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1899~1961).
20세기 미국의 대문호. <노인과 바다>,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등 작품으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작가다. 1952년 <노인과 바다> 출판 후 1953년 퓰리처상을 수상했고 1954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종군기자 출신 특유의 정제되고 간결한 문체로 유명하다.
2024년 1월30일. 혼자서 헤밍웨이하우스가 있는 키웨스트(Key West)로 향했다. 정초임에도 20도를 웃도는 중미의 날씨, 그리고 파란 물감을 풀어놓은 듯 청명한 하늘이 생경하면서도 아름다웠다.
1930년대, 쿠바를 사랑했던 헤밍웨이는 집도 쿠바와 가장 가까운 섬 ‘키웨스트‘에 뒀다. 키웨스트는 미국 대륙한계선내 최남단 섬이다. 2000여개 섬으로 이뤄진 플로리다키스 제도의 가장 서쪽 끝에 위치한다. 이른바 ‘땅끝 마을’인 셈이다.
플로리다반도 남단에서 헤밍웨이하우스를 가려면 키웨스트까지 이어진 ‘US-1번‘ 국도를 달려야 한다. 이 국도는 섬과 섬을 잇는 40개의 다리로 이어져 있다. 일명 ’Overseas Highway’로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속도로 중 하나로 꼽힌다.
숙소가 있던 마이애미에서 키웨스트까지는 차로 4시간. US-1번 국도를 달리다보니 광활한 바다와 1차선 도로 옆으로 보이는 철길, 그 위를 산책하는 관광객과 낚시꾼들이 그림처럼 스쳐 지나갔다.
섬들을 잇는 다리 중 압권은 세븐 마일 브리지(Seven Mile Bridge)다. 길이는 총 10.93km(6.79마일)로, 중간부분은 20m 높이의 선박이 통과할 수 있도록 아치형으로 솟아 있다. 그 바로 옆으로는 중간에 끊긴 철길이 보였다.
폭이 좁은 아찔한 도로는 왼쪽으로 대서양, 오른쪽으로 멕시코만을 가른다. 대양을 바라보며 대여섯개 큰 섬을 지나니 마침내 키웨스트에 도착했다. 키웨스트 헤밍웨이하우스는 1937년 헤밍웨이가 스페인 내전 취재를 떠나기 전까지 두번째 부인 폴린 파이퍼, 그리고 두 아들과 살던 집이다.
큰 야자수에 가려진 탓인지 헤밍웨이하우스는 도로에서 바로 눈에 띄지 않았다. 작게 난 문으로 관광객 몇몇이 드나드는 것이 보였다. 입구에서 18달러 입장료를 내고 안뜰로 들어서니 비로소 커다란 야자수 뒤로 상아색 덧창이 인상적인 대저택이 보였다.
가이드 투어를 기다리며 집 외관을 둘러봤다. 헤밍웨이하우스는 건물 2채로 이뤄져 있다. 둘다 2층짜리 건물로 본관은 생활공간, 뒤채는 헤밍웨이 작업실로 쓰였다.
본관 1층은 현관을 중심으로 오른쪽은 거실, 왼쪽은 부엌과 다이닝룸으로 나뉜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침실이 2개 나오는데 오른쪽은 헤밍웨이 부부의 침실, 왼쪽은 두 아들과 유모방이다.
가이드 투어는 헤밍웨이의 일대기가 집약된 1층 오른쪽 방에서 시작됐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수염이 덥수룩한 말년의 헤밍웨이 초상이었다. 20세기 유명인의 초상을 전담했던 사진작가 유섭 카쉬(Yousuf Karsh)가 찍었다.
그 아래로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헤밍웨이 사망에 대한 추도사가 자리했다.
Few Americans have had a greater impact on the emotions and attitudes of the American people than Ernest Hemingway….He almost single-handedly transformed the literature and the ways of thought of men and women in every country in the world.
어니스트 헤밍웨이 만큼 미국인들의 감정과 태도에 더 큰 영향을 미친 미국인은 거의 없습니다…그는 거의 혼자의 힘으로 세계 모든 나라의 남성과 여성의 문학과 사고방식을 바꿔놨습니다.
-Statement by the President John F. Kennedy on the Death of Ernest Hemingway-
헤밍웨이 초상 옆으로는 <노인과 바다>의 실제 인물인 그레고리오 푸엔테스의 사진이 있다. 푸엔테스는 헤밍웨이가 쿠바에 머물던 시절 낚시친구이기도 했으며 훗날 헤밍웨이의 보트 ‘엘 필라‘의 관리인 겸 선원으로 고용되기도 했다. <노인과 바다>가 헤밍웨이에 부와 명예를 가져다주자, 푸엔테스는 술 한잔으로 갈음하려 했지만 헤밍웨이는 그에게 2만달러를 줬다고 한다.
