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LG상남언론재단 지원으로 2024년 9월부터 2025년 8월까지 영국 런던에서 연수중인 매일경제신문 이유섭 차장입니다. 이번 연수기에서는 국제기구 근무경험을 다뤄보려합니다.
해외 연수지를 정하는 방법은 크게 3가지로 나뉘는 것 같습니다. 국내 언론인들이 앞서 다녀온 연수지와 기관에 지원하기, 국가와 도시를 먼저 정한 뒤 초청해줄(비자를 발급해줄) 기관을 물색하기 그리고 기관을 먼저 정한 뒤 해당 기관이 있는 도시로 가기입니다. 첫 번째 케이스가 가장 많을 것이고, 저는 세 번째 케이스에 해당됩니다.
저는 현재 유럽부흥개발은행(EBRD·European Bank for Reconstruction and Development)에서 1년 계약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유럽개발은행 본사는 영국 런던의 새로운 금융 중심지인 카나리와프(Canary Wharf)에 있습니다. 통일독일의 체제전환 지원을 위해 1991년 설립된 EBRD는 총재 자리를 독일과 프랑스가 번갈아가며 맡는 대신 본사를 런던에 두기로 했다고 합니다. 초대 총재는 프랑스 출신의 세계적 석학인 자크 아탈리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영국인이 총재 자리를 맡기도 했고, 현재는 프랑스 재무관료 출신이자 파리클럽 의장 등을 역임한 오딜 르노-바소가 총재입니다. 4년 임기를 마친 뒤 올해 연임이 확정됐습니다.
저는 경제부에서 근무하던 지난 2019년 11월, 인도계 영국인인 수마 차크라바르티 전 EBRD 총재를 서울에서 인터뷰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EBRD가 하는 일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됐고, 계속 인연을 이어온 끝에 1년 계약직 ‘컨설턴트’로 근무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됐습니다. 제가 근무 중인 부서는 체제전환 효과를 분석하는 임팩트(IMPACT) 팀입니다.
국제기구에서 근무하게 된 배경과 EBRD에 대한 소개는 이정도로 하고, 이번 연수기에서는 국제기구 근무환경과 조직에 대한 지난 몇 개월간의 관찰결과를 공유하도록 하겠습니다.
자유 근무환경···관리자조차 런던서 2주 피렌체서 2주
EBRD 근무환경의 가장 큰 특징은 사무실 근무와 재택 등 원격근무를 섞은 개념인 ‘하이브리드 근무 시스템’입니다. 코로나를 겪으면서 완벽하게 정착된 하이브리드 근무의 장점을 직책에 상관없이 모든 직원들이 누리고 있음을 EBRD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소속된 임팩트 팀의 이탈리아인 디렉터(부문장)는 런던과 피렌체를 2주씩 번갈아 오가며 근무하고 있습니다. 자녀 교육문제 때문에 집이 피렌체에 있다고 합니다. 관리자급인 어소시에이트 디렉터(AD)인 저희 팀장은 보통 일주일에 두 번, 많아야 세 번 사무실에 나옵니다.
참고로 저는 저희 팀장과 팀즈(Teams)로 첫 인사를 나눴고, 그 후 몇 번 사무실에 마주치긴 했지만, 아직까지도 대면인사를 나눈 적은 없습니다. 이후에도 팀즈 회의에서는 업무관련 이야기를 나누지만, 아직 실제로 만나서 대화를 나눈 적은 없습니다. 제가 연수를 마치고 돌아갈 때조차 팀즈로 굿바이 인사를 나눈다한들 전혀 이상할 게 없는 게 이곳의 업무환경입니다.
그러다보니 한국인 입장에서는 황당한 일을 겪기도 합니다. EBRD와의 미팅을 위해 서울에서 런던까지 비행기를 타고 15시간 가까이를 날아왔는데 정작 미팅을 팀즈로 하게 되는 황당한 경우도 실제로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다소 극단적인 사례일겁니다. 한국인 입장에서는 엄청난 무례지만, EBRD 직원 입장에서는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일입니다. EBRD와 회의를 하게 될 경우, 대면인지 비대면인지 하이브리드인지 여부를 반드시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직원들이 화~목요일 사이에 2~3번 출근합니다. 그러다보니 월요일과 금요일은 건물이 매우 한산합니다. 특히 금요일에는 식당도 절반만, 그것도 셀프서비스로 운영할 만큼 건물이 텅 비어있습니다.
사무실 자리는 자유석입니다. 방이 배정되는 건 임원급인 Associate Director(AD)부터입니다. 그러니 한국 회사의 국장급이라 할 수 있는 Director도 자리를 애플리케이션으로 예약해 잡아야 합니다. 책상은 큰 편이고 자리마다 큰 모니터가 설치돼있어, 노트북을 연결해서 사용합니다. 모든 책상은 높낮이 조절이 가능해 서서 일을 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정직원 되면 월급 1000만원···1800만원 상당 출산비용 지원도
EBRD내에서의 저의 직급은 ‘컨설턴트’입니다. 계약직 직원 중 가장 낮은 단계를 생각하면 되고, 컨설턴트 보다 아래에는 ‘인턴’만 있습니다. 저 같은 임시직이나, 해외에서 파견된 직원들을 제외한 일반 계약직(애널리스트)은 또 23개월 short-term과 24개월 Fixed-term으로 구분됩니다. 24개월 계약직은 일종의 무기계약직 같은 것으로 1개월 차이지만 대우는 크게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컨설턴트는 임금수준도 낮고 국제기구 근무 직원이 누릴 수 있는 면세혜택을 볼 수 없지만, 23개월 계약직으로만 전환돼도 세금을 내지 않습니다. 23개월 계약직 직원 연봉이 4만6000파운드 (약 8200만원) 정도 되는데, 여기에서 한 푼도 세금으로 떼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24개월 계약직이 되면 4만6000파운드에 3만1280파운드(5500만원) 상당의 보너스와 연금혜택이 추가로 주어집니다.
