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 연구인가
대한민국 20대 대통령을 선출하는 2022년 대선은 ‘비전 경쟁’보다는 ‘비호감 대결’에 초점이 맞춰졌다. 역대 대선마다 여야의 선거전이 네거티브 공세로 점철되며 정책 경쟁은 뒷전이 되는 일이 되풀이됐지만, 이번 대선은 그 정도가 한층 심해졌다고 볼 수 있다.
더불어민주당의 경선 과정을 보면 기본소득 논쟁이 있긴 했지만 그것은 부수적이었을 뿐, 여배우 스캔들이나 대장동 개발 의혹이 더 부각됐다. 국민의힘 경선에서도 정책 경쟁보다는 손바닥 왕(王)자 등 역술 논란이나 ‘개 사과’ 논란이 오히려 화제가 됐다. 이재명 전 경기지사와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여당과 제1야당의 대선 후보로 선출되면서 이번 대선은 여야가 서로를 응징하기 위해 벼르는 ‘응징 대선’으로 규정되기도 했다.1)
각 당의 경선과 대선 본선에서 후보자들의 발언 논란이나 자극적인 이슈 위주로 정치 뉴스가 생산되고 소비되는 경향이 되풀이됐다. 이 과정에서 각 후보의 공약 보도는 후순위로 밀렸고 자연스럽게 유권자들이 각 후보의 정책 비전에 접근할 기회도 줄어들었다.
오랜 민주주의 역사를 가진 미국은 대선 공약 보도가 비교적 엄격하게 이뤄지는 대표적 나라다. 미국의 주류 언론은 팩트체크 정신에 기반해 각 후보자의 공약을 검증한다. 경선 과정부터 각 후보의 공약과 과거 정책 성과를 비교하고 소요 예산과 로드맵을 다양한 그래픽과 동영상 등을 활용해 유권자에게 전달한다. 대선이 끝난 후에도 취임 100일, 1년을 맞아 공약 이행 상황을 집요하게 점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런 측면에서 미국 언론의 공약 보도 사례들은 국내 언론에도 충분한 시사점을 줄 수 있다.
국내 언론의 공약 보도… 공약 검증보단 공방에 초점
민주당, 국민의힘 경선 과정에서의 국내 언론의 공약 보도는 각 후보가 기자회견이나 SNS 게시물, 인터뷰 등을 통해 공약을 발표할 때마다 개별 기사로 소화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민주당 이재명 후보의 경우 첫 공약을 발표한 시점은 2021년 7월 18일,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첫 공약을 발표한 시점은 같은 해 8월 29일이었다. 두 후보 모두 경선 국면에 돌입한 직후 또는 경선을 앞두고 첫 공약을 발표한 셈이다. 경선 과정에서 각 당 후보들의 공약 비교는 좀처럼 이뤄지지 않았다. 그마저도 개별 공약의 실현 가능성이나 재원을 검증하기보다는 경선 경쟁자들의 비판 발언을 토대로 ‘공방’ 형식으로 소화되는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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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언론이 공약을 본격적으로 보도하는 것은 주요 정당의 후보가 확정된 이후부터라고 볼 수 있다. 민주당 후보가 확정된 것은 10월 10일이고, 국민의힘 후보가 확정된 것은 11월 5일이다. 공약 비교 보도는 11월 6일 이후부터 두드러졌으며 공약과 관련한 기획 기사가 등장하기도 했다. 부동산 등 쟁점이 되는 이슈가 있을 때마다 후보별 공약을 비교하는 기사가 등장했다.
