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옥스퍼드만 보고 영국의 다른 사회를 예상하면 안 돼. 이곳은 영국 안에서도 정말 특별한 곳이니까.” 영국 사회를 더 잘 이해하고 싶다고 얘기하면 여기서 만난 친구들이 내게 종종 건네는 말이다. 맞다. 영국 안에서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는 사뭇 특별한 곳이다. 전 세계에서 몰려온 ‘선택받은’ 학생들과 학자들이 여기서 지내고 있다. 영국 안에서도 가장 공부 잘한다는 학생들이 모여든다. 두 도시에 들어와서 살려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집값도 런던 만큼 비싸다. 거주하는 주민들의 소득 수준도 높아서 물가도 비싸고 사립 학교도 정말 많다. 내가 경험한 영국 사회는 석사 시절의 케임브리지, 지금 방문 연구원을 하면서 보고 있는 옥스퍼드의 모습이다. 대체적으로 학력이 높고, 젠틀하고, 굉장히 인터내셔널한 분위기에 인종 차별 적고, 최빈층의 모습은 보기 어려운 모습. ‘영국에 대한 내 인상은 이 나라 대다수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것이리라.’ 스스로 경계한다. 하지만 이 속에서도 고통받는 인류를 종종 만난다. 그리고 새로 깨닫는 것들이 많다.
#떠날 곳을 간절히 찾다가 이곳에 왔다.
옥스퍼드 곳곳을 다니다 보니 옥스퍼드 대학교 이외에, 여러 영어 교육 기관들도 많이 알게 됐다. 옥스퍼드라는 도시 자체가 공부하기 좋다보니 여타 지역에서 어학 연수를 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 영어 교육 기관이 여럿 있는데 그 가운데 꽤 수준 있는 무료 영어 강좌도 간간히 열리고 있었다. 예를 들면 영어 선생님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자격증을 따는 코스가 있는데, 그들이 학생들을 상대로 교육 실습을 하는 영어 강좌가 무료로 열리는 식이다. 마침 연구실이 한적했던 1월 중순부터 2월 중순까지 한 달 동안 해당 강좌가 열리길래 등록했다. 부족한 영어도 늘리고, 옥스퍼드 대학교를 벗어나서 여러 친구들을 만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어떻게 알음알음 알고들 왔는지 수업에는 10여 명이 학생들이 모여있었다. 한 달 동안 수업을 듣다 보니, 같은 반 친구들과 여러 사는 얘기들을 많이 나누게 됐다. 내 마음을 가장 울린 사람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왔다는 파울라인이라는 친구였다. 25살, 앳된 얼굴에 늘 히잡을 쓰고 수업에 오는 데 영어 공부를 정말 공격적으로, 너무 열심히 했다. 줄을 치고, 단어를 여러번 쓰고, 중얼 중얼 외우고. 이런 모습은 여기 친구들에게서는 보기 힘든 모습인데, 그 친구는 정말 영어 공부를 그렇게 사정없이 열심히 했다. 영국에 온 지는 이제 2년째라는 영어도 사뭇 잘했다. 남편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오래 전에 실종됐단다. (하지만 그녀는 절대로 남편이 죽었다고 표현하지 않았다. 그냥 없어졌고, 연락이 안 된다고 표현했다.) 전쟁에 지친 고국을 떠나 5년 전에 아이 둘을 데리고 파키스탄으로 건너갔단다. 거기서 오랫 동안 난민 신청을 기다리고, 또 기다린 끝에 영국에 건너오고, 그리고 옥스퍼드로 거주지를 배정받기까지. 마음을 졸이며 이렇게 평화로운 나라에서 살날을 꿈꿔왔다고 했다. 5살, 3살. 어린 아들 딸의 사진을 보여주며 여기서 아이들을 잘 키우고, 영어를 잘 배워서 직장도 얻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 어제 집에 가서 애들한테 자랑했어. 나는 한국에서 온 기자 친구를 만났다고. 내가 언제 인생에서 기자를 만나보겠니! 옥스퍼드에 왔으니까 가능한 일이야.” 아이 둘을 낯선 나라에서 혼자 씩씩하게 키우는 모습이 정말 기특해 보였다. 수십년 째 전쟁 중인 고국을 떠나 비로소 안정을 찾은 그녀의 남은 삶을 응원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돌아가지 않을꺼야”
