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사법제도 개혁 방안으로서의 ‘대배심제’에 대한 고찰
검찰 개혁 방안으로 자주 거론되는 대배심 제도1)는 대표적인 제도 운용국인 미국에서조차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미국 인권선언에 포함될 만큼 존경받았던 대배심의 위상은 과거와 다르다. 대배심을 둘러싸고 권력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하는 집단이라는 평가와 검찰의 ‘거수기’라는 조롱이 혼재한다.
대배심은 언제부터 왜 무기력한 집단이라는 평가를 받게 됐을까? 법조인들과 학자들은 형사 사건이 급증하고 복잡해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법령이 세분화되면서 검사는 점점 전문가로 훈련받았지만, 대배심의 전문성은 상대적으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대배심 절차에서 거의 모든 실무적 권한을 검사에게 준 법원 규정도 원인으로 꼽힌다. 검사가 모든 카드를 쥐고, 대배심은 검사에게 끌려 다니는 사례들이 이어졌다. 정부의 권력 남용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하는 방패로 평가받던 대배심이 오히려 검사의 더 날카로운 창이 된 건 아이러니다.
이런 비판 속에서, 시민의 힘으로 권력을 견제하는 기능을 재건하려는 ‘대배심 개혁’(Grand Jury Reform) 요구가 오랜 기간 진지하게 이어지고 있다. 검찰의 막강한 권한을 분산하려는 논의가 활발한 한국도 제도 도입에 앞서 미국 대배심 제도의 개혁논의를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법률 전문성의 문제: “법률 모르는 시민이?”
한국과 미국 형사사법절차의 가장 큰 차이는 시민 참여권을 얼마큼 보장하느냐다. 영미법 배심제의 핵심은 재판에 대한 민주적 통제다. 대배심은 피의자를 재판에 넘길지 결정하고 소배심은 피고인의 유·무죄를 판단한다. 시민이 재판의 시작과 끝에 서 있다는 뜻이다.
한국 사회도 수사와 공소제기, 재판의 객관성과 중립성을 둔 논란이 오랫동안 이어져왔다. 그런 맥락의 제도보완으로 다양한 법원과 검찰의 개혁조치들이 있었고, 대배심제의 취지를 일부 반영한 제도도 시행하고 있다. 국민참여재판의 배심원 평결과 검찰 수사심의위원회가 그런 사례들이다. 우선 결정의 강제력이 없고 권고에 그친다는 점에서 출발부터 한계가 명확한 것이다. 게다가 검찰의 기소권이 크고 판사만이 재판 종결권을 가진 형사사법체계의 틀을 유지한 채 도입한 보완책은 의미를 가지기 어렵다.
대배심제의 대전제는 시민에게 재판의 시작과 끝을 맡긴다는 것이다. 법률 전문성이 없는 일반 시민에게 형사사법 절차를 맡기는 데 대해서는 필연적으로 불안한 이중심리가 존재한다. 이 이중심리는 대배심제의 도입 논의를 첫 단계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야 할 문제다.
1) 영국에서 기원한 대배심 제도는 본래 왕의 범죄자 처벌을 돕는 도구였다. 헨리 2세는 1166년 명망가들을 모아 선서하게 하고 지역사회에서 범죄자라고 믿는 사람의 이름을 공개하도록 하면서 대배심 제도를 발전시켰다. 왕은 시민의 호응을 바탕으로 범죄자를 수월하게 기소할 수 있게 됐다. 그로부터 100년 뒤 대배심은 새로운 역할을 하기 시작한다. 왕이 정치적 목적으로 또는 근거 없이 피의자를 기소하려 할 때, 대배심이 이를 거부함으로써 시민을 보호한 것이다. 대배심이 ‘창과 방패의 역할을 한다’는 말은 여기서 비롯한다. 미국은 영국의 식민지 시절 대배심 제도를 도입한 이래, 시민집단이 정부의 권력남용을 견제하는 법률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영국은 1933년 대배심 제도를 폐지했다.
