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문화재 보존의 근본 목적은 시간의 흐름을 막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려는 힘을 섬세하게 조정하는 데 있다. 그리고 현재를 과거의 산물이자 미래를 변화시키는 조정자로서 이해해야 한다.”1
역사는 그리 길지 않지만 광활한 자연과 다양한 건축물 등 자연·문화유산을 보존하고 활용하는 데 탁월한 성과를 낸 미국. 문화재를 원형 그대로 보존하려는 데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시민사회와 함께 호흡하며 발굴한 문화유산을 후세대가 누릴 수 있는 자산으로 남기려는 노력을 꾸준히 펼치고 있다는 점이 특히 주목할 만하다.
물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급격한 개발이 진행되면서 훼손되는 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1966년 국가역사보존법을 제정하고, 독립 200주년을 맞은 1976년부터 건축 유산 보호에 관한 관심이 본격화되면서 다양한 법률이 제정된 것이 주효했다.
하지만 이념과 인종 갈등을 뛰어넘어 역사를 보존하고 살리며 미국적 가치를 확립해나간 건 ‘시민의 힘’이다. 를 펴낸 노먼 타일러(Norman Tyler) 미국 이스턴 미시간대 교수는 “미국 문화재 보존은 비교적 짧은 역사 속에서도 일관성 있게 유지됐으며 이는 시민들이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풀뿌리’ 운동 덕분”이라고 밝혔다. 풀뿌리 운동을 중심으로 시민들의 적극적인 활동이 더해지면서 주민과 문화재가 공존하는 사회로 변모한 것이다. 이념 갈등의 심화로 역사까지 왜곡되는 우리나라의 현실에 본보기가 될 만한 요소이며,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지만 한 세기도 채 지나기 전에 수많은 근·현대 유산이 사라져버린 우리나라와는 대조적이라 할 수 있다.
지난 1년간 미국 곳곳을 둘러봤다. 이들 대부분 지역은 시민사회와 공공기관들이 협력해 자연·문화유산을 적극적으로 보호하는 동시에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해 관광객은 물론 지역민들이 보다 폭넓게 문화유산을 향유할 수 있도록 돕고 있었다.
다양한 자연·문화유산을 단지 관광자원으로 접근하지 않고 인류의 유산으로 바라보고 시민들이 자원봉사자로 적극 나서 문화재를 알려 나가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특히 어린이·청소년들이 자연·문화유산 보존에 관심을 갖고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지 고민할 수 있도록 하는 ‘주니어 레인저 프로그램(Junior Ranger program)’은 문화유산에 대한 후세대의 지속적인 관심을 끌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서원 등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을 비롯해 국립공원, 문화재가 즐비한 우리나라도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제도라고 생각한다.
민간 영역과 공공영역이 어우러져 발굴되고 보존되며 지역·시민 사회와 함께 호흡하는 사례뿐만 아니라 다양한 지역 유산을 발굴하고 보존하려는 시민들의 활동 사례도 함께 살펴보면서 한국 사회에 적용 가능성 여부 또한 고민해보고자 한다.
1. 민·관 협력으로 발굴된 자연·문화유산들
미국 곳곳에는 시민사회와 공공기관이 협력해 묻혀있던 자연·문화유산을 발굴한 사례가 제법 많다. 시민들은 공공기관과 함께 폐허가 되거나 방치됐던 ‘잊힌’ 공간을 새로운 명소로 바꾸고, 침체 위기에서 허우적대던 마을에 활기를 불어넣으며 ‘살아있는 역사현장’을 만들어갔다. 자발적으로 모인 시민들의 노력으로 개발과 자본의 논리에 따라 철거될 비운을 맞은 공간이 후세대의 자산으로 승화된 예도 있다. 부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연방정부의 협력으로 탄생한 ‘위대한’ 국립공원도 시선을 모은다.
* 미 서부지역 시애틀의 다양한 사례들
1) 개스 워크 공원(Gas work park)
시애틀 내 위치한 개스 워크 공원은 혐오시설이 주민들과 공공기관의 협력을 통해 도시의 명물로 탈바꿈한 대표적인 사례이며, 친환경 도시계획의 필요성을 보여준 곳이다.
레이크 유니온(Lake Union)에 위치한 개스 워크 공원(Gas work park)은 한때 주요 합성 가스 제조 공장2이었다.
1906년 Seattle Gas Light Company에서 석유 생산 공장으로 개발된 이후 도시 전역의 주민들에게 주요 에너지원이었다. 매연, 악취, 폐기물 등으로 끊임없이 주변의 민원 제기가 있었으나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석유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자 잠시 긍정적인 여론을 얻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다시 여론이 악화하자 1956년까지 반세기 동안 석유를 생산하던 공장은 결국 문을 닫았다. 부지가 크게 오염됐지만 1962년 시애틀 시의회 의원인 머틀 에드워즈(Myrtle Edwards, 1895-1969)가 이끄는 부동산 구매 계약이 이뤄지면서 본격적인 공원 터로의 전환이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리처드 하그(Richard Haag) 등 시민 상당수가 전문가이자 공원 개발의 일원으로 참여한 점이 특히 눈길을 끈다. 리처드 하그는 1964년 워싱턴주립대에 조경학과를 설립한 인물로, 정원과 공원의 경계를 허물고 조경을 도시 생태계 디자인으로 승화시키는 데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3.
1976년 공원으로 문을 연 이후 심각한 토양 오염이 드러나면서 문을 닫기도 했지만, 토양을 정화한 뒤 1984년 새로 문을 열면서 공원에 대한 평가도 다시 이뤄졌다.
시애틀 공원의 상징이 된 개스 워크 공원은 1999년 시애틀시의 랜드 마크로 지정된 데 이어 2013년 국가 사적지로 지정됐다. 개스 워크 공원은 이후 산업 부지 전환 및 생태학적 설계의 원형으로 국내 및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정진규 워싱턴주립대 지리학과 교수는 “도시 혐오시설을 공원으로 조성한다는 자체가 역발상적이고 또 획기적인 가장 시애틀다운 지속가능한 개발계획의 예”라며 ”철로를 자전거 길로 변모시킨 버크 길먼(Burke-Gilman Trail4)과 연결된 공원을 조성했다는 점도 친환경적인 공원계획의 특징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개스 워크 공원은 국가 사적지이기 전에 시민들이 즐겨 찾는 대표적인 공원이기도 하다. 석유 공장의 흔적이 고스란히 보여주는 엄청난 규모의 파이프를 타고 오르는 클라이머들이 상당수 눈에 띄었으며, 핼러윈 데이와 같은 특정일에는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주며 공원에 대한 역사를 설명해주는 자원봉사자 역할을 하는 시민들도 있었다. 미국 독립기념일에는 거대한 불꽃 쇼가 펼쳐지는 명소의 역할도 겸하고 있었다. 실제로 올해 펼쳐진 불꽃축제에는 팬데믹(코로나(COVID-19) 위기의 장기화)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시민 수만 명이 몰리며 성황을 이뤘다.
