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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위반 벌금 줄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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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교통범칙금, 일명 트래픽 티켓을 한 번 받고 나면 다른 운전자들이 차가 없는 도로에서도
정지신호를 철저하게 지키는 이유를 뼈저리게 깨닫게 됩니다. 별 것 아닌 위반에도 100달러 넘는
티켓이 날아오는 것은 예사고 주변 이야기를 들어보면 주차 위반에 300달러를 넘는 티켓을 받은 경우
도 있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방문학자로 1년간 지내며 티켓 한번 받지 않는 분들도 많다지만 저는 미국에서 운전한지
두달도 안 돼 그 악명 높은 범칙금 티켓을 받게 됐습니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제가 아닌 아내가
운전하다 받은 경우입니다. 시애틀 북쪽에 위치한 린우드 법정에서 날아온 편지에는 단속카메라에
찍힌 우리차의 사진과 124달러라는 무지막지한 벌금이 적혀 있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위반을 했기에
이렇게 큰 금액의 벌금이 나오나 깜짝 놀랐지만 나중에 들어보니 그 정도 액수면 양호한 편이더군요.


위반 내용은 사거리에서 우회전을 하면서 일단 정지를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되짚어보니 대형마트가
있는 린우드에 갔을 때 아내가 사거리에서 멈추지 않고 우회전하기에 제가 뒷자리에서 조심하라고
잔소리했던 기억이 났습니다.


미국에서 처음 운전을 하면 한국과 신호나 도로 체계가 미세하게 다른 경우가 많아 당황할 때가 많습
니다. 그중 한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혼동하는 것이 ‘사거리에서 정지 후 우회전’일 것입니다.
워싱턴주는 한국 면허증을 곧바로 미국 면허증으로 바꿔줘 편리하긴 했는데 세세한 교통법규를 공부할
기회가 없었던 것은 단점이더군요.


생각지도 않은 범칙금 티켓을 받고 멍하니 앉아있는데 아내가 편지에 뭔가를 적더니 다시 우편함에
넣더군요. 봉투에 벌금을 넣어 보냈냐고 물어보니 ‘억울해서 그 돈 다 못낸다’면서 ‘mitigation
hearing’(범칙금 감면 청문회) 신청했다고 합니다. 일종의 정상참작을 요청하는 약식 재판입니다.
범칙금을 받으면 곧바로 벌금을 낼 수 있고, mitigation hearing이나 contested hearing(이의제기
청문회)를 신청할 수 있습니다. mitigation hearing은 위반사항은 인정하지만 정황을 고려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고, contested hearing은 법정에서 위반여부를 싸워 가리는 것입니다. 이 경우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변호사나 증인을 대동할 수도 있습니다.


저희의 경우는 위반사항이 너무 명백하여 별로 억울할 건 없을 것 같고 설사 그렇다해도 과연 법정
에서 벌금을 감면해줄까 싶었는데 아내는 ‘특별히 바쁜 일도 없는데 법정에 한 번 가보자’고 하더
군요. 얼마후 법정에서 심리 기일이 적힌 편지가 왔고 날짜에 맞춰 린우드 법정에 갔습니다. 조금
일찍 도착해 앉아 있으니 같은 시간에 hearing이 예정된 사람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30명 안팎의 사람들이 모였고 간이 검문대를 통과해 법정에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왜 티켓을
받았는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판사가 들어오기를 기다렸습니다. 나이가 60대
가까이 보이는 판사가 들어오더군요. 그는 mitigation hearing에 대해 간단히 설명한 후 한 명씩
동영상을 확인한 후 즉결을 내렸습니다.


판사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20~30여명의 교통위반자를 판결하는 절차인만큼 진행순서는 간단합
니다. 판사가 이름을 부르면 자리에서 일어나 판사 앞에 섭니다. 동영상을 틀어 위반 사실을 확인합
니다. 판사가 부연설명을 하고 벌금을 새로 고지합니다. 옆자리에 앉은 비서가 새로운 고지서를 내줍
니다. 법정 밖에 나가 새로운 벌금을 냅니다. 대부분 판사 혼자 이야기하고 위반자는 감면된 벌금
고지서를 받고 ‘thank you’ 한마디만 하고 끝났습니다.


이날 불려온 교통위반 유형은 대략 세가지였습니다. 아내처럼 교차로에서 정지하지 않고 우회전했거나
스쿨존에서 속도를 낮추지 않았거나 황색등에서 적색등으로 신호가 바뀔 때 주행한 경우였습니다.
판사는 매번 동영상을 확인할 때마다 농담을 섞어가며 왜 그 같은 위반사항이 위험한지 설명했습니다.
택시운전자에게는 “프로가 왜 이러십니까? 그래도 벌금은 좀 감면해줄게요.”라거나, “상당히 급하
셨나보네요? 아무리 급해도 지킬 건 지켜야죠.” 하고 말하는 식입니다. 대부분 반액으로 줄어든 벌금
고지서를 들고 법정을 나갔습니다. 단 한명, 너무나 명백하게 적색등에서 속도를 줄이지 않고 주행한
한 여성에게는 판사가 농담 한마디 하지 않고 얼마나 위험한 행동인지 장황하게 설명한 후 벌금을 그대
로 다 내야 한다고 판결하더군요.


아내도 순서가 되자 판사 앞에 섰습니다. 판사가 동영상을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64달러로 벌금을 낮춰
줬습니다. 아내는 “시애틀에 온지 두달 밖에 안 됐고, 그날 린우드에서는 처음 운전한 것이라 길이
익숙하지 않았다’고 부연 설명을 했지만 판사는 “앞으로는 위반하지 말라”며 벌금을 더 낮춰주지는
않더군요.


밖에서 벌금을 내는데 한 여성이 “반나절을 허비하지만 그래도 벌금이 절반으로 줄어드니 올만하다.”
라고 말했습니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주 바쁘지 않은 경우 많은 사람들이 벌금을 줄이기 위해
mitigation hearing을 신청한다고 합니다. 또 contested hearing을 신청하는 경우도 많아서 전문 변호사
들도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벌금이 절반 가량 줄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적은 금액은 아닙니다.
차가 없어도 정지 사인만 보면 딱딱 멈추는 미국인들, 강력한 규제가 만들어낸 안전습관인지도 모르겠
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