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최대 명절이라는 땡스기빙 데이에 나름 의미있는 경험을 했습니다. 아이오와 대학에서 저널리즘 박사과정에 있는 미국 친구 존의 가족모임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존의 아내가 한국인이고, 존도 한국에서 7년 넘게 직장생활을 했던 덕분에 쉽게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도 깊고, 제 엉터리 영어도 곧잘 알아듣습니다. 미국에서 만난 가장 귀한 인연이라 생각합니다.
여하튼 존의 가족과 저희 가족이 함께 2박3일 일정(11월21~23일)으로 인디애나 여행을 했습니다.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미국 가정의 전형적인 명절 행사에 참여했다는 점에서 특별한 경험이었다고 생각해 글을 씁니다.
-미국의 추석.
한해의 농사에 대한 감사를 표시하는 명절이라는 점에서 추석이나 땡스기빙이나 다를 바 없지요. 감사와 고마움의 의미가 담겨서일까요. 곳곳에서 흩어져 사는 가족이 한곳에 모인다는 점도 땡스기빙과 추석의 공통점이군요.
저는 여행의 첫날밤을 인디애나폴리스에 있는 존의 할머니 집에서 보낸 뒤 곧바로 인디애나 교외의 모닥이라는 곳에 위치한 존의 큰 누나 집으로 갔습니다. 존의 어머니, 존의 작은 누님 가족, 존의 남동생 가족, 지인 가족까지 20여명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음식은 각자 조를 나눠서 만들었습니다. 땡스기빙의 메인요리인 터키는 작은 누님의 남편, 터키와 함께 먹는 각종 스터핑과 펌킨 파이 등은 존의 어머님과, 큰 누님이 준비해왔습니다. 저는 존의 매쉬드 포테이토 요리를 도왔습니다. 여러 명이 둘러서서 삶은 감자를 깠습니다. 2시간여의 준비 끝에 터키, 매쉬드 포테이도, 터키와 함께 먹는 2~3가지 스터핑, 그레이비 소스, 크랜베리 소스, 와인 등 전통적인 식단이 차려졌습니다. 식사 뒤 나오는 펌킨 파이까지 풀 코스를 소화했습니다. 식사와 함께 마신 와인으로 정신까지 알딸딸해졌습니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명절에는 애들이 가장 즐겁다.
어린 시절 제게 추석은 친척 형 동생들과 놀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미국 아이들도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4학년인 제 딸, 1학년인 존의 딸, 4학년인 친구의 조카 셋이 삼총사가 되어 정신없이 놀더군요.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뭉친 세 악동(?)들이 마당에 있는 트램폴린에서 정신없이 뜀뛰기를 시작했습니다. 많은 대화가 오간 것도 아닌데 애들은 곧 친해졌습니다.
점심시간 전에는 아이들이 이름표를 만들어 식탁에 배치했습니다. 사람이 많아 큰 식탁과 작은 식탁이 준비됐는데요. 재미있는 건 애들 맘 대로였다는 겁니다. 아이들이 자신들의 이름표를 큰 식탁 중앙에 배치하고 나머지 이름표를 되는대로 배치하면서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습니다. 집안의 가장 어른인 존의 어머니는 작은 테이블로 쫓겨났습니다. 애들 맘이니까요. 저와 제 아내, 존의 남동생 부부도 졸지에 작은 테이블로 밀려났습니다.
한국이었다면 어른들이 나서서 할머니 자리를 중앙에 재배치하고, 애들을 작은 테이블로 몰아넣는 조치를 취했겠지요. 그런데 누구도 아이들이 배치한 자리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더라구요. 집안의 가장 어른이 작은 식탁 구석에서 식사를 하시는 모습이 참 신기했습니다. 애들을 꾸짖거나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었구요. 식사를 마친 아이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밤늦게까지 놀고 모두 한방에서 잤답니다.
-작은 즐거움
점심식사 후 사람들은 여러 무리로 찢어져 담소를 나눴습니다. 그냥 소소한 일상, 취미생활 등 소소한 주제를 놓고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제겐 할리우드 영화에서 보던 파티장면이 연상됐습니다. 물론 신기했습니다. 저녁식사 전에는 온 가족이 주변으로 산책을 나갔습니다. 특정한 코스없이 농장 인근을 20여분 동안 걸었습니다. 역시 삼삼오오 짝을 지어 다녔죠.
남은 음식으로 저녁을 가볍게 때웠습니다. 식사 후에는 존과 존의 매형이 기타연주와 노래를 하면서 간단한 공연을 했습니다. 컨트리음악이 대부분이었던 것 같네요. Take me home country road외에는 아는 노래가 없었지만 마음까지 훈훈해졌습니다.
저녁에는 손님들 각자가 가져온 침낭들을 거실과 부엌에 펴고 잠을 청했습니다. 격식을 따지지 않는 미국 사람들의 생활 방식이 엿보였습니다. 그래도 저희는 손님이라고 거실 소파로 침대를 만들어주더군요. 거실 벽난로 온기에 취해서인지 곧 골아 떨어졌습니다. 아침도 남은 음식으로 가볍게 때웠습니다. 식사를 마친 뒤 함께했던 사람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행사를 마무리했습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가족을 중시하고 작은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미국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됐답니다. 이런 점에선 아직 미국은 건강한 사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식사 전 온 가족이 테이블에 빙 둘러서서 I’m thankful for~라고 차례대로 감사를 표시했던 장면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모두가 가족들과 친지들이 함께 모여 귀한 식사를 하는 기회를 가지게 돼 감사하다고 하더군요. 저는 딱히 할 말이 없고, 영어도 짧아서 I’m thankful for everything이라고 했습니다. 한국에 돌아가서도 그런 맘으로 살도록 노력해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