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는 출범초기 민감한 외교 문제가 언론에 보도되고 있다며, 청와대 민정수석실을 동원해 유출경로로 추정되는 외교부 북미 라인을 감찰했다. 2019년 중반쯤 뒤늦게 논란이 일자 청와대는 감찰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당사자의 동의하에 이뤄진 절차라고 설명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018년 1월 자신의 트위터에 이런 글을 남겼다. “가짜 뉴스 미디어는 나와 김정은의 1차 정상회담이 성과가 없는 것처럼 말하지만 그것은 틀렸다.” 트럼프 행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뉴욕타임즈와 워싱턴 포스트, CNN의 보도를 가짜 뉴스로 규정한 것이다.
한미 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런 풍경은 비단 지금의 일만은 아니다. 정권의 정치적 성향과도 무관하다. 이런 현상의 기저에는 외교 정책의 수립과 실행은 정치 엘리트가 전적으로 수행하는 것이고, 되도록 비밀에 부쳐져야 한다는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정책 성과 또한 전문가 집단이 판단하는 것이며, 언론은 정부에 의해 정책에 호의적인 여론을 형성하도록 동원되는 보조 수단일 뿐이라는 판단이다.
본 연구는 외교 안보 정책 영역에서 언론의 역할이 과연 관찰자 내지는 정부의 의도대로 정책 성과를 홍보하는 차원에서 머무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에서 시작됐다. 외교 안보분야는 그 어떤 영역보다 정부의 정보독점권한과 기밀 유지 욕구가 강한 만큼, 언론은 정부의 정보 조작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정부의 의도에 따라 이른바 ‘받아 쓰기’를 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 셈이다.
언론이 단순히 정부의 발표를 전달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감시견으로서 외교 안보 정책을 비판하거나 새로운 의제를 제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부로 하여금 새로운 정책을 만들에 내게 하거나, 정책 방향을 근본적으로 변경하도록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시하는 이들이 많다.
미국에서는 언론이 단순한 관찰자를 벗어나 정책 결정자를 압박해 행동(새로운 정책 결정)하도록 할 수 있다는 주장이 1990년대 탈냉전 이후부터 제기돼 왔다. 이런 주장은 이른바 ‘CNN 효과’라는 용어까지 만들어 냈으며, 학술적으로도 인정받고 있다.
이번 연구를 통해 미국의 안보 외교 정책 결정과정에서 언론이 해온 역할을 고찰해보고, 그 결과가 한국에도 적용될 수 있는지를 규명해 보고자 한다.
필자는 외교 안보 영역을 5년 동안 출입한 현직 기자다. 따라서 이 연구는 단순히 학술적 성과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언론과 외교 안보 영역 정책 결정자들의 바람직한 관계를 설정해 보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다. 외교 안보 정책 결정자들이 언론을 통제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관념이 과연 합리적이고 국익에 도움이 되는 것인지, 이념적 양극화가 심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을 어떻게 활용해서 국가 간 협상에 활용할 수 있는지, 언론은 외교 안보 문제를 보도할 때 관찰자나 전달자에 머물러야 하는지, 의제 설정과 정부 감시의 역할을 하면서 ‘진실 보도’와 ‘국익’이라는 두 가치를 어떻게 바라보고 조합해야 할지에 대한 답을 찾아보려 한다.
한미 양국의 언론 환경과 정치 지형이 다른 만큼, 한미 간 비교 연구를 기본으로 하려 한다.
2절에서는 언론과 정책 결정 과정에 대한 이론틀을 제시하고자 한다. 본 연구 주제는 정치와 언론 영역이 중첩돼 있다 보니 기존 연구가 그리 다양하지는 않다. 그나마 참고할 수 있는 기존 연구는 CNN 효과에 대한 연구이다. CNN 효과는 추후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요약한다면 언론 보도가 특정 사안에 대한 여론을 형성해 정책 결정자를 압박함으로써 행동(새로운 정책 수립 또는 정책 노선 변경)하게끔 한다는 이론이다.
퍼트남 교수의 ‘양면 게임(Two Level Game)1)’도 정책 결정 과정과 언론을 통한 여론 형성 과정을 설명한 이론이다. 특히 정보를 통제하려는 외교 안보 정책 결정자의 의도와는 달리 언론을 통해 정부 간 협상 과정이 노출됐을 때 어떤 효과가 발생할 수 있을지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틀이다. 정부의 정보 통제가 능사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제3절에서는 언론의 기본적인 역할과 외교 안보 영역에서의 언론과 정책 결정자와의 관계를 개략해 보고자 한다.
