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 초상화 갤러리 “트럼프는 어디에”
매번 코로나19를 빼고 얘기를 시작할 수가 없다. 이 글을 쓰는 6월13일(현지시각) 미국의 코로나19 확진자 수가 2%대로 떨어졌다(5월28일~6월4일 존스홉킨스대 통계)는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호언장담했던 집단 면역 형성 소식은 아직이지만, 평균 13%대 확진율에 방콕만 해야 했던 우울한 겨울을 생각하니, 정말이지 감격스러울 정도다.
코로나19 백신 접종률이 높아지고 확진자 수가 줄어들면서, 문을 닫았던 박물관과 미술관도 서서히 관객들을 받기 시작했다. 마스크 착용, 사회적 거리 두기를 위한 예약제 인원 제한을 시행하고 있긴 하지만 모처럼 ‘문화 생활’하러 나서는 길, 코로나19 팬데믹 탈출도 머지 않았다는 생각에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지난달 중순, 워싱턴 D.C. 방문 길, 이제 막 문을 열기 시작한 박물관들을 찾았다. ‘국립 초상화 갤러리(National Portrait Gallery)’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스미스소니언 아메리칸 아트 뮤지엄’과 연결돼 있는 엄청난 규모에 하루 일정으로는 전시를 제대로 볼 수 없겠다 싶을 정도였다.
‘예술은 얼마나 정치적인가. 또 예술은 얼마나 긴밀하게 시대와 호흡하는가.’ 두 곳을 돌면서 머릿속에서 이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내가 집중해 돌아봤던 ‘대통령의 초상(Presidential Portrait)’이라는 전시 주제가 주는 피할 수 없는 숙명도 있겠지만, 두 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각종 전시들은, 전시 주제 선정부터 작품을 전시하는 방식(작품의 크기, 배치 위치, 작품 설명)을 통해, 적극적으로 시대를 말하고 주장을 펼치고 있었다. 전대미문의 코로나19 위기로 전 세계 경제가 휘청거려 각국 정부가 수많은 자금을 쏟아붓고 있는 이때, 스미스소니언 아메리칸 아트 뮤지엄이 1930년대 대공황 시기 뉴딜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정부가 예술가들을 어떻게 지원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을 대거 전시(Experience America)하고 있는 게 대표적이었다. 또 국립 초상화 갤러리에선 페미니즘의 부상을 입증(?)하는 듯한 전시(Her Story: A Century of Women Writers)가 한창이었다.
대통령들의 얼굴을 모아둔 ‘대통령의 초상’ 전시실은 그래서 더 관심이 갔다. 미국 사람들이 그들의 대통령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궁금했고, 그 평가를 표현하는 방식이 궁금했다. 누가 잘 했고, 누가 못 했는지에 대한 평가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마련이니까.
이곳에 가기 전엔 몰랐는데, 대통령의 초상 콜렉션은 국립초상화갤러리의 자랑. 백악관 외에 미국 대통령들의 초상을 전부 소장하고 있는 곳은 이곳이 유일하다고 (갤러리 누리집이) 그러더라. 전시관은 연대기 형식을 기본으로 대통령제의 수립(1789~1829)-민주주의와 확장기(1829~1861)-연방의 위기(1861~1901)-사회 개혁기(1901~1933)-세계평화 협상 시기(1933~1989)-현대의 대통령들(1989~2017)이란 6개의 방으로 구성돼 관람객들을 맞는다.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부터 45대 도널드 트럼프까지 40명이 넘는 미국 대통령의 초상을 보여주는 이 전시는 그 자체로, 대중의 기억에 각인된 대통령은 사실 이들 중 몇 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서늘한 진실을 보여준다. 공식 초상 ‘사진’ 뿐만 아니라 유화나 그래피티 작품 등으로 된 초상이 전시되기도 했고, 초상화 크기는 물론 작품 숫자도 대통령별로 달랐는데, 그들의 공과는 물론 대중적 인기 등 평가가 반영되지 않았다곤 할 수 없을 터다. 작품 수와 크기, 배치 등에서 조지 워싱턴과 루즈벨트 프랭클린, 존 F. 케네디, 버락 오바마 초상 전시에 조금 더 많이 공을 들어간 게 한 눈으로도 확인된다. 우리나라처럼 이념 대결(으응?)이 극심한 나라에서였다면, ‘아니 왜 트럼프 초상보다 오바마 초상 크기가 큰 거야? 트럼프 사진은 꼴랑 한 장 뿐인데 왜 케네디는 두 장이야? 논란부터 일지 않았을까’ 잠깐 생각…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작품 배치 위치였다. 세계 평화 협상 시기 대통령들을 다룬 5실과 ‘현대의 대통령’을 다룬 6실이 각각 좌우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 두 관을 가르는 입구 정면 정 가운데를 차지한 건 2008년 대선 당시 버락 오바마 신드롬을 불러일으키는데 일조한 그래피티 포스터 이미지(셰퍼드 페어리 작)였다. 오바마 대통령 오른 편 벽에는 모자이크로 만든 빌 클린턴의 초상을 중심으로 아버지 부시와 아들 부시가 같은 크기로 전시돼 있었다.
이런 모습이다. 오바마 초상 오른쪽으로 조지 부시 부자와 빌 클린턴의 초상이 있다.
