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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과 미국, 정치 양극화라는 공통의 숙제
한국과 미국의 정치 양극화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두 나라 모두 거대 양당제가 자리 잡고 있고, 정치권의 승자독식 문화가 득세한 상황에서 어쩌면 양당으로의 쏠림과 두 정당 간의 갈등은 피하기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정치와 여론의 양극화가 점점 극단화되고 있고, 두 정당 지지자들 간에는 사실 인식에 대한 공통의 기반조차 찾기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언론도 양극화를 해결하기보다는 어느 진영, 특정 정파의 입장을 대변하는 경향이 더욱 짙어지고 있다. 민주주의를 위한 공론장이 돼야 할 언론, 국민의 정치적 의사 결정 과정에 정보를 제공해야 하는 정치 기사는 어떻게 개선될 수 있을 것인가.
■미국, 여전한 트럼프 향수
2021년 8월, 처음 미국에 와서 느낀 것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향한 지지와 향수가 여전하다는 것이다. 2020년 미국 대선이 끝난 지 2년이 다 돼 가지만 트럼프는 정치권과 언론의 뜨거운 감자다. 미국 곳곳에서는 차량 스티커와 대형 현수막 등으로 트럼프의 2024년 대선 재출마를 지지하는 유권자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미국 언론들은 지난 1월 워싱턴 의회 습격 사건 1주년을 조명하는 여러 기획 보도와 분석 기사들을 내보냈다. 언론에 등장한 트럼프 지지자들은 “우리는 애국자다, 아무 잘못이 없다”며 의회 공격이 정당하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림 1. 기름값 인상이 바이든 정부 잘못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트럼프 스티커.
올랜도=임성수 기자
그림 2.민주당 출신 대통령과 트럼프를 비교한 기념품. 키웨스트=임성수 기자
워싱턴 정계에서는 이른바 ‘트럼프 키즈’의 약진 조짐도 나타나고 있다.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지난 5월 인디애나주와 오하이오주 공화당 예비선거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이 공개 지지를 선언한 후보들이 전원 당선되는 일이 벌어졌다.
조 바이든 대통령에 대한 공화당 지지층의 적대감은 여전하다. 퓨리서치 센터가 지난 3월 24일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 공화당 지지자의 71%가 이번 11월에 열리는 중간선거가 바이든 대통령에 반대하는 선거라고 응답했다. 1)바이든 대통령이 주요 투표 고려사항이 아니라는 응답은 26%에 그쳤다. 반면, 민주당 지지층의 경우, 중간선거가 바이든을 지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응답이 46%, 바이든 대통령은 선거 고려 대상이 아니라는 응답은 47%로 엇비슷했다. 중간선거는 임기 2년의 연방하원 의원 전원과 연방 상원의원 3분의 1을 다시 선출하는 선거다. 공화당 지지층의 경우, 의회를 새로 구성하는 선거를 대통령에 대한 반대 여론을 드러내는 2020년 대선의 연장전으로 여기고 있는 셈이다.
공화당 지지자의 경우엔 선거 제도 자체에 대한 불신도 크다. 같은 조사에서 11월 중간선거에 공정하고 정확하게 치러질 것이라는 응답은 민주당 지지층의 경우 76%였지만, 공화당 지지층은 47%만이 그렇다고 답했다.
그림 3. 미국 중간선거에서 바이든에 반대하는 투표를 할 것이라고 답한 유권자 비율. 퓨리서치센터
그림 4. 중간선거가 공정하게 치러질 것이라고 답한 유권자 비율. 퓨리서치센터
정파적 입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언론들도 힘을 얻고 있다. 대표적 보수 성향의 폭스뉴스는 물론, 트럼프 대통령에 친화적인 보수 채널 ‘뉴스맥스(Newsmax)’와 ‘원아메리카뉴스(One America News)’를 시청하는 미국 국민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지난 4월 14일 포브스에 따르면 뉴스맥스는 폭스뉴스와 MSNBC, CNN에 이어 4번째로 시청자가 많은 뉴스 채널로 조사됐다. 포브스는 뉴스맥스가 트럼프에 비판적인 견해를 밝힌 참전용사의 생방송 인터뷰를 중단하는 등 노골적인 친트럼프, 친공화당 성향의 매체다. 포브스는 뉴스맥스에 대해 ‘선전과 음모론의 배출구(a propaganda and conspiracy theory outlet)라는 미디어 전문가의 비판을 전하기도 했다.