여기에서 정직원이 되면 어소시에이트(Associate)가 되는 것이고, 이어 Principal1, Principal2, Associate Director(AD), Director(ED), Managing Director(MD), Vice President(VP), President 순입니다. Principal1 정도가 되면 순수 월급만 5500파운드(약 1000만원) 정도 됩니다. 국제기구라서 사실상 세금을 안 떼니 ‘세후’ 개념이라는 것도 없습니다.
직급체계는 회사마다 다르기 때문에 유의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한국에서 가장 헷갈려하는 부분이 바로 ‘Vice President(VP)’입니다. 한국에서는 ‘부사장’으로 번역되고, EBRD의 경우 그게 적절한 번역이지만, 다른 회사, 특히 금융기관의 경우에는 오역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런던에 있는 프랑스 투자은행인 BNP파리바의 경우, 애널리스트-어소시에이트-Vice President-AD-디렉터(ED)-MD 순입니다. BNP파리바에서 VC란 EBRD의 Principal 정도의 직급이 되는 거죠.
국제기구다보니 EBRD는 다른 금융기관에 비해 연봉수준이 높지 않은 대신 복지혜택이 많은 편입니다. 앞서 언급한 완전유연근무제가 대표적이고, 눈치 안 보고 길게 휴가 쓰는 문화도 정착돼있습니다. 덕분에 저도 2025년 초에 2주간 스페인으로 휴가를 다녀왔습니다.
출산휴가는 여성의 경우 30주이며, 직급 등에 따라 최대 22주까지 월급이 지급됩니다. 남성의 경우 유급 10주 휴가가 주어집니다. 아이를 입양한 경우에도 동일한 혜택이 주어집니다. 또 EBRD 정직원이 되면 영국 왕실이 이용하는 것으로 알려진 포틀랜드 병원(Portland Hospital)에서 아이를 출산하고 비용을 전액 지원받게 됩니다. 포틀랜드병원은 여성과 아동을 대상으로 한 사립병원입니다. 출산수술의 경우, 약 1만 파운드(약 1800만원)의 비용이 들어가는데 이를 모두 EBRD가 내주는 겁니다. EBRD 동료가 출산을 해서 직접 가볼 기회가 있었는데, 1인실을 사용한다는 것 외에는 한국의 일반 종합병원과 큰 차이가 없어 보였습니다.
2년 뒤 돌아오면 퇴사도 OK
EBRD가 자랑하는 근무유연성 관련 제도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것 중 하나가 ‘퇴사 2년 후 복직 허용’ 제도입니다. 예를 들어 EBRD 직원이 미국 워싱턴에 있는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됐을 경우, 일단 퇴사를 하더라도 2년 후 돌아오기만 한다면 무조건 복직을 허용하는 제도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퇴사경험이 있는 직원이 없는 직원보다 오히려 더 능력을 인정받고 승진도 빠르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관리자나 임원이 되기 위해서는 국제개발은행 근무 경험을 쌓고 오는 게 유리하다고 합니다.
런던의 고물가에 시달리는 연수자 입장에서 가장 크게 다가오는 복지는 바로 본사 꼭대기인 24층에 있는 직원식당입니다. 매일 바뀌는 스페셜 메뉴 등 각종 요리와 샐러드바, 디저트, 과일착즙주스 등에 이르기까지 매우 맛있고 수준 높은 음식을 취향에 따라 골라서 먹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격이 매우 저렴해 한산한 금요일에는 아내와 아이를 초대해 함께 식사를 즐기기도 했습니다. 템스강이 내려다보이는 멋진 풍경은 덤입니다.
EBRD 근무 韓 직원수 40여명…지분율 8배 많은 日은 10여명
EBRD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직원 수는 40여명입니다. 기획재정부와 금융위원회 등 정부를 비롯해 한국거래소, 금융결제원, 한국자산관리공사, 한국증권금융, 서울보증보험 등 여러 공공금융기관에서도 EBRD에 파견을 나와 있습니다. 근무기간은 기관에 따라 1~3년으로 상이합니다. 그밖에 한국 정부에서 파견한 2년 계약직 국제기구 초급전문가(Junior Professional Officer·JPO)와 계약직, 정규직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인 직원들이 활약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한국 정부가 보유한 EBRD 지분율이 1%인데, 지분율이 8%에 달하는 일본의 경우 자국 직원 수가 10여명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말 순수하게 EBRD 돈을 받는 정직원 수는 한국도 10여명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정부 파견직과 JPO를 비롯한 다수의 계약직 월급이 사실은 한국 정부의 예산이기 때문입니다. 또 JPO의 경우, 2년 근무 후 정규직 전환비율이 높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부가 강조하는 것처럼 청년 인재들의 국제기구 진출 ‘첫걸음’ 정도만 지원을 해주는 것이지, 이후부터는 각자가 알아서 생존을 해야 합니다. 한국인으로서 EBRD 내에서 생존을 하려면, 처음 취업을 할 때는 한국 정부 예산의 덕을 보더라도, 2년 내 한국과 무관한 업무를 할 수 있을 만큼 스스로의 능력을 업그레이드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