이런 난민들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만나는 친구들 가운데도 여럿, 절대로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이들을 종종 만난다. 간간히 아프가니스탄에서 온 방문학자들, 그리고 이란에서 온 친구들을 만나는 데, 앞으로의 계획을 물어보면 그들은 한결같이 대답한다. “돌아가지 않을 거야. 절대로.” 옥스퍼드 뉴커머스 클럽에서 만난 이란인 친구 모히와도 이런 저런 사는 얘기를 여러번 나누게 됐다. 본인은 스위스에서 석사를 하고, 이후 옥스퍼드대학교에서 포닥을 하러 온 남편을 따라 이곳에 오게 된 친구였다. 학부는 이란의 테헤란대학교에서 마쳤단다. 전공이 디자인 쪽이라 해당 공부를 계속 하고 싶은데, 여기서는 해당 공부를 할 기회가 마땅히 않고, 일을 하고 싶은데 일자리가 잘 구해지지 않아 걱정이 많아 보였다. 너희 나라에서는 가장 좋은 대학교를 나왔고, 공부도 외국에서 이렇게 많이 했고, 그러면 다시 돌아가서 잘 살 수 있지 않을까? 물었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도 같았다. “돌아가지 않겠다.” 경제 상황도 좋지 않고, 정치적으로도 불안정하고, 게다가 여자가 살기에는 너무 나쁜 사회라는 것이 돌아가기 싫은 이유였다. 어떻게 해서든 이곳에, 혹은 유럽에 남을 방법을 찾겠다고 다짐하는 그녀를 보며, 내 자신에게도 물어보게 됐다. 내 나라는 돌아가고 싶은 공동체인가? 돌아가야만 하니 돌아가는 것인가, 아니면 너무나 돌아가고 싶은 나라인가?
#나의 공동체를 생각한다… 영국에서 맞은 설 명절
여기 친구들이 “너는 이 공부 마치고 너희 나라에 돌아갈 거야?” 물으면 나는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해 왔다. “당연히 가야지. 회사에 복직해야 하니 당연히 돌아가야 하고, 그렇지 않아도 돌아가고 싶어. 내가 태어나고 자란 나라고, 내겐 가장 편한 곳이니까.” 그럴 때마다 한국에 있을 때는 깊이 생각해 보지 못했던 질문들을 여기서 종종 자신에게 던지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한국은 어떤 나라인가. 민족주의와 순혈주의에 갇히지 않돼, 내가 속한 공동체를 사랑하고 그 공동체를 위해 헌신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런 고민을 하던 중에 1월 말, 설 명절이 다가왔다. 여기서 이런 저런 학술 행사에는 참여했지만, 문화 행사 같은 것에 참여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내가 종종 나가는 옥스퍼드 뉴커머스클럽에서 동양인들의 음력설 ‘LUNAR NEW YEAR’를 맞아서, 한국인인 네가 한국의 설을 소개할 수 있는 무언가를 같이 공유해줬으면 좋겠다는 요청을 받았다. 같이 윳놀이를 하기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절을 하게 한 뒤 세뱃돈을 줄 수도 없고, 떡국을 같이 끓여 먹기도 쉽지 않고. 그래서 가장 쉬운 노래 가운데 하나인 ‘까치 까치 설날은’ 노래를 함께 부르고 율동도 가르쳐주기로 결정했다. 다 큰 성인들이 이렇게 유아틱한 동요를 잘 따라 하려나. 걱정이 무색하게도 가사를 알려주고 율동을 가르쳐주는 데, 다른 나라 친구들이 너무 신기해하고 재밌어하며 열심히 따라했다. “정말 너네 나라에서는 까치가 복을 불러오는 거니?” “너네 나라 사람들은 왜 인사를 할 때 고개를 맨날 숙여? 우리 눈에는 그게 너무 신기해. 절도 그런 인사의 한 종류인 거야?” 옥스퍼드 대학교 유니버시티 클럽 강당에서 함께 음력 설을 기억하며 춤을 추면서,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매력적인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동양적인 문화, 동양적인 생각이 여타 나라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낯설고 신기하면서도 흥미로운 것이로구나. 깨달았던 시간이었다.