기자가 연수 중인 노스캐롤라이나대(UNC) 저널리즘스쿨의 이수만 교수는 미국 언론 생태계와 관련해 “폭스뉴스의 등장은 특정 진영을 대변하는 것만으로도 시청률이 나오고 수익을 낼 수 있다는 생각을 언론계에 자리 잡게 만들었다”며 “정치 양극화가 극단적으로 치닫는다면 사실상 정치적 내전(Civil war) 상태가 될 수 있다”고 했다.
■한국, ‘노 허니문, 노 레임덕’
한국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이 ‘허니문’ 기간을 거의 누리지 못했다. 한국 대통령들은 통상적으로 취임 전 대선 득표율을 뛰어넘는 높은 국정 지지율을 누려왔다. 2017년 약 41%를 득표했던 문재인 전 대통령이 취임 당시 80%를 넘나드는 지지율을 기록했던 것이 대표적이다. 대선에서의지지 여부와는 별개로 새 대통령에게 거는 기대, 새 정부가 잘해줄 것이라는 희망 등이 담긴 지표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이런 허니문이 거의 없었다. 대선 득표율 남짓한 지지층만 윤석열 행정부에 대한 기대를 걸고 있다.
반면, 문재인 전 대통령은 한국 전 대통령들이 겪었던 임기 말 권력 누수 현상인 ‘레임덕’을 거의 겪지 않았다. 민주당의 정권 재창출 실패로 1987년 민주화 이후 보수, 진보 양당 간 ‘10년 집권주기론’이 처음으로 깨졌지만, 문 대통령의 임기 말 지지율만큼은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하는 이례적 현상도 나타났다.
지난 5월 6일 발표된 한국갤럽의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문 전 대통령의 마지막 주간 지지율은 45%로 나타났다. 3)반면 당시 당선인이던 윤 대통령의 지지율은 41%에 그쳤다. 5년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대통령이 임기를 앞둔 당선인보다 지지율이 높은 정치적 기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이 같은 ‘노 허니문’과 ‘노 레임덕’의 원인은 복합적으로 분석돼야 하겠지만, 정치 양극화도 그 원인 중 하나로 들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투표하지 않는 대통령에게는 어떠한 지지도 보내지 않고, 내가 투표했던 대통령은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지지하는 여론이 반영된 현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언론의 정파성도 미국만큼이나 심각해지고 있다. ‘김어준의 뉴스공장’ 등 노골적인 정치 성향을 드러내는 라디오 방송이 인기를 끄는 것, 주요 공중파 방송이 지난 대선 기간 정파성 짙은 유튜브 채널의 보도를 대대적으로 받아 확대 보도하는 것 등이 그 사례다.
2. 정치 기사, 어떻게 쓸 것인가
여론 양극화 시대에 언론은 어떤 기사를 써야 할까? 정치 기사는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 언론 본연의 임무인 팩트체크 시민단체·전문가와 협업하는 저널리즘 등은 정치 기사의 혁신 방향이 될 수 있다.
■팩트체크, 형식부터 새롭게
그동안 언론에서는 대통령 등 유력 정치인의 연설이나 인터뷰는 일단 있는 그대로 보도하는 방식을 고수해왔다. 또 여야 공방을 대칭적으로 중계하는 기계적 방식이 최소한의 균형을 확보하는 방법이라고 믿어왔다. 하지만 이같은 방식의 기사가 시시비비를 명확히 가려야 하는 언론의 임무를 방기하고, 양비론이나 양시론적 태도를 택하면서 오히려 갈등을 부추기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받아왔다.