독립기념일을 맞아 펼쳐진 불꽃 쇼에서 만난 한 시민이 “개스 워크 공원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 공간”이라고 말한 것처럼 개스 워크 공원은 지역민들의 삶에 스며든 살아있는 문화재이자 역사 현장이었다.
1) John W. Lawrence, Dena of the School of Architecture, Tulane University, April 24, 1970.
2) www.historylink.org
3) https://uwapress.uw.edu/book/9780295746463/the-landscape-architecture-of-richard-haag
4) https://www.seattle.gov/parks/find/parks/burke-gilman-trail
2) 프리몬트 트롤(Fremont Troll)
프리몬트 트롤(Fremont Troll)은 시민사회와 공공기관이 힘을 합쳐 낙후된 공간을 문화예술공간으로 변모시켜 주변 환경을 개선시킨 사례다. 프리몬트 트롤은 1932년 지어진 오로라 다리(Aurora Bridge) 아래 자리잡은 공공 조각상으로, 높이는 18피트, 무게는 2톤에 달한다5 .
활발한 마약 거래 탓에 위험지역으로 분류되면서 방치되다시피 했던 다리 아래에 빛이 들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89년. 시애틀시가 프리몬트 예술위원회(Fremont Arts Council)에 오로라 다리 아래 환경을 개선할 수 있는 예술작업을 요청하면서 변화가 일기 시작됐다. 프리몬트 예술위원회는 예술과 예술가를 지원하는 지역 사회 운영 조직으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인 단체이기도 하다. 프리몬트 예술위원회에서 개최한 경연대회에서 스티브 바데네스가 이끄는 팀이 우승했는데, 노르웨이 설화를 바탕으로 한 민담 ‘아기 염소 세마리(Billy Goats Gruff)’에 착안한 트롤이 탄생한 것. 이 거대한 조각상은 폭스바겐 비틀을 찌그러뜨리면서 도로를 지키고 있다.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등에도 출연하며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트롤 역시 도시 환경을 개선하는 데 시민들과 공공기관의 협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되기 충분하다.
3)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Pike Place Market)
시애틀의 명물로 꼽히며 시애틀을 대표하는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Pike Place Market)은 한때 철거 대상이었다. 보존을 위한 시민들의 적극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비운을 맞았을 것이다.
1907년 8월 17일 개장한 이래 전통시장으로서 역할을 해냈지만 경제 효율성을 이유로 지난 1963년 철거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시민을 중심으로 한 지역 사회의 강력한 반대로 살아남은 뒤 1971년 역사보존 지구로 지정6됐다. 지난 2007년 100주년을 맞은 바 있는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은 지금까지 전통시장 고유의 역할을 유지하며 지역 사회와 함께 숨쉬고 있다.
펜데믹으로 인해 관광객이 크게 줄었다고는 해도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 거리 곳곳에 인파가 가득했다. 특히 1971년 문을 연 스타벅스 1호점은 문전성시를 이뤘다. 필자가 찾은 시각이 평일 오전 9시였음에도 불구하고 스타벅스 1호점에서만 살 수 있는 기념품을 사기 위한 관광객들의 행렬이 다섯 블록 이상 이어져 있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상인은 “우리 마켓은 단순히 물건을 파는 곳이 아니다. 전통을 전하는, 시민들과 함께 하는 놀이터”라고 말했다.
전통시장이 갈수록 설 자리를 잃어가는 현 시점에서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의 생존을 넘어선 활력은 지역민들과의 적극적인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한 예다.
5) https://fremont.com/explore/sights/troll
6) 시애틀의 도시공간 특성: 역동성과 다양성, 신정엽, 한국지리학회지 4권 1호 2015
4) 언더그라운드(Underground)
시애틀의 꼭 가봐야 할 명소로 꼽히는 언더그라운드(Underground)는 반세기동안 ‘잊힌’ 공간이 시민들의 노력으로 부활한 대표 사례로 꼽힌다.
1889년 대화재로 인해 파이오니어 광장(Pioneer Square)을 중심으로 한 25개 블록에 이르는 중심상업지구가 소실되자 당국은 불탄 도시 중심부를 철거하고 복구하는 대신 언덕을 깎아 3m 정도 높게 토지를 다져 건물을 지어 올리기로 했다. 침수가 잦았던 데다 비용 문제 때문이었다. 화재 전에는 건물 상당수가 목조 건축이었지만, 대화재 이후에는 화재를 막기 위해 석조 건축물만 허용했다고 한다. 신규 도로는 기존 건물 2층과 연결됐고, 처음에는 고도가 다른 신규 도로, 기존 도로, 건물 1층과 2층이 혼재돼 사용되다가 이후 신규 도로, 건물 2층이 새로운 도심의 기준면이 됐다7. 이렇게 지하가 된 대화재 현장은 반세기 이상 파이오니어 광장 아래 묻히면서 ‘잊힌’ 공간으로 전락했다.
1950년대 들어서면서는 시애틀 중심지구가 북쪽으로 옮겨가면 파이오니어 광장 주변은 황폐해지기까지 했다. 퇴락한 지역이 다시 빛을 발하게 된 것은 언론인 출신인 빌 사이델(Bill Seidel) 덕분이다.
954년 시애틀 대화재로 소실된 도시의 잔해를 발견한 그는 지역 언론사에 이를 알렸고, 모금 활동을 벌이는 동시에 파이오니어 광장을 역사지구로 지정하도록 대대적인 시민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이후 시애틀 시의회는 1970년 5월 파이오니어 스퀘어 역사지구(Pioneer Square Historic District)에 있는 20개의 정사각형 블록을 명명하는 조례를 채택했고, 파이오니어 광장은 첫 국가 사적지로 등재되는 쾌거를 이뤘다. 언론과 정계, 시민사회가 힘을 합쳐 이뤄낸 결과물인 셈이다.
사이델이 시민 캠페인의 하나로 1965년 시작한 언더그라운드 투어(Underground Tour8)는 오늘날 시애틀의 가장 인기 있는 코스 중 하나가 됐다. 화재로 인해 불탄 뒤 지하 공간에 온전히 보존된 호텔, 은행 등의 모습은 1800년대 후반 미국의 한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필자가 투어에 참여했을 당시 그룹에는 입소문을 타고 전국 각지에서 모인 관광객 50여명으로 구성됐다. 어르신 가이드의 화려한 입담에 폭소가 터지는 등 남녀노소 두루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 덕분에 대화재의 참혹했던 현장은 더 이상 잊힌 과거가 아닌 ‘재미있는 역사’로 거듭나 있었다.
7) 시애틀의 도시공간 특성: 역동성과 다양성, 신정엽, 한국지리학회지 4권 1호 2015
8) undergroundtour.com
* 미국 서부의 또다른 도시들
1) 워싱턴주 워내치(Wanechee)
한때 ‘사과의 수도(capital of apple)’로 불렸던 워내치는 쇠락한 도시에 제2의 생명을 불어넣은 대표 사례로 분류된다.
