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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쌓인 고속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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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은 연수 오실 분들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뜻에서 시행착오의 경험담으로 쓴다.

미국에 와보니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는 쇼핑과 여행의 시기다. 한국에 비교하면 추석과 구정과 비슷하다고도 볼 수 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예정에 없던 뉴욕 여행을 가게 됐다. 뉴욕에 와 있던 아는 분과 전화 통화를 하다가 반가운 마음에 한번 얼굴을 보고 인사라도 해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만날 약속을 잡았다.

그런데 출발하기 전날(12월 18일) 방송을 보니 일기 예보가 심상치 않았다. 워싱턴과 뉴욕이 포함된 미 동부 지역에 대설이 예상된다는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 보니 내가 있는 채플힐 지역은 구름 낀 흐린 날씨였지만 눈은 오지 않았다. 반면 방송에선 뉴욕과 워싱턴의 일기 예보로 변함없이 ‘폭설’을 반복하고 있었다. 약속 날짜를 미루자고 전화를 해야 하나 고민하다 결국 출발했다. 날짜를 다시 잡는 것도 쉽지 않을 터인데다 갑자기 날씨 탓을 들어 약속을 미루는 것도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닌 듯 싶었다.

자동차로 출발하고 2시간 가까이는 그럭저럭 달릴만 했다. 오히려 눈 예보 때문인지 평소에 비해 도로를 달리는 차량이 적었다. 하지만 노스 캐롤라이나를 벗어나 버지니아로 접어들어선 조금씩 불길한 조짐이 나타났다. 도로 옆으로는 간밤에 미끄러져 도랑에 처박힌 채 방치돼 있는 자동차들이 등장했다. 어떤 SUV 차량은 거꾸로 뒤집혀 있었다. 이미 버지니아에선 지난 밤에 눈이 내렸기 때문에 눈 길에 미끄러진 뒤 견인차가 오지 않아 사람들만 빠져 나오고 차량은 사고가 난 상태 그대로 남겨진 것 같았다.

버지니아 중부의 리치몬드라는 도시로 향하면서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이라는 말이 얼마나 난감한 상황을 묘사한 것인지 느낌이 팍팍 왔다. 리치몬드를 넘어 워싱턴을 100km 가량 앞두고선 급기야 눈이 펑펑 쏟아졌다. 가족을 자동차에 태운 채 얼어 붙은 도로 위를 눈을 맞으며 달리는 심정은 겪어 본 분만 알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에게는 결코 권하고 싶지 않다.

이래서는 뉴욕은커녕 워싱턴까지도 갈 수 없었다. 뉴욕으로 향하는 왕복 8차선의 I-95 도로는 각각 상행, 하행 차선 하나씩을 남긴 채 눈으로 완전히 덮였다. 그 한 차선도 간 밤에 내린 눈이 한차례 얼어 붙은 상태라 조금만 브레이크를 밟아도 ‘드륵드륵’ 하는 ABS의 진동이 오른 발을 타고 허리로 올라왔다. 내 차량은 물론이고 다른 차량들도 이제는 거북이가 기어가듯이 미끄러운 도로를 조심조심 앞 차량 꽁무니만 보고 따라가는 형국이었다.

오후 3시께 결국 워싱턴을 80km 정도 앞두고는 차를 돌려 I-95 도로를 빠져 나오려 하니 나만이 아니었다. 고속도로를 빠져 나오는데만 한 시간이 걸린 것 같았다. 그 다음부터는 ‘점입가경(漸入佳境)’에 해당된다. 도로를 나온 뒤 아까 살짝 보였던 여관의 표지판을 향하는데 갑자기 진입로 정면에 차단 장치가 보였다. 오르막 10여m 구간에 눈이 쌓여 차량들이 올라 갈 수가 없어 지역 경찰이 아예 출입을 막은 것이다. 갑자기 걱정이 몰려 왔다. 시간이 조금만 흘러도 도로를 다니기가 불가능해 보였다. I-95 같은 큰 도로는 경찰차들이 몰려 나와 차량을 통제라도 하고 있었지만 동네의 왕복 2차선 도로들은 아예 지난 밤부터 제설 작업이 거의 안돼 있었기 때문이다. 자동차는 자꾸 미끄러지고 쏟아지는 눈에 앞이 보이지 않는데 어두워지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다시 내비게이션에 의지해 하얀 눈발을 뚫고 20여분을 기어가다가 여관을 만났다. 반가운 마음에 자동차를 멈추고 뛰어 들어갔는데 카운터의 인도인이 “Sorry, No rooms”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나처럼 밤을 지낼 숙소를 찾아 몰려든 운전자들로 이 여관(Days Inn)은 이미 만원이었다. 고행은 다시 시작됐다. 도로로 다시 나서니 이제 도로와 인도가 구별되지 않았다. 모두 눈이었다.