트럼프 시대를 겪은 미국 언론들은 유력 정치인의 발언이라도 즉각적으로 팩트체크를 통해 사실을 검증한다. 정치인의 연설을 그대로 전하지 않고, 숨은 거짓말과 가짜 정보들을 걸러내는 것이다. 트럼프 시대를 거치면서 미국 언론들은 기사 형식부터 팩트체크에 맞춘 방식을 시도하고 있다.
지난 1월 뉴욕타임스의 트럼프 전 대통령의 연설 팩트체크는 기사 형식부터 연설 한 대목, 한 대목마다 사실과 다른 거짓 주장이 무엇인지 지적했다. 4)트럼프 전 대통령은 애리조나에서 열린 집회에서 “좌파가 코로나 치료에서 백인을 차별하고 있다. 백인이면 백신과 치료제를 받지 못한다”고 주장하자, 뉴욕타임스는 비백인과 히스패닉 등이 사회적 불평등 탓에 코로나19로 인한 중증 및 사망 위험이 높기 때문에 인종이 주요 요소로 고려되고 있을 뿐이라고 반박했다. 뉴욕타임스는 2020년 대선 당시에도 트럼프의 연설 중 잘못된 정보나 거짓 정보가 들어있는 곳을 빨간색으로 표시하고 첨삭하는 방식의 팩트 체크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림 5. 트럼프 연설을 한 대목씩 팩트체크한 더뉴스 앤 옵저버.
노스캐롤라이나(NC)의 유력 신문인 ‘더 뉴스 앤 옵저버(The News & Observer)’도 지난 4월NC 셀마에서 진행된 트럼프의 연설을 팩트체크했다. 기사 형식도 뉴욕타임스와 비슷하게 트럼프의 한마디 한마디를 ‘주장(claim)’으로 소개한 뒤 이를 반박하는 사실을 전달했다. ‘2020년 대선 결과는 도둑 맞았다’ ‘내가 대통령에 재선되면 멕시코와의 국경 장벽을 3주만에 세울 수 있다’는 등의 트럼프의 주장을 하나하나 반박했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독버섯처럼 퍼지는 거짓 정보가 어디에 있는지 직접 링크를 걸고, 기성 언론이 적극적으로 찾아내는 역할도 한다. 로이터통신은 지난 4월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를 통해 “미국 50개주 중에서 46개 주에서 대선 재검표를 했고, 바이든이 패배했다”는 거짓 정보가 퍼져나가자 팩트체크에 나섰다.5)
해당 거짓 정보가 공유되는 플랫폼을 직접 링크하고,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조목조목 설명했다. 거짓 정보의 시발점을 찾아내고 직접 사실로 원점 타격하는 방식이었다.
그림 6. 로이터통신의 팩트체크. 거짓 정보가 유통되고 있는 플랫폼 링크를 기사에 게재했다.
■협업으로 답을 찾다, Collaborative & Solution Journalism
협업 저널리즘은 언론과 외부 전문가, 시민단체가 파트너십을 맺고 협업하는 보도 방식을 가리킨다. 정치가 양극화되고, 언론의 정파성도 덩달아 심화할 때, 전문적이고 객관적인 전문가들의 협업은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미국 몽클레어 주립대는 지난 3월 전세계 125개국, 1010개의 언론 및 싱크탱크, 시민단체(NGO)가 함께 협업한 155개 사례를 분석해 발표했다.6) 연구진은 Collaborative journalism의 이점으로 ①정보 전달 채널의 다양화로 더 많은 수용자를 확보할 수 있고, ②인적 자원 제약 등에 직면한 뉴스룸이 전문성을 가진 이들과 협력할 수 있으며 ③저널리즘이 좀 더 폭넓은 영향력을 가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몽클레어 주립대가 분석한 협업 보도의 주제에서는 민주주의/투명성/거버넌스/부패 분야가 가장 많은 24.5%를 차지했다. 민주주의나 부패 등 정치 기사의 주요 소재들이 협업 보도의 대상으로 적절하다는 방증이다.