그러나 선거전이 진행될수록 양당의 네거티브 공세가 가열되면서 정책에 대한 주목도는 자연스레 떨어졌다. 민주당은 윤 후보의 고발사주 의혹, 부인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및 허위 이력 의혹, 장모의 편법 증여 의혹을 제기하며 ‘본부장'(본인·부인·장모) 리스크를 부각했다. 국민의힘은 이 후보의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을 비롯, 조폭 유착 의혹, 친형 정신병원 강제입원 의혹, 변호사비 대납 의혹 등 20여 개 의혹을 집중 제기했다.2)
각 당 후보의 공약이나 정책 방향이 산발적으로 보도되기는 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청사진을 가지고 국가를 운영하려는 것인지는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왔다.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이런 양상에 대해 “행선지가 어디인지 알려주지도 않은 채 자기가 운전하는 버스에 올라타라는 식이다. 어디로 가는지 몰라도 일단 이 버스를 타면 일자리도 생기고 돈도 많이 벌 수 있고 지역 살림살이도 나아진다는 것이다. 그 말이 진정성 있게 들릴 수 없다”고 지적했다.3)
2023년 5월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 1년을 맞아 국내 언론은 윤석열 정부 1년 간 분야별 성과들을 평가하는 기사들을 일제히 선보였다. 현재의 정치 지형이나 경제 지표, 노동·연금·교육 개혁 상황 등에 대한 기사가 주를 이뤘다. 대선 당시의 공약 이행 상황이 한 눈에 들어오게끔 체계적으로 분석한 기사는 여전히 드물었다.
미국 언론의 대선 시기 공약 보도
46대 대통령을 선출하는 미국의 대선은 2020년 11월 3일 치러졌다. 가장 최근인 이 대선을 기준점으로 삼아 미국 언론의 대선 시기 공약 보도를 살펴봤다. 미 대선 레이스는 2019년 1월부터 서서히 가열됐다. 민주당에서 20명 넘는 후보가 각축을 벌인 결과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이 대선 후보 자리를 꿰찼고, 공화당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 도전으로 예비경선이 절차에 불과했다.4) 한국과 미국의 정치 환경에 차이가 있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미국 언론의 공약 보도에서 우리가 참고할만한 시사점을 찾을 수 있다.
◇ 경선, 그 이전부터…언론사 독자적인 서베이도
뉴욕타임스의 경우 후보들의 공약 발표 이전부터 주요 현안에 대한 독자적인 서베이를 실시하는 점이 특징적이다. 대선 1년 4개월 전인 2019년 6월 23일 조 바이든, 카말라 해리스, 엘리자베스 워런을 비롯해 20여명에 달하는 민주당 경선 후보군에게 직접 의료 복지 시스템 개선에 대한 견해를 묻는 서베이를 실시, 후보별 의견을 상세하게 다뤘다.5) 같은 해 10월 13일에는 동일한 후보군을 상대로 첨예한 찬반 논쟁의 한복판에 있는 ‘총기 규제’6)에 대한 입장을, 11월 25일에는 ‘낙태’에 대한 견해를 서베이한 뒤 이를 보도했다.7)
뉴욕타임스는 민주당과 공화당 후보군 20명 전원(일부 미응답 후보 제외)을 상대로 대통령 권한, 언론 자유, 트럼프 정부 이후 개혁 의제 등 11가지 주제에 대한 답변을 받아 이를 일목요연하게 소개하기도 했다.8) 후보들의 공약 발표를 수동적으로 보도하는 것이 아니라, 언론사가 주요 어젠다를 선정한 뒤 각 후보의 입장을 수개월에 걸쳐 소개한 장기 프로젝트였다.