1960년대부터 인구가 줄기 시작하면서 철도역과 인접한 워내치의 메인스트리트는 주변 도시를 연결하는 통과 도로로 사용되는 데 그쳤다. 이에 이 일대는 해체 위기를 맞았다.
마을을 살리자는 데 뜻을 모은 상인들이 힘을 합친 데 이어 1990년대 들어 민·관 협업 관계를 바탕으로 지역사회의 자발적이로 자생적인 해결법을 찾는 것을 지향하는 메인스트리트 프로그램 지원을 받으면서 마을이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사과 저장 창고 등 건축물들은 지역산업의 역사를 담은 산업유산 보전 차원에서 워내치 등록문화재로 지정9 되기도 했다.
철강 회사(Pybus Steel) 자리에 세워진 지역 명소인 퍼블릭 마켓은 철로가 다닌 흔적 위에 세워져 관광객의 발걸음을 이끌었다.
마켓 내에는 철도 노동자의 동상이 마련돼 있었고, 철강 회사의 역사가 담긴 사진들이 입구의 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마켓 입구에는 일부 철로가 남아있었다. 이 같은 역사성 덕분인지 주말 무더위 속에서도 마켓을 이용하는 지역민들이 꽤 보였다. 인근 공원과 연계해 지역의 역사를 알리는 문화 공간의 구심점이 됐다.
2) 캘리포니아주 LA 근교 베니스 운하 역사지구
‘미국의 리틀 베네치아’로 꼽히는 LA 근교 베니스 운하 역사지구는 침체와 방치로 고통을 겪다 보존지구로 재조명 받은 캘리포니아주의 대표 사례다.
1905년 개발자이자 사업가 애벗 키니(Abbot Kinney)가 건설한 인공 습지 운하인 베니스 운하는 당초 약 2마일에 달하는 해수 습지대에서 준설된 미국의 베니스(Venice of America)다. 7개의 별도 운하로 이뤄져 있었으며, 운하는 작은 삼각형의 미국 섬을 포함하여 4개의 섬을 둘러싸고 있는 형태였다. 곤돌라까지 오갔던 운하는 보행자 위주로 설계된 탓에 자동차의 급속한 보급으로 매력을 잃게 됐다. 1924년 당시 독립 도시였던 베니스가 수질 관리가 어려운 운하를 유지하는 대신 교통 인프라를 구축하기로 하면서 지역민들의 거센 반발을 샀지만, 결국 많은 운하가 새로운 도시로 바뀌게 됐다.
베니스가 LA에 통합된 이후 남은 운하 역시 환경문제와 자금난으로 인한 분쟁이 지속되면서 제대로 관리되지 못해 방치되고 말았다. 하지만 건립이 다시 박차가 가해진 것은 근 100년 가까이 지난 1982년. 운하를 둘러싼 주거지역이 1982년 국가사적에 등록10 되고, 베니스 마을 남쪽에 남은 6개 운하가 재조명되면서 1992년 재정비되면서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이후 베니스 운하를 비롯한 마을이 역사지구로 지정됐고, 인근 베니스 비치 등과 맞물려 젊은 층들의 발길도 이끌었다.
실제로 베니스 운하와 인근 베니스 비치에는 젊은 층이 주를 이뤘다. 부모의 손을 잡고 산책하는 어린이 청소년도 상당수였다. 베니스 비치를 중심으로 스케이트보드 시설과 산책로가 곳곳에 조성됐고, SNS에 올리기 좋은 다양한 색감의 건축물, 맛집, 조형물 등이 해변을 따라 통일감 있게 조성돼 있었다.
운하와 비치를 중심으로 한 여러 스토리텔링은 주변 경관과 잘 어우러져 젊은 층을 사로잡았다. 문화유산이 인근 해변을 적극 활용해 젊은 세대의 관심을 이끌어낸 좋은 예다.
9) 역사와 문화를 활용한 도시재생 이야기, 도시재생사업단 엮음, 한울, p.34~p.35
10) https://hmn.wiki/ko/Venice_Canal_Historic_District
* 미국 동부 도시들
1) 워싱턴D.C의 조지타운(Geoge town)
미 서부에 비견할 만한 사례가 미 동부에서도 많이 발견된다. 1600년대 말 처음 사람들이 정착하기 시작했으며, 영국 식민지였던 1751년 독립된 마을로 통합된 조지타운(Geoge town)이 대표적이다. 1871년 공식적으로 워싱턴D.C에 편입됐지만 지금까지도 ‘워싱턴D.C의 이웃 마을’로 불리길 바랄 만큼 개성이 뚜렷한 곳이기도 하다.
한때 경제·사회 중심지로 명성을 떨쳤으나 철도가 화물운송의 주요 수단으로 운하를 대체하면서 조지타운은 침체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John F. 케네디와 그의 부인 재키 케네디 여사가 파티를 열면서 조지타운은 상류층이 모이는 곳으로 이름을 알리게 됐고, 1950년대 들어서 다시 활기를 띠게 됐다. 이에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50여 년에 걸쳐 조지타운 양식의 건축물이 들어선 멋진 마을을 만들어갔다. 침체로 인해 역설적으로 보존됐던 페더럴 양식(Federal Style, 1780년부터 1815년 주류를 이뤘던 건축 양식)의 주택들은 이후 페더럴 양식 건물들을 대표하게 됐고, 조지타운 지역사회를 규정 짓는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11를 이뤘다.
페더럴 양식을 대표하고 있는 집이 바로 1799년 지어진 덤바턴 하우스(Dumbarton House)다. 카페트와 벽지도 전통 방식을 따라 옛모습 그대로 복원하는 등 1932년 공개된 이래 박물관을 겸하고 있다.
이 집에서 주목할 또다른 특징은 국가가 아니라 비영리 단체에서 집을 매입해 보존했다는 데 있다. 1928년 집을 사들여 복원에 나선 비영리 단체 NSCDA(National Society of The Colonial Dames of Ameica)다.
NSCDA는 1891년 결성된 재단으로, 44개주에 지부를 두고 있으며 1만 5000명 이상의 여성 회원이 참여하고 있다. 이 재단은 덤바턴 하우스뿐만 아니라 메릴랜드주 등 10여 곳의 저택을 매입해 보존 관리하는 등 역사 보존에 앞장서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이와 함께 조지타운에 위치한 올드 스톤 하우스(Old Stone House)는 규모는 작지만 1765년 지어진 이래 지금껏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가장 오래된 유서 깊은 건물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당시 쓰였던 물품들이 2층에 전시돼 있다.
록 크릭 국립공원(Rock Creek Park)에서 보수 관리 중이며, 록 크릭 국립공원 비지터 센터를 겸하고 있다.