(1) 레베카 로너건 교수 인터뷰
미국 캘리포니아 주(州) 연방 검사로 권력형 비리 사건의 대배심 수사를 지휘하고 미국 법무부에서 부패범죄 사건을 담당한 레베카 로너건(Rebecca Lonergan) 서던캘리포니아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대배심 절차는 검사가 증거를 제시하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이때 대배심원은 기술적으로 (추가) 증거를 요청할 수 있지만 실제로 요청하는 경우는 드물다”며 “대배심원은 법을 공부한 적이 없고 훈련받은 적 없는 일반인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로너건 교수가 평가하는 대배심원은 “함께 일하는 사람의 수준 만큼에는 도달할 수 있어도 그 이상을 보여주지는 못하는” 집단이다.
미국 대배심을 통해 공공이 얻을 수 있는 소중한 가치는 검찰의 비리 수사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로너건 교수는 “증인 심문이 끝나면 검사는 대배심원에게 증인이 어떤지, 증인이 진실을 말하는지에 대한 판단을 물어 본다”며 “나의 경험에 따르면 대배심원은 증인 진술의 신빙성 여부를 아주 잘, 훌륭하게 판단한다”고 평가했다. 대배심원은 목격자가 진실을 말하도록 압박하기도 함으로써 증거 수집을 돕는데, 이는 기소의 신뢰도와 직결되기 때문에 대배심이 거수기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로너건 교수에게 우리나라가 대배심 도입을 논의해 온 이유를 알려줬다. 그러자 그는 “한국은 소송 당사자가 주도하는 당사자주의(adversarial system)를 채택하지 않고 있어서, 검찰의 권한이 비대해지는 부작용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서 “그러나 대배심이 검사에 대한 견제와 균형의 역할을 할지 확신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대배심원은 검사 의존도가 높아 독립적 판단이 쉽지 않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로너건 교수는 “대배심이 부패한 검사를 만나면 잘못된 결정을 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상기시키며, “한국이 검찰 권한을 분산할 목적으로 대배심 제도를 도입한다면 대배심원이 부패한 검사에게 휘둘리지 않도록 할 장치인 ‘대배심 법률자문단’을 함께 검토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당사자주의 측면에서 부패한 검사를 견제하고 균형을 잡아줄 중립적인 사람을 둘 필요가 있다는 얘기이다.
“권력을 분산하면 분산할수록, 부패는 생존하기 어렵다. (사건의) 정보를 접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이 부패해야 부패가 성공하기 때문이다. 부패하지 않은 사람이 (사건의) 정보를 접하면 즉시 부패는 멈춘다. 따라서 서로 견제하고 균형을 유지하는 다양한 기관, 다양한 집단이 정보에 접근할 수 있기를 항상 바란다.
검사는 명확한 규칙에 따라 정부의 압력에 단호하게 거부할 수 있어야 하고, 자신의 직업은 유죄 판결이 아니라 정의라는 것을 훈련받아야 한다. 권력에 굶주리지 않고 진실을 밝히며 정의를 추구하고 합리적인 마인드를 갖도록 검사 윤리를 끊임없이 교육해야 한다. 왜냐하면 검사는 막강한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2) 대배심 ‘법률자문단’
대배심 법률자문기구는 하와이 주에서 지난 1980년 활동을 시작했다. 하와이 주 헌법은 “대배심이 구성될 때마다 법률에 의해 임명된 독립적인 자문위원은 대배심원이 다루는 문제에 관해 조언해야 한다. 자문위원은 주(州) 대법원에서 법률 업무를 할 자격이 있는 사람 중에서 선택돼야 하고 공무원이 아니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2) 주(州) 대법원장이 임명하는 자문위원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대배심원의 질문에 답변하는 것이다. 질문이 사실관계와 관련한 것이면, “증인심문을 하라”거나 “추가 증인을 신청할 필요가 있다”며 형사사법 절차를 조언하는 식이다. 대배심원의 질문이 법(legal nature)과 관련된 것이라면 자문위원은 자유롭게 답변할 수 있다. 형법 지식을 묻는 질문과 답변은 대배심의 판단에 도움이 된다. 자문위원은 법률정보 조사도 한다. 자문위원은 검사가 명백하게 법을 왜곡하지 않는 이상, 검사의 말에 반박하거나 증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자문위원은 대배심 법정에 참석할 필요는 없지만 대배심원이 원하면 참석 가능하다.3)