그림 7.몽클레어 주립대가 발표한 협업 저널리즘의 주제들.
사실 한국의 정치부 기자들도 국회 인사청문회나 국정감사에서 의원실과의 협업을 통해 빛나는 특종기사를 발굴하기도 한다. 여야 가릴 것 없이 의회가 행정부를 견제하는 역할에 충실하고, 언론이 함께 할 때 좋은 정치 기사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선거 제도 개혁, 개헌 등 정치권의 오래된 담론 등은 특정 언론사 한 곳이 감당할 수 있는 의제를 넘어선다. 이럴 때 전문가그룹과 시민단체와의 협업 보도는 중요한 정치 담론을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림 8. 협업 보도를 통해 해법을 지향한다고 밝히고 있는
‘THE GRANITE STATE NEWS COLLABORATIVE’ 홈페이지 메인 화면
협업 보도는 단지 정치권의 갈등을 중계하는 것을 넘어 해답을 제시하는 ‘솔루션 저널리즘’으로 확대되기도 한다. 뉴햄프셔주에서는 ‘THE GRANITE STATE NEWS COLLABORATIVE’라는 프로젝트를 20여개의 지역 매체들이 협업해 현안을 함께 보도하기도 했다.7)
이들은 프로젝트를 통해 단지 문제를 지적하는 언론이 아니라 해법(solution)을 제시하는 언론을 지향했다. 인종과 다양성, 난민 등을 주제로 한 14개의 보도를 통해 지역 사회 발전에 기여했다. 특히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40만 달러의 지역 매체 지원기금을 확보하기도 했다.
■대화와 참여의 저널리즘
미국 오리건주의 ‘오리건 캐피털크로니클(Oregon capital chronicle)’은 주지사 경선을 앞둔 지난 4월 19일 ‘오리건의 저널리스트들이 주지사 경선 보도의 새로운 방식을 실험합니다’라는 제하의 캠페인성 기사를 내보냈다.8) 오리건주의 주요 매체 60여곳이 연합해 유권자들의 목소리를 청취한 뒤, 유권자들이 원하는 의제에 대해 직접 후보자 전원에게 의견을 묻고 이를 생생하게 보도하는 방식이었다. 언론사나 정치인이 정하는 의제를 전달하는 ‘하향식 보도’가 아니라, 유권자들이 궁금해하는 것을 취합하고 정리해 이를 보도하는 ‘상향식 보도’라고 할 수 있다.
그림 9. 유권자들에게 받은 질의와 이에 대한 주지사 후보자들의 답변을 토대로 만든 ‘오리건 캐피털크로니클’ 기사의 메인 화면.
기사를 기획한 오리건 캐피털크로니클은 ‘Let’s talk’라는 유권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유권자들이 선거 승자를 가려내는 것에 치중하고, 정치 스캔들과 캠페인에 초점을 맞춘 정치 기사가 아닌 주택, 치안, 경제 등 삶과 밀접한 것에 대한 후보자들의 입장을 알기 원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이를 바탕으로 오리건주 여러 매체의 기자들은 오리건대 저널리즘스쿨과 협력해 15개의 질문을 추렸다. 주지사 후보들은 거대 정당 소속이든 무소속이든 해당 질문에 대해 대답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기자들은 후보자들의 답변을 바탕으로 ‘그들의 말(THEIR WORDS)’이라는 시리즈 기사를 작성했다.
이 같은 보도 방식은 유권자들과 정치인, 독자와 언론 간의 거리를 좁히는 새로운 방식의 정치 기사라고 볼 수 있다. 유권자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그들을 의제 설정에 참여시킴으로써 ‘공론장’으로서의 역할을 하려는 시도였다. 정치 기사를 혁신할 수 있는 하나의 방향을 제시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