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고재학 기자는 2001년 제 6기 해외연수언론인으로 선발되어 현재 미국 뉴욕에 위치한 컬럼비아대학에서 대체 의학에 대하여 공부하고 있습니다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은행 계좌 개설, 인터넷 개통, 운전면허 시험 응시…. 어느 것 하나 맘먹은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이런 식이었다. 지역 교통국에 운전면허 시험을 신청하러 갔더니 자격 요건(사회보장번호, 학생증 등)이 되거든 다시 오란다. 10일 후 서류를 갖춰 필기시험을 보았다. 이 번엔 5시간짜리 비디오 교육을 요구했다. 1주일 뒤 수료증을 받고 실기시험을 신청했다. 컴퓨터가 정해 준 시험날짜는 40여 일 뒤. 아직도 무면허 운전자 신세를 벗지 못하고 있다(뉴욕주에선 입국 후 한 달 까지만 국제운전면허증을 인정해 준다).
우리나라의 한국통신 격인 버라이즌(verizon)에 인터넷 초고속 통신망(DSL)을 신청했다. 당일은 어려워도 수 일 내에 설치가 가능하리라는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10일 후에야 DSL 설치 가능 여부를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설치가 가능한 지 확인하는데 10일이 걸린다니! 우리나라에선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10일이 지나 다시 전화를 했다. 설치가 가능한 지역이니 소프트웨어와 모뎀을 우편으로 보내주겠단다. 2주를 기다렸으나 소식이 없었다. 결국 신청을 취소하고 전화선을 이용하는 아메리카 온라인(AOL)으로 바꿨다.
국내에서 가져 온 돈은 현금 3만 달러(여행자 수표 포함). 초기 정착비용(집 렌트비, 차량 구입비 등)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선배들의 조언을 감안했다. 평생 만져본 적이 없는 거금을 손에 쥐고 있자니 겁이 더럭 났다. 집을 구하자 마자 국내에서도 낯이 익은 시티은행을 찾았다. 현금 3만 달러를 지닌 고객이니, 당연히 ‘어서 옵쇼’ 하며 반길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미국에 거주한다는 증명이 필요하다며 ‘집 계약서(lease agreement)’나 ‘유틸리티 빌(utility bill 전화 가스 전기 등의 고지서)’을 가져 오란다. 돈만 있으면 됐지 웬 고지서 타령이람. ‘미리 전화를 하고 올걸’ 후회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튿날 집 계약서를 들고 다시 은행을 찾았다. 그런데 이 번에는 말이 달랐다. 은행 규정상 유틸리티 빌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틀 전 집을 구한 사람에게 유틸리티 빌이 있을 리 만무했다.
돈을 보여주며 사정을 이야기 하자 전화를 신청했다는 증명서라도 가져 오란다. 전화국에 연락을 했더니 1주일 후 받을 수 있도록 우편 발송하겠다고 했다. 직접 방문해 받아가거나 팩스로 은행에 보내줄 수 없느냐고 사정했지만 ‘규정상 어렵다’는 냉담한 반응이었다.
전화 통화를 지켜 보던 은행 담당자는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boss와 상의해 보겠다며 자리를 떴다. 30분 만에 나타난 그는 집 주인에게 전화해 세입자 여부를 직접 확인한 뒤 돈을 받아주겠다고 했다. 결제는 전화국의 확인서를 제출한 뒤부터 가능하다는 조건이었다. 1주일 걸린다던 전화국의 우편물은 10일이 넘어서야 도착했고 이어 수표책이 우송돼 왔다. ‘제발 내 돈 좀 받아달라’고 사정한 지 20여일 만이었다. ‘성질 급한 사람은 절대 미국에 오지 말 것.’ 짧은 뉴욕 생활에서 얻은 첫 번째 결론이다.
‘부지런해라, 그러면 구할 것이다’
역시 정착하는 데 가장 시급한 것은 집을 구하는 일일 것이다. 연수 선배들을 보면 아는 사람을 통해 미리 집을 구해 놓고 출국하거나 현지에 가서 직접 구하는 두 가지 유형으로 갈렸다. 그런데 지인을 통해 집을 구한 선배들은 후회하는 사례가 많았다. 가족과 함께 거주하는 경우라면 직접 집을 둘러보고 결정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면 어느 지역을 선택할 것인가. 이는 경제력과 개인 취향이 좌우하는 문제다.
뉴욕시는 맨해튼, 퀸즈, 브루클린, 브롱스, 스태튼 아일랜드 등 다섯 개 구(borough)로 구성돼 있다. 비싼 동네는 지역에 관계없이 어디나 쾌적하고 편리하다. 싸면서도 주변환경이 괜찮은 곳은 없을까. 뉴욕시와 뉴저지주에 사는 지인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수십 차례 통화 끝에 내린 결론은 스태튼 아일랜드였다. 대개 교통이 불편한 곳은 범죄율이 낮고 주변 환경이 쾌적한 편이다. 스태튼 아일랜드는 뉴욕시에서 유일하게 지하철이 없는 지역이다. 대중교통을 많이 이용하는 저소득층이 기피하기 때문이다. 집 값도 상대적으로 싸다.