백악관(White House)을 비롯해 국회의사당(Capitol hill), 워싱턴 기념탑(Washington Monument), 내셔널 몰(National mall), 링컨 메모리얼(Lincoln Memorial), 스미소니언 국립자연사 박물관(Smithsonian Institution National Museum of Natual History) 등 볼거리가 차고 넘치는 워싱턴D.C 중심부에서 다소 떨어진 거리에 위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지타운이 독자성을 유지하고 많은 관광객을 모을 수 있는 것은 이렇듯 지역 특유의 건축 양식은 물론 지역성을 잃지 않은 덕분이라 해석된다.
지역 특색이 반영되지 않은 채 단순한 성과 위주의 문화유산 발굴 및 보존은 지양되어야 함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2) 필라델피아의 엘프레스 골목(Elfreth’s Alley)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조직을 결성해 골목 이름을 되찾고 건물 보존에 앞장선 지역도 있다. 필라델피아 올드 시티(Old City)내 위치한 엘프레스 골목(Elfreth’s Alley)이다.
엘프레스 골목은 1700년대부터 형성된 미국의 가장 오래된 주거지역으로, 워싱턴 D.C의 조지타운과 마찬가지로 페더럴 양식의 건물이 주를 이루고 있다. 산업혁명 이후 주변에 공장이 둘러싸이면서 골목 고유의 특성을 잃었다.
하지만 1930년대 들어 돌리 오티를 비롯한 지역민들의 주도에 지역 역사학자들이 힘을 보태면서 엘프레스 골목 협회가 조직됐다.
이후 적극적인 활동을 통해 골목 이름을 되찾는 데 성공했으며, 역사지구 지정 등을 통해 건물 보존에도 앞장서고 있다.
현재 30여 가구가 살고 있으며, 골목에 박물관을 만들고 각종 서비스를 도입해 골목을 적극 홍보하고 있다. 필라델피아시가 주도적으로 펼치고 있는 ‘올드 시티’에 포함돼 있다.
11) 문화유산의 보존, 노먼타일러 등 지음, 강경환 옮김, 민속원, p.182
*미국 남부 도시들
1) 뉴올리언스의 뷰 카레 역사지구(Vieux Carré Historic District)
‘프렌치 쿼터(French Quarter)’로 널리 알려진 뷰 카레 역사지구12 는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폐허로 변한 뒤 역사적 중요성과 관광 흡인력으로 인해 가장 먼저 다시 문을 열고 주민들이 거주하게 된 남부 지역의 대표 사례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계획 도시로도 꼽히는 이 곳에는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공공시장인 프랑스 시장도 자리잡고 있다.
1850년대 미시시피 밸리의 금융·상업 중심지로서 국제도시로 이름을 날렸지만 1900년대 초부터 급속히 쇠퇴하고 말았다. 1936년 시민들이 주축이 된 뷰 카레 위원회(Vieux Carré Commission)가 만들어지면서 원형 보존 움직임이 형성됐으며, 수십년에 걸친 노력 끝에 1966년 뷰 카레 역사 지구는 국가 역사 명소 지구(Vieux Carré National Historic Landmark District)로 지정됐다.
사실 프렌치 쿼터는 다문화의 표본으로도 간주된다. 구역 안쪽에는 프랑스풍 건물과 스페인풍 건물이 혼재돼 있다. 프랑스와 스페인이 100여 년 간 번갈아 통치한 흔적인 셈이다. 외곽은 이탈리아식 건물이 눈에 많이 띄며, 멕시코의 흔적도 곳곳에서 발견된다.
12) www.tclf.org
2) 샌안토니오의 알라모 광장(Alamo Square)
미국 남부에는 개발 광풍을 이겨내고 역사성을 고스란히 지킨 지구가 제법 된다. 미국 텍사스주 샌안토니오에 위치한 알라모 광장(Alamo Square)이 대표적이다.
알라모 광장은 텍사스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유적인 알라모 인근에 세워진 상업지구로, 1977년 역사지구로 지정됐다. 이후 알라모 광장 옆으로 휴스턴 역사 거리(Huston historical street)가 조성됐으며, 리버사이드를 중심으로 건물, 상점 등이 늘어섰다. 역사지구로 선정된 덕분에 무분별한 도시 개발의 피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좋은 사례가 됐다.
사실 이 지역은 전쟁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하고 있다. 2000년 전 원주민들이 정착했던 이 지역에 스페인 정복자들은 1724년 발레로 샌안토니오 교회를 세웠다. 이 교회는 나중에 프랑스군으로부터 스페인 점령지역을 지키기 위한 군사 요새가 됐다. 텍사스 군대는 이 교회에서 멕시코군에 대항해 13일간 알라모 공성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 같은 역사성 때문에 이 곳은 ‘전쟁의 기억’을 중심으로 한 전쟁과 승리의 역사 알리기에 초점이 맞춰져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변화가 생겼다. 스토리텔링에 관심이 옮겨가면서 도심 곳곳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내는 데 시민들의 역량이 집중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알라모 광장 역사지구가 40℃에 육박하는 불볕더위 속에서도 관광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스토리’였다. 광장 주변으로 이어진 Menger hotel, Emily Morgan hotel 등 유서 깊은 건물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낸 주민들의 도심 투어 등에 관광객들이 몰렸다. 필자 역시 알라모 광장 인근으로 흐르는 강을 중심으로 이뤄진 리버사이드 워크 크루즈 투어에 참여하기 위해 뙤약볕 아래 1시간 가까이 기다리는 인내심을 발휘하기도 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탄생시킨 미 중부 국립공원
지역민의 열정과 세계적인 부호의 열정, 대통령의 관심이 맞물려 50여 년에 걸친 치열한 논쟁에 마침내 마침표를 찍으며 지정된 국립공원 사례도 있다. 세계적인 부호 록펠러의 관심과 사랑이 만들어낸 미 중부 와이오밍 주에 위치한 국립공원, 바로 로키산맥의 설산이 돋보이는 그랜드 티턴 국립공원(Grand Teton National park)다.
1872년 미국에서 처음으로 지정된 국립공원이자 1978년 유네스코 세계 자연유산으로 지정된 인근의 옐로스톤 국립공원(Yellowstone National Park)과 다른 점은 그랜드 티턴 국립공원엔 주민들이 살았던 거주지가 그대로 보존돼 있다는 점이다. 국립공원 안에 거주지가 보존된 곳은 미국 내에서 흔치 않다. 이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 그대로를 보존한 여느 국립공원과 달리 그랜드 티턴 국립공원은 지정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음을 의미한다.
이 국립공원이 시선을 모으는 것은 국립공원 지정을 위해 앞장선 지역민들의 열정과 록펠러 2세라는 거부의 기부와 열정이 없었다면 결코 보존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데 있다. 미국은 자원봉사와 기부로 만들어진 나라라는 우스개소리에서 알 수 있듯, 미국에서는 거부들의 기부행렬이 줄을 잇는다. 세금 절세 등의 비판도 크지만 록펠러의 기부와 노력이 없었다면 그랜드 티턴은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없었을 것이다.
