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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큐’에, ‘당연한 말씀’이라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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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손과 두 발이 가지런히 모아졌다. 잘못한 게 없지만 주눅이 들었고 행여나 작은 지적이라도 나올까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아이들이 유치원 다닐 때도 선생님과의 면담은 어려웠는데, 이젠 초등학교. 더구
나 상대는 미국인 선생님이다!
 
그 첫 면담이 있던 때는 미국에 도착해 3개월 정도가 흐른 뒤. 아이는 위스콘신 주 밀워키 카운티의
작은 초등학교 2학년과 1학년에 다니고 있다. 영어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지만
아이들은 다행히 새로운 환경을 나름대로 즐기고 있었다. 학교는 정기적으로 conference를 개최하는데,
아이의 학교 생활을 두고 부모와 개별 면담을 갖는 시간이다.
 
드디어 2학년 아들의 담임 선생님과 마주한 상황. 30대 여성으로, 만삭의 몸이다. 면담은 오후 6시가
지나서 시작돼 선생님은 더욱 피곤해 보였다. 나 역시 1학년 딸의 담임 선생님 면담을 끝내고 두번째
로 면담에 임한 터라 영어에 대한 집중력은 갈수록 떨어졌다. 선생님은 아들의 학교 생활을 두고 이것
저것을 언급했다. 대강의 내용은 ‘잘 적응하고 있으니 너무 염려 말라’는 것이었다. 다만 조금 더 적
극성을 발휘하면 좋겠다는 주문을 덧붙였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아들은 아들대로 고군분투했겠지만 들리지 않는 언어에 어쩔 줄 몰라했을 것
이고, 그런 아들을 두고 선생님도 답답했으리라. 아들도 아들이지만 출산을 앞두고 말귀를 못 알아듣는
한국인 제자를 덜컥 맡게 된 선생님께 미안