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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돈, 남은 돈, 숨은 돈, 돌려 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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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돈

동네에서 마트를 갔다. 한국에서도 그랬지만, 미국에서도 뭐라도 싸게 팔면 마법처럼 발길이 간다. 먹고 싶은 걸 먹는 게 아니라, 세일하는 걸 먹는다. 그날의 메뉴는 나의 뇌가 아닌 마트의 마케팅 담당자가 정한다. 그날은 7달러짜리 조각 케이크 2개를 12달러에 판다고 했다. 2달러 할인. 그럼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나 보다. 아이 엄마는 케이크 2개를 들고 셀프 계산대로 향한다. 그런데,

케이크 바코드를 찍으니 할인 적용이 안 된다. 2달러 싸다고 해서 들고 온 건데, 포기할 수 없다. 직원 계산대로 향한다. 바코드 오류인가, 역시 2달러 할인이 안 된다. “이거 2개에 12달러 적혀 있었어.” 짧은 영어로 호소한다. 미국 직원은 어떻게 대처했을까? 케이크 1개만 계산하고, 1개는 그냥 주더라. “그냥 가져가!” 2달러 할인이 순식간에 7달러 할인이 됐다. 직원은 시스템 오류엔 관심이 없었다. 마트 사장님의 돈으로 문제를 해결할 뿐. 남의 돈으로, 생색은 자기가 낸다.

호의를 베푸는데, 자기 돈은 안 쓴다. 지난해 크리스마스 때도 그랬다. 플로리다주 올랜도의 한 호텔에서 체크인을 하던 와이프가 멀리서 함박웃음을 짓는 게 보인다. 왜 그래? 물었더니, 주차비를 면제 받았단다. “크리스마스 선물이래!” 호텔 주차비는 1박에 18달러, 우리는 4박이라 주차비만 72달러에 달했다. 10만 원 넘는 선물. 손님이야 깜짝 선물에 기쁘지만, 호텔 사장님은 이런 크리스마스 선물을 알고 계실까. 좋게 말하면 직원 재량이 크고, 나쁘게 말하면 자기들 멋대로다.

남은 돈

그놈의 기프트카드. 이름은 선물 카드지만, 본인이 직접 쓰려고 사는 경우가 많다. 할인해서 팔기 때문이다. 100달러짜리를 80달러, 90달러에 파는 식이다. 미국 대형 마트에 가면 정말 다양한 업체의 실물 기프트카드를 구입할 수 있다. 최근 코스트코에서는 100달러짜리 서브웨이 기프트카드를 60달러에 살 수 있다. 이걸 사면 외식도 내가 먹고 싶은 것보다는, ‘기카’로 싸게 먹을 수 있는 것을 먹게 되는 셈이다. 서브웨이 샌드위치 14만 원어치. 가능할까? 그럼 절약인 걸까?

그럴 수도, 아닐 수도. 늘 남은 돈, 잔액이 문제다. 소주 따르다 보면, 마지막 잔을 가득 채우지 못해 ‘한 병 더’ 외치는 식이다. 기카도 쓰다 보면 찝찝하게 잔액이 남는다. 디즈니를 갔다 왔는데, 잔액 쓰러 디즈니 또 가야 되나? 우리 부부는 지금 그러고 있다. 이곳 노스캐롤라이나에는 디즈니 기프트카드를 사용할 수 있는 오프라인 매장이 하나도 없다. 기카를 처음엔 싸게 샀지만, 잔액을 쓰려면 10시간을 운전해 올랜도에 또 가야 한다. 가면 잔액만 쓸까? 더 쓰겠지. 디즈니의 간단한 상술에 알고도 말려든 것 같다.

