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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첫번째 직업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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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미국에도 가을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여름의 끝을 상징하는 Labor Day(노동절), 9월 1일을 기점으로 확연히 달라진 날씨를 피부로 느낍니다. 주말을 붙인 3일 간의 미국 노동절 연휴는 마지막 여름 휴가(여행) 기간이기도 한데요, 저또한 근교로 여행을 갔다가 호텔 TV에서 접한 한 편의 영상을 통해 미국에서의 ‘노동’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게 됐습니다.

약 2분 정도 되는 이 광고 영상은 백악관이 제작한 것으로, 트럼프 내각의 장관 6명이 나와 자신들의 첫 번째 직업이 무엇이었는지를 소개하는 형태입니다. 존F.케네디 전 대통령의 조카이자 이번 대선에도 출마했던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 복지부 장관, 피트 헤그세스 국방부 장관, 털시 개버드 국가정보국(DNI) 국장, 로리 차베스 드레머 노동부 장관, 더그 콜린스 보훈부 장관, 리 젤딘 환경보호청장 등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냈습니다.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 복지부 장관이 자신의 첫 번째 직업을 설명하는 모습 / 백악관 유튜브 채널

쟁쟁한 고위 관료들의 첫 직업은 소박했습니다. 정치 명가, 케네디 가문 출신인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 복지부 장관의 첫 직업은 워싱턴 동물원 파충류관에서 일하며 파충류들에게 먹이를 주고 우리를 청소하고 난간을 닦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정말 의외였습니다. 프린스턴대, 하버드대를 졸업한 피트 헤그세스 국방부 장관은 어머니가 일 하던 실내 수영장에서 인명구조원으로 일 한 게 첫 직업이라고 했습니다. 21세에 하와이 주의회 하원의원에 당선되며 최연소 기록을 세운 털시 개버드 국가정보국장은 신문배달을, 더그 콜린스 보훈부 장관은 마트 바닥 청소, 리 젤딘 환경보호청장은 공공도서관, 로리 차베스 드레머 노동부 장관은 고등학생 때 치어리더 유니폼을 살 돈을 마련하기 위해 복숭아 포장 일을 한 게 첫 직업이었다고 밝힙니다. 하루에 12시간씩 복숭아를 포장했다는 말과 함께요. 내용을 들어보면 이들 대부분은 고등학생 때 첫 직업을 가진 것 같습니다. 우리로 치면 아르바이트를 첫 직업으로 과대 포장했다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 해도 우리나라 현실과 비교하면 시사점이 적지 않습니다.

로리 차베스 드레머 노동부 장관은 고등학생 때 하루 12시간씩 복숭아 포장 일을 하다가 살이 7kg 가까이 빠졌다고 한다. 그래도 신나는 경험이었고 치어리더 유니폼을 살 돈을 모아 기뻤다고.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 복지부 장관은 영상 말미에 이렇게 말합니다. “작은 것들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무슨 일이든 모든 재능과 에너지를 다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워싱턴 동물원에서의 경험을 단순 노동이라 할 지 모르겠습니다만, 케네디 장관에게는 노동을 대하는 태도를 정립하는 데 엄청난 영향을 끼친 것 같습니다. 어린 나이에 최저임금 수준의 저임금을 받아가며 몸을 쓰는 노동(일)을 해본다면 우리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수 많은 노동자들의 노고에 대해 알 수 있겠죠. 또한 노동자들의 권리와 노동 환경 개선에 대한 의식도 생길 것입니다. 돈 버는 게 얼마나 힘든지 체험시켜 돈의 소중함을 느꼈을 수도 있고요. 그것이 대학과 진로를 결정하는 데에 큰 동기부여가 되었을 수도 있겠지요. 학창시절 공부만 시키는 것보다 이런 노동을 경험시키는 것이 의미가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인들이 어렸을 때부터 자녀에게 돈을 벌어보게 하는 걸까요. 실제 미국 부모들은 강한 근로 의식을 심어주는 데 진심인 것 같습니다. 넓게 보면 어린 아이들이 집 앞에서 레모네이드를 만들어 팔아 기부를 하는 것도 그 일환이 아닐까 싶은데요. 한 번은 도서관에서 고등학생이 붙인 ‘뭐든지 다 고쳐드립니다’ 격의 ‘handy man’ 광고를 봤습니다. 마침 집에 청소하고 손 볼 것들이 몇 개 있었던 터라 시급이 저렴한 이 친구를 불러봤습니다. 체구가 작은 남학생이 전문 장비를 들고 와 두 시간 동안 임무를 완수해내는데 정말 입이 다물어지지 않더군요. 이전에 고용했던 작업 인부보다 훨씬 손끝이 야무졌습니다. 어디서 이런 기술을 배웠는지 물어봤더니 아버지가 가르쳐줬다고 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어릴 적부터 함께 집 구석구석을 보수하는 경험을 통해 이런 기술을 터득하게 되었고, 지금은 여름방학이라 용돈벌이 삼아 틈틈이 이런 일을 하고 있다고. 당연히 부모도 동의했다고 하고요. 우리나라 중학생이었으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인데 미국과 한국이 정말 다르다는 걸 느꼈습니다.

지역 고등학생이 여름을 맞아 올린 구직 공고 포스팅. 미국 학생들은 어릴 때부터 노동을 경험하며 경제적 자립심을 키운다.

생각해보면 대학에 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가 공부에만 전념하기를 바라며 취업 전까지 부모가 전폭적인 지원을 하는 경향이 강한 우리와 달리 대부분의 미국 대학생들은 부모로부터 독립해, 스스로 학비를 벌어 대학을 다니죠. 아니면 학자금 대출을 받아 십 년 넘게 갚거나. 어쩌면 이런 헝그리 정신이 이들의 성공 욕구를 자극하고, 경제적 자립심을 키워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는 순기능을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저 또한 앞으로 자녀가 좀 더 크면 성인이 되기 전에 노동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줘야 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현실적으로 어떤 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이의 첫 직업이 대학생 시절의 개인과외가 아니라 더욱 의미 있는 무언가가 되도록 더 고민해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