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와 네트워크 구축, 유창한 영어회화 능력 확보, 싱글골퍼 되기, 여행
그리고 아이들 영어실력 향상.
지난해 8월 UC버클리로 연수를 떠나기 전 세운 목표들이다.
선배들은 코웃음을 쳤다. “하나라도 잘 해라”, “골프나 열심히 치고 와”, “네 인생에서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유일한 기간이다. 쓸데없는데 시간 낭비하지마”.
8개월 가까이 지난 지금, 선배들의 조언이 맞았는지도 모른다. 어느 것 하나 만족스럽지 못하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히 달라진 점은 있다. 어느덧 미국생활에 익숙해졌다. 이들의 문화, 관습, 생활, 사회시스템 등이 낯설지 않다. 수준 높은 대화는 아직 쉽지 않지만 생활주변에서 만나는 이곳 사람들은 전혀 이방인으로 느껴지질 않는다.
다섯 마리의 토끼를 좇느라 정신없이 다니다보니 느리지만 꾸준히 앞을 향해 가고 있는 거북이 한 마리가 옆에 있었다.
자유+규율, 그리고 합리주의
미국 사회와 체제의 근간은 독립선언문과 연방헌법이라고 한다. 독립선언문은 자유주의, 연방헌법은 법치주의의 상징이다.
미국인의 사고방식에는 근본적으로는 개인주의가 깔려 있다. 미국 제도의 대부분이 개인의 권리를 최대한 인정하고 보호하기 위한 취지에서 마련됐다.
하지만 이를 방치할 경우 사회질서의 혼란이 불가피하다. 이를 위해 강력한 법제도가 존재한다. 사회질서나 타인의 자유를 해칠 경우 가차 없는 제재가 가해진다.
다소 거창한 얘기지만 미국 생활에서 부딪치는 다양한 낯선 상황들도 이 기본개념에서 풀어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미국에서 운전은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몇가지 시스템만 익숙하면 된다. 그중 가장 차이가 큰 것이 교차로 통행법이다. 한국의 경우 신호등이 설치돼 강제로 통행순서를 정해주거나 그렇지 않으면 눈치껏 다녀야 한다.
하지만 미국은 동네 골목길마다 `4-way STOP` 사인이 있다. 괜스레 신호등을 설치해 운전자의 시간을 뺐지 않겠다는게 근본취지다. 운전자 스스로 순서에 입각해 가장 먼저 도착한 차량이 먼저 교차로를 빠져나가는 자율적 통행방식이다. 심지어 왕복 6차선 도로에서도 기묘하게 도착한 순서를 잘 맞춰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면 `자율 속 규율`이 몸에 밴 미국시민들을 느낄 수 있다.
미국 Freeway에는 한국과 같은 무인속도감지기가 거의 없다. 함정단속을 위해 숨어있는 경찰도 드물다. 그럼에도 속도제한을 훨씬 초과해 과속하는 차량이 거의 없다. 이유는 한가지. 만약 과속으로 걸릴 경우 최소 300달러 이상의 무거운 벌금을 내야하기 때문이다.
강력한 처벌체계가 시민들의 자율적인 질서준수를 조성하고 있는 것이다.
Freeway에서 창밖으로 담배꽁초를 버리다 적발되면 700~1000달러에 가까운 벌금을 내야 한다. 무심코 던진 담배꽁초가 뒷차(여긴 특히 오픈카가 많다)로 들어갈 경우 엄청난 사고를 초래할 수 있다. 시민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질서위반에는 그만큼 무거운 벌이 가해진다.
필자는 매월 5일 아파트관리인에게 월세를 지급한다. 한번은 Checking Account에 돈이 부족한 것을 모른 채 매니저에게 수표를 끊어준 적이 있다. 물론 이튿날 바로 Saving Account에서 돈을 옮겨놨지만 며칠 후 매니저는 75달러의 벌금을 요구했다.