록펠러가 그랜드 티턴에 주목하게 된 것은 1920년대. 1929년 그랜드 티턴이 국립공원에 지정됐지만, 규모가 너무 작자 일부 지역민들을 중심으로 토지를 구입해 국립공원의 범위를 더욱 넓히자는 주장이 제기됐다. 공원 주변을 보호해달라는 주민들의 요청을 받고 해당 지역을 찾았던 록펠러는 그랜드 티턴의 매력에 흠뻑 빠졌고, 본인의 이름으로 토지를 매입하게 되면 매입가가 훌쩍 뛸 것을 우려해 스네이크 리버 토지회사(Snake River Land Company) 명의로 산 주변 토지를 모조리 사들였다.
하지만 국립공원 확대는 요원했다. 산 주변에 살고 있던 목장주 등 주민들의 거센 반발이 있었던 것. 20여 년의 세월이 지나도 공원 지정안이 의회를 통과하지 못하자 록펠러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국립공원 지정을 요청하는 편지를 직접 쓰기도 했다. 이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3년 대통령령으로 잭슨 홀 국립 기념탑을 세워 국가기념물을 만든다. 의회 통과는 결국 실패했지만, 주민들과 극적인 합의가 이뤄지면서 1950년 드디어 국립공원으로 재지정됐다.
이에 따라 다른 국립공원과 달리 모르몬교 신자들이 일궜던 모르몬 로(Mormon Row), 커닝햄 오두막(Cunningham Cabin Historic Site) 등 주거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로렌스 S. 록펠러 자연보호구역(Laurance S. Rockefeller Preserve)도 그랜드 티턴 국립공원의 일부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2. 주민들과 함께 살아 숨쉬는 문화유산들
지역의 작은 문화유산은 물론 세계적으로 이름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이라 할지라도 미국 유산의 상당수는 지역민들과 함께 호흡하고 있었다. 도심에서 꽤 떨어진 곳이라도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관광객의 발걸음을 이끌 수 있는 데는 지역민의 애정과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 텍사스주 샌안토니오의 산 안토니오 수도원(San Antonio Missions)
2015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된 ‘산 안토니오 수도원(San Antonio Missions)’은 지역민들과 함께 살아 숨쉬는 미국 남부지역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이다.
산 안토니오 수도원 역시 앞서 소개된 알라모 광장과 함께 전쟁과 승리의 역사를 중심으로 해석됐다. 한때 이 일대에 살았던 네이티브 아메리칸과 스페인의 역사는 패전 이후 축소되거나 잊혔다.
하지만 네이티브 아메리칸 문화를 복원하려는 전국적인 움직임과 맞물려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과정에서 전쟁의 결과물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지역에 새겨진 삶과 문화라는 접근이 이뤄졌다. 이로써 산 안토니오 수도원은 전쟁의 흔적에 국한되지 않고 보다 풍성한 삶의 궤적을 보여주는 현장으로 변모했다.
샌안토니오 식민화와 복음 전파, 누에바 에스파냐(Nueva España)의 북쪽 국경을 방어하기 위해 힘썼던 스페인 왕실의 노력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한 수도원은 텍사스 남부 산 안토니오 강(San Antonio River)을 따라 펼쳐진 5개 국경 수도원 단지와 남쪽으로 37㎞ 떨어진 곳에 있는 목장을 아우른다. 수도원 단지는 18세기 프란체스코 수도회 선교사들이 세웠으며, 학적·고고학적 구조물과 함께 농지·주택·교회·곡물 창고는 물론 관개시설도 마련돼 있다. 산 안토니오 수도원은 또 자연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원주민 문양과 가톨릭의 상징이 결합한 교회의 장식 등 독특한 특징13을 보여주고 있다.
1) 주민들이 들려주는 스토리텔링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등재 이후 뚜렷한 변화는 유산을 알리고자 하는 주민들의 적극적인 참여 의지다. 지역민들을 중심으로 한 스토리텔링의 힘이 문화유산을 바라보는 시각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들 지역을 중심으로 다양한 투어들이 마련돼 있는데, 가이드를 맡은 이들은 50~60대 지역민들로 주로 구성돼 있었다. 자신을 ‘그링고(라틴국가에서 라틴계 미국인을 낮춰 부르는 말)’라고 밝힌 가이드 알렉스 씨는 지역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렇듯 지역민들이 지역 유산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지역민들 자체적으로 다양한 투어 프로그램을 마련해 관광객들에게 풍부한 뒷이야기를 들여주는 것은 문화유산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문화재에 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상당히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와 함께 라티노에 대한 차별이 줄어들고 스페인어가 공용어급으로 보급된 점도 특이할 만하다. 실제로 이 지역에선 영어와 스페인어를 함께 표기한 곳들이 제법 눈에 띄었다. 전통적인 백인 중심 사회인 남부 지역의 큰 변화가 아닐 수 없다.
2) Ghost tour
고스트 투어도 마찬가지. 말 그대로 밤 9시 이후 진행되는 투어로, 주요 건물을 소개하면서 해당 건물에 얽힌 비화도 풀어내는 식이다. 이들 가이드 역시 지역민들이지만 다소 젊은 층이 주를 이루고 있는 게 특색이다.
밤늦게 진행되는 투어였지만 남녀노소 50여 명 이상이 참여했으며, 어린이 청소년도 잠을 이겨내며 투어에 끝까지 참여하는 열의를 보였다. 타주에서 온 관광객들뿐만 아니라 샌안토니오 인근 지역민, 텍사스주 주민들도 상당수를 이뤄 지역에서 보이는 관심도 상당히 높았다. 특히 샌안토니오의 심장으로 꼽히는 산 페르난도 대성당(San Fernando cathedral)과 스페인 지배 시절 지어진 주거 건축물 중 텍사스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스페인총독궁(Spanish governor’s palace)에서 발견됐다는 유령 사진을 마련해 옛 문화재에 대한 문턱을 한껏 낮췄다.
사실상 미국에서는 이 같은 고스트 투어가 지역마다 심심찮게 발견된다. 하지만 고스트 투어가 문화유산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질 수 있는 것은 문화유산이 삶과 괴리된 공간이 아니라 감각적으로 우리가 보는 것 그 이상의 상상의 영역14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주효하다.
* 캘리포니아주 LA의 다양한 건축·구조물들
1)역사적 건물과 현대건축물의 조화
로스엔젤레스를 더욱 멋스러운 도시로 변화시킨 것은 다양성을 지닌 건축물 덕분일 수 있다. 건축가 개인 역량이 강조되는 시카고의 화려한 건축물들과 달리 LA의 오래된 건축물과 최근 건축물은 조화를 이루며 다양한 이야기가 덧붙여져 후세대에 전달되고 있었다. LA를 ‘이미지’의 집합체로 보고, 상상의 도시로서 문화적인 해석을 강조 15하는 분석이 설득력 있는 이유다. 다채로운 문화적 해석은 LA를 포스트 모더니즘 건축의 대표 도시로 우뚝 서게 했다.