#옥스브리지 한인 학술회 참여
이곳에 오기 전부터 이곳의 한인 공동체와 교류하는 것과 이 나라 사회로 더 깊숙하게 들어가는 것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좀 고민해 왔다. 이 부분은 개인 성향이나 가치 판단에 따라 다를 것 같은데, 각각의 장단점이 있는 만큼 균형을 잘 유지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기왕에 외국에 나왔으니 영국 사회에 최대한 가까이 가는 것에 좀더 중점을 둬왔다. 그러다보니 이런저런 한인들 모임에는 거의 참석하지 못해왔는데, 2월에는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학생들을 위한 연합 학술 행사가 열리는 것을 보고 마음을 먹고 참여하게 됐다.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대학교에는 각각 한인학생회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케임브리지에는 CUKS가 있고, (Cambridge University Korean Society, CUKS) 옥스퍼드 대학교에는 OUKS가 있다. (Oxford University Korea Society, OUKS) 이 단체들은 학부생, 석박사생, 연구원들이 함께 모여 정기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세미나를 열고, 세미나 이후 식사 자리도 마련해서 서로 간 친목을 돕는다. 학업 이후 귀국하면 한국에 옥스브리지 소사이어티라는 통합 동문회가 있어서, 간간히 함께 모여 송년회도 하고, 식사도 함께 한다. 이외에도 옥스퍼드에는 옥스퍼드 한인 학술회(Oxford Korean Academic Society, OKAS)가 있다. 이 모임은 학부생보다는 석박사생이나 연구원들을 중심으로 한 모임이고, 좀더 학술적인 교류를 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해마다 케임브리지 옥스퍼드 학생들이 함께 모여 상대방 대학 투어를 진행하고, 본인 연구에 대한 발표도 하고 행사가 열리는데 올해는 옥스퍼드에서 행사가 열리는 해였다. 발표 신청을 받는다는 공지를 보고, 지원을 했다. 박사 논문을 쓰는 과정도, 내가 소속된 연구실에서 진행하는 연구들도 참 녹록지 않은 요즘이기에, 말 잘 통하는 한국인들 앞에서 고민을 좀 나누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었다.
각 나라 이주 정책에 대한 고민, 유럽 각지의 극우 정당의 인기에 대한 분석, 그리고 기자로서 이제까지 느껴온 부족함과 한계, 영국 사회를 이해하는 것의 어려움, 아니 영국 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을 이해하는 것의 어려움을 최대한 진솔하게 공유했다. 그리고 많은 친구들이 내 일처럼 진지하게 들어주고, 조언도 해줬다. 한인 커뮤니티 속에서 따뜻함을 느꼈다. 그리고 여러모로 고마웠다. 다들 각자의 고민을 안고 여기에 와있는 것 같았다. 지금하고 있는 연구들의 의미. 공부를 하고 난 이후의 진로 등등. 학업 이후 고국에 돌아갈 것인가. 남을 것인가 하는 질문부터, 학문를 통해 무엇을 더 구하고 찾아야 하는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까지. 쉽지 않은 질문들을 함께 나눴다.

#무언가를 공유하고 가야 한다면…
내가 소속된 연구센터 COMPAS (center of migration policy and society) 에서는 매주 목요일 세미나를 한다. 오전에는 주로 박사과정생들이 그간 자기가 연구해 온 것들을 발표하고, 교수님들에게 신랄한 지적을 받는다. 오후에는 이곳 학생들 모두에게 개방하는 public 세미나를 연다. 나는 방문연구원이니 큰 부담은 가지지 않아도 되지만, 그래도 이곳에 온 이상, 한국에서 온 기자로서 뭔가를 내놓고 가야 한다는 (?) 무언의 압박은 계속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소속된 college와 연구실과 상의해서 다음 학기가 시작되는 5월, 목요일 public 세미나 시간의 하나를 배정받아 시사기획 창에서 만든 ‘나의 난민 너의 난민’ 프로그램 상영회 겸 간담회를 열기로 결정했다. 다행히 영어 자막 작업이 이미 되어있는 작품인지라, 상영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을 것 같다. 이주 정책에 대한 한국의 현실은 어떤지, 그리고 한국의 언론이 이것을 다루는 방식은 어떠한지. 얘기 나눠보는 자리가 될 것 같다. 이곳 사람들의 반응은 어떨까. 기대 반 걱정 반이다.

이 곳 친구들과 어떤 주제로 얘기를 나누든 “그래서, 그 문제에 대해 한국은 요즘 어때?” 질문을 받는다. 그리고 꼬리 질문이 뒤따른다. “그래서 너희 나라는 돌아가고 싶은 나라야?” 나는 누구이고, 내가 속한 공동체는 어떤 곳이었는지. 나는 대체 왜 여기에 와있고, 내가 공부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고, 내가 했던 기자 생활을 대체 무엇이었으며, 내가 앞으로 찾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이곳에서 더욱 진지하게 묻게 된다. 결국 어떠한 해답도 못 찾더라도, 고민하는 이 과정조차 의미가 있을 것이리라. 스스로 다독여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