헤밍웨이 사진과 훈장, 기록 등이 벽에 즐비한 이 방에서 눈에 띄는 게 하나 더 있었다. 100년이 다 돼가는 헤밍웨이하우스에 보이는 블랙가전. 바로 공기청정기다. 자세히 보니 LG전자 퓨리케어였다. 왠지 모르게 흐뭇해져 나도 모르게 사진을 찍었다.
1층 왼쪽편은 다이닝룸과 주방이다. 프랑스 파리 <보그>편집장 출신인 아내 폴린의 감각이 돋보는 공간이다. 1930년대 치고 매우 현대식이 주방인데다 타일과 가구를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 유럽에서 공수해온 것이라고 한다.
2층 자녀방은 헤밍웨이의 작품들과 이를 원작으로 한 영화, 그리고 추억의 사진들로 꾸며졌다. 가장 주목할 것은 벽에 붙은 아그네스 폰 쿠로브스키(Agnes von Kurowski)라는 여성이다. 19세 ‘청년‘ 헤밍웨이가 스페인 내전에 앰뷸런스 운전병으로 참전했을 당시 무릎 부상을 입어 이탈리아 밀라노 적십자 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를 돌봐준 간호사다. 헤밍웨이는 이 여성에 사랑을 고백했지만 “남동생 같다“며 거절당했다고 한다. 이 때의 기억은 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의 근간이 됐다.
반대쪽은 헤밍웨이 부부의 침실이 자리했다. 킹사이즈는 돼 보이는 커다란 침대 위에 자고 있는 검은 고양이가 눈에 띄었다. 한 마리인 줄 알았는데 베개 뒤쪽에 또 다른 고양이가 자고 있었다. 헤밍웨이는 고양이를 좋아해 거주 당시 30여마리를 키웠다고 한다. 특히 헤밍웨이의 고양이는 ‘폴리댁틸(polydactyle)’이라는 발가락이 6개 있는 다지증 고양이었다. 헤밍웨이가 스탠리 덱스터라는 선장 친구에게서 ‘스노우볼‘이란 이름의 고양이를 처음 선물 받았을 때 발가락이 하나 더 있어 그때부터 애묘가가 됐다는 후문이다.
2층 침실에서 발코니로 나가니 뒤채가 보였다. 헤밍웨이가 거주했던 당시 본관 2층에서 별관 작업실까지는 ‘캣워크‘라는 다리가 이어져 있었다. 헤밍웨이는 캣워크로 작업실까지 이동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별관 2층 작업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헤밍웨이가 쓰던 의자와 책상, 타자기 등이 놓여 있었다. 정면에는 사슴 박제와 헤밍웨이가 당시 보았던 책들이 전시돼 있었다.
뒤뜰로 내려가니 커다란 수영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키웨스트에 있는 개인 수영장으로는 최대 규모다. 스페인 내전 종군기자로 헤밍웨이가 집을 비운 사이 아내 폴린이 당시 돈 2만달러를 들여 만든 것이다. 지금으로 환산하면 4만달러(약 5억원)에 이른다고 가이드는 설명했다.
집에 돌아와 수영장을 본 헤밍웨이는 폴린에게 “내 마지막 1페니(1센트)까지 가져가는 게 어떻겠소?”라고 말하며 주머니에서 1센트를 꺼내 던졌다고 한다. 이를 폴린은 수영장 앞 기둥 바닥에 보관해 현재까지 관광객들에 웃음을 선사하고 있다.
헤밍웨이는 1899년 7월 21일 미국 일리노이주 오크파크에서 태어나 1961년 7월 2일 61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아이다호주 케첨에서 자신이 아끼던 산탄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생전 헤밍웨이는 4번 결혼했다. 첫번째 부인(해들리 리처드슨)이 피아니스트였던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 세명(폴린 파이퍼, 마사 겔혼, 메리 웰시 헤밍웨이)의 부인은 모두 저널리스트이나 작가였다.
2시간의 관광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9시간짜리 <무기여 잘 있거라> 오디오북을 들었다. 실존적 허무주의자이자 하드보일드 성향의 헤밍웨이가 한 말이 스쳤다.
“세상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 후에 그 부서진 곳에서 사람들은 강해진다.”
(The world breaks everyone, and afterward, many are strong at the broken pla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