은행에 지급을 요청했는데 내 구좌에 돈이 부족해 받지를 못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나는 약속된 날짜에 정확히 check를 준 게 아니냐”며 항변했지만 “당신이 주질 않으면 내가 내야 한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정해진 약속을 지키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 댓가였다.
그렇다면 자유와 규율이 상충되는 경우는 어떻게 해결될까. 이를 해결하는 기준이 ‘합리주의’인 것 같다.
한번은 집에서 가까운 다운타운에 물건을 사러갔다가 주차위반 티켓을 발부받은 적이 있다. 상점 바로 앞에 위치한 Private Parking 구역에 차를 대고 일을 본 후 돌아와 보니 주차위반 티켓이 앞 유리창에 끼어있었다. 해당구역이 필자가 간 상점이 아닌 다른 가게의 주차구역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Private Parking Sign을 자세히 보니 어느 점포의 주차구역인지가 표시되지 않았다. 당연히 필자와 같은 이방인은 혼동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억울한 마음과 영어공부라도 하자는 생각에 시 교통관리국에 이의제기 편지를 보냈다. “구체적인 내용이 부족해 나에게 혼란을 줬으니 완전히 내 잘못만은 아니다”라는 골자였다.
2주 후 “당신의 이의제기를 수용해 주차위반 티켓을 취소한다”는 답신이 돌아왔다.
일단 결정된 행정조치였지만 합리적으로 문제점을 지적하고 설득하니 번복이 된 것이다.
흔히들 미국에서 교통위반 티켓을 발부받으면 곧바로 범칙금을 내지말고 반드시 법원에 이의신청 절차를 밟으라는 조언을 한다. 법정에 출두해 자신이 교통을 위반하게 된 합리적인 사유를 설명하면 벌금이 절반이하로 줄어든다. 법관이 단속한 교통경관을 호되게 꾸짖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공권력과 규제의 권위를 유지하기보다 시민의 목소리를 듣고 이를 합리적으로 판단하는게 더 우선인 셈이다.
시간 vs 돈
필자의 연수지인 샌프란시스코 지역은 미국 내에서도 가장 물가가 비싸기로 유명한 곳이다. 기름 값의 경우 전국 평균이 갤런당 2.7~2.8달러 안팎인 반면 이곳은 3.3~3.4달러를 상회한다. 주택비용, 식음료비 등 모든 것이 전국 최고수준이다.
자연히 이곳 사람들은 절약생활이 몸에 배어 있다. 레스토랑이나 유명 박물관, 테마파크 등을 제 돈 내고 가면 바보취급을 받는다.
각종 비용을 절약하는 가장 유용한 방법은 인터넷을 활용하는 것이다.
골프장의 예를 들어보자. golfnow.com이라는 유명한 온라인 예약사이트가 있다. 1인당 50~60달러인 Green Fee를 20~30달러선, 즉 절반 가격으로 예약할 수 있다. 미국 전역에서 활용할 수 있다.
이 사이트에 나오지 않는 유명 골프장은 홈페이지에 회원으로 가입하는 방법이 있다. 간간히 좋은 Deal이 날라 온다.
미 서부지역의 유명 박물관과 테마파크, 공연장들도 온라인 무료회원만 가입해도 입장료를 포함한 각종 특전을 받을 수 있다.
신문 전단지나 집으로 배달되는 우편물 형식으로 날라오는 각종 쿠폰들도 유용하다. 자동차정비, 대형마트, 옷수선, 학원비 심지어 고작 3달러짜리 햄버거를 먹는데 까지 소비생활 전 분야에서 쿠폰이 통용된다.
고상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주문하면서 15% 할인 쿠폰을 내미는 일이 여기에선 전혀 창피하거나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같은 절약생활을 위해서는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한다.
여행준비를 위해 호텔을 예약하려면 디스카운트를 받을 수 있는 여행관련 인터넷이 무수히 많다. www.expedia.com, www.hotel.com, www.aaa.com, www.choicehotels.com 등이 유명한 사이트 중 일부다. www.priceline.com 에서는 역경매방식을 이용해 엄청나게 싼 가격에 호텔을 예약할 수도 있다.
