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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카드가 정지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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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카드가 정지됐습니다.

1. 어느 날 갑자기 문자와 함께 신용카드가 정지됐다. 이상한 결제가 연달아 시도됐다는 은행에서 보낸 문자였다. 내가 한 결제가 맞는지 확인해 달라, 그 전까지는 추가 결제를 막겠다는 내용이었다.
부랴부랴 은행 앱을 열어서 확인을 해봤다. 구글플레이에서 7달러짜리 ‘앵그리 버드’ 게임 아이템을 네 번 연달아 산 흔적이 나왔다. ‘나는 앵그리버드를 한 적이 없는데…’ 하는 순간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제 네 살인 아이가 심심해 할 때마다 내 태블릿을 주고 놀게 했는데, 그러다가 앵그리버드를 깔았고 아이템까지 산게 아닐까 의심이 갔던 것이다.
태블릿에 결제 창을 열어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결제가 돼 있었다. 더 황당한건 그리고 나서도 20불 짜리, 60불 짜리 아이템도 연달아서 사려고 했지만 카드 결제가 거부된, 그러니까 카드 회사가 알아서 정지를 시켜버린 흔적까지 나와 있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한테 결제가 가능한 태블릿을 쥐어준 내 잘못이 명백했다. 한국에서 경험상, 게임회사에 하소연을 해봐야 돈을 돌려줄 리가 없었다. 하지만 화도 나고 아쉬운 마음에, 은행 앱에 있던 ‘dispute’, 그러니까 분쟁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일은 그렇게 커져버렸다.

2. 은행은 fraud, 그러니까 도용이나 사기가 아닌지 확인해 보겠다면서 카드를 아예 묶어버렸다. 그냥 내 실수가 맞다고 인정했다면 카드를 다시 쓸 수 있었을텐데, 카드회사는 이 카드 자체를 폐기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조사가 끝나고 새 번호의 카드가 집에 올 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문장이 떴다.
어차피 그 돈 내가 내야 할텐데, 잘 몰라서 괜한 일을 벌였구나 자책이 됐다. 그 카드가 없으면 여러 가지로 생활에 불편함을 겪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서 한동안 짜증도 났다. 그런데 2주 쯤 지났을까, 한 메일을 받게 되면서 오히려 생각이 확 바뀌었다.

좋은 뉴스입니다 – 당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졌습니다.

결제금액을 다시 돌려드리게 됐고 어떤 이자나 비용이 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드려서 기쁩니다. 당신은 어떤 일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의 인내심에 감사드리고 당신을 위해 문제를 해결해서 저희도 기쁩니다.

당신의 안전은 우리의 최우선 과제입니다.

우리의 고객이 돼주셔서 감사드립니다.

3. 어리둥절하면서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단순 실수인 것이 맞고 내 의사에 반한 것이었던 것도 맞는데, 은행이 이렇게 나서서 문제를 해결해 줄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시스템을 악용해서 이득을 보려던 의도가 아니었다면, 그러니까 소비자의 실수였고 선의였다면, 책임을 물리지 않겠다는 뜻으로 이해됐다.
그런데 알아보니 미국 은행들은 이렇게 고객이 문제를 겪은 이후 뿐만 아니라, 사전에도 위험을 먼저 감지하고 나서서 해결해주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면 카드를 사용할 때 기존의 패턴과 다르다거나, 수상한 결제가 감지되면 경고를 하는 동시에 결제를 막는 식이다. 실제로 거주지가 아닌 지역으로 여행을 가서, 평소에 잘 쓰지 않았던 결제 등을 할 경우에 일단 결제를 막고 본인이 맞는지 문자로 묻는 경우가 적잖았다. 카드 결제 중에 벌어질 수 있는 다양한 사기 행태를 분석해서 그 패턴과 유사한 결제가 벌어지는 경우에는 실시간으로 잡아낸다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서 다른 은행의 경우에는 범죄자들이 정보를 주고 받는 소위 ‘다크웹’에 이메일이나 전화번호 등등의 내 개인 정보들이 거래되는지 실시간 감시를 해서 알려주는 경우도 있었다. 금융사기 위험을 고객에게 전적으로 맡겨두는 것이 아니라, 은행이 같이 방지하려는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었다.

4. 한국 은행들의 행태는 전혀 다르다. 오랜 기간 논란을 이어가고 있는 공인인증서의 문제가 대표적이다. 금융 거래에서 위험을 오롯이 고객에게 전가하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다. 다양한 정보를 수집해서 미리 대책을 세울 수 있는 은행은 노력을 하지 않는다. 몇 번의 정권을 거치면서 이 공인인증서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지만, 고치겠다 고치겠다 말만 했을 뿐, 이름을 바꿔가면서 은행과 더 나아가서 금융당국은 소비자에게 책임을 지우는 방식을 고집하고 있다.

우리나라 은행들은 최근 이자 놀이로 사상 최대 이득을 내고 있다. 하지만 보이스피싱을 포함한 각종 금융 사기 문제에 있어서 금융권이 시스템을 통해서 문제를 사전에 걸러내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단순히 금융 시스템이 선진국에 뒤떨어졌다는걸 넘어서, 서비스업으로서 자세 자체가 부족하다는걸 깨달은 사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