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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方禮儀之國 – 친절한 미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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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미국에 왔을 때 가장 적응하기 어려웠던 것 중의 하나가 모르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일이었다. 마트 계산대에서는 물론이고 심지어 길을 가다가도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면 어김없
이 “Hi, How are you?”라는 인사가 일면식도 없는 누군가로부터 건네졌다. 낯선 이의 친절이
당황스러워 말없이 어색한 웃음만으로 대꾸하거나 그냥 “Good”이라고 말하고 서둘러 시선을
외면하던 내가 “Good, how are you?”라고 웃으며 대답하기까지 실로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易地思之를 아는 미국인

 

이런 미국인들의 친절이 그저 ‘예의치레’일 뿐이라고 치부했던 나의 생각이 상당 부분 틀렸다
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두 달 전쯤, 자동차가 고장 나 Korea
Town에 있는 한인 정비업체에서 수리를 받고 오는 길이었다. Freeway를 내려서자 마자 갑자기
차가 멈춰 섰다. 4차선 도로 한 가운데서 오도 가도 못한 채로 정비업체에 전화를 걸어 항의를
하고 있는데 지나가던 차에 타고 있던 미국인 몇 명이 내게 뭐라 말을 걸었다. 문제가 뭐냐는
식의 질문이 대부분이었다. 통화 중이었던 데다 차선을 가로 막고 서 있는 것에 대한 불평이겠
거니 하고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그냥 흘려 들었다. 그런데 그 중 한 명이 가던 길을 멈추고 차를
길가에 세운 채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계속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통화가 끝나자
그는 차에서 내려 내게 다가왔다. “Do you need a help?”.

 

생면부지인 나를 돕기 위해 기다려 주기까지 했던 것이다. 갓길도 마땅치 않았던 상황이어서
견인이 가능한 곳으로 차를 빼내기 위해 50미터가 넘는 거리를 밀어야 했다. 족히 30분 정도는
걸렸다. 뜨거운 햇볕 아래 덩치 큰 밴을 미느라 금새 웃옷은 땀에 젖었다. 이 정도면 한 두
마디쯤 생색을 낼 법도 한데 그는 일이 마무리 되자 “Thank you” 뒤에 이어지는 “so much”
를 듣기도 전일 만큼 서둘러 떠났다. 그가 떠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내가 길 한가운데서 멈춰
서 있던 그 시간 동안 누구도 경적을 울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당황스러운 순간 짜증스레 외면
했던 낯선 이들의 언어가 도움의 뜻이었음을. 남을 이해하고 남을 돕는 것, 미국인들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마음으로 소통하다

 

큰 아이 초등학교 담임선생님과 첫 미팅이 있던 날, 아이 엄마는 빈손으로 찾아 가기가 멋쩍어
한국에서 하던 대로 커피를 한 잔 사 들고 갔다. 다음 날, 아이는 학교에서 돌아오면서 엄마에게
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 담임선생님이 보낸 카드에는 전날 커피에 대한 감사의 내용이 정성스런
글씨로 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고작 커피 한 잔에 대한 고마움만으로 제법 큰 카드 면을 다 채운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분명 커피를 들고 갔을 때도 그 자리에서 감사의 뜻을 표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 선생님은
굳이 다시 편지에 가까운 감사카드를 보냈다. 커피 한 잔에 담긴 마음을 받은 것이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마음을 카드에 담아 보낸 것이다. 이후에도 비슷한 Thank You Card를 아이들의 선생님
들로부터 몇 차례 더 받았다.

 

지구상에서 자본주의가 가장 고도화된 미국에서 아이러니칼하게도 물질이 아닌 마음이 통하는 것
이다. 이런 곳에서 촌지는 그야말로 가당치 않은 일이 될 것이다. 한국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LA 인근 어딘가에서는 외국인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촌지가 관행화 됐다는 소문이 들린다. 사실이
라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작은 것에 감사하고, 감동하는 법을 우리가 너무 오래 잊고 살았던
것은 아닐까.

 

내가 미국에서 경험한 친절은 대부분 우리와 피부색이 다른 ‘서양인’으로부터였다.
언필칭 ‘東方禮儀之國’으로 일컬어지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여기서는 그다지 친절한 편에 속하지
않는다. 길을 걷다 눈이 마주쳐도 인사를 건네는 경우가 드물고, 남에게 도움을 주는 데도 인색한
편이다. 어려서부터 ‘孔孟의 도리’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배워온 우리는 정작 禮를 잊고 사는 반면,
孔孟이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미국인들은 禮를 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반칙하지 않고, 입장
바꿔 생각할 줄 알며, 마음으로 소통할 줄 아는 것, 법에 의한 강제가 아니라 시민들 사이에 자발
적으로 합의된 규범이 거대한 미국 사회를 선진적으로 작동시키는 주요 원리이다. 이제 도리어
‘西方禮儀之國’으로부터 한 수 배워야 할 판이라는 사실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