·복잡화와 기후 변화로 재난은 일상화·다양화되고 있다. 이 때문에 재난 이후에 대한 대비, 즉 공동체의 레질리언스를 높이는 일이 중요해졌다.
저널리즘의 역할도 마찬가지다. 세월호 참사 이후 제정된 재난보도준칙은 전문에서부터 ‘레질리언스’에 초첨을 맞추고 있다. “재난보도에는 방재와 복구 기능도 있음을 유념해 피해의 확산을 방지하고 피해자와 피해지역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하루빨리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기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2 . 어떻게 레질리언스를 높일 것인가
가. 재난보도 저널리즘
사회적 재난 때마다 미국에서도 속보 경쟁과 오보·선정적 보도가 논란이 됐다. 1999년 4월, 콜로라도주 컬럼바인 고교에서 재학생 2명이 총탄 900여발을 난사해 학생 12명과 교사 1명이 숨지는 참사가 발생했다. 최악의 학교 총기난사(Mass shooting)이자, 100명 넘는 모방 범죄자를 유발한 ‘컬럼바인의 비극’이다.
넓은 참사 현장에서 생존자와 목격자를 동일시해선 안 된다. 현장에 있던 모든 생존자가 목격자는 아닌 것이지만, 당시 언론은 속보 경쟁에 매몰된 나머지 생존자와 목격자를 구분하지 않고, 사실과 의견이 혼동된 단편적인 경험담을 ‘목격자 인터뷰’로 보도하는 치명적 오류를 범했다. 사건을 직접 목격하지 생존자들은 이 같은 인터뷰에 다시 영향 받아 부정확한 팩트를 확대 재생산했다. CNN 등 유수의 언론마저 ‘트렌치코트 마피아’가 범행을 저질렀다는 등의 확인되지 않은 소문을 기사화해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언론에 묘사된 주범의 모습은 왕따·고스족·호모 등으로 시시각각 바뀌었는데, 많은 미국인들은 짧게는 수개월에서 길게는 수년 동안 잘못된 보도를 그대로 믿고 있었다고 한다. 참사 이후 등교가 재개되자 학생들은 ‘맘껏 물어뜯어(bite me)’라고 쓰인 티셔츠를 입고 다닐 정도로 언론에 증오와 적개심을 드러냈다.2
2005년 미국 남동부를 덮친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21세기 미국 최악의 재난보도로 꼽힌다. “사망자 수가 1만 명에 육박할 수 있다(실제 사망자는 2000여 명)”는 시장의 발언을 언론은 확인 없이 그대로 전했다. 당시 대부분의 사망자가 저지대에 사는 가난한 유색인종이었다. 언론에서 뉴올리언스는 범죄자들이 활보하는 무법지대로 묘사되고, 평범한 흑인의 사진은 ‘폭도’로 윤색됐다.3
미국 공영 라디오 네트워크(NPR) 소속이자 노스캐롤라이나 최대 공영 라디오 방송인 WUNC의 뉴스 디렉터 브렌트 울프는 “재난 보도 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라며 “우리가 아직 모르는 것이 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추측하지 말고 모른다고 말해야 한다”했다. 특히 “기자들에게 어떤 뉴스를 먼저 전하는 것보다 차라리 올바른 것이 낫다고 말한다”며 속보 경쟁에 매몰돼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나. 기억과 반성
2005년 일본 효고현에서 발생한 ‘후쿠치야마선 탈선 사고’는 107명의 사망자를 낸 대표적인 ‘인재’였다. 경력이 채 1년도 되지 않은 23세 기관사가 출근 시간대 오버런(승하차 지점을 지나쳐서 정차하는 것)을 범했고, 이 때문에 열차 도착 시간이 다소 지연됐다. 초보 기관사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 곡선 구간에서 한계를 넘어선 속도를 냈다. 결국 열차는 선로를 이탈해 건물을 들이받고 말았다. 참사 이면엔 분초 단위로 정시 운행을 압박하는 경직된 조직 문화와 비용 절감을 위한 미숙련 기관사 배치 등 고질적 문제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고할 만한 것은 참사 이후 운영사의 태도였다. JR서일본은 2027년까지 초장기적인 안전 계획을 수립했다. 홈페이지 첫 화면엔 대표이사 사과문과 사고 이후의 대응, 안전을 위한 회사의 다짐 등을 게시했다. 기업의 얼굴이나 다름 없는 첫 페이지에 이른바 ‘흑역사’를 20년 가까이 걸어둔 것이다. 사고 당시 열차가 충돌했던 아파트 1층은 일부 공간이 보존됐고, 기념관인 ‘추모의 집’이 조성됐다.