30여분을 헤매다 결국 여관을 하나 찾았다. 이곳은 다행히도 아직 방이 있었다. 진입로가 온통 눈으로 덮여 있는데다 여관 광고판이 도로 구석에 세워져 있어서 자동차들이 쉽게 찾지 못했기 때문 같았다. 여관 광고판에 ‘하룻 밤에 50달러’라고 써 있었지만 이곳에선 숙박비로 80불을 요구했다. “왜 광고판에 적힌 요금보다 비싸게 받느냐”고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카운터에서 돈을 치르는데 한 노부부가 “어디로 가느냐”고 행선지를 묻는다. “뉴욕” 이라고 답하자 할머니가 “I-95 도로 통행이 차단됐다”고 말했다. 워싱턴으로 향하던 이 노부부는 “내일은 꼭 도로가 뚫려야 한다”며 걱정스런 표정이 역력했다. 다른 중년 부부에게 도로 상황을 물어보니 자신들도 잘 모르겠다는 답이었다. 그러면서 “경찰이 제일 잘 알고 있을테니 지역 경찰에 물어보라”는데 내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 대답이었다.

방은 잡았는데 이번에 주차가 문제였다. 주차장에 무릎까지 눈이 쌓인 뒤 얼어 붙고 그 위로 다시 눈이 내려 차를 댈 공간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겨우 공간을 찾아 후진 주차했는데 앞바퀴가 얼음 위에서 계속 미끌어지는 바람에 차를 앞으로 뺄 수가 없게 됐다. 어쩔 수 없었다. 내일 날이 밝은 뒤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날 밤 뉴스에선 워싱턴, 뉴욕에 내린 대설이 크게 보도됐다. 뉴욕, 워싱턴의 공항들은 모두 폐쇄됐고, 방송의 weather 채널에서 일기 예보를 전하던 진행자는 “뉴욕, 워싱턴, 필라델피아, 볼티모어에선 비상 상황이 아니라면 차를 몰지 않기를 강력히 권한다”는 멘트를 빠뜨리지 않았다. 이들 도시는 내가 달리려 했던 I-95 도로 선상에 있었다. 노트북을 꺼내 인터넷에 접속해 I-95 도로 상황을 들여다 보니 버지니아에서 뉴욕까지 올라가는 구간 수십곳에 ‘I’ 표지가 나타났다. I가 뭔가 하고 도로 상황도의 설명을 들여다 보니 교통사고였다.

다음날은 다행히도 눈이 그쳤다. 우여곡절 끝에 뉴욕으로 올라왔지만 겪었던 고생을 생각하면 결코 반복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다. 내가 있는 채플힐에서 뉴욕까지는 500마일(800km) 정도 거리다. 서울-부산 경부고속도로의 길이가 416km이니 두 배 가깝다. 채플힐에선 날씨가 괜찮다고 해서 뉴욕과 그 중도에 있는 워싱턴까지 맑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이날 워싱턴에서 2 feet(60cm)가 넘는 눈이 왔다고 한다. 수십년 만의 폭설이라고 방송은 보도했다.

장거리 운전을 해야 하는 미국에선 날씨 확인이 필수다. 연수 오실 분들은 부디 이 점을 명심하고 특히 겨울철 주행 때는 일기 예보를 꼭 확인하시기 바란다. 둘째로 날씨에 도전하는 것도 피하시기 바란다. 한국에서처럼 고속도로를 빠져나가면 하룻밤을 청할 숙소를 쉽게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비상 상황이 발생할 때는 연락할 지인이 있는 것도 아닌 만큼 미국에선 날씨와 싸워 봐야 무모한 대결이다.

1.출발은 양호
: 노스 캐롤라이나의 채플 힐을 떠날 때만 해도 날씨는 흐린 정도였고, 도로도 잔설이 약간 남아 있었을 뿐이었다. 충분히 달릴 수 있었다.

2.불안한 전조
:그러나 버지니아로 올라가자 도로 양쪽으로 전날 밤 내린 하얀 눈이 쌓여 있다. 제설 작업이 완전히 되지 않아 차량 한 대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만 도로가 치워져 있다.

3.운전 불가
:워싱턴을 앞두고선 편도 4차선 도로에 펑펑 내리는 눈이 쌓이며 차선이 사라졌다. 내린 눈은 얼어붙기 시작했다. 더 이상 운전했다간 언제 사고가 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4.다음날 아침
다음날 아침 숙소의 전경. 눈은 그쳤지만 눈이 하얗게 쌓여 있다. 앞에 보이는 주차장 진입로가 얼어 붙어 차들이 빠져 나가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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