이들 사이트를 열심히 뒤지며 보다 싼 가격에 좋은 호텔을 잡으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한국인은 물론이고 미국인 ‘아줌마’들에게 인기가 높은 대형 의류마트를 예로 들어보자.
필자 집 부근 20분내에도 Marshal, Ross, TJ Max 등의 이름을 가진 이같은 쇼핑센터가 6~7개나 있다.
한국에서 10만원이 넘는 유명브랜드 티셔츠를 10달러대에서 살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성과’를 올리려면 사이즈별로만 구별된 채 빽빽이 걸려있는 옷들 사이를 족히 서너 시간은 헤매야 한다.
일종의 Searching Cost가 존재하는 것이다. 자신의 노력과 시간을 돈으로 바꾸는 셈이다.
그럴 여유가 없는 사람은 제 돈 내고 상품이나 서비스를 구입할 수 밖에 없다.
결국 자신의 선택이다. 자신의 하루일당과 하루를 투자해 절약할 수 있는 가치를 비교해보면 답이 나온다. 작은 소비생활 하나에서도 철저히 자본주의적 방식이다.
몇가지 유익한 정보들
미국사회에서는 학생이나 저소득자를 위해 다양한 혜택을 부여한다. 각종 학자금지원은 물론 비싸기로 소문난 병원비도 거의 무료에 가깝게 떨어진다.
연수생도 과연 이 혜택을 받을 수 있을까. ‘뭐든지 부딪혀보자’는 의욕과 무모함이 충만했던 정착초기, 필자가 사는 Contra Costa County의 교육청에 저소득자 유아교육 지원프로그램을 지원해봤다.
어린 딸을 Preschool에 넣으려다보니 비용이 너무 높아 이를 경감해보자는 생각이었다. 물론 미국 내에서는 아무 소득이 없다는 내용의 지원 서류를 제출했다.
4개월여가 지나자 지원대상으로 선정됐으니 디테일한 서류를 준비해오라는 편지를 받았다. 아쉽게도 이미 싸고도 좋은 Preschool에 딸이 다니고 있던 터라 지원을 포기하고 말았지만 어쨌든 연수생도 저소득자 지원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정착초기에 중고차를 구입하려면 딜러 또는 개인간 거래를 통하는게 일반적이다. 앞서 말한대로 인터넷등을 통해 개인이 내놓은 차량을 구매할 경우 Searching Cost가 들기는 하지만 10%이상 싼 가격에 구매할 수 있다.
하지만 딜러를 통해서 구입할 때도 요령이 있다. 일단 가능한한 많은 딜러와 접촉해 상대방의 제시가격을 비교하면서 Deal을 해야 한다. 또 월말로 다가갈 수록 실적을 쌓아야하는 딜러가 열세에 놓일 수 밖에 없다는 점도 이용할 만 하다.
‘월말효과’는 교통단속에서도 흔히 나타난다. 월말로 다가갈수록 Freeway, 로컬길할 것없이 곳곳에 단속경찰을 볼 수 있다. 단속실적을 채우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나선 것이다. 심지어 속도제한이 25마일인 동네 길에서 조차 단속에 걸릴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가족들을 위한 각종 프로그램을 마련할 때는 Community Center가 아주 유용하다. 각 연령대별로 영어, 체육, 미술, 음악, 여행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무료 또는 저렴한 비용으로 제공된다.
Community Center 뿐 아니라 시립미술관, 박물관, Adult school, YWCA 등에서도 다양한 교육과정을 제공한다. 인기있는 강좌의 경우 상당히 빨리 마감이 되니 정착초기에 서두를 필요가 있다.
스포츠를 좋아하는 자녀를 위해서는 지역공동체에 자치적으로 운영되는 클럽활동을 뒤져볼 필요가 있다. 부모와 아이들이 함께 참여하는 클럽식 모임으로 주중연습과 주말경기 등으로 다채롭게 1년간 운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