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아이를 둔 연수생 가족은 연수 지역 선정서부터 집구하기까지 아이들 학교를 우선적으로 고려하게 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본인의 지식 충전이나 자기 계발보다 아이의 현지 학교 적응에 방점이 주어질 것입니다.
저의 경우, 초등 5학년과 1학년 사내 아이 둘을 두고 있기에 과연 어떤 학교에 보내야 할지 무척 신경이 쓰였습니다. 단적으로 한창 집을 구하러 다닐 때, 가령 5학년서부터는 중학교 과정으로 편입되는 학교가 있는 지역은 정작 그 집이 마음에 들어도 포기했습니다. 아이 둘을 아침마다 다른 곳으로 ride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연수 10개월째를 맞고 있는 지금 돌이켜 보면, 대부분의 연수생 가정과 마찬가지로, 별다른 대과나 별다른 큰 성과 모두 없는, 무난한 적응을 했다는 느낌이 듭니다.
사실 제가 거주하고 있는 뉴저지 Fort Lee는 한국인들이 많이 사는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막상 살아보니 한국인만이 아니더군요. 제 둘째 아이네 학급은 모두 17명인데 한국계가 6, 중국계 1, 일본계 2, 인도계 2, 아랍계 1명 등입니다. white도 토종 미국인은 아니고, 그리스나 러시아계더군요. 히스패닉이야 미국 전역에서 득시글거리고 있으므로 논외겠지요. 좋게 보면 ‘어린이 유엔 총회’ 쯤 되겠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동네에선 흑인이 소수라는 거지요. 첫째 아이 학년인 5학년이 모두 70, 80명 선인데 흑인은 단 2명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결코 ‘소수’가 아니더군요. 언젠가 초등학교 대항 농구시합이 있어 이 동네 유일한 공립 고교인 Fort Lee Highschool에 응원간 적이 있습니다. 모두 10명이 번갈아 뛰는 농구 시합에서 승부를 가른 건 두 팀에 한 명씩 끼어 있던 흑인 아이들이었습니다. 이 둘의 컨디션에 따라 두 팀의 승패가 갈린 것이지요. 정말 가관(!)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체육관을 가득 채운 모든 관중이 이 둘의 몸놀림에 탄성과 한숨을 내쉬는 모습을. 흑인은, 스포츠 때문에도(미국인들이 얼마나 각종 스포츠에 열광하는지 떠올려 본다면) 결코 소수가 아닙니다.
지난해 9월 처음 학기가 시작했을 때만 해도 걱정이 많았습니다. 한국에서는 무슨 응원단장이라도 되는 양 동네 아이들을 이리저리 몰고 다니던 큰 아이는 영어가 안 되니 한눈에도 의기소침한 상태로 한 달이 넘게 죽을상을 하고 있고, 가뜩이나 내성적인 둘째는 등교할 시간이 되면 무슨 도살장 문 앞에 선 송아지마냥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정말 고민이었습니다. 숙제의 내용을 몰라 준비를 못 해갈 정도였으니까요. 다른 부모들처럼 좀 더 철저히 영어 공부를 시키지 않은 걸 가슴을 치며 후회했었습니다.
돌파구는 운동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미국에서는 가을엔 축구를, 봄엔 야구를 시킵니다. 두 아이 모두 지역 축구 리그에 가입시켰는데, 아 그만한 스트레스 해소법이 없더군요. 1주일에 실제 경기 한 번, 연습 경기 한 번, 60분씩 뛰고 나면 애들 표정이 달라지더군요. 몇 마디 안 되는 대화들이지만 또래 선수들과 주고받는 영어도 간접적으로 아이들에게 자신감을 준 것 같습니다.
부지런하지만 축구에 재능이 없는 둘째는 전후반 내내 운동장을 뛰어다녔지만(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아무리 일러줘도 정말 단 10초도 쉬지 않고 뛰어다녔습니다) 시즌이 끝날 때까지 채 10번도 공을 차보지 못했습니다.
반면 운동 신경이 떨어진다고 내심 포기했던 큰 아이는 첫 게임의 수비 포지션에서 두 번째 게임에 미드필더로 당당히 오르더니 한 마디로 운동장을 날아다니더군요.
이것이 우습게 볼게 아닌 것이, 5학년 정도 되면, 수비로 뛰는 애들은 적어도 3년, 고정 공격수로 배치된 애들은 5년가량 매년 이 리그에서 뛴 아이들이기 때문이지요. 우리 아이는 물론 태어나서 처음으로 정식 경기를 해 본 것이구요.
노조 체육대회를 빼놓곤 푸른 잔디 구장을 밟아본 적도 없는 저로서는 멀쩡한 정식 축구장 관중석에서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연수 초기 정착기의 각종 스트레스가 스르르 풀리더군요. 더구나 야간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쾌적한 바람과 밤을 환히 밝히는 스포트라이트와 푸른 잔디, 아이들의 맑은 함성 소리…
결국 아이는 시즌이 끝나기 직전 생애 처음으로 골을 넣었습니다. 파란 눈의 아이들이 그 다음부터 우리 아이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더군요. 시즌 내내 15명이 넘는 팀 선수 중 한골이라도 넣어본 선수가 고작 4명 뿐 임을 고려한다면 ‘가문의 영광’인 날이었습니다.
두 아이 모두 지금은 야구를 하고 있는데, 축구보다 훨씬 더 각종 테크닉이 필요한 야구라서 그런지 눈에 띄는 성과를 못 내고 있습니다. 축구보다 돈이 5배는 더 먹은 야구(배트, 글러브, 야구화, 타이즈, 공, 모자…) 인데도 우리 아이는 2시간 경기 중 잘해야 1~2회 타석에 들어설 뿐 수비에도 끼질 못하더군요.
선수배치 테스트(tryout)를 거쳐 다행히 마이너리그 팀(6개팀) 아닌 메이저리그 팀(4개팀)에 소속된 것 까지는 좋았는데, 축구와 마찬가지로 3~5년씩 공을 때려온 아이들과 맞장을 뜨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더군요. 이곳 야구리그 관계자들은 축구리그 관계자들보다 훨씬 영악(?)해서, 기금 마련을 이유로 내세우면서 세상에 65달러짜리 초콜릿 박스를 모든 선수에 강매하기까지 했습니다. 6만 5000원짜리 초콜릿, 그래도 달긴 오지게 달더군요.(미국 사람들, 참 달게 먹습니다)
어쨌든 아이가 미국 생활에 적응을 잘 못하거든 무조건 스포츠를 시키십시오. 아주 효과가 좋습니다. 애들 정신 건강을 위해서도 강추합니다.
아이의 학교생활 적응 과정에 대해선 다음 기회에 말씀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