14) Exploring Field Mapping haunted data: Creative geographic visualization, Jin-Kyu Jung, KAGES, P.5
LA 도심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상업용 건물로 꼽히는 브래드버리 빌딩(Bradbury Building)은 1893년 세워진 후 1990년대 초 완전히 복원되면서 다운타운에서 가장 사랑받는 건축물로 이름을 널리 알리고 있다.
브래드버리 빌딩과 LA 첫 전통시장으로 꼽히며 영화 촬영지로도 잘 알려진 그랜드 센트럴 마켓(Grand Central Market) 등이 위치한 거리에서 100년 전통을 느낄 수 있다면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 등이 이어지는 인접한 거리에서는 도시의 미래를 엿볼 수 있었다.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큰 중고서점인 라스트 북스토어(The Last Bookstore)16 는 오래된 은행 건물의 외형을 그대로 살리며 사라져가는 서점의 특성을 이어간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거대한 금고 안에는 추리소설 등 다양한 장르의 책이 화려한 장식과 함께 전시돼 있었고, 독특한 형태로 책을 쌓아 전시하면서 SNS를 중심으로 입소문을 타 젊은 층으로부터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필자가 방문했던 날 역시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사진을 촬영하고 책을 구입하기 위한 젊은 층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인터넷 서점 등으로 인해 오프라인 서점이 설 자리를 갈수록 잃어가는 시점에서 라스트 북스토어의 행보는 눈여겨볼 만하다.
15) Postmodern Urbanism, M. And S. Flusty, Annals of the Association of American Geographers. Vol.88.
16) www.lastbookstorela.com
2)Hollywood 간판
LA의 랜드 마크로 꼽히는 ‘할리우드(HOLLYWOOD)’ 간판 역시 문화적인 해석이 건축물 특성을 돋보이게 한 대표적인 사례다.
이 간판은 1923년 ‘HOLLYWOODLAND’라는 부동산회사의 광고에서 출발했다. 부동산 개발회사의 할리우드 주택과 땅을 매입하기 위해 설치한 조형물이었던 이 간판은 지난 1939년부터 유지 보수가 중단되면서 파손된 글자 ‘LAND’가 철거됐다.
1978년 할리우드 사인 기금(Hollywood Sign Trust)이 설립되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현재의 간판이 세워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후 철거 위기를 또 맞았다. 할리우드 언덕 토지 소유주들이 호화주택지로 개발하려는 부동산회사에 토지를 팔려고 한 것이었다. 지역민들이 중심이 된 비영리단체의 적극적인 설득으로 결국 이들은 비영리단체에 땅을 판매하기로 결정했으며, 이후 존 헤프너 등 유명인사의 기부금 행렬,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전역에서 보내온 기부금으로 보존이 되면서 오늘날 모습을 갖추게 됐다.
이 간판 덕분에 사인을 잘 볼 수 있는 레이크 할리우드 파크(Lake Hollywood Park)도 덩달아 인기를 모으고 있다. ‘할리우드’ 간판이 지닌 이미지와 문화적 해석은 지역민의 역량이 더해져 할리우드뿐만 아니라 LA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우뚝 섰다.
3. 민·관·언 협력의 결정체 보스턴 ‘프리덤 트레일(Freedom Trail)’
민·관·언의 협력으로 역사를 보존하고 복원한 사례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은 바로 미 동부 대표 도시인 보스턴에 위치한 프리덤 트레일(Freedom Trail)이 있다.
1958년 저널리스트 윌리엄 스코필드는 주요 유적지를 연결하는 보행 구간을 만들고자 계획했다. 그의 노력에 행정기관, 시민단체의 힘이 더해져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공원으로 꼽히는 보스턴 커먼(Boston Common)을 시작으로, 그래너리 공동묘지(Granary Burying Ground), 올드 사우스 집회소(Old South Meeting house), 보스턴에서 가장 오래된 공공 건물로 1776년 미국 독립선언문이 처음 낭독된 올드 스테이트 하우스(Old State house), 올드 노스 처치(Old North Church), 폴 리비어 하우스(Paul Revere house), 미국독립혁명의 첫 전쟁터로 수많은 사상자를 낳았던 곳을 기념한 벙커힐 기념탑 등 유명 역사유적지 16곳이 4km에 이르는 하나의 큰 길로 이어졌다
붉은색 벽돌선이 구비구비 펼쳐진 길은 초보자들도 쉽게 따라갈 수 있도록 바닥에 표시돼 있었다.
필자가 이 곳을 방문했을 당시엔 한낮 온도가 33도까지 오르는 불볕더위에도 불구하고 워킹 투어에 참여하려는 관광객이 줄을 이었다. 1시간~2시간에 이르는 도보 투어가 주를 이뤘으며, 보스턴 대학살 당시의 전통 의상을 갖춰 입은 가이드가 프리덤 트레일과 관련한 보스턴의 역사에 대해서 상세히 설명해주는 투어도 있었다.
매사추세츠주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지구인 보스턴의 비컨힐 역사지구(Beacon Hill historic District)는 잘 정의된 경계를 가진 역사지구의 모범사례로 꼽히고 있다.
19세기 후반 설립된 크리스천 사이언스 제일교회 역시 10년 이상에 걸쳐 시행된 종합적인 수리·복원계획의 대표적인 성공사례 중 하나로 거론되고 있다. 대부분 벽돌로 된 연립 주택 형태의 건축물에는 빅토리아 시대뿐만 아니라 20세기 초 식민지 부흥 주택이 포함된다. 건축은 건축 위원회의 승인 없이는 구조물의 가시적인 부분을 변경할 수 없도록 하는 제한적인 규정에 의해 보호17 된다.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한 비컨힐 홍보 활동도 꽤 활발한 편이다. 비컨힐 타임즈(The Beacon Hill Times)가 발행되고, 홈페이지를 만들어 비컨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기도 한다. 지역에 대한 이 같은 사랑 덕분에 미국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독립 약국 중 하나인 게리 드러그(Gary Drug)가 성업 중이며, 비컨힐 역사지구만의 상업 거리도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4. 어린이·청소년을 끌어안은 주니어 레인저 프로그램(Junior Ranger program)
1960년대 초 처음 도입된 주니어 레인지 프로그램은 국립공원과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이 많은 우리나라에서도 충분히 도입 가능한 제도다.
주니어 레인저 프로그램은 말 그대로 미국 전역 국립공원에서 실시하고 있는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해당 국립공원의 이모저모를 알 수 있는 소책자를 완성하면 배지를 준다. 플로리다의 경우 1979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에버글레이즈 국립공원(Everglades National park)과 빅 사이프러스 자연보호구역(Big Cypress preserve), 비스케인 국립공원(Biscayne National park)) 등 국립공원과 자연보호구역 3곳의 주니어 레인저 배지를 획득하면 주니어 레인저 패치도 별도로 지급한다. 이렇다 보니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자연스럽게 지역의 자연유산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필자의 아이 역시 플로리다의 땡볕 아래 묵묵히 3곳의 책자를 완성하며 주니어 레인저 패치를 받기 위한 열정을 불태웠다.