◇ 본선 과정…양당 후보의 공약, 알기 쉽고 접근이 편하게
재선에 도전한 공화당 소속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민주당 조 바이든 후보의 대결 구도가 확정된 뒤 공약 보도는 인상적이다. 워싱턴포스트는 ‘트럼프와 바이든의 이슈별 입장은 무엇인가’ 제하 기사에서 코로나 대응, 경제 및 교역, 세금 및 재정지원, 헬스케어, 형사 사법, 투표 및 정부, 외교 정책 등 분야별로 주요 이슈에 대한 후보의 생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제시했다.9) 쟁점이 되는 분야에 대해 체크박스 형식으로 후보의 찬반 입장을 알기 쉽게 표현한 것이나, 독자가 상단의 바를 클릭해 관심 분야를 빨리 찾아볼 수 있도록 한 방식이 눈에 띈다. 웹사이트를 공약 보도의 주요 플랫폼으로 활용함으로써 지면의 한계를 넘어섰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 선거 이후가 더 중요하다…공약 이행 검증 보도
미 언론들은 대통령 당선 이후 공약 보도에도 공을 들였다. 취임 100일, 1년 등 계기가 있을 때뿐만 아니라 임기 말까지도 전체 공약이 얼마나 이행됐는지 점검하는 집요한 태도를 보였다. 이 같은 접근 방식은 공약이 선언적 구호나 공염불에 그치지 않도록 정치인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유권자인 독자들도 공약의 중요성에 대해 재차 인식하게 될 것이다. 공약 보도의 선순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AP통신은 바이든의 취임 100일을 맞아 기후, 경제 및 세제, 총기 규제, 주택, 건강, 이민, 불평등 등 9개 분야별 세부 공약을 총 61개로 정리하고 이중 28개가 이행됐다고 보도했다.10) 기후 분야의 경우 온실가스 감축, 파리기후협정 복귀 등 세부 항목별로 ‘시작 안함(not started)-일부 이행(partially met)-이행 완료(completed)’로 나눠 공약 이행 상황을 점검했다. AP 홈페이지에 올라온 이 기사의 그래픽에서 세부 분야를 클릭하면 해당 공약에 대해 가장 최근 바이든 대통령이 취한 조치나 백악관 브리핑, 관련 기사도 살펴볼 수 있다.
워싱턴포스트도 ‘취임 100일, 바이든은 선거 공약을 지켰나’11) 제하 기사에서 코로나 관련 공약을 필두로 한 공약 이행 상황을 점검했다. 코로나 확산 상황에서 백신 접종, 학교 등교 재개, 마스크 의무화 등이 이슈였던 만큼 이에 대한 진행 상황을 꼼꼼하게 들여다봤다. 백신 접종의 경우 바이든은 선거 과정에서 취임 후 100일 이내 백신 1억 도스(1회 접종분)를 접종 완료하겠다고 공약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이 공약이 58일 만에 완료됐으며 백신 접종 목표치를 2억 도스로 상향해 이 역시 취임 92일 만에 이행됐다고 보도했다. 다만 여전히 백신 접종을 꺼리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 과제이고, 변이 바이러스가 늘어나면서 집단면역 달성에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도 함께 짚었다.
미국 정치전문지 폴리티코(Politico)는 2023년 4월 25일 바이든 대통령이 재선 도전을 공식 선언하자 다음날 바이든 대통령의 공약 이행 상황을 평가하는 기사를 선보였다.12) 바이든 대통령이 자신의 재선 도전 명분으로 “과업을 마무리짓겠다”(Let’s finish the job)를 내세운 만큼 첫 대선 당시의 공약들이 어떻게 이행되고 있는지를 시의 적절하게 분석한 것이다. 공약 이행 정도에 따라 ‘이행’(Kept his promise), ‘진행 중‘(in progress), ’교착 상태‘(stalled), ’불이행‘(broke his promise) 등 4단계로 나눠 평가했다. 폴리티코는 코비드 19 대응, 경제 재건, 미국의 국제 리더십 복원, 건강 복지 확대 등의 공약이 이행됐다고 분석했고, 반면 총기 규제, 이민 정책 관련 공약은 이행하지 못했거나, 교착 상태라고 평가했다.
공약 점검은 임기 말까지도 이어진다. 워싱턴포스트(WP)는 전임 트럼프 대통령이 2016년 대선 과정에서 내놓은 60개의 주요 공약에 대한 이행 상황을 ‘팩트체커’ 코너에서 다뤘다.13) 이에 따르면 트럼프 전 대통령은 19개의 공약을 이행했고 30개의 공약을 지키지 못했다. 대표적으로 임기 내 일자리 1천만개 창출, 연간 4% 경제성장률 달성 같은 공약이 실현되지 못했다고 워싱턴포스트는 지적했다.