제4절에서는 2차 세계 대전을 계기로 ‘세계의 경찰’로 부상한 미국의 외교 안보 정책 결정과정과 미디어가 미친 영향을 역사적으로 조망해보려 한다. TV등장이 베트남전에 미친 영향, 인도적 개입과 CNN 효과, 그리고 아랍의 봄과 소셜 미디어의 문제를 들여다 볼 계획이다.
5절에서는 미국의 북한 비핵화 과정에서 언론이 어떤 역할을 했고, 정책 결정자들에게 어떻게 활용됐는지를 따져 볼 계획이다. 제1차 핵 위기와 클린턴 행정부의 ‘제네바 합의’, 2차 핵 위기와 부시 정부의 ‘9.19합의’,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 트럼프 행정부의 ‘힘을 통한 평화’ 등이 대상이다.
미국의 사례를 통해 언론이 정책 결정 과정에 미치는 영향력이 매우 제한적이지만, 인도적 개입 분야에서는 오히려 정책 결정자를 압박해 새로운 정책을 수립하도록 하는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미북 핵협상 과정에서 미국이 퍼트넘 교수의 양면 게임 이론을 어떻게 활용했는지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6절에서는 미국적 상황이 한국에도 적용될 수 있는지를 들여다 볼 계획이다. 북한 인권 문제와 남북 군사 협상, 한일 초계기 갈등, 한미 방위비 협상 등의 사례를 통해 CNN 효과와 양면 게임 이론이 한국에서도 적용되는지를 고찰할 것이다.
끝으로 한미 비교 연구를 통해 도출된 정책 결정 과정에서 언론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요약하면서 정책 결정자와 언론의 윈윈(WIN-WIN) 전략과 건전한 관계를 제시하는 것으로 이 연구를 마무리하려 한다.
1) guillaumenicaise.com/wp-content/uploads/2014/09/resum%C3%A9-du-cours_techniques-de-negociation.pdf
CNN 효과 이론은 실시간 뉴스 전달 매체가 등장함으로써 이런 매체들의 보도가 정책 결정자로 하여금 새로운 정책을 내놓도록 압박한다는 논리이다. 언론 보도가 정책 결정에 미치는 영향은 비록 여론을 통한 것이지만 매우 직접적이고 강력하다.
일반 대중은 자신의 피부에 와닿는 국내 뉴스에 관심이 집중될 수 밖에 없고, 국제 뉴스는 대부분 무관심의 그늘에 놓여 있다. 그러나 CNN이 등장하면서 일반 대중은 관심권 밖이었던 국제 기아와 제3세계의 내전으로 인한 참상을 안방에서 볼 수 있게 됐고, 참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영상은 일반 대중들에게 여론을 형성하도록 자극했다. 정책 결정자들도 여론에 대응하기 위해 새로운 정책 수립 등과 같은 재빠른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미디어의 발달로 공론의 장이 확대되면서 정부가 조용히 외교 안보 정책을 수립할 수 있는 여지가 줄어든 것이다.
CNN 효과의 실제 사례는 자국이 아닌 타국의 인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강대국이 무력 개입하는 ‘인도적 개입’ 문제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다. 다만 CNN 효과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정책 결정자들이 분명한 정책 노선을 가지고 있기 보다는 모호한 입장에 있거나 아예 어떤 방향도 정하지 않은 상태여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양면 게임 이론은 국가간 협상 과정을 설명한 이론이다. 협상자는 겉으로는 타국과 협상(Level 1)을 벌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이 협상에 민감한 국내 세력과도 협상(Level 2)을 벌이고 있다는 논리이다. 레벨 1은 양국간의 잠정적 합의를 하는 과정이고, 레벨 2는 양국간 잠정적 합의를 비준하는 과정이다. 이때 비준은 국회 비준뿐 아니라 이해 집단이나 국민들의 묵시적인 동의까지도 포함한다. 국내 행위자도 의회, 정당, 관료, 시민단체, 국민 등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국내적으로 논쟁이 뜨거운 이슈일수록 양국가가 합의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그럴수록 협상자의 협상력은 커지고 협상이 이뤄질 경우 얻을 수 있는 이익은 크다.
