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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라지에서 보물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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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원짜리 한 장 던져주며 “담배 두 갑에 음료수 세 개 사오고 700원 거슬러 오라”는 억지가 통하는 데가 내무반뿐인 줄 알았는데 미국에 오니 민간인들 사이에서 이런 일들이 횡행하고 있다. 이런 터무니없는 거래가 이뤄지는 곳이 미국 집의 차고인 거라지(garage)다.

이곳 미국인들은 이사 준비를 하거나 집안을 정돈하면서 긴요하지 않은 물건들을 대거 정리하고 싶을 때 이것들을 차고에 늘어놓고 파는 ‘거라지 세일’을 한다.(미주리주 이외 지역에서도 성행인지는 잘 모르겠다.) 자신에게 불필요해진 물품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넘기는 게 기본 취지다 보니 쓸만한 제품도 헐값인 경우가 많다.

가령, 우리 집 뒤뜰에 다른 미국 집들처럼 작은 탁자와 의자들을 마련해 휴식공간을 꾸미는데 6달러가 들었다. 2달러는 테이블, 4달러는 의자 4개를 사는 데 썼다. 네 집의 거라지에서 주워 모은 것 들이다. 허둥지둥 짐을 챙겨오느라 마땅한 손가방과 지갑을 못 가져온 아내에겐 각각 1달러짜리를 사서 쥐어줬다.


요즘 백화점 같은 데 모처럼 외출을 할 때면 아내는 1달러짜리 지갑을 1달러짜리 백에 넣어 들고 나선다. 인형이 많았던 한국 집에 비해 영 썰렁했던 초등학생 딸의 방엔 총 1달러를 주고 사온 소, 돼지, 강아지, 곰 인형이 놓이면서 한결 나아졌다. 중학생 아들은 ‘University of Missouri` 글씨가 선명한 50센트짜리 티셔츠를 입고 동네를 활보한다. 나 역시 비슷한 글씨가 새겨진 50센트짜리 티셔츠를 입고 대학에 강의를 들으러 간다. 총 10달러. 거라지에선 이렇게 대단한 돈이다.

지난 7월 이곳 미국 미주리주 콜럼비아시에 온 뒤 두달여간 우리 집엔 남의 집 거라지에서 실어온 가재도구들이 계속 늘어났다. 이젠 집구석 어디를 가도 거라지 상품을 피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거라지 세일을 가보면 손님 중에 한국인을 비롯한 동양인은 의외로 드물다. 대개 미국인들이 열심히 물건을 고르고 있다. 내 생각엔 거라지 세일을 가장 잘 활용할 사람은 우리 같은 연수생이다. 미국에 와보니 각종 마트나 쇼핑몰마다 다양한 상품이 넘쳐난다. 그런데 한국에 가져가기엔 부담스럽고 여기서 몇 달 쓰고 버리기엔 돈이 아까운 것들이 대다수다. 위에 언급한 탁자와 의자를 상점에서 구입하려면 족히 200달러는 들 텐데 피 같은 연수비를 그런데 쓸 수 있겠는가. 거라지는 지갑 얇은 연수생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보물창고다.

만족스런 거라지 쇼핑을 하는 단계에 이르는 동안 시행착오가 많았다. 쓸 데 없는 물건, 폐품 수준의 잡동사니에 어이없이 큰돈(그래봐야 5달러 내외지만)을 낸 경우가 있었다. 거라지 세일 안내 표지판을 따라가다 방향을 잃어 가족들의 야유를 들었는가 하면 이미 세일이 끝난 뒤에 찾아가 기름값만 날리는 아픔도 겪었다. 남루한 물건을 들고 왔을 땐 식구들로부터 “저 사람 혹시 거지가 아닐까”하는 의혹의 시선을 받기도 했다. 이제 실력 갖춘 ‘거라지 바이어’가 됐다는 자만심도 생겼고 날씨가 더 추워지면 거라지 세일도 사라질 것 같기에 나름의 노하우를 공개한다.