숨은 돈

미국에선 숨은 돈이 많다. 눈에 보이는 돈이 전부가 아니다. 크루즈 상품을 예약할 때도 그렇다. 소비자에게 처음 노출되는 가격은 미끼일 뿐이다. 한 크루즈 업체의 경우 ‘온보드 크레딧(ONBOARD CREDIT)’을 운영하는데, 이건 크루즈에 타면 현금처럼 쓸 수 있는 돈이다. 소비자가 온보드 크레딧을 많이 받으면 그만큼 크루즈를 저렴하게 예약하는 셈이다. 결국 내가 싸게 가는 건지, 비싸게 가는 건지 알려면, 온보드 크레딧이 얼마인지 알아야 한다. 그런데,

답답한 노릇이다. 크루즈 선사 공식 홈페이지에서도 온보드 크레딧이 얼마인지 알기 위해선 결제 직전 단계까지 가야만 한다. 결국 이거 저거 가격 비교를 위해선, 전부 다 결제 직전까지 클릭을 하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정보 불평등이다. 최저가를 원하면 고통을 감내하게 만들어놨다. 선사 공홈이 아닌 여행사 사이트에서 온보드 크레딧은 더욱 불투명하다. 꼭꼭 숨겨놔서 대체 얼마인지 알 수가 없다. 최종 결제 뒤에야 메일이 오면서 ‘너의 온보드 크레딧은 얼마야’라고 알려준다.

선사는 이렇게 고객에게 지급하는 숨은 돈을 조절해 마케팅에 써먹는다. 최저가, 파격적인 할인! 이라고 해놓고 뒤에선 온보드 크레딧을 슬쩍 줄이는 식이다. 고객은 엄청 싸게 예약했다고 좋아할 수 있지만, 실제로 받은 크레딧은 얼마 안 된다. 조삼모사다. 역대급 할인 소식에 ‘난 비싸게 예약했구나’, 속이 쓰려서 선사에 항의전화를 하면 ‘온보드 크레딧 많이 받으신 거예요. 사실 똑같아요’라고 한다. 크루즈 손님을 끌어 모으려면 가격을 계속 흔들어야 하고, 손님 모두를 만족시키기 위해 돈을 숨겨놓는다.

돌려 돈

어떤 할아버지가 과장 좀 보태, 6.25 때부터 쓰던 것처럼 보이는 청소기를 코스트코에 갖고 갔다고 한다. 이유가 놀랍다. 반품하고 돈을 돌려 달라고 하려고. 나도 6.25 때부터 쓴 것은 아니지만, 쓰던 제품을 반품한 적 있다. 식기세척기 린스 뚜껑을 열어서 한 번 썼다가 코스트코에 반품하러 갔다. 그래도 뜯은 건데, 반품 받아줄까? 속으론 조마조마, 겉으론 당당하게 환불을 요구했다. 직원은 왜 반품하는지 묻는다. “린스 안 써도 별 차이 없는 것 같아”라고 했다. 직원은 뭐라고 했을까?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게 끝이었다. 더 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환불. 코스트코 환불 규정에 따르면, 다이아몬드와 담배, 배터리 등 환불에 일부 예외 품목이 정해져 있을 뿐이다. 그러니 집에서 쓰던 청소기를 가져가고, 개봉한 린스를 가져가는 것이다. 코스트코가 유독 너그러운 것이 아니다. 아마존 환불은 더 간단하다. 구입한 제품을 앱에서 환불 클릭하고, 포장할 필요도 없이 동네 UPS에 가져가면 끝. 월마트, 타겟도 환불이 넘쳐난다. 소비자들에겐 천국일까? 꼭 그렇지도 않은 것이,

내가 산 물건이 누군가 반품한 제품일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있는 것이다. 마트에서 사 온 가습기를 처음 개봉하는데 뭔가 쎄한 느낌이 들었다. 박스를 재포장 한 것 같았다. 가습기를 꺼냈더니 역시, 매뉴얼도 없고 물통 안쪽에는 물까지 묻어 있었다. 심지어 제품을 오래 썼을 때 생기는 하얀 가루까지 가습기 부품에 묻어 있었다. 이게 새 제품이라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짜증을 참고 다시 환불하러 간다. 직원은 미안하다 사과 한 마디 없이, 새 거 다시 가져가라고 사무적으로 답한다. ‘저걸 또 포장해서 팔겠지?’ 미국은 소비자들끼리 반품 폭탄 돌리기를 하는 것 같다. 내일은 또 어떤 돈 얘기가 이어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