이 제도는 미국 50개 주 가운데 단 한 곳, 하와이에서만 시행되고 있다. 미국 대배심 개혁을 주장하는 법조인 가운데 대배심 법률자문기구를 다른 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법조인이 적지 않다. 연방 검사 출신 클린트 카르테(Klint Karte) 변호사는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대배심은 검찰을 위한 도구이자 시민을 위한 도구”라며 “대배심원이 법률자문위원의 도움을 받아 판단하는 과정에서 시민의 힘을 깨닫게 된다면 부당한 기소가 줄어들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태두스 호프마이스터(Tedeoseu Hoffmeister) 노스웨스턴대학교 법학 교수는 에 실은 논문 ‘대배심 법률자문가: 대배심의 방패를 부활시키다’에서 “(대배심 법률자문기구가 도입되면) 검사는 대배심 준비에 공을 들일 것”이라며 “초기 심사가 더 철저할수록 (기소 근거가) 약한 사건들을 더 일찍 솎아낼 가능성이 커진다. 이는 검사에게도 좋은 일”이라고 강조했다.4) 이들의 주장은 ‘일단 기소하고 보자’는 태도로 사건을 처리했다가 법원에서 무죄 결론이 난 사건들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2) 하와이 주 헌법 1조 11항. “Whenever a grand jury is impaneled, there shall be an independent counsel appointed as provided by law to advise the members of the grand jury regarding matters brought before it. Independent counsel shall be selected from among those persons licensed to practice law by the supreme court of the State and shall not be a public employee. The term and compensation for independent counsel shall be as provided by law.”
3) 미국 일각에서는 자문위원이 대배심 법정에서 모든 절차에 동석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일부 자문위원들은 “검사는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전문위원이 단순히 배석하는 것만으로도 (공정한 절차 진행에) 도움이 됐다”고 밝혔다.
4) p. 1222, The journal of criminal law & criminology, The Grand Jury Legal Advisor: Resurrecting The Grand Jury’s Shield, Thaddeus Hoffmeister, 2008
2. 미국의 대배심 개혁 논의: 2014년 퍼거슨 시(市) 시건
(1) 검사가 오도한 대배심
지난 2014년 미주리 주 퍼거슨 시에서 18세 흑인 청년 마이클 브라운을 사살한 백인 경찰 대런 윌슨을 대배심이 기소하지 않기로 하면서 미국 전역을 격랑으로 몰아넣었다. 검찰이 대배심 법정에서 거짓 목격자 증언을 제공해 대배심의 판단을 흐리게 한 정황이 드러나기까지 했다. 미국 검찰의 중립성 논란은 경찰의 총격사건 수사에서 자주 불거진다. 영역 다툼이 치열한 한국 검찰-경찰 관계와는 달리, 미국 검찰은 경찰을 동업자로 인식한다. 선출직인 지방검사가 선거에서 경찰협회의 지지를 받으려면 경찰과의 원만한 관계가 필수기 때문이다.
퍼거슨 시 사건 때 검사는 대배심에 뒤죽박죽 섞인 방대한 자료를 제공하거나 경찰의 일방적 진술을 듣는 등 불기소를 유도했다는 의심을 받을 만한 행동을 했다.5) 이런 비윤리적 행위가 가능한 건 대배심 절차가 비공개이기 때문이다. 퍼거슨 사태의 진상은 대배심 녹취록이 공개된 뒤 낱낱이 드러났다. 로저 패어팩스(Roger Fairfax) 교수는 논문 ‘미국 대배심은 퍼거슨에서 살아남아야 하나?’에서 “이미 수수께끼 같은 존재였던 대배심이 시민을 더 좌절시키고 있다”고 강도 높게 비난했고6), 대배심 절차의 ‘투명성’을 요구하는 학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대배심 녹취록을 사후 공개하면, 검사가 대배심 뒤에 숨어 정치적 비난과 책임을 시민에게 전가하는 행태에 제동을 걸 수 있다는 것이다.