퍼트넘은 이런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윈셋(winset)’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윈셋은 ‘국제 협상 과정에서 국내 비준을 얻을 수 있는 모든 합의의 집합’을 의미한다. 단순하게 얘기해서 협상에 대한 국내적 합의 가능성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협상 당사국은 원셋이 교차하는 영역, 즉 양국 모두 국내 비준을 받을 수 있있어야 협상에 합의할 수 있다. 또한 모든 조건이 동일한 상황에서 어느 한쪽이라도 원셋이 확대(국내 비준 가능성 확대)되면 협상 합의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러나 윈셋의 크기에 따라 합의를 통한 이득이 크기도 달라질 수 있다. 원셋이 작을수록 협상 이득은 커진다. 이 때문에 양국은 협상 합의를 성공적으로 이뤄내면서도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원셋을 조작하는 전략을 세우기도 한다. 첫 번째는 자국의 원셋을 축소하는 발목 잡히기 전략이다. 협상 당국자가 국내 여론에 자유롭지 못한 상태가 된다는 의미로, 이럴 경우 협상 당국자의 자율성은 확연하게 떨어지고 합의 가능성도 낮아진다. 하지만 상대 협상국이 이런 상황을 인정하고 합의에 이르는 경우에는 ‘국익’은 커지게 된다. 해당 문제에 대해 언론이 비판을 쏟아내고, 여론이 악화될수록 타국과의 협상 가능성은 낮아진다. 그러나 만약 타국가가 국내의 악화된 여론을 인정해 합의에 이른다면 ‘국익’은 극대화될 수 있다.
두 번째 전략은 자국의 원셋을 확대하는 ‘고삐 늦추기’ 전략이다. 부정적 여론을 긍정적으로 돌릴 수 있다면 협상자는 유연하게 협상에 임할 수 있고, 합의 가능성도 높아진다.
세 번째는 타국가의 원셋을 확대하는 전략이다. 상대국이 원할만한 다른 사안을 연계시켜 일괄타결 시키는 ‘상승 연계 전략’과 타국 여론에 직접 호소해 진행중인 협상에 대한 긍정적인 여론을 형성하도록 하는 ‘메아리 전략’이 있다.
언론의 일반적인 기능은 크게 4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정보 제공과 사실 전달, 의견 제시, 의제 설정, 권력 감시 등이다.
언론은 1차적으로 특정 사안에 대한 사실 관계를 파악해 이를 일반 대중에게 전달한다. 정보의 범람으로 인해 최근에는 사실과 다른 가짜 정보가 많고, 이 때문에 언론의 팩트 체크는 가장 기본적이면서 중요한 역할로 부상하고 있다.
두 번째는 의견 제시이다. 신문 등 인쇄매체는 칼럼이나 사설, 방송은 앵커나 해설위원 등을 통해 특정 사안에 대한 의견을 제시한다. 언론의 기본 기능인 사실 전달이나 정보 제공조차도 이미 언론사나 해당 기자의 시각에 따라 취사선택된 것인 만큼 완전무결한 객관성을 확보했다고 볼 수 없다. 막스 베버가 지적한 간주관성이라 할 수 있고, 이는 결국 간접적으로는 해당 문제에 시각과 의견이 내포됐다고 할 수 있다.
언론은 의견 제시에서 더 나아가서 일반 대중과 정책 결정자에게 어떤 문제가 중요하다는 점을 인지시키는 의제 설정 기능을 한다. 주로 기획성 보도가 이에 해당한다. 의제 설정은 여론 형성을 통해 보다 적극적으로 정책 변화를 도모한다는 점에서 의견 제시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언론의 중요한 역할 중에 하나는 권력 감시 기능이다. 정부나 정책 결정자를 감시하면서 잘못되거나 보완해야 할 점을 대중들에게 알린다.
언론의 이런 역할 등을 통해 여론을 형성하고, 정부는 여론의 향배를 눈여겨볼 수밖에 없다. 결국 언론은 직접적으로 정부와 정책 결정자에게 압박을 행사하기보다는 여론이라는 스펙트럼을 통해 정부를 움직이는 경향이 짙다.
언론은 정부와 긴장 관계에 있다. 그러나 감시자와 감시 받는자의 관계처럼 일방적이지는 않다. 불가근 불가원이라는 말이 있듯이 정책 결정자들은 때로는 언론을 활용하거 때로는 언론을 경계한다.
외교 안보 분야는 정부의 정보 독점이 심한 영역이다. 외교나 국방 분야에서는 정부는 공식적으로 공개가 민감한 사안을 기밀로 분류해 놓고 있다. 공식적인 기밀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국익 등을 들어 외부 공개를 꺼리는 경향이 짙다.
정부는 외교 정책을 수립, 수행해 가는 과정에서 쉽게 정보를 조작 또는 조절하면서 언론으로 하여금 호의적인 여론 형성을 하도록 유도한다. 언론은 2)정부의 프레이밍(Framing)을 받아들여 외교 안보 문제를 구조화 단순화해서 정부에 호의적인 방향으로 국민들이 이해하게끔 하려는 시도를 지지한다.