한미 정치환경의 차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미국의 정치 환경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4년 중임제를 채택하고 각 당이 대선 2년여 전부터 사실상 경선 레이스에 돌입하는 미국과 5년 단임제를 채택하며 대선 1년 전까지도 후보군 윤곽이 드러나지 않는 한국의 공약 보도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대선을 3~4개월 앞두고서야 후보들이 선출되는 한국으로선 공약이 무르익고 검증될만한 기회가 애초부터 적은 것이다. 그러나 법제도적 한계로 인해 정치 환경의 극적인 변화를 가져오기 어렵다 할지라도 미 언론이 공약에 대해 접근하는 마인드에는 충분한 시사점이 있다.
발표되는 공약을 수동적으로 전달하거나, 정치인들의 공방 위주로 정책을 소개하기보다는 언론이 보다 능동적인 관점을 가져보는 것이 그 출발점이 될 것이다. 유권자의 실생활과 밀접한 정책 현안들을 선제적으로 파악하고 이에 대한 후보군들의 생각을 정리해 효과적으로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방식을 고민해볼 수 있다. 미 언론의 사례를 참고해 공약을 입체적이면서도 한 눈에 들어오게 만들 수 있는 그래픽과 짧은 동영상 등 다양한 형식을 시도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지면이나 방송 등 전통적인 매체의 보도 방식을 뛰어넘어 자사 뉴스 애플리케이션이나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같은 SNS 플랫폼을 통해 유권자와 소통하며 공약 보도를 활성화하는 방안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선거가 끝난 뒤에도 지속적으로 공약 이행 상황을 점검하는 집요함이 필요하다. 언론이 이처럼 다양한 공약 보도 방식을 연구한다면 유권자들이 소모적인 정치 공방보다는 어떤 정치인이 나의 삶을 변화시킬 정책을 마련했는가에 보다 집중하도록 도움을 줄 것이다. 동시에 정치인들이 공약에 보다 주력하게 하는 선순환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 1 응질론의 정면충돌 빌런들을 불러내다, 한겨레, 2021년 11월 6일
- 2 [대선 D-100] ① 대세후보 없다…정권교체론 우세에도 승패 안갯속, 연합뉴스, 2021년 11월 28일
- 3 나라 이끌겠다는 대선 후보들, ‘미래 비전’이 안 보인다, 조선일보, 2021년 12월 13일
- 4 [미 대선 D-1] 백악관 수성 vs 탈환…22개월 레이스 일지, 연합뉴스, 2020년 11월 2일
- 5 ‘Medicare for All’ vs. ‘Public Option’: The 2020 Field Is Split, 뉴욕타임스, 2019년 6월 23일
- 6 We Surveyed the 2020 Democrats on Gun Control. Here Are the New Dividing Lines, 뉴욕타임스, 2019년 10월 13일
- 7 On Abortion Rights, 2020 Democrats Move Past ‘Safe, Legal and Rare’, 뉴욕타임스, 2019년 11월 25일
- 8 We asked 2020 candidates how they would wield presidential power. Here is what they said., 뉴욕타임스, 2019년 9월 17일~2020년 2월 26일
- 9 Where Trump and Biden stand on the issues, 워싱턴포스트, 2020년 10월 22일
- 10 Biden’s first 100 days: Where he stands on key promises, AP통신, 2021년 4월 27일
- 11 At the 100-day mark, has Biden kept his campaign promises?, 워싱턴포스트, 2021년 4월 27일
- 12 Did biden keep his campaign promises from 2020? Here's our report card. 폴리티코. 2023년 4월 26일
- 13 ‘Trump Promise Tracker', 워싱턴포스트 2021년 1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