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셋 아빠의 미국 온라인 탐구생활1
– ‘족보’가 사라진 미국 연수 생활
펜데믹을 뚫고 미국 캘리포니아에 온지 1년이다. 지난해 8월 태평양을 건널 때만 하더라도 흑사병이 휩쓴 중세 유럽으로 가는 비장함으로 비행기를 탔다. 공항은 물론 비행기 이코노미 클래스도 텅텅 비어 있었다. 아이들에겐 코로나 때문에 비행기에서 누워서 갈 수 있다며 농담도 건넸다. 샌프란시스코 상공에서 처음 마주한 건 코로나가 아닌 산불이 만들어낸 거대한 연기 구름이었다. 비행기 창 너머 보이는 산불은 해외 토픽에서 볼 법한 화산 폭발 사진만큼 거대하고 강렬했다. 미국에 정착하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코로나보다 사상 최악의 캘리포니아 산불이 더 위협적이었다. 아침부터 잿빛이 된 하늘을 보면서, 오늘도 하루 종일 집에 있어야 체념이 마음을 가라앉게 만들었다.
샌프란시스코 상공에서 본 산불 연기
처음 미국에 도착했을 때, 이미 코로나로 도서관과 박물관, 미술관 같은 공공시설은 물론, 시에서 운영하는 동네 놀이터도 모두 문을 닫았다. 내가 방문연구원으로 있는 UC 버클리도 마찬가지다. 나의 경우 지금까지 미국에 와서 학교를 가 본 건 두 번 밖에 없다. 처음은 미국에 오자 마자 온가족이 캠퍼스를 둘러봤을 때, 마지막 방문은 나의 학교 ID를 받을 갔을 때다. 담당 교수와 미팅도, 듣고 싶은 강의도 모두 줌(Zoom)으로 진행됐다. 그나마 해방구였던 산과 공원은 산불이 점점 심해져 갈 수 없었다. 코로나의 경우 전 인류가 경험하고 있다고 치더라도, 캘리포니아 북부 산불은 예상치 못한 복병이었다. 지난 1년 동안 미국 유수 국립공원들을 다녔지만, 아침부터 뿌연 갈색 연기가 뒤덮은 하늘만큼 충격적인 광경은 보지 못했다. 잿빛 하늘과 꽉 막힌 아이들의 코를 볼 때마다 샌프란시스코행을 후회했다. 그 후회는 나처럼 단기 거주자들의 불만만은 아니다. 내가 있는 월넛크릭(Walnut Creek) 시의 콘트라 코스타(Contra Costa) 카운티는 지난해 상당수가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간 것으로 조사됐다. 타주에 비해 비싼 물가와 높은 세금을 캘리포니아 온화한 기후에 대한 날씨세(Weather Tax)라고 했던 것도 옛말이 됐다.
산불 연기로 잿빛이 된 캘리포니아 하늘
쇼핑몰과 슈퍼마켓은 그나마 처음 미국땅을 밟았을 때가 나았다. 산불이 주춤해진 연말부터 캘리포니아는 코로나 확진자와 사망자가 폭증하면서 자택 대피(Stay at home) 명령에 이어 밤 10시 이후엔 통행도 금지됐다. 마트는 제한된 정원만 받고, 그동안 허용되던 식당 야외 테이블 식사도 전면 금지됐다. 우리 가족이 미국 식당에서 처음 외식을 한 건 추수감사절 연휴인 11월 말, 미국에 온 지 4개월 만이었다. 네바다주와 경계에 있는 타호 호수(Lake Tahoe)의 한 패밀리 레스토랑이었다. 한국에서 찾아온 후배와 함께 동네 다운타운의 한 식당에서 미국식 바비큐를 먹은 게 두 번째 외식이었다. 난로도 없는 파티오에서 오들오들 떨면서 먹다가, 아이들의 성화에 1시간 만에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코로나로 처음엔 여행도 쉽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 주민들은 다른 지역으로 여행이나 출장을 다녀오면 10일 간의 자가 격리를 감수해야 했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나의 미국 온라인 탐구생활은 선택이 필수가 됐다.