정부의 프레이밍은 때론 사실과는 다른 경우도 많다. 이때 등장하는 논리가 ‘국익’이다. 정부는 언론이 원칙으로 내세우는 사실 전달보다는 국익을 중요시한다. “국익이 위험에 처했을 때 정부는 거짓말을 할 권리뿐만 아니라 의무도 있다”는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언론보좌관이었던 파월의 말은 이런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노옴 촘스키는 한발 더 나아가 언론이 정부에 대한 견제를 포기하고 미국의 이익에 따라 보도한다는 선전 모델을 제시했다. 여론조작이 엘리트들의 동의와 묵인 속에 이뤄지는데도 일반 대중은 언론이 객관적으로 보도하면서 정의를 수호한다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결국 언론이 정부의 의도적인 프레이밍을 충분히 인식하고, 그 프레이밍 자체가 허위임을 알면서도 동조한다는 주장이다.
외교 안보 정책 결정자들은 정보를 언론에 고의로 유출해 여론 동향을 파악하기도 한다. 언론은 이 과정에서 실험 풍선(trial ballons)이 되는 것이다.
언론은 정부가 유출을 원하지 않는 정보를 폭로하는 ‘권력 감시’ 역할도 수행한다. 언론은 정부와는 달리 국익보다는 사실 전달을 더 중요시 여기기 때문이다.
1971년 뉴욕타임즈가 당시 닉슨 행정부가 베트남전에 대해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보도한 것은 대표적인 예이다. MIT부설 국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이었던 대니얼 엘스버그는 미국의 베트남 참전의 계기가 됐던 ‘통킹만 사건’이 미국 군대가 조작한 것이라는 단서와 사상자 숫자가 축소됐다는 내용을 뉴욕타임즈에 제보했고, 뉴욕타임즈는 이를 보도했다. 닉슨 행정부는 안보에 미치는 악영향을 내세워 연방 1심 법원으로부터 국가기밀서류 공표를 금지시키는 임시명령을 얻어냈다. 그러나 뉴욕타임즈 보도가 막히자 워싱턴 포스트와 보스턴 글로브, 시카고 트리뷴, LA타임즈가 연쇄적으로 펜타곤 페이퍼를 입수해 후속 보도했다.
2) 강대국의 패러록스 미국외 외교정책 220P
TV의 등장은 미디어의 영향력을 외교 안보 영역에까지 확장시킨 대전환점이었다. 베트남전은 최초로 미군의 군사 활동 장면을 미국인들이 안방에서 생생하게 볼 수 있는 전쟁이었다.
‘한국전쟁의 기원’ 저자인 브루스 커밍스는 TV의 등장이 미국의 베트남 철수를 가져왔다고 평가했다. TV를 통해 전쟁 현장이 여과 없이 안방에까지 전달되면서 미국 내 반전 여론이 들불처럼 일어났고, 미 정부가 결국 철군을 결정하게 됐다는 것이다. 1968년 린든 존슨 대통령은 대통령 재임에 도전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TV가 베트남전에 미치는 영향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나는 여러차례 텔레비전이 전쟁을 우리 안방으로 가져왔을 때를 생각했습니다. 누구도 이런 생생한 장면이 미국인들의 여론에 무슨 영향을 미칠지를 얘기할 수 없습니다. 역사학자들은 한국전쟁이나 2차 세계 대전 때 텔레비전이 있었다면 생길 수 있었던 영향에 대해 생각해봐야 합니다.”3)
린든 존슨의 말은 베트남전의 추악함이 텔레비전을 통해 미국 안방까지 전달됐고, 반전 여론에 불을 지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린든 존슨은 이런 반전 여론에 밀려 재임을 포기했고, 새롭게 선출된 닉슨 대통령은 베트남전 철수를 결정했다. 미군은 1972년 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결국 언론의 보도, 특히 매스 미디어의 생생한 이미지가 일반 대중들을 자극하고, 일반 대중들은 정책 결정자에게 정책을 수정하도록 압박하는 매커니즘을 엿볼 수 있다.
3) Michael Mandelbaum 『Vietnam: The Television War』 (2002, MIT Press)
1980년 CNN이 출범할 때만 하더라도 성공을 장담한 이들은 많지 않았다. CNN은 24시간 내내 국내외 뉴스를 보도하는 뉴스 전문 채널이었다.
CNN은 1984년 에티오피아 기근에 대한 보도를 통해 희생자들에 대한 폭넓은 동정심을 불러 일으켰고, 구호를 위한 자선 록 음악회인 라이브 에이드(Live Aid)4)가 열리는 계기가 됐다. 그룹 퀸이 동참한 이 음악회에서 수천만 달러가 모금됐다.
1981년 걸프전은 CNN 등 24시간 뉴스 채널이 군사 분쟁을 실시간으로 방송한 첫 기회였다. 전 세계인들은 뉴스 채널을 통해 이라크의 스커드 미사일이 미국의 패트리엇 미사일에 의해 요격되는 장면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이라크 후세인은 전쟁 내내 CNN을 시청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백악관부터 미국의 모든 기관이 CNN의 생중계와 속보를 빼놓지 않고 보게 되는 현상이 발생했다.
