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3일 2021년 미국 에미상(Emmy Awards) 후보작들이 발표됐다. 매년 미국 텔레비전 과학기술 아카데미(The National Academy of Television Arts & Sciences)가 뽑는 에미상은 지난 1년 동안 TV와 인터넷를 통해 소개된 드라마, 스포츠, 뉴스, 다큐멘터리 등 각 부문에서 최고의 작품을 뽑는 시상식으로 그 명성이 높다.
올해 9월 열리는 시상식 후보작들의 면면을 보면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플랫폼 콘텐츠들의 경쟁력과 그 위상이 지난해에 비해 더 높아졌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가장 많은 부문에 후보를 올린 작품은 애플TV의 대표 시리즈 테드 라소(Ted Lasso)다. 13개 부문 후보작에 오른 이 TV 시리즈는 미국 대학 미식축구 감독이 영국 프리미엄 리그(EPL) 감독으로 부임하며 생긴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다. 그 뒤는 넷플릭스의 대표작 더 크라운(The Crown)과 훌루(HULU)의 핸드메이즈 테일(Handmaid’s Tale)이 나란히 11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다. 디즈니플러스는 해밀튼(Hamilton)과 완다비전(WandaVision), HBO는 메어 오브 이스트타운(Mare of Easttown)과 아이 메이 디스트로이 유(I May Destroy You) 등이 이름을 올렸다. 미디어 그룹별로 봐도 OTT 업체들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다. 지난해 가장 많은 후보작을 배출했던 넷플릭스(27개작)와 왕좌의 게임으로 에미상을 휩쓸었던 HBO(24개작)가 올해도 가장 많은 후보작을 배출했다. 처음 이름을 올린 디즈니플러스와 애플TV, 프라임 비디오(아마존)도 각각 21개작과 13개작, 4개작으로 3위와 5위, 9위에 올랐다.
흥미로운 건 전통 매체들이 주름잡아 오던 에미상의 뉴스&다큐멘터리 부문에서도 OTT업체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다. 코로나와 미국 대선 소용돌이 속에서, 기존 네트워크TV와 신문 매체에 이어 온라인 미디어와 OTT 업체들까지 가세해 각축전이 더 치열해진 것이다. 후보작으로 올린 물량만 보면 전국 네트워크TV인 PBS, CNN, CBS, ABC가 1~4위를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온라인 매체 바이스(VICE)와 신문인 뉴욕타임즈가 그 뒤를 바짝 추격하고 있다. HBO와 넷플릭스는 탐사 저널리즘을 바탕으로 한 고품질 다큐멘터리로 수상을 노리고 있다. 이처럼 다양한 후보작들을 쏟아낸 미디어들은 플랫폼부터 콘텐츠가 제각각이지만 공통점도 있다. 다름아닌 탐사 취재다.
가장 많은 부문에 후보작을 올린 프로그램의 면면만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19개 부문에 후보작을 올려 멀티 수상을 노리는 PBS의 ‘프론티어’(Frontline)와 16개 부문에 이름을 올린 CBS의 ’식스티미닛’(60 Minutes)는 각 방송국을 넘어 미국을 대표하는 탐사 프로그램들이다. 여기에 식스티미닛과 함께 16개 부문에 후보로 오른 VICE의 ‘뉴스투나잇’(Vice News Tonight)도 마찬가지. “광고도, 앵커도, 검열도 없다”(no ads, no anchors, and no censors)를 표방하는 뉴스 투나잇은 캐나다 온라인 매체 바이스가 HBO 채널을 통해 처음 선보였다. 일방적인 뉴스 형식을 과감히 탈피하고 심층 인터뷰와 다큐멘터리 수준의 고품질 영상으로 새로운 탐사 프로그램의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 바이스는 지난해 초엔 OTT 플랫폼인 훌루(HULU)를 통해 미투 운동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추적한 탐사 다큐멘터리 ‘디스그레이스’(Disgrace)도 내놓아 주목받았다. 후보작 중엔 비영리 온라인 탐사 매체인 프로퍼블리카와 탐사 보도에 강한 뉴욕타임즈도 눈에 띈다. 에미상을 주최하는 텔레비전 예술 과학 아카데미의 아담 샤프 CEO는 “코로나가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고 미국 대선이 민주주의 초석을 뒤흔든 가운데, 해당 뉴스와 다큐멘터리들은 중요하고 명확한 사실을 보도하며 사람들이 자신의 미래를 위해 판단을 내리는 데 필요한 지식을 제공했다’고 밝혔다.