서울을 떠나기 한 달 전 스태튼 아일랜드에 거주하는 장모님 친구 분에게 집을 물색해 달라고 부탁했다. 방 2개, 월 1,500달러 미만, 전원풍의 미국 중산층 동네. 우리가 내건 조건이었다. 염치 불구하고 이 분 집에 여장을 푼 뒤 집 구하기에 나섰다. 두 곳을 둘러 보았지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국인 부동산 중개업자를 통해 아파트, 타운하우스(town house 일종의 연립주택), 어태취드 하우스(attatched house), 단독 주택 등 네 곳을 더 살펴 보았다. 두 곳은 우리가 싫었고, 두 곳은 주인이 ‘No’ 했다. 초등학생 자녀가 2명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아이들이 있으면 집이 쉽게 망가질 우려가 있고 물도 많이 쓴다고 보는 것이다(전기와 가스비는 세입자 부담이지만, 물 값은 주인 부담). 대부분 목조 주택이다 보니, 방음이 잘 안되는 것도 아이들을 기피하는 이유였다.
행운(?)은 엉뚱한 곳에서 찾아 왔다. 동네 비디오 가게에 들렀다가 생선가게를 하는 한국인 부부가 세입자를 구한다는 말을 들었다. 즉시 가게로 달려가 집을 보여달라고 부탁했다. 백인 거주지역의 2층집이었다. 집 앞에 정원이 있고 뒤쪽엔 잔디밭이 있는 전형적인 미국 주택이었다. 부동산 중개업소를 통해 집을 구할 경우 한 달 치 월세를 복비로 지불하는 게 관례다. 다행히 우리가 직접 구한 집이어서 복비 없이 입주하게 됐다. 뉴욕 도착 10일 만이었다. 마음에 드는 집을 빨리 구하려면 부지런히 발품을 파는 수밖에 없다.
‘아는 것이 돈이다’
뉴욕 생활은 돈과의 싸움이다. 육류와 과일, 휘발유 정도를 빼면 무엇이고 우리나라보다
비싼 것같다. 공산품에 붙는 세금은 8.25%. 미국 최고 수준이다(뉴저지 6%, 버지니아 4%선). 식당, 택시, 이발소 등 서비스 업종을 이용하면 15~20%의 팁을 줘야 한다. 교통비도 비싸다. 맨해튼행 익스프레스 버스(우리나라의 좌석버스와 유사)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3달러를 받는다. 4인 가족이 맨해튼에 한 번 다녀오려면 버스비만 24달러(약 3만 원)가 든다.
스태튼 아일랜드 지역에서만 운행하는 로컬 버스는 1.5달러. 키가 42인치 미만이면 돈을 받지 않는다. 반면 익스프레스 버스는 자리만 차지하면 아무리 어려도 돈을 받는다. 이런 간단한 사실을 파악하는 데도 상당한 시일과 경제적 손실(?)이 따랐음은 물론이다. 내지 않아도 될 요금을 냈는가 하면, 내야 할 돈을 내지 않아 창피를 당한 적도 있다.
뉴욕의 물가가 살인적이긴 하나, 비용을 줄일 수 있는 장치도 곳곳에 널려 있다. 교통비만 해도 그렇다. 다양한 종류의 교통카드가 있는 만큼 자기 여건에 맞는 것을 고르면 30% 이상 교통비를 줄일 수 있다. 맨해튼의 학교로 출퇴근하는 경우라면 주 17달러, 월 67달러로 버스와 지하철을 무제한 이용할 수 있는 메트로 카드를 구입하는 게 경제적이다.
슈퍼나 대형 할인점의 회원(유료나 무료)으로 가입하면 일정액의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신문이나 잡지에는 할인 쿠폰이 심심찮게 눈에 띤다. 이 것을 모아 놨다가 필요할 때 사용하면 생활에 큰 보탬이 된다. 비행기 여행을 할 경우 최소 3주 전에 예약을 하면 20% 이상 저렴한 항공권을 구입할 수 있다. 항공사의 티켓 세일 광고도 눈여겨 봐야 한다. 며칠 전 워싱턴 포스트지에는 LA행 티켓을 99달러(편도)에 판다는 광고도 실렸다. 뉴욕과 뉴저지의 세금이 다른 만큼 뉴저지 지역의 쇼핑몰이나 주유소를 이용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나의 뉴욕생활은 시작됐다.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언어와 문화가 전혀 다른 이국땅에 정착하기가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적응이 빠를수록 생활이 편해지고 여유도 생기는 법. 새로운 환경,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은 스트레스로 작용할 수도, 가슴 설레는 즐거운 떨림일 수도 있다. 도전하는 자만이 짜릿한 성취감을 맛볼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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