미디어 기술의 발달은 결국 정책 결정자로 하여금 조용히 숙고하는 시간을 주지 않고 신속하게 반응하도록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실시간 통신의 발달이 국민들뿐만 아니라 정치 엘리트들이 세계 문제에 반응하도록 유도한다는 개념(CNN Effect)이 탄생했다.
하지만 여전히 뉴스 미디어는 정책을 만들지 못하고, 단지 정책을 지지하는 역할을 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실시간으로 뉴스를 전하는 매스 미디어와 정부의 정책 수립 과정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학술적 연구는 전무하다시피 했다.
전환점은 1992년 소말리아 내전과 기근이었다. CNN은 소말리아 내전으로 인해 소말리아 주민들이 굶어 죽어 가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도했고, 미국 정부는 잠자코 있을 수 없는 지경에 놓였다. 부시 대통령은 자신의 저서에서 “굶고 있는 소말리아인의 모습을 보는 것이 너무나 괴로워서 인도적 개입을 명령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인도적 개입이란 한 국가가 자국이 아닌 타국의 인권 문제에 대해서 ‘군사적 개입’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4) 1985년 7월 13일 에티오피아 난민 기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획된 대규모 공연. 15억명의 시청자가 100여개 국가에서 실황 중계를 시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베트남전과 91년 걸프전이 매스 미디어가 전쟁에 미치는 영향을 엿볼 수 있는 계기가 됐다면 2003년 걸프전은 언론의 한계가 드러난 전쟁이었다.
대부분의 언론은 후세인 정부가 대량 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부시 정부의 주장5)을 확대 재생산하는 확성기 수준에 머물렀다.
특히 뉴욕타임스 주디스 밀러 기자는 2002년 익명의 국방부 관계자 증언을 근거로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고,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를 침공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했다. 그러나 후세인 축출 이후 이라크에서 대량살상무기는 발견되지 않았다.
밀러의 사례는 독점적인 정보를 가지고 있는 외교 안보 정책 결정자들이 어떻게 정보를 조작하고, 언론을 이용하는지, 언론이 무비판적으로 달콤한 독배를 마셨을 때 어떻게 타락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5) https://www.nytimes.com/2003/01/23/opinion/why-we-know-iraq-is-lying.html
2010년 12월 튀니지의 26살 청년 모하메드 부아지지가 노점상 단속으로 생존권을 위협받자 분신자살로 항의했다. 부아지지의 분신 장면은 유튜브와 페이스북 등 소셜 미디어를 통해 순식간에 퍼지면서 튀니지 국민들은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군부가 중립을 선언하면서 벤 알리 대통령이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했고, 24년간 계속된 독재정권도 종지부를 찍었다.
이런 민주화 운동은 튀니지에 머무르지 않고 이집트, 리비아 등 다른 아랍 국가에도 확대되어 이집트의 무바라크 정권을 무너뜨렸으며 각국에서 장기 독재 정권에 대한 국민의 불만과 결부되어 수많은 정변과 정치 개혁을 일으켰다.
소셜 미디어의 특성은 현장성과 즉시성, 확산성이다. 매스 미디어조차 접근할 수 없는 현장을 이제는 개인들이 휴대폰으로 찍어 올리고, 이는 소셜 미디어망을 통해 곧바로 전파된다. 특히 대부분의 이미지는 별다른 여과 없이 그대로 노출된다. 충격적이고 참혹한 이미지를 보여줌으로써 여론을 형성하고, 이를 통해 정책 결정자들이 새로운 정책을 수립하거나 기존 정책을 수정하도록 압박했던 TV와 24시간 뉴스 채널의 역할을 이제는 소셜 미디어가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실시간’이라는 핵심적인 요소도 변하지 않았다.
미국에서도 트럼프 대통령이 트위터를 통해 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등 소셜 미디어의 영향력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외교 안보 부처들은 기성 언론 매체가 아닌 소셜 미디어를 통해 일반 대중에게 직접 정책을 설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는 비단 미국만의 일은 아니다. 일본과의 해상 초계기 갈등 때도 한국 국방부는 유튜브에 일본의 주장을 반박하는 동영상을 직접 게재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국가간 협상은 치열한 외교전이다. 정부는 정보를 통제하고 조작해서 우호적인 여론을 형성하길 원한다. 언론은 정부의 프레이밍을 최대한 충실히 전하거나, 때로는 정보 조작을 묵인하면서까지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기 마련이다. 정부의 정책에 비판적인 언론이라고 하더라도 정보의 접근이 쉽지 않아 날선 비판을 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북한을 대하는 미국 언론은 이와 다소 차이가 있다. 집권세력이 민주당이든 공화당이든 그동안은 ‘강경파’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경우가 잦았다. 미국인들이 북한을 주로 ‘악의 축’과 같은 이미지로 받아들이는 경향 때문으로 보인다. 북한에 대한 강경한 여론을 워싱턴 정가의 싱크 탱크, 정부 관료, 의회, 영향력 있는 개인과 블로거, 언론 매체라는 ‘외교 공동체’가 형성한다는 주장도 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부안보 보좌관이었던 벤 로즈는 외교안보 엘리트들의 집합체를 ‘덩어리’ ‘떼거리’를 의미하는 블로브(Blob)라고 칭했다. 이들은 부시 행정부의 네오콘(신보수주의자)과는 달리 당파성마저도 초월한다는 특성이 있다. 결국 당파성마저 초월한 보수적인 블로브들이 정보를 통제하고, 조작함으로써 북한에 대한 대북 협상 과정에 대한 비판적인 보도를 유도한다고 볼 수 있다.