(2) 대배심 공개심사 법안
퍼거슨市 사건은 최소한 경찰의 공권력 남용사건에 한정해서라도 대배심 절차를 공개하자는 사회적 논쟁을 촉발했다. 흑인 의원들 주도로 2013년 의회에 제출된 대배심 개혁 법안(Grand Jury Reform Act)도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경찰관이 공권력으로 시민을 사망에 이르게 했을 때 법관 앞에서 기소할 상당한 근거가 있는지 정하기 위한 공개 청문 절차를 진행하도록 한 것이 골자다.
대배심 비공개의 목적은 피의자의 인권과 자유, 사생활 보호인데, 그보다 더 큰 공공의 이익이 있다면 공개하자는 것이다. 브레넌 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은 “특정 목적을 위해 대배심의 비밀이 유지된다. 그러나 비밀이 그러한 목적에 도움이 되지 않거나 비밀로 얻은 이익이 공개에 대한 상쇄 이익보다 더 클 때 비밀은 해제될 수 있고 해제돼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7)
대배심 개혁 법안은 9년째 하원에 머물러 있다. 전직 미 의회 관계자는 “민주당 의원 49명이 발의한 이 법안은 청문회를 단 한 차례도 하지 않았고 올해 117대 의회에서는 법안을 소개조차 하지 않은 상태”라며 “민주당이 다수당이 된 이후에도 움직임이 전무할 만큼 미 의회는 법안 처리에 무관심하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백인 경찰이 비무장 흑인 조지 플로이드의 목을 5분 이상 무릎으로 눌러 숨지게 하는 등 경찰의 과잉 진압 논란이 끊이지 않자, 경찰 개혁 등에 화력을 집중하면서 대배심 공개 법안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는 분석이다.
무엇보다도 미국인 다수가 대배심 공개에 부정적이다. 피의자의 개인정보 노출로 인한 인권 침해뿐 아니라 범죄 과정을 잘 아는 내부 고발자의 위축, 피의자가 정치인이거나 공공기관장일 경우 기소 여부가 결정되기 전 업무 공백에 따른 혼란 등 다양한 이유를 든다.
5) 검사는 일반 사건을 처리할 때 ‘대배심에 제공하는 정보는 적을수록 좋다’는 게 통상의 태도다. 형식적인 프레젠테이션으로 대배심의 기소 결정을 이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45분 만에 15건 기소했다”고 자랑한 한 검사의 말이 논문에 인용되기도 한다.
6) Roger A. Fairfax, Jr. Essay, Should the American Grand Jury Survive Ferguson?, 58 HOW.L.J. 825, 827 (2015)
7) Pittsburgh Plate Glass Co. v. United States, 360 U. S. 395, 403 (1959) (Brennan, J.,dissenting)
3. 피의자 참여권
대배심에 회부된 사건의 피의자는 대배심 제도를 어떻게 평가할까. 미국 연방 대배심에는 피의자가 참여할 수 없다. 대배심은 유·무죄를 판단하는 게 아니라 ‘재판에 넘길만한 상당한 근거’가 있는지 확인하는 곳이다. 검찰이 확보한 범죄 증거가 충분한지에 대해서만 시민이 판단해 부당한 기소를 걸러낸다.