1. 섣불리 사면 후회한다.

거라지 세일에 처음 가면 싼값에 현혹돼 이것저것 집어들 수 있다. 그러나 조금 더 다녀보면 이게 결코 싼 가격이 아니란 걸 알게 된다. 처음엔 많이 사지 말 것. 전자제품은 꼭 작동하는지 확인해 보라. 집주인은 정상 작동됐었다는 확신을 갖고 있지만 거라지 상품은 상당수가 한동안 방치된 것들임을 잊으면 안된다. 물론 세일이 끝난 뒤 그 집에 찾아가 반품, 환불을 요구할 정도의 용기와 영어실력을 갖췄다면 막 사도 괜찮다.

2. 필요한 물품들을 미리 생각하고 시세를 알아두라.

생활하면서 아쉬운 품목들을 염두에 두고 다니면 한결 효율적이다. 나의 경우 저울, 거울, 시계, 호스, 가방 등을 목표로 삼고 찾아다녀 만족스런 구입을 했다. 마트 같은 데 가서 시세를 봐두면 도움이 된다. 때론 거라지 세일에 붙은 가격이 마트의 새것보다 비싼 경우도 있다. 이런 거 사면 억울해서 밤에 못 잔다.

3. 동선을 미리 결정하는 것이 좋다.

길거리에 붙은 거라지 세일 표지판을 보며 찾아다니는 방식은 극히 비효율적이다. 시간만 허비하고 소득은 없을 가능성도 크다. 거라지 세일 광고(이곳의 경우는 콜럼비아 트리뷴지 홈페이지 www.columbiatribune.com 광고란 등)를 찾아서 주소, 시간, 주요 품목 등을 미리 파악하고 나서는 게 효율적이다. 광고에 나온 주소들을 맵퀘스트나 야후 등에 입력해 위치를 확인하고 동선을 짜면 두 시간에 10곳 가까이 들를 수 있다. 네비게이션이 있다면 최고다. 주소 찍으면서 다니면 쉽다.

4. 부자 동네를 노려라.

사실 이게 엑기스다. 거라지 세일 중엔 생계형도 있다. 값은 비싸고 실속은 없는 경우다. 그러나 부촌에서 하는 세일은 나눠 쓰는 개념이 강하다. 물건의 질도 좋다. 잘 사는 동네에서 하는 거라지 세일은 꼭두새벽부터 미국 사람들이 몰려와 쟁탈전 수준의 신경전을 벌이는 경우가 많다.

5. 대화를 시도하라.

이 김에 공짜로 영어회화 공부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물건에 대해 물으면 대개는 친절히 설명해준다. 그런데 대화를 하다보면 의외의 횡재를 할 수 있다. 이 사람들이 나를 처음 보면 불법체류자 정도로 생각하는 거 같다. 얘기를 하면서 미주리대에 다닌다는 것을 알게 되고 한국에서 온 기자라는 것까지 확인하고 나면 무척 우호적으로 바뀌는 경우가 있다. 요구하지 않았는데도 값을 팍팍 깎아주고 좋은 물품을 공짜로 주는 일도 생긴다.

이상이 지금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나의 거라지 딜 제안이다. 끝으로 내 나름의 ‘괜찮은 거라지 시세’를 간단히 정리해본다. 이것보다 비싸다면 베스트 딜은 아니니 한번 더 생각하고 사는 게 좋을 것 같다.

가구 소품 : 5달러 이하

옷 : 50센트-1달러 (점퍼는 3달러)

가방 : 50센트-2달러

신발 : 50센트-1달러

책 : 25-50센트

전자제품 : 3-10달러 (지금까지 내가 산 최고가 상품은 10달러짜리 전자 피아노다.)

주방용품 : 10센트-1달러

골프용품(백, 카트 등) : 3-5달러 (골프채 세트는 10달러)

그 외 대다수 상품 : 25센트-3달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