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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땅, 아이들에게도 시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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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하루 종일 레고 장난감만 생각했어.”


미국 나이로 다섯 살인 둘째 아들(화영)이 개학 첫날 스쿨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내뱉은 말이다. 그리고
얼마나 급했던지 바지춤을 붙잡고 집 화장실로 뛰어갔다. 학교에서 한 번도 화장실을 가지 않았다고 한
다. 아침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내리 7시간을 참은 것이다. 전날 화장실과 물, 두 가지 생존 단어를 부
랴부랴 가르쳤지만, 자존심 강한 녀석은 서툰 단어를 말하기보다 참는 쪽을 택한 듯했다.


둘째 날도, 셋째 날도 화영이는 유치원에서 온종일 한마디 말도 않고 혼자 상상놀이를 하다오기를 반복
했다. 그나마 아침마다 엄마가 싸주는 간식과 도시락이 유일한 위안인 듯 보였다.
 


개학 첫 날, 아이들이 스쿨버스를 타고 있다. 미국에서는 학생들의 등하굣길에 부모의 배웅은 의무화
돼 있다.


그러기를 한 달. 아들은 불쑥 영어가 우리말처럼 들린다고 했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벌써 귀가
트였나?’ 반색하며 물었더니 그게 아니었다. 예전에 한 개그맨이 셀린 디옹의 노래 ‘All by myself’를
‘오빠 만세’로 열심히 불렀던 것처럼, 영어가 그렇게 들린다는 얘기였다. 그러면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
는 팝송에 멋대로 한글 가사를 붙여 따라 불렀다. 그래도 혼자만의 상상의 세계에서 빠져 나와 바깥으로
귀를 연 것만 해도 어디인가. 이제는 가끔 집에 와서 친구들 이야기도 꺼내고, 유치원에서 배운 내용도
말하기 시작해 미국 생활에 슬슬 시동을 거는가 싶었다.


두 달째. 하루는 아들이 스쿨버스에서 맨몸으로 내렸다. 책가방을 버스에 두고 왔나 싶어 찾았지만 없었
다. 자기는 분명 학교에서 가방을 메고 버스에 탔는데, 없어졌다고 한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장난감 놀이를 했다. 자기 물건 하나라도 없어지는 날이면, 온종일 징징거리며 찾을 때까지 난리 치던
녀석이 가방이 통째 사라졌는데도 가만히 있는다? 분위기가 이상해 슬쩍 물었다.


“화영아, 가방 없어졌는데도 괜찮아?”
“응, 가방 없으면 학교 안 가도 되잖아”


다음날 아들과 함께 학교에 갔더니, 주인 잃은 가방이 덩그러니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10월 하순 가을 소풍날. 잔뜩 들떠 있는 아들과 달리 내 발걸음은 무거웠다. 소풍 때 자원봉사자를 구한
다는 가정통신문이 유치원에서 수 차례 왔던 터였다. 아이를 돌봐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을 샤프롱(chape
ron)이라고 하는데, 한 반에 27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교사 2명이 다돌볼 수 없어 학부모들에게 샤프롱이
되길 요청한 것이다. 봉사와 기부가 일상화된 미국에서는 학부모들도 이런 자원봉사 요청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한국에서 직장에 다닌다는 핑계로 두 아들의 학교와 유치원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은 나에게
자원봉사 요청은 엄청난 부담이 됐다. 하지만 영어가 서툰 화영이가 소풍가서 힘들어할까 봐 선생님이
직접 SOS를 쳤기에 어쩔 수 없이 우리 부부는 소풍 길을 따라 나섰다. 소풍 장소는 집에서 30분 가량 떨
어진 한 농장. 우리 부부는 화영이를 직접 데리고 그곳까지 갔다. 호박을 주제로 조성된 대형 농장 겸
놀이공간이다.
 


농장에서의 놀이일정이 끝나면 아이들은 호박 하나를 골라 집으로 가지고 갈 수 있다. 판매용 호박이
전시 돼 있다.


막상 가서 보니 샤프롱 학부모들에게 아이들을 3~4명씩 배치해 그날 하루 함께 어울려 다니며 놀이기구
도 타고, 점심도 같이 먹도록 프로그램이 짜져 있었다. 우리에게 배정된 아이는 달랑 우리 아들 한 명
뿐이었다. 선생님의 배려였겠지만 아들은 그 덕에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다녀야 했다. 다른
모둠에 끼어볼까 따라다녀 보기도 하고 아들의 등을 떼밀며 친구들 사이로 밀어 넣기도 했다.


하지만 쭈뼛쭈뼛하며 잔뜩 주눅이 든 아들에게 같은 반 친구들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학부모들도 자기
아이들 챙기기에 바빠 낯선 이방인 꼬마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남편은 아들이 투명인간이 된 듯
보였다고 했다. 나 역시 내색은 못했지만 속으로 분통을 터뜨렸다. 즐거운 소풍날, 가뜩이나 친구들과
놀지 못해 속상한 아들은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있는 엄마, 아빠 얼굴을 보며 눈치까지 살펴야 했다
 
뭐가 잘못된 것일까. 아이들은 미국에서 학교에 보내기만 하면 친구들과 놀면서 ‘저절로’ 영어도 익히고
‘알아서’ 적응한다고 수도 없이 들었던 터였다. 특히 둘째 아들은 활달하다 못해 너무 까불어 탈인 아이
였기에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의 걱정은 10살 난 큰아들에게만 쏠려 있던 터라 둘째의 생각
지 못한 모습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서 담임에게 이메일을 보내며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인
“우리 아이에게 좀 더 많은 신경을 써 주셨으면 합니다”라는 말은 끝내 쓰지 못했다. 아이에게 도움이 될
지, 해가 될지 잘 판단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수 오기 전, 우리의 목표는 크지 않았다. 이곳에서만이라도 아이들을 대자연 속에서 열심히 뛰어 놀게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두 아들과 나와의 거리감을 좁히는 것이 소망 아닌 소망이었다.(한국에서 두 아들
은 어쩌다 집에 일찍 들어오는 엄마에게 불편하고 어색한 시선을 보내곤 했다.)


하지만 부모의 욕심은 끝이 없는 것일까. 막상 와보니 꼭 그렇게 소박한 목표만 가질 것은 아니었다. 영
어를 능숙하게 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그래, 미국까지 왔는데 영어는 좀 하고 가야지”, 미국에 오면 무조
건 운동과 악기 하나는 배우게 해야 한다는 조언에는 “그래, 지금 해야지 언제 해보겠어”, 아이들과 여행
을 많이 다니는 것이 결국 남는 장사라는 얘기에는 “그래, 뭐니뭐니해도 여행이 최고지”. 내 양쪽 귀는
수시로 펄럭였고, 해야 할 것들의 목록도 늘어났다. 하지만 지금은 다시 원래 목표로 돌아왔다. 영어도,
운동도, 여행도 일단 아이들의 마음부터 편해져야 가능하다.
   
잘 몰랐다. 아이들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엄마 아빠가 조급해 하면 아이
가 먼저 알고 불안해한다는 것을. 그리고 낯선 땅에서 부모보다 더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그날 밤, 곤히 잠든 아들을 보며 꿀밤을 주는 시늉을 했다가 마음이 짠해져 꼭 껴안아 줬다. 아이가 성장
하는 만큼 부모 역시 이곳에서 함께 성장하고 있음을 느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