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퍼볼(Super Bowl) 경기가 열렸던 지난 2월 7일 밤 TV에서 본 한 편의 광고를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미국 어린이들이 국기에 대한 맹세(The Pledge of Allegiance)를 하는 장면을 패러디 한 광고로, 학생들은 고사리 같은 손을 가슴에 얹은 채 미국의 빚, 그리고 돈을 빌려준 중국에 대한 부채상환의 의무를 다짐하고 있다. 광고 말미에 등장하는 지구본에선 미 국채를 대량 보유하고 있는 중국이 특별히 클로즈업된다. 한 민간단체에서 워싱턴 지역에 내보낸 이 광고는 급증하는 국가부채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방인으로서는 그동안 감춰왔지만, 마침내 드러난 중국에 대한 미국인들의 크나큰 두려움을 본 듯한 느낌이었다.
核 정상회담 (Nuclear Security Summit)이 열렸던 지난 4월13일 워싱턴포스트는 한국에서라면 난리가 났을 법한 사진을 1면에 실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각국 정상을 맞이하는 10장의 사진 가운데,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과의 악수장면은 정말 이상했다. 꼿꼿하게 머리를 들고 어깨를 편 채 손만 앞으로 내민 후진타오 주석과 달리, 오바마 대통령은 머리와 어깨를 함께 숙인 모습으로 마치 상관에게 정중히 절을 하는 듯 보였다. 우연히 그 장면이 찍힌 것이겠지만, 한국에서라면 틀림없이 난리가 났을 것이다. 물론 문화와 정서의 차이일 뿐일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동양에서 온 이방인은 ‘세계의 패권이 어느새 바뀌어 버린 것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아니면 그 전주를 명확하게 보여줬던가.
구글이 중국에서 쫓겨나다시피 홍콩으로 물러났는 데도 이곳에선 별다른 반향이 없었다. 구글의 문제일 뿐이라는 정서가 많은 탓인지 정부는 물론 민간 차원에서도 심각한 항의나 마찰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미래의 최대 시장에서 쓸데없이 분란을 일으키고 시장에서 쫓겨난 구글의 의사결정이 잘못된 것 아니냐는 투의 얘기가 없지 않다.
현재의 최강국 미국에 살면서, 오히려 미래의 최강국의 공인된 중국의 힘을 자주 생각하게 된다. 한국에 있을 때 생각했던 것 보다 그 ‘힘’이 훨씬 강하고, 그리고 파워가 훨씬 빨리 커지고 있다는 걸 느낀다. 무서울 게 없을 것 같은 미국인의 속내를 직접적으로, 그리고 간접적으로 접하면서 이들이 정말로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체감하기 때문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의 경제시스템 변화를 다루는 ‘free market in crisis’ 이라는 제목의 대학원 강의에 참여하고 있는데, 여기서도 중국은 매우 중요한 테마다. 정부 역할이 강화되는 가운데 신(新)자유주의 신념이 퇴색하는 조류 속에서 뒤는 어떻게 될 것인가를 토론하는데, 중국식 국가 주도 자본주의는 주요 이슈로 다뤄지고 있다.
교수는 첫 수업시간에 중국 출신 학생에게 영문으로 된 페이퍼를 찾아봐 달라는 간곡한 당부를 하며 특별한 관심을 표시했고, 학기 내내 별다른 위기 없이 고도성장을 계속하고 있는 중국식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논의는 수 차례에 걸쳐 진행됐다.(안타깝게도 그 학생은 이 강의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이후론 나타나지 않았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 미 재무장관을 지낸 헨리 폴슨이 쓴 자서전 ‘On the brink’를 보면서도 미국 주류 백인계층이 얼마나 중국과의 교류에 힘을 쏟고 있는지를 새삼 확인하고 혀를 내두르게 된다. 파생상품 판매관련, 사기 혐의로 제소돼 곤욕을 치르고 있는 골드만 삭스의 회장을 지낸 그는 이미 1990년대 초반부터 중국시장에 정성을 들였다고 밝힌 뒤, 위기 상황에서 미 국채를 가장 많이 보유한 중국정부와의 사전 조율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를 상세히 적으면서 고마움을 전했다. 그는 금융시장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결정의 순간순간 마다 중국에 사전 통보하며 협조와 이해를 구했다고 전했다. 책의 행간을 보면 중국은 언제나 협조와 이해를 구해야 할 첫 번째 대상이었고, 다른 나라엔 통보하지 않았던 숱한 의사결정들이 중국엔 가감 없이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또 책에는 헨리 폴슨이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재무장관으로 임명되기 전에 중국 정부는 그가 차기 재무장관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정황도 기술돼 있다.
얼마 전 ‘When China rules the world’라는 책이 나왔다. 영미권과는 문화와 관습, 그리고 사고 패턴이 다른 중국이 세계패권을 쥐게 될 때 세상이 어떻게 달라질 것이고, 무엇을 준비해야 할 것인가를 다루고 있다. 다 읽은 게 아니라 뭐라 얘기할 수 없지만, 먼 미래가 아닌 가까운 장래에 중국에 의한 세계 지배(?)를 미국, 그리고 서구사회가 이제 기정사실화하면서 대비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책이다.
물론, 지금 미국과 미국인이 바라보는 중국엔 거품(bubble)이 끼어있다는 느낌이 들 때도 많다. 중국의 힘이 모든 분야에서 커지고 있는 게 명명백백하지만, 때로는 중국이 안고 있는 숱한 문제들을 간과한 채 ‘실체’를 다소 과장해 보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미국에서 함께 안식년을 보내고 있는 중국 전문가들과 만나 얘기를 해보면, 중국이 지금의 미국과 같은 ‘세계의 중심’이 되려면 극복해야 할 내부 과제도 숱할 뿐더러 시간도 많이 걸릴 것이라는 의견이 적지 않다. 단순한 내수 시장의 크기가 아니라, 글로벌 제국이 되기 위한 사회시스템, 국민의식의 성숙도, 그리고 글로벌 제국의 첨병으로 세계를 누빌 세계적인 기업 등에서 너무나 가야 할 길이 멀다는 얘기다.
미국에 살면서 바라보는 중국은 그래서 헷갈린다. 일상에서 느끼는 미국인의 두려움에서 전혀 다른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고, 금융위기로 인한 미국의 불안정성 때문에 미국사회가 중국을 실체 이상으로 부풀려 보고 있다는 한국 전문가들의 얘기에 귀가 쏠리기도 한다.
그래서 결단코 그런 일은 없겠지만, 한번 더 해외연수 기회가 주어지면 중국을 보고 싶다. 그리고 3개월 뒤 서울에 돌아가면 중국을 좀 공부해야겠다. 泰山鳴動鼠一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