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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에 휩싸인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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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에 휩싸인 영국

영국의 대형 슈퍼마켓 체인인 세인즈버리(Sainsbury)의 진열대가 텅 빈 것을 처음 봤을 때만해도 좀처럼 실감은 나지 않았다. 오히려 화장지며 파스타면 따위를 사재기하느라 여념이 없는 영국인들을 바라보며 묘한 우월감마저 느꼈던 터였다. 그리도 콧대 높은 척하더니 도대체 화장지는 어디에 쓰려고 그리도 사가는 것인지 내심 비웃기도 했다.

영국의 외식 물가는 잘 알려진 대로 높고, 그만한 돈 값도 못하지만, 장바구니 물가는 한국보다 낮고 식료품들의 품질도 꽤 괜찮은 편이다. 영국에서는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세인즈버리, 테스코(Tesco)같은 토종 유통 업체들과 이들의 시장을 무섭게 잠식해가고 있는 독일계 유통 업체들의 혈투가 계속된 지 오래다. 그래서 식품 매장을 어디에서든 쉽게 찾아볼 수 있고, 가격이나 품질 경쟁도 치열하다. 그러니 저러다가 말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흘 동안이나 윔블던의 마트 곳곳을 헤매고도 통조림 따위는 고사하고 달걀이나 우유, 고기와 같은 흔하디 흔한 신선 식품조차 구하지 못하게 되자 두려움이 엄습했다. 이러다가는 자칫 타지에서 가족을 굶길 수도 있겠구나.

인근에서 가장 큰 초대형 마트인 테스코 엑스트라 매장 안의 풍경은 그야말로 비현실적이었다. 그 넓디넓은 마트의 식품 매대가 종류를 가지지 않고 말 그대로 텅텅 비어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빈 매장을 누비며 그나마 남은 먹을 거리를 찾아 뭐든 일단 집어 담고 있었다. 그 동안 너무 안이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식량을 구하지 못한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다음날 아침 7시 40분쯤 독일계 마트 체인인 리들(Lidl)에 도착했다. 이미 매장 안은 사람들로 가득 찼고, 입구에는 수십 명이 줄을 서서 매장 안으로 들어갈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럴 때 일수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며 마음을 다잡았다. 아이들이 며칠 째 단백질 타령을 하고 있지 않은가. 제일 먼저 계란을 집고 그 다음은 고기다. 머리 속으로 동선을 정한 뒤 입장하자 마자 재빠르게 마지막 남은 계란과 돼지 목살을 획득하는데 성공했다. 한층 가벼워진 마음으로 야채 따위를 고르고 있을 때 바구니를 든 중년 남성이 나에게 계란이 어디에 있냐고 물어왔다. 나는 내심 뿌듯해하며 아마 없을 것이라고 대답해줬다.

저마다 커다란 카트를 가득 채운 탓에 계산대부터 매장까지 늘어선 줄은 쉽게 줄어들지 않았다. 길게 늘어선 줄 사이에서 한 백인 남성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보안요원이 그를 말리고 있었다. 줄을 서다가 뭔가 분통이 터진 듯했다. 보안요원의 제지에 ‘아이 돈 케어’를 반복해 외치고 있었다. 그러면서 자신은 사흘 동안이나 밥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며 지금 배고프다고 소리를 치는 것이었다. 줄을 선 뒤 내가 계산을 마치기 까지는 50분이 걸렸다. 그나마 다른 지역보다는 사정이 낫다는 런던 지역의 풍경이었다.

이렇게 공포가 급속히 퍼진 데에는 영국 정부의 안이한 초기 대처 탓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이탈리아 북부에서 코로나 환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던 2월20일 경은 영국의 하프텀(half-term) 방학 기간이었다. 주말을 끼고 10일 정도 되는 이 하프텀 방학 동안, 꽤 많은 영국의 학생들이 부모와 함께 이탈리아 북부로 스키 여행을 다녀 왔다. 이후 학교마다 환자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환자가 발생한 학교들은 잇따라 폐쇄됐다.

놀라운 것은 영국 정부의 대응이었다. 이탈리아 북부를 다녀왔어도 발열과 기침 등 의심되는 증상이 있을 경우에만 집에 있으라는 지침을 내린 것이었다. 결국 이탈리아 북부를 다녀온 많은 사람들이 버젓이 런던의 좁은 지하철을 타고 다녔고, 펍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다. 마스크를 쓰는 사람은 물론 찾아보기 어려웠다. 구할 수 없어서이기도 하겠지만 영국 정부는 마스크보다 손을 씻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후 알려진 대로 영국의 감염자 수는 가파르게 증가했다. 이런 상황에서 보리스 존슨 총리는 감염자수를 늘려 자연 면역을 강화하겠다며 국민들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각오를 하라고 말했다. 귀를 의심하게 하는 발언이었다.

실제로 감염자 수가 폭증하기 시작하자 영국의 의료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는 NHS(National Health Service)는 문자를 보내왔다. 코로나 증세가 있으면 절대 병원에 오지 말 것, 그리고 아주 위급한 경우가 아니라면 NHS의 번호 111로 전화도 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각자 알아서 조심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 현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 것이었다.

이처럼 부족한 영국의 의료 인프라를 감안하면 애초 대비를 좀 더 철저히 했어야 하지만, 영국 정부의 대처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안이했다. 보리스 존슨 총리는 상황이 악화되면 단계적으로 대응 수위를 높여갈 것이라고 했다. 생명을 지키고 NHS의 부담을 덜기 위해 집에 있으라는 말만 매일 반복했다. 이는 곧 상황은 더욱 악화될 것이고 이에 따라 봉쇄와 같은 강한 조치가 있을 것이라는 예고에 다름 아니었다.

이 같은 예고는 한편으로는 앞으로 닥칠 두려운 상황에 대비하려는 사재기와 같은 움직임으로 이어졌고 다른 한편으로는 본격적인 봉쇄 조치가 단행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즐기자는 분위기로 나타났다. 게다가 마침 춥고 비 내리는 긴긴 겨울이 끝나고 마침내 맑은 하늘이 드러나고 꽃이 만발한 참이었다. 도심에서 멀지 않은 공원이나 웨일즈 북부의 스노우도니아 같은 유명 관광지는 봉쇄 전 마지막 주말을 즐기려는 인파들로 넘쳐났다.

사태의 심각성을 뒤늦게 인지한 영국 정부는 결국 생필품을 사거나 하루 1회 운동을 제외한 외출은 금지하는 강력한 이동 금지령을 내렸지만 이미 늦은 조치였다. 감염자 수와 사망자수는 이 같은 조치를 비웃기라도 하듯 폭증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코로나 사태의 총 책임자와 실무 책임자인 총리와 보건부 장관이 감염되는 초유의 사태에까지 처하게 됐다. 상황은 이렇게 악화되고 있지만 이전에도 공급 부족이라는 문제를 늘 안고 있던 영국 의료시스템은 진정한 한계를 노출하고 있다. 만약 감염되더라도 환자는 그 누구의 도움 없이 각자의 집에서 스스로 견뎌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 것이 지금 영국이 처한 현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