*지역 자연문화유산 알리미
국립공원에서 시작된 주니어 레인저 프로그램은 국립역사공원 등 미 전역 420여 곳으로확대돼 지역 문화유산 홍보에도 큰 힘이 되고 있다.
예컨대 워싱턴주 산 후안 섬(San Juan Island)은 지리적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가족단위 관광객들이 줄을 잇는다. 산 후안 섬은 영국군과 미국군이 남북으로 나뉘어 영토 분쟁을 치렀던 미국 최북단의 섬이다. 1850년대 섬 북쪽은 영국군대가 진을 치고 있었고, 남쪽은 미국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1872년 극적인 평화협약으로 산 후안 섬은 미국 영토가 됐지만 영국군 캠프가 있던 곳을 없애지 않고 영국 국기를 걸고 보존하고 있다.
영국 캠프(English Camp)와 미국 캠프(American Camp)로 이뤄진 산 후안 섬 국립역사공원(San Juan Island national historical park)에서 각각 캠프에서 주니어 레인저 배지를 획득할 수 있게 하고, 양쪽 캠프를 상징하는 패치를 판매하는 등 미국군 캠프뿐만 아니라 영국군이 지배하던 당시 모습을 그대로 보존해 어두웠던 역사도 전하고 있다. 필자가 방문했을 당시 영국 캠프에서는 당시 생활상을 재현하는 퍼포먼스가 치러지고 있었는데, 이 역시 어르신들이 주축이 돼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상세하게 생활상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배지를 받기 위해 책자를 풀면서 해당 공원에 대한 지식을 쌓고, 당시 생활상을 관찰하면서 감추고 싶은 역사의 한 현장까지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알기 쉽게 풀어낸 것은 벤치마킹하기 충분한 요소다.
샌안토니오 중심가에서 살짝 벗어난 산 안토니오 수도원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도 마찬가지. 도심과 다소 떨어진 지역에도 불구하고 어린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것 역시 주니어 레인저 프로그램 덕분이라 추측된다. 필자 역시 배지를 받고 싶어 하는 아이를 위해 투어 끝난 후 또다시 현장을 찾았을 정도다.
그렇다고 무조건 자연문화유산 현장에 가야만 배지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직접현장을 찾아야만 하는 공원이 상당수지만, 국립공원 홈페이지( www.nps.gov )에서 책자를 다운로드해 풀어서 우편이나 이메일로 보내면 배지를 보내주거나 Virtual junior ranger 배지를 프린트할 수 있도록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도 있다. 일률적인 정책이 아니라 각 공원의 재량에 맞게 유연하게 운영되고 있는 점 역시 벤치마킹할 수 있는 부분이다.
*세계 유산 주니어 레인저(World Heritage junior ranger) 프로그램으로 확대
미국은 이뿐만이 아니라 2015년부터 온라인을 통해 세계 유산 주니어 레인저 프로그램을 운영 중에 있다.
관련 책자를 풀어 이메일이나 우편을 보내면 세계 유산 주니어 레인저 배지와 유네스코 세계 유산과 관련한 안내 책자를 받을 수 있다. 더 자세한 책자를 받기를 원한다면 20세기 건축으로 2019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가 등장하는 애니메이션과 1981년 유네스코 세계 자연유산에 등재된 매머드 동굴 국립공원(Mammoth Cave National Park)과 관련된 영상을 보고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면 된다. 배지를 받기 위해 책자를 풀면서 자연스럽게 미국의 세계 유산을 공부하게 되는 것이다.
세계 유산 주니어 레인저 프로그램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24곳 중 한 곳으로 1981년 유네스코 세계 자연유산에 등재된 올림픽 국립공원(Olympic National Park)와 매머드 동굴 국립공원, 산 안토니오 수도원 국립역사공원, 유네스코 세계 유산 잠정목록에 오른 호프웰 문화 국립 역사공원(Hopewell Culture National Historical Park) 홈페이지에서 가능하다.
도입된 지 10년도 채 되지 않은 탓에 주니어 레인저 프로그램과 달리 아직 대중화되지는 못했다. 세계 유산 주니어 레인저 코디네이터를 맡고 있는 데이비드 크루슨 씨는 이메일을 통해 프로그램을 어떻게 알리느냐가 최대 고민이라고 이메일을 통해 밝혔다.
하지만, 이런 프로그램 자체가 세계유산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하다고 판단된다. 세계 유산 잠정목록에 오른 유산도 포함시켜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자연스럽게 향후 세계 유산에 정식으로 등재될 문화유산에도 관심을 갖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피란수도 부산 등 세계 유산 잠정목록에 오른 유산을 보유한 우리나라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5. 문화유산 발굴 및 보존을 위한 지역·시민사회 협력은 현재진행형
미국 곳곳에서는 유·무형의 문화유산을 발굴하고 보존하려는 민간 차원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커뮤니티 중심으로 독특한 문화를 계승하려는 움직임은 향후 미국 사회의 한 축을 이루는 문화유산이 되기에 손색이 없다.
* 흑인 커뮤니티 지키자! 시애틀 ‘와 나 와리(Wa Na Wari)’
무형의 문화유산을 발굴하고 보존하려는 시민사회의 노력은 여러모로 이뤄지고 있다. 흑인 커뮤니티를 지키며 흑인 고유의 문화를 보존하려는 프로젝트 ‘와 나 와리(Wa Na Wari)’가 대표적이다.
나이지리아 남부의 칼라바리어로 ‘우리의 집’을 의미하는 와 나 와리는 흑인 문화 공간을 되찾고 고급 커뮤니티에서 흑인 토지 소유권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지난 2019년 Jill Freidberg 등 지역 예술가 4명이 만든 커뮤니티 기반 프로젝트다. 시애틀 중심가의 센트럴 디스트릭트에 자리 잡은 와 나 와리는 와 나 와리 공동 창립자이자 집 소유주 Green 가의 손자인 Inye Wokoma가 흑인 커뮤니티를 위한 공간을 보존하기 위해 임대한 집이다. 예술, 역사 보존 및 커뮤니티 연결을 통해 소속된 흑인의 집인 셈이다. 센트럴 디스트릭트의 기존 주민들이 대거 떠나는 젠트리피케이션을 막는 동시에 퇴색되어 가는 흑인 커뮤니티의 보존을 위한 구심점이기도 하다.
지난 3월 말 필자가 참석한 와 나 와리 구술작업 보고회(Wa Na Wari listening party)는 팬데믹으로 인해 1년 만에 가진 전체 모임이기도 했다. 지역민이 직접 나서 다른 지역민의 삶을 오랜 기간에 걸쳐 녹음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지역민들은 구술을 통해 지난했던 삶을 담담하게 풀어내면서 감동을 함께 전했다.