지난해 포장만 허용된 동네 중국집
올해 8월 현재 미국은 작년에 비하면 상전벽해 수준으로 변했다. 캘리포니아에선 학교를 포함해, 도서관과 박물관과 같은 공공 시설도 이제 거의 문을 열었다. 3월 초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SF MOMA)에 이어 캘리포니아 과학관(California Academy of Sciences), 샌프란시스코 도서관, 멀리는 디즈니랜드까지 입장객들을 받기 시작했다. (과학관의 경우 최근엔 백신 접종자와 코로나 음성 판정서를 소지한 사람만 입장을 받는 것으로 바뀌었다.) 한 때 관광객이 줄어 예약이 잘되던 요세미티나 옐로스톤 같은 국립공원 내 숙박 시설들은 이제 코로나 이전처럼 빈방을 찾기 힘들다. 인기 있는 아이들의 여름 캠프는 한 달 전부터 대기 명단에 이름을 올려야 했다. 배달과 포장만 허용되던 레스토랑에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올 초까지만 해도 미국 현지에서 느낀 사람들의 위기 의식은 예상보다 컸다. 지난해 말 화장실에 쓸 휴지를 구하기 위해 시내 마트를 돌아다녔던 생각을 하면 아직도 아찔하다.
지난해 11월 생필품 사재기로 텅텅 빈 휴지
최근 다시 코로나가 확산되고 있다. 뉴욕타임즈에 따르면 내가 있는 캘리포니아 콘트라 코스타(Contra Costa) 카운티의 10만명 당 코로나 확진자는 지난 3월만 해도 일주일 평균 하루 6명(3월 26일 기준)이었다. 7월엔 21명, 8월 말엔 34명으로 훌쩍 뛰었다. 한국(3명)의 10배가 넘는다. 코로나 변이와 돌파 감염도 속출하고 있다.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와 학원에서 감염되는 사례가 크게 늘고 있다. 하지만 주변에서 느끼는 위기감은 지난해에 비해선 낮아졌다. 휴지와 생수 같은 생필품 확보 전쟁이 사라졌고, 사람들은 마스크와 소독제, 외출 자제를 통해 차분하게 대응하는 분위기다. 이렇게 바뀐 건 백신 접종과 그에 대한 기대감이다. 7월 말 현재 내가 사는 지역에서 백신을 2차까지 맞은 사람은 전체의 63%, 18세 이상은 75%, 65세 이상은 87%에 달한다. 얼마 전 골프장에서 악수를 청하는 미국인에게 습관적으로 주먹 인사를 내밀자, ‘저 백신 다 맞았어요(I’m fully vaccinated)’라며 웃었다.
코로나로 문을 닫았었던 동네 놀이터
코로나가 진정된다 하더라도, 미국이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긴 힘들어 보인다. 올 초 아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에서 대면 수업을 준비하면서 부모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 결과를 보면, 온라인 수업을 계속하겠다는 응답이 30%가 넘었다. 일부 학교에선 교사 확보 전쟁이 벌어졌다. 코로나로 인해 이번 가을에도 온라인 수업을 계속 받겠다는 가정들이 늘면서 온라인을 담당할 교사 수요가 더 늘어났다. 직장 생활도 마찬가지다. 옆집에 사는 대학 연구원은 일주일에 3일, 그것도 금토일 저녁에만 학교로 출근한다. 연구실에서 한 명씩 일하며 서로 마주치지 않도록 각자 시간을 정해 출근하는 시스템이다. 나머지 시간은 전부 재택 근무다. 혼잡한 출퇴근 시간을 피하고 필요 이상의 잡무와 커뮤니케이션이 사라지면서 코로나 이전과 비교해 삶의 질이 훨씬 높아졌다고 한다.
지난해 관광객이 사라진 샌프란시스코 관광명소 소살리토
미국에 오기 전만 해도 LG 연수자들의 후기를 비롯해 각종 카페와 블로그 글들을 꼼꼼히 찾아 읽었다. 공항 도착부터, 아이들 학교 등록, 운전면허 시험, 심지어 국립공원 방문까지 기존 ‘족보’들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예전 생활과 비교하면 좋겠지만, 개인적으로 펜데믹 이전에 미국에 살아본 적은 없다. 여행과 출장으로 미국을 몇 번 온 게 전부다. 그래도 가능하면 기존 ‘족보’들과 비교해서 달라졌을 법한 생활에 대해 소개하려 한다. 미국 초등학교 기준으로 4학년, 2학년, 킨더(유치원)에 다니는 세 딸을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