1998년 8월 17일 뉴욕 타임스는 미국 정보기관을 인용해 북한 영변 북동쪽 40km지점에 거대한 비밀 지하 시설이 탐지됐다며 북한이 핵동결을 파기하고 핵개발을 재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일명 ‘금창리 의혹’이다. 이때는 1994년 제네바 합의 이후 클린턴 정부가 영변 핵시설 동결 프로세스를 진행 중이던 시점이었다. 미국은 식량 60만톤을 지원하면서까지 조사에 나섰지만 텅빈 동굴로 판명됐다. 보도 이후 야당인 공화당은 북한 경수로 건설 비용에 대한 의회 의결을 지연시키는 방식으로 제네바 합의에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북한은 대포동 1호를 발사하는 등 북미 관계가 파국으로 치달았다.
부시 정부는 클린턴의 업적을 지우려는 ABC전략6)을 구사했고, 북핵 문제에서도 제네바 합의를 파기하기 위한 수순을 밟았다.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을 의심하고 있던 부시 행정부는 북한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이 켈리 차관보와 만난 자리에서 “핵무기는 물론 그것보다 더한 것도 가지게 돼 있다”라고 한 발언을 활용했다. 북한이 고농축 우라늄 보유를 시인했다며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한 것이다.
부시 행정부가 강 부상의 발언을 공개한 과정을 보면 2주 동안 공개하지 않다가 갑자기 발표했다. 한 일간지가 강 부상의 발언을 단독 보도하려는 움직임이 있어서 정부가 먼저 공개했다는 것이 당시 설명이었다. 일간지에 정보를 누가 줬는지, 일간지의 단독 보도 움직임이 진실인지를 떠나서 선제적 공개는 이례적이었다. 제네바 합의를 유지하려면 언론 보도를 부인할 수도 있었지만, 상황이 자신들의 이해와 맞아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부시 정부 후기, 강경파들이 떠나면서 뒤늦게 대화 분위기가 조성됐고, 북미는 2005년 6자 회담 틀 속에서 ‘9.19 합의’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이에 앞선 9월 7일 월스트리트저널은 북한이 방코델타아시아(BDA)를 통해 돈세탁을 하고 있다는 보도를 내보냈다. 9.19합의는 잉크도 마르기 전에 교착상태로 빠졌다. BDA 제재는 북핵 협상을 주도했던 미 국무부가 아닌 재무부의 작품이었다. 미국내 의사 결정 노선이 복합적이라는 의미이다.
부시 정부가 9.19합의 이행에 목을 매던 2007년 이스라엘이 시리아의 핵 의심 시설을 공습하면서 북한이 시리아 핵 개발을 지원하고 있다는 언론 보도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당시 힐 차관보는 의회 청문회에서마저도 “북한의 시리아 핵 프로그램 관련 여부는 비밀 사항”이라며 확인을 거부했다. 북한이 국제적인 핵 확산에 나섰음에도 부시 행정부는 9.19합의의 성과를 깨지 않으려 했고, 언론 보도의 진위 여부를 확인해 주지 않았다.7)
6) Anything But Clinton: 클린턴의 업적을 제외하고 아무것이나 좋다는 의미로 제네바 합의가 부시 행정부에서 제대로 이행되지 않은 원인으로 꼽힌다.
7) 찰스 프리처드 『실패한 외교, 부시 네오콘 그리고 북핵위기』, (사계절, 2008), 23p.