그러면 트럼프는 어딨냐고?
그렇다면 조 바이든 현 대통령 취임 전까지 대통령을 지낸 도널드 트럼프는 어디에 있을까. 정면에서 바라본 구도 안에 트럼프는 없었다. 트럼프 초상은 오바마 초상이 걸린 벽 뒤편에 걸려 있었다. ‘정의를 위한 투쟁’이란 다른 전시관으로 연결되는 위치에 있었는데, 이 전시관이 하필 일시 폐관 상태라, 깜빡 트럼프 초상을 놓치고 지나칠 뻔했다.
연대기에 따른 자연스러운 구성인 듯 보이긴 하지만, 트럼프의 초상을 숨겨놓은 것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트럼프 초상의 크기는 오바마 초상의 3분의 1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작품의 크기가 반드시 중요도와 일치하는 건 아니지만 ‘큐레이터도 트럼프의 존재를 어지간히 지우고 싶었나 보다’ 생각하며 낄낄 웃었다.
김정은과의 세기의 대결로 희화화된 트럼프.
정말 그런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건, 백악관 앞 기념품 가게에 갔을 때였다. 직전 대통령인데도 불구하고, 그 흔한 트럼프 피규어가 ‘잘’ 보이지 않았다. 고 루스베이더 긴즈버그 연방대법관과 앤서니 파우치 미국 국립 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장 피규어 박스도 진열대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트럼프 피규어는 전시용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앗, 하나! ‘세기의 대결’이란 타이틀을 달고 로켓맨 김정은과 박스 안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제품은 있었다. 트럼프의 팬보다는 안티팬들이 더 좋아할 만한 기념품 같았다.
대통령의 초상 아래 쪽인 적힌 짤막한 안내 글들도 인상적이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오바마에 대해선 2009년 흑인 첫 대통령이 됐다는 점을 꼽으며, 2008년 대선 당시 대공황 위후 최악의 금융위기를 겪고 있는 미국에 희망의 메시지를 던졌고, 재임 기간 동안 국내적으론 이전까지 보험에 가입되지 않았던 수백만명에게 건강보험 가입 혜택을 주는 ‘오바마 케어 액트(Affordabale Care Act)’를 발효시켰다는 점을 공으로 평가했다. 대외적으론 중동 내 주둔 미군 감축을 지휘했지만 드론 등을 통한 공습 확대 등이 이뤄져 논란이 됐다는 점도 같이 짚었다. 아울러 오사마 빈 라덴 사살 작전은 성공했지만 관타나모 수용소 폐지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어떤 의미로든 ‘문제적’이란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은 트럼프에 대해선, 미국 내 포퓰리즘 분위기를 파고들어 대통령에 선출됐다는 점이 첫 줄을 장식했다. 전통적 의미의 정치에 반대했고, ‘아메리카 퍼스트’ 정책을 밀어붙였다는 설명이 뒤따른다. 아울러 재임 기간 연방대법관을 포함해 가장 많은 연방 판사들을 임명했으며, 이스라엘과 아랍에미리트(UAE)가 외교 관계를 정상화하는 ‘에이브러햄 협정’을 체결할 수 있도록 중재하는 한편, 강력한 이민 제한 및 정부 규제 축소에 나섰다는 점도 기록했다. 2020년 2월에 역대 최저치인 3.5%의 실업률을 기록했다는 점과 함께 재임 동안 2번 탄핵됐으나 상원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는 점도 함께 적혔다. 아울러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고 경제 위기를 불러온 코로나19가 재선 캠페인 핵심 이슈로 부상했고, (그 바람에) 전에 없이 많은 미국인들이 투표에 참여한 2020년 대선에서 바이든이 승리했다고 썼다. 또 여기서 그치지 않고, 트럼프가 대선 결과에 승복하지 않았고, 그의 지지자 중 일부가 2021년 1월6일 미 의회를 공격했다는 점까지도 담아냈다.
문득 이명박 정부 시절이던 2015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전시실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중화학 공업 중심으로 산업 구조를 변경시키기 위해(!) 유신을 선포했다’는 설명을 붙여 논란이 됐다고 기사 썼던 기억이 난다. ‘유신 미화’ 논란처럼 비칠 소지가 다분히 있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설명에 비해, 미국 국립 초상화 갤러리의 대통령의 초상 전시는 대체로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중립적’으로 전달하려고 애쓴 듯 보였다. 하지만 누군가에겐 사진 밑에 적힐 몇 줄 ‘사실’의 선택조차도 정치적이라고 비쳐 질 수 있을 터. 트럼프 지지자들이 이 전시를 보면 뭐라고 할지 궁금했다.
P.S. 대통령의 초상 전시에서 인상 깊게 남은 것 중 하나는 케네디의 초상이었다. 미국인들의 영원한 스타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경우, 일레인 드 쿠닝이 그린 유화 외에 (유일하게) 퍼스트 레이디인 재클린과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 있는 것도 흥미로웠다. ‘케네디의 인기에 재키가 참 지대한 영향을 끼치긴 했구나’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넷플릭스서 본 에 재키의 대중적 인기를 케네디가 질투했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참 그럴 만도 했겠다 싶어 웃음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