이에 대해 고마츠바라 아키노리(小松原明哲) 와세다대 교수는 TV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사고에서 배우는 시스템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면서 “세간의 관심은 누가 나쁜 사람인지 ‘범인 찾기’가 되지만, 이후엔 제대로 반성을 하고 무엇이 문제였는지를 계승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지적했다.
다. 대비와 예방
노스캐롤라이나 윈스턴 세일럼에서는 지난 3월 재난심포지엄(NCDC)이 열렸다. 2019년 이후 매년 개최되고 있는 심포지엄(코로나19로 잠시 중단 뒤 2023년 재개)에서는 미주 전역의 의료기관과 응급구조(EMS) 관리자, 주 정부와 지자체의 비상 관리기관 등 각 분야의 베테랑들이 모여 재난 대비 태세와 경험 등을 공유하고, 재난으로부터 얻은 교훈에 대해 심층적인 토의를 벌인다. 주제는 토네이도와 홍수·산불 등 자연재해 등은 물론이고 대규모 사상자 발생 참사와 사이버 테러까지 광범위하다.
올해 심포지엄에서는 2021년 텍사스 주를 7일간 마비시킨 겨울 폭풍, 2023년 루이지애나주의 폭염 사태 등 이상기후 재난과 함께, 비료 공장 화재·재활시설 화재 등 다양한 사회적 재난 현장의 대응 사례도 제시됐다.
그 중 가장 흥미를 끈 주제는 빈센트 토레스 마이애미대 비상관리 이사가 발표한 ‘폴른 아크엔젤(추락한 대천사)’ 훈련 사례였다. 테러 공격으로 자가용 항공기가 격추되고 추락한 항공기가 대학 캠퍼스 내 외국인 VIP를 태운 버스를 들이받는 긴박한 시나리오를 담고 있는데, 추락 사고 대응과 피해자의 대학병원 이송, 병원 간의 협조를 통해 기존 대학병원 환자의 자매 병원 전원 등이 일사불란하게 이뤄졌다. 이처럼 심포지엄에서는 재난 발생 시 여러 관계 기관의 유기적인 대응이 강조되는데, “관계는 현장보다는 사고 발생 전 훈련과 훈련을 통해 가장 잘 구축된다”는 게 행사의 취지이다.
3. 나가며
연수 기간 중에도 한국에서 벌어진 크고 작은 재난 소식에 눈과 귀를 뗄 수 없었다. 세월호 참사는 10주기를 맞았지만 유족들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고, 2년 전 핼러윈 참사 역시 여전히 많은 궁금증과 논란이 남아있는 상태다.
이른바 ‘보도 참사’로 불리는 세월호 참사 이후 저널리즘에도 일부 개선점이 있었다. 핼러윈 참사 당시엔 방송사들이 자체적으로 사망자가 발생하는 순간의 골목 영상을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유가족과 시청자들의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100여일이 지난 시점에는 지역 주민들과 자영업자들의 일상 회복을 고려해 이태원이라는 지명도 쓰지 않기로 했다. 유족들에 대한 ‘2차 가해’를 막기 위해 언론사들이 자발적으로 댓글창을 닫기도 했다. 이와 함께 현장을 취재한 자사 기자들의 트라우마를 고려해 상담 치료 등 지원에도 나섰다.
반복되는 참사 이후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의 대응이 반복되고 있지만, 적어도 재난으로부터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하는 것보다는 끊임없이 연구하고 개선하는 편이 낫다. 기억과 반성의 문화가 정착되고, 활발한 학술 연구를 통해 재난에 대비한 체력을 기른다면 공동체의 레질리언스를 지금보다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다.
- 1 윤명오, , 토지주택연구원 랜드 앤 하우징 인사이트 가을호, 2018
- 2 Dave Cullen, , Grand Central Publishing, 2010
- 3 서수민, , 신문과 방송 1월호,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