뉴욕타임스는 지난해 CSIS 보고서8)를 인용해 북한이 삭간몰에 미신고 미사일 기지를 운용하고 있다며 미국이 북한의 속임수에 놀아나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삭간몰은 한미 정보 당국이 이미 파악하고 있는 스커드 미사일 기지다. 그럼에도 뉴욕 타임스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미사일 기지가 있는 듯이 보도했고, 트럼프는 “알고 있는 것이며 새로울 것도 없다”고 일축했다. CSIS보고서를 작성한 버뮤데스마저도 선정적인 보도라고 비판했다. 한국 언론은 뉴욕타임스를 대부분 인용 보도했다. 뉴욕타임스의 언론 보도 경위를 알수는 없다. 그러나 그동안의 보도와 마찬가지로 미국인들의 북한에 대한 인식을 알 수 있다.
뉴욕타임스의 보도 이후에도 CNN은 12월 6일 미들버리 연구소 보고서를 인용해 북한이 기존의 영저리 미사일 기지에서 불과 7km밖에 떨어지지 않은 지역에 새로운 기지를 운용중이라고 보도했다. 영저리 또한 한미가 이미 노동미사일 기지로 파악하고 있는 곳이다. 뉴스로서 별다른 가치가 없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언론은 이를 비중 있게 보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워싱턴 정가의 회의론자들이 북한은 믿을 수 없는 국가이고, 협상이 아닌 압박만이 북한의 비핵화를 이룰 수 있다는 주장을 언론을 통해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일종의 언론 플레이이며 언론은 이를 알거나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확대 재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8) https://beyondparallel.csis.org/north-koreas-undeclared-missile-operating-bases/
정치 엘리트들은 정보 통제와 유출, 조작을 통해 자신들의 의도대로 언론이 움직이도록 유도한다. 언론은 이를 충분히 인식한 상태에서 정치 엘리트대로 움직이거나(선전 모델),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국익 또는 정보의 부재로 인해 정부의 우호적인 보도를 하기도 한다(프레이밍).
반면 언론, 특히 실시간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미디어는 참혹한 현장을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국민들의 분노와 동정심을 유발하고, 정부는 이런 여론을 인식해 새로운 정책을 수립하거나 정책 방향을 수정한다(CNN 효과). 이런 효과는 주로 정책 방향이 명확하지 않을 때 더 위력을 발휘한다. 특히 미국의 경우에는 제 3세계의 인권 문제일 경우에 CNN 효과는 극대화된다.
그렇다면 한국 언론도 미국의 경우처럼 정책 수립이나 변화를 가져오는 보도를 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생긴다.
우선 한국에도 CNN처럼 실시간 뉴스 채널이 존재한다. 그러나 CNN처럼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갖추지도 못했다. 그나마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갖춘 통신사나 방송사는 실시간 보도가 제한된다.
미국은 강대국으로 그나마 국제적인 이슈에 대한 관심이 있지만, 한국은 미국보다 국제뉴스에 대한 관심도가 현저히 떨어지는 경향도 있다.
그나마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북한 인권 문제이다. 한국 언론은 북한정권의 인권문제를 지속적으로 보도해왔고, 이는 일부 국민들에게 충격을 주기에 충분하다. 김정은의 이복형인 김정남 암살이나 장성택 처형, 굶주리는 어린이를 뜻하는 꽃제비, 정치탄압과 숙청 등이 이에 해당한다.
우리 정부는 2016년 북한 인권법을 제정했고, 이에 따라 북한인권재단을 발족하도록 하는 등 나름의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일련의 움직임이 언론 보도로 인한 것인지는 불명확하다. 특히나 2016년은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인 입장에 있던 보수적인 정부가 집권했던 시기였다.
특히 북한은 군사적으로 중무장한 국가이고, 핵개발을 진행중이다. 또한 러시아와 중국을 우방으로 두고 있다. 따라서 미국이 인권 문제를 이유로 군사 개입을 할 여지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인도적 개입의 핵심은 ‘군사 개입’이다.
더군다나 한국은 북한에 대해 진보, 보수 진영의 입장이 명확하다. 진보 진영은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고, 대화와 협력을 통해 북한이 핵을 포기하도록 유도한다는 입장이다. 이에 반해 보수 진영은 북한을 국가로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북한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도 대화 협력보다는 압박이다. 이렇듯 정책 기조가 분명하고 회색 지대가 없는 것이다.
이런 점들을 종합해보면 한국 언론이 적나라한 현장 보도를 통해 새로운 외교 안보 정책을 수립하도록 압박하는 역할을 하기에는 역부족이다.
한국의 외교 안보 당국자들은 언론을 정부의 확성기내지는 정책 진행을 방해하하는 훼방꾼 정도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문재인 정부 들어 북한과의 군사 협상을 주도했던 전직 국방부 고위관료는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언론이 일이 잘되도록 돕기보다는 일이 잘 진행되지 않도록 하는 경향이 있다”고 밝혔다.
남북한은 군사합의로 지상과 해상, 공중에서 완충구역을 설정하고 상호 적대행위를 중단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이후 이를 비판하는 언론, 특히 보수 언론의 보도가 잇따랐다.