주(州) 대배심은 저마다의 형태로 운영된다. 뉴욕 주에서는 피의자가 대배심 법정에 나갈 수 있지만, 캘리포니아 등 다수의 주에서는 피의자 참여권이 보장되지 않는다. 캘리포니아 주에서 형사 사건을 전문으로 하는 캐린 아크리(Kareen Akry) 변호사는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대배심 절차는 매우 일방적이다. 가장 시급한 것은 피의자와 변호인의 참여권 보장”이라며 불만을 드러냈다. 방어권 보장 차원에서 피의자에게 극도로 불리한 구조라는 것이다. 피의자에게 유리한 무죄 증거를 제시할지 말지도 검사 마음이다. 아크리 변호사는 “검사가 입맛대로 증거를 골라 제시하니까 절차가 불공정해지는 것”이라면서 “증거가 충분하지 않으면 사건을 대배심에 회부해선 안 된다. 증거가 충분히 수집될 때까지 차라리 수사를 더 하라”고 검사를 직접 겨냥해 목소리를 높였다. 캘리포니아 주는 경찰의 총격 사건에서 대배심을 금지한 첫 번째 주로, 경찰 기소 여부를 검사만이 결정하도록 해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미국 최고권위의 법률 전문지 도 “대배심 절차에 피의자 측(변호인) 발표를 허용하는 것은 대배심 개혁의 한 방법”이라는 시각을 실었다. 피의자에게 발언 기회를 주지 않으면 대배심원은 검사가 제시하는 모든 증거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검사가 무죄 증거를 제출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대배심의 결정이 크게 달라진다면 대배심의 기능은 자의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피의자가 도주하거나 증인을 위험에 빠지게 하는 등 잠재적 피해가 너무 클 경우, 검찰은 (피의자 측 참여를 불허하는 대신) 피의자의 무죄 증거를 제시하도록 할 수 있다는 대안을 제시한다.8)
‘피의자 참여는 방어권 보장을 넘어선 의미를 가진다’는 클레어 도너휴(Claire Donohue) 보스턴 칼리지 교수의 견해는 주목할 만하다. 대배심원은 열린 마음으로 사건의 양면을 볼 수 있게 된다. 더욱이 피의자에게 참여감이 없으면, 그는 정서적으로 무감각해지고 모든 형사소송 과정을 공허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 정의를 향한 열망이 무심함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형사소송의 피로와 긴장은 피의자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회의와 혐오의 온상이 된다. 피의자의 참여는 결과적으로 당사자가 결과를 수용할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또 일반인이 시스템을 이해하고 신뢰하면 대중의 반응은 덜 복잡하고 순응적이다. 9)
8) P. 1223, Harvard Law Review 130, no. 4, “Restoring Legitimacy: The Grand Jury as the Prosecutor’s Administrative Agency, 2017
9) Claire Donohue, “Article 32 Hearings: A Road Map for Grand Jury Reform,” Howard Law Journal 59, no. 2 (Winter 2016): 469-484
4. 시민의 힘
한국에 대배심 제도를 도입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 논의는 답보 상태다. 법조계 일각에서 미국 대배심의 역할 축소와 피의자의 방어권 문제를 부각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범죄에는 칼, 부당한 공권력에는 방패 역할을 하는 대배심을 원한다면, 그 형태를 들여오는 것을 넘어 제도 본연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건 시민이 다른 시민을 믿고 힘을 불어넣을 준비가 돼 있는가이다. 또 시민이 권력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려는 의지가 있는가이다.
미국 델러웨어 주(州) 대배심 선서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포함돼 있다. “정의는 궁극적으로 배심원의 질(質)에 달려 있다.”10) 배심원의 판단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한 이 문구는 ‘시민의 참여가 늘어나면, 장기적으로 시민의 법률적 판단능력이 커진다’는 믿음에 근거한 것이기도 하다.
시민이 기소 여부 등을 판단해 권고하는 한국의 ‘검찰수사심의위원회’는 결론 도출 때마다 반발과 잡음이 이어졌다. 피의자의 방어권을 보장하고 법률자문위원을 두는 등 미국 대배심 개혁 쟁점을 반영했지만, 양 갈래로 갈라진 진영 다툼만 보일 뿐이다. 시민이 스스로 시민의 판단을 불신하고 선택한 길은 결국 엘리트 기구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최근 신설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는 출범 직후부터 정치 수사와 권력 남용 논란에 휩싸여 있다. 검찰 개혁은 검찰이 오로지 국민을 바라보며 책임 있는 수사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이 물음에 진지하게 답할 때다. “시민의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할 준비가 돼 있는가.”
10) Justice ultimately depends upon the quality of the jurors who serve in our cour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