예컨대 한 주민은 모델 에이전시에 흑인 모델이 단 한 명뿐이어서 흑인에게 맞는 화장품과 헤어 디자이너가 없어 어려움을 겪었던 이야기를 들려줬고, 또 다른 지역민은 학교 교사로서 아이들의 가르칠 때의 방향성을 논하기도 했다. 이 같은 기억은 커뮤니티의 훌륭한 자산이 될 것임이 분명했다. 진행자로 구술작업 하나하나를 소개한 비디오 아티스트 질 프레이드버그(Jill Freidberg)는 이날 보고회에서 구술작업을 성공적으로 마친 지역민들에게 증서를 수여하기도 했다.
이 같은 작업이 이어진 데는 지역 대학의 지원도 큰 힘을 발휘했다. 크리스찬 앤더슨(Christian Anderson) 워싱턴대 예술과학학부 교수와 캐리 프레쇼어(Carrie Freshour) 워싱턴대 지리학과 교수, 정진규 워싱턴대 지리학과 교수 등은 2021년 ‘the Seattle Black Spatial Histories Institute’ 연구를 진행하면서 학교로부터 지원받은 기금 1만 달러를 와 나 와리 프로젝트에 전액 기부했다. 이날 참석했던 프레쇼어 교수와 정 교수는 “커뮤니티 참여는 학계와 시민간 협력에 기반을 둔 중요한 프레임”이라며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한 경험적 지식과 학계가 가진 전문적 지식이 어우러져야 한다는 점에서 민·학 협력은 절실하다”고 밝혔다.
* 한인 이민 역사를 한눈에 – 시애틀 ‘한인이민사편찬회’
1985년 설립된 비영리단체 ‘한인이민사편찬회(Korean American Histoical Society, 이하 KAHS)’는 1903년 하와이 이주를 시작으로 샌프란시스코, LA, 시애틀 등으로 퍼져나간 한인 이민의 역사를 발굴하고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지난 2003년 한인 이민사 100주년을 기념한 사진전을 열기도 했으며, 현재 북서부 지역 한인들이 소장하고 있는 역사기록물이나 유물을 수집해 전산화하는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디지털 아카이브를 구축 중이다. 20년 넘는 기간동안 사비를 들여 재미 한국인의 역사를 수집한 이익환 초대 회장과 한인 3세로 한인 이민사를 관통한 멜 강 현 회장, 각계각층에서 활약 중인 지식인들이 이사로 참여해 KAHS를 중심으로 재미 한국인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고 있다.
편찬회 시작부터 자료 정리 등을 맡았던 매튜 베누스카(Mattew Benuska) 씨는 한국 연세대에서 1년간 연수한 뒤 시애틀로 돌아와 한인이민사편찬회에 몸 담으면서 한국 문화에 좀 더 관심을 가지게 됐다. 이직한 이후에도 사물놀이를 배우는 등 한국과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그는 사진 신부(사진을 보낸 뒤 남편 얼굴도 모른 채 결혼 이민을 온 이민 여성) 등 하와이 이민 초창기 보통사람들의 삶이 인상적이라고 했다. 그는 “1985년 첫 간행물을 출간한 이후 KAHS 활동은 꾸준히 이어졌다”면서도 “재미 한국인의 역사가 남겨질 수 있도록 다양한 계층에서 보다 많은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국전쟁 당시 가족들이 부산으로 피란 오면서 부산에 대한 추억을 많이 전해 들었다는 신경림 이사 역시 “한국학에 관심을 갖는 학생들과 자료 수집을 위한 재정적 지원이 보다 다각도로 이뤄졌으면 한다”고 바랐다.
* ‘잊혀진 전쟁의 살아있는 기억’ – 보스턴 ‘Still Present Pasts’
재미동포들이 끔찍한 내전이자 국제전의 참화를 공적인 방식으로 기억한 첫 사례로 기록된 재미동포들의 기억의 구술사 기획 ‘잊혀진 전쟁 살아있는 기억(Still Present Pasts)’ 프로젝트 18가 지난 2006년 진행된 이래 지금껏 보스턴에서 이어져오고 있다. 채록한 재미동포 개인들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한 멀티미디어 전시는 6·25전쟁이 오늘날까지 개인과 가족, 그리고 공동체의 삶에 물려주고 있는 여러 층위의 유산을 보여주고 있으며, 구술사의 경우엔 미국의 역사기록과 대중의 의식 속에 존재하는 무관심에 도전하고 한국전쟁을 가시화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만난 램지 림(Ramsay Liem) 보스턴대 명예교수는 1980년대 후반 칠레와 중미에서 살아남은 고문 생존자들이 상담가들에게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역사적 트라우마를 극복해낸 사례를 접한 뒤 젊은 한국계 미국인들과 북한 문제를 논하면서 잊힌 전쟁의 기억을 성찰할 기회를 갖지 못한 한인들의 트라우마에 눈을 돌리게 됐다고 밝혔다.
매우 고통스럽고 숨기고 싶은 기억을 들춰내야 하는 것이 어려웠고, 일각에서는 잊힌 전쟁의 기억을 되살리는 작업을 반대해 전시를 방해하거나 공개 행사에서 이의를 제기하는 사례도 있었다. 하지만 림 교수는 “한인들 사이에서 대화의 장을 열 수 있었고, 이 같은 움직임은 보다 확장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처음 전시를 개최한 이후 지금까지 10여 년 간 이뤄진 가장 큰 변화는 한국계 미국인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전쟁의 실제 역사, 한·미 관계, 그리고 계속되는 북한과의 적대감을 알고 싶어 하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미관계에서 거의 80년에 가까운 냉전 시대를 종식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다”고 밝힌 림 교수는 “아시아에서 분단된 한국과 미국을 괴롭히고 있는 잊힌 역사에 대해 글을 지속적으로 쓰고 대중 교육을 실시하면서 미국인들이 1945년부터 지금까지 한·미 관계에 대해 알 수 있는 공간이 다소 늘어났다”는 것을 성과 중 하나로 밝혔다.
전시뿐만 아니라 한국전쟁의 기억을 저장한 ‘한국 전쟁의 유산’ 아카이브 19도 매우 인상적이다. 림 교수를 비롯한 각계각층의 지식인들이 힘을 합쳐 만든 이야기 저장소에는 주제와 유형별로 전쟁에 대한 한인들의 기억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다. 임 교수는 10년 전 한국 학자들과 협력하려고 했던 노력이 구체적인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작업에 도움을 준 한국의 학자들과 예술가들이 많았음을 밝혔다. 그는 “기회가 생긴다면 한국의 동료들과 파트너가 될 수 있는 학자와 활동가가 미국에 있으며, 이들은 훌륭한 동반자 관계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18) www.stillpresentpasts.org
19) legaciesofthekoreanwar.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