대다수의 정치 엘리트나 정책 결정자들은 정부의 정책 기조가 분명한 상황에서 이를 비판하는 언론의 보도를 정책 방향을 훼손하기 위한 의도로 판단한 것이다. 언론 보도로 인해 특정 이슈에 대해 논란이 일게 되면 정부의 의도대로 정책을 진행하기 어렵다는 판단이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정부는 외교 안보 정책에 있어서 최대한 정보를 통제하면서 언론 노출을 꺼린다. 2018년 제 10차 한미 방위비 협상 때도 정부는 협상 초기 외교부 기자단에 엠바고(보도 유예)를 요청했다. 당시 미국은 우리 정 부에 전력 자산 전개 비용을 요구했고, 이런 내용이 일부 언론을 통해 이미 보도된 이후였다. 더 이상의 논란을 피하려는 의도였다.
방위비 협상을 양면게임이론으로 분석하면 국내에서 방위비 협상에 대한 논란이 많이 일수록(원셋이 작아질수록) 협상 당사자는 협상의 여지가 좁아진다. 그러나 만약 협상이 타결됐을 경우에 얻을 수 있는 성과는 크다. 반면에 방위비 협상에 대한 국내 여론이 잠잠하다면(원셋이 커질수록) 협상 타결 가능성은 높아지지만 협상의 과실은 상대적으로 작아진다.
외교 당국이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논란을 최소화거나 우호적인 여론을 형성해 자국의 원셋을 확대하는 ‘고삐 늦추기’가 있다. 외교 당국이 취한 엠바고 요청도 이에 해당한다.
반면에 의도적으로 논란을 불러일으켜 원셋을 축소하는 대신 협상 성과를 극대화하려는 ‘발목 잡히기’도 있다. 당시 미국이 전략 자산 전개 비용을 요구한다는 내용을 기자에게 알려준 이는 당국자는 아니었지만 ‘국익’을 위해 언론이 논란에 불을 지펴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외교 당국은 발목 잡히기가 아닌 고삐 늦추기로 일관했다.
양면 게임 이론을 적용하면 정부는 미국과의 방위비 협상과정에서 엠바고를 요청함으로써 스스로 쓸 수 있는 방법 하나를 버렸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은 진영 논리가 첨예하게 대립돼 있고, 주요 이슈보다 진보와 보수는 대립하고 있다. 진보 정부의 경우에는 보수 언론에, 보수 정부는 진보 언론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는다. 그러나 정부간 협상과 관련된 이슈의 경우에는 언론의 비판을 ‘발목 잡히기’ 전략의 하나로 활용할 수 있다.
한국 안보 정책 결정과정에서 언론의 역할은 극히 한정돼 있다고 볼 수 있다. CNN효과처럼 언론이 여론을 형성해 정책 결정자로 하여금 새로운 정책을 만들어 내게 하거나, 정책 방향을 틀도록 압박하는 CNN효과는 한국적 상황에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양면 게임 이론 정도가 한국의 안보 정책 결정과정에서의 언론의 역할을 설명할 수 있는 틀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정부는 양면 게임 이론의 다양한 전약중에서 ‘고삐 늦추기’ 전략을 주로 사용한다. 언론 통제의 욕구가 큰 편이고, 최대의 국익보다는 협상 타결에 초점을 맞춘 전략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이념적 양극화가 심화하고 있는 현 상황에 고려하면 한국 정부는 ‘발목 잡히기 전략’을 고심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 특히 정부에 비판적인 매체의 보도를 단순히 협상 타결을 어렵게 하려는 ‘저주 섞인 보도’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이를 활용해 최대의 국익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2019년 타결된 제10차 방위비 분담 특별협정이나 현재 진행중인 11차 방위비 분담금 협상 과정은 아쉬운 점이 많다. 10차 협정 때는 외교부가 기자단에게 엠바고를 요청함으로써 국내적 논란을 차단시키는 발목 잡히기 전략을 포기했다. 언론 또한 협상 진행 과정에서 논란이 될 만한 내용들을 적극적으로 보도하기 보다는 정부의 의도대로 협상이 진행되도록 방치하는 우를 범했다. 현재 진행 중인 협상과 관련해서도 과연 언론이 협상 과정에서 터져 나온 내용들에 대해서 충분한 보도를 하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한국 정부는 외교 안보 정책, 특히 타국가와의 협상 과정에 있는 의제에 대해서는 국내적 논란을 최소화하기 보다는 언론 보도와 여론 형성 추이를 면밀히 검토해 다양한 전략을 구가해야 하고, 언론 또한 취재의 편이성보다는 다소 어려움이 있더라도 최대한 논란이 될 만한 내용을 취재해 적극 보도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