탐사 취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뉴스 프로그램이나 콘텐츠가 전문가들에게만 주목받아온 건 아니다. 넷플릭스가 지난해 선보인 7부작 다큐멘터리 ‘타이거 킹: 무법지대’는 코로나로 극장들이 문을 닫은 가운데, 미국 안방의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미국에서 실제 일어난 사건을 소재를 다루면서도, 끈질긴 취재가 만든 그 실체에 한순간도 눈을 떼기 힘들다. 지난해에만 6000만명 이상이 시청해 넷플릭스 미니 시리즈 중 가장 많은 시청자를 기록했다.
전통 미디어들에 이어 온라인과 OTT 업체들이 플랫폼으로 가세하면서 탐사 저널리즘(Investigative Journalism)의 성격도 다양해지고, 분야도 세분화되고 있다. 기존 탐사 저널리즘은 기존 범죄를 한걸음 더 들어가 그 내면을 추적해 시청자들의 호응을 이끌어내는 심층 취재(In-depth Journalism), 정치인들과 같은 권력자들의 인터뷰나 추적을 통해 그 실상을 폭로저널리즘(Muckraking Journalism), 사회 구조적인 비리를 들춰내 사람들의 공분을 일으키게 하는 분노 저널리즘(Outrage Journalism) 등으로도 나눠져 왔다. 이렇게 분류돼 온 탐사 저널리즘의 뿌리는 최근 OTT 업체들의 다큐멘터리를 통해 그 색채가 더 진해지고 훨씬 다양해 지고 있다.
고양이 살해범의 끔찍한 실체에 대한 네티즌 추적기를 다룬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고양이를 건드리지 마라 : 인터넷 킬러 사냥’은 기존 범죄를 한 걸음 더 들어가는 전형적인 심층 탐사 취재 형식을 따라간다. 무고한 사람들이 범죄자로 바뀌는 현실을 다룬 ‘결백의 기록’이나 미국 체조계의 만연한 성폭력 실체를 다룬 ‘우리는 영원히 어리지 않다’(Athlete A)도 마찬가지. ‘우리는 영원히 어리지 않다’는 올해 에미상의 베스트 다큐멘터리에도 이름을 올리며 시청자들은 물론 전문가들의 호평까지 이어지고 있다. 신문이나 방송 뉴스의 전유물로만 여겨져 온 단독이나 폭로성 인터뷰도 최근 온라인 미디어와 OTT 업체들에게 옮겨가 불붙고 있는 추세다.
기존 언론 보도에 대한 평가도 단독이나 속보 보다는 장기간 기획 취재한 탐사 기사가 더 주목받고 있다. 최근 퓰리처상을 받은 기사 상당수가 단독 기사가 아닌 기존 보도된 기사를 끝까지 파거나 수년 전, 수십 년 전 보도된 사건들을 파헤치며 독자적으로 정리한 기사들이다. 퓰리처상 대상 격인 공공 서비스 부문상을 수상한 ‘선센티넬’(Sun Sentinel)의 은 플로리다주 파크랜드 지역의 고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을 파헤쳐 수십 건의 기사를 연속 보도한 경우다. 총기 사건 발생 당시 경찰의 무전 음성 기록, 경찰의 바디캠, 학교 내 CCTV 영상을 소송 통해 확보해 사건을 1분 단위로 재구성해 공개했고, 이후 경찰 15명이 해고됐다.
기존 언론사 간의 연대도 탐사 보도의 최근 특징이다. 전통 매체와 온라인 탐사 매체의 협업도 늘고 있다. 매년 퓰리처 수상작을 내놓고 있는 프로퍼블리카의 경우 뉴욕타임즈나 가디언과 협업을 통해 탐사 취재를 하고 양쪽 모두 기사를 게시하고 있다. 온라인이나 신문 매체의 깊이 있는 탐사 기사를 영상으로 구현하는 작업도 활발하다. 프로퍼블리카의 경우 지난해엔 코로나로 위기에 빠진 요양 시설의 실태를 고발(Rescuing Her Father From an Assisted Living Facility in the Coronavirus Epicenter)하며 그 결과물은 PBS의 프론티어와 함께 동영상으로 제작해 선보였다.
반면 속보성 현장 기사도 더 이상 보도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지난해 8월 백인 경찰들의 비무장 흑인 연발 총격 사건이 벌어진 미국 위스콘신주 케노샤의 항의 시위 취재에서 가장 돋보였던 매체 중 하나는 다름아닌 신문인 워싱턴 포스트였다. 단순히 현장 시위만 커버한 것이 아니라 왜 폭동으로 가게 됐는지를 깊이 있는 인터뷰 영상과 함께 선보이며 매체의 저력을 알렸다. 뉴욕타임즈는 기존 신문 오피니언 코너의 내용을 동영상으로 선보이며, 방송사나 OTT 업체들의 탐사 제작물 못지않은 품질로 호평을 받고 있다. 과거 미국에서 벌어진 대형 사고와 사건의 현주소를 10분 분량의 동영상으로 만드는 레트로 리포트는 바이스와 함께 2016년 대선 당시 트럼프 대통령의 검증을 맡았던 주류 언론들의 역할을 다시 들여다봐 주목받았다.
탐사 취재를 위해 이처럼 온라인과 오프라인 미디어의 합종연횡은 물론, 미디어와 학계의 공동 취재도 끊임없이 확장 중이다. 미국 국회의사당에 난입해 폭동을 일으킨 극우주의자들의 실체를 다룬 ‘American Insurrection’ 보도는 PBS, 프로퍼블리카와 함께 UC 버클리의 석사 과정인 IRP(Investigative Reporting Program) 재학생들이 함께 취재한 결과물이다. UC버클리의 경우 매년 IRP와 언론과의 합동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다양한 탐사 기사를 선보이고 있다. 애리조나주립대 저널리즘 대학원인 크론카이트(Cronkite)의 경우 탐사 저널리즘 석사 과정의 교수진을 퓰리처상 수상자 출신 언론인들로 구성했다. 전문가들의 탐사 취재 참여도 확대되고 있다. 미국 MIT의 경우 언다크(Undark) 웹진을 통해 통계와 이론에 기반을 둔 과학 저널리즘(Science Journalism)을 추구하며 과학 전문 기자들과 협업을 통해 탐사 보도하고 있다.
기존 언론사들도 탐사 보도가 단순히 저널리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수익은 물론 생존과 직결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추세다. AP통신의 대너 셰프스키 부사장 “탐사보도는 회사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라며 “기사 주요 플랫폼이 온라인으로 옮겨가고 있는 상황에서 더 이상 속보 경쟁에서 승리를 장담할 수 없기 때문에 탐사보도 강화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실제 미국은 트럼프 시대를 거치며 정치 탐사 보도 전성시대를 맞고 있다. 언론들은 탐사 취재를 독립 부서로 만들고, 정치 이슈에 대한 탐사 기획을 대폭 늘리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뉴욕타임스는 2018년 5월부터 정치 탐사 부서(Political Investigative unit)를 신설, 대통령만 감시하는 부서를 만들었고, AP통신도 기존 탐사보도부에 워싱턴팀을 따로 운영해 트럼프 대통령과 주변인들, 국회의원 부패와 비리를 감시해 왔다. 대부분의 주요 매체들은 탐사팀 외에도 비즈니스, 메트로, 스포츠 등 기존 부서에 탐사기자를 1~2명 배치해 이슈가 터지면 장단기 기획취재를 강화하고 있다. 정치인들에 대한 밀착 취재가 강점인 지역 매체들의 탐사보도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마이애미 지역 신문인 마이애미헤럴드의 경우 팀장 1명, 취재기자 1명, 촬영기자 1명으로 이뤄진 소규모 탐사팀 운영하면서 트럼프 대통령 측근인 유력 헤지펀드 매니저 제프리 앱스타인의 성범죄 사실을 추적 보도해 주목을 받았다. 앱스타인이 종신형을 선고 받을 수 있는 미성년자 대상 성범죄를 저지르고도 트럼프 대통령 측근인 연방 검사와의 감형 협상으로 징역 13개월형을 받은 사실을 보도했는데 기자 1명이 2년 간 취재한 것으로 알려졌다.
탐사 보도는 언론 매체만의 전유물도 더이상 아니다. 단독 보도를 지향하는 뉴미디어 매체인 악시오스는 지난해 대선을 앞두고 트럼프 대통령과의 인터뷰를 HBO에 방영해 큰 파장을 일으켰다. 악시오스가 취재하고 HBO가 방송하는 ‘AXIOS on HBO’는 트럼프 대통령 뿐만 아니라 사위 제라드 큐슈너(Jared Kushner),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Elon Musk) CEO, 애플의 팀 쿡 CEO 등을 독점 인터뷰했다. 이 프로그램은 악시오스 기자들의 인터뷰 기획부터 회의 과정까지 그대로 보여주고, 실제 방송에선 날 선 질문으로 상대방의 민낯을 가감없이 드러나게 만든다. 실제 미국과 유럽 언론은 콘텐츠에서 자신들이 공들여 취재한 기사를 보도하면서 취재에 착수하게 된 경위나 취재 과정 에피소드를 구체적으로 공개하고 있다. 기사 취재 단계부터 OTT 서비스를 염두해 두고 취재하는 형식이다. 처음엔 소셜미디어나 자사 홈페이지에 자료 입수 과정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언론사가 보도에 필요한 기록 얻기 위해 직접 소송에 나서는 과정도 취재 과정의 일환으로 독자들에게 공개하는 식이다.
뉴욕타임스의 경우 지면 기사와 함께 기사 취재 및 제작 과정을 메이킹 필름 형식으로 영상물로 추가 제작한다. 주간지 는 기존 지면 기사를 취재하게 된 배경과 심층 인터뷰가 더한 동영상을 아마존의 프라임 비디오에 시즌제 에피소드로 제공하고 있다.
탐사 콘텐츠들이 그 어느 때보다 주목받으면서 이에 대한 저널리즘 윤리 논의도 새삼 주목받고 있다. 최근 한국에서 논란이 커지고 있는 피의사실 공표, 공소장 공개, 포토라인 여부 등에 대한 논란은 해외도 마찬가지다. 정통 탐사 취재 트렌드도 바뀌고 있다. 조세피난처에 계좌를 숨겨온 명단을 폭로한 국제탐사보도 언론인협회(ICIJ)는 상근직원 4명의 작은 조직이지만 네트워크에 가입된 탐사보도 기자 50여 명이 서로 이슈를 발제하고 취재를 공조하며 대형 특종을 터트리며 세계 유수의 기성 언론들을 압도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앞서 소개한 캐나다의 바이스나 뉴미디어인 악시오스, 미국 프로퍼블리카부터 프랑스 탐사전문 보도 매체인 ‘메디아파르’까지 인터넷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새로운 탐사 보도의 시대를 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독립적인 조직이나 협회, 온라인 매체들의 탐사보도는 시간이 갈수록 그 영향력과 주목도가 확대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탐사보도팀을 운영하는 미국 기성 언론들은 영상 보도와 함께 팟캐스트에도 적극 뛰어들고 있다. 탐사보도물을 ‘오디오 다큐멘터리’로 제작, 팟캐스트로 구독하게 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탐사 저널리즘 팟캐스트 표방한 의 경우 한 시즌마다 15~20건의 에피소드를 한 시간 분량의 팟캐스트로 제작, 일주일에 하나씩 공개한다. 취재기자이자 PD의 음성과 인터뷰, 현장음으로 구성된 오디오 탐사물이지만 큰 인기다. 뉴욕타임스는 2014년부터 운영하던 팟캐스트
를 최근 탐사보도 형식으로 변형했다. 원래 20분 분량으로 그날의 주요 뉴스를 요약해 아침에 올려주던 방식이었는데 최근에는 하나의 주제에 대해 깊이 있게 5-6개 연속 보도물로 올리고 있다. 최근에는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뿐만 아니라, 다양한 디지털 플랫폼도 탐사 뉴스들을 환영하고 있다. 아마존에서 제공하는 Prime과 Audible에 뉴스를 재가공해 공급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자사 채널을 통해 유료 독자를 위한 서비스에 집중하는 해외 언론에 반해 포털 사이트와 소셜미디어에 집중하는 한국 언론 현실을 비교해 보고, 한국에 맞는 탐사보도 플랫폼을 연구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실제 국내에선 포털 사이트들이 사실상 디지털 유통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가운데, 이에 맞는 기사로 재가공하고 있는 게 현실이지만 앞으로 다양한 매체들과의 협업을 통해 저널리즘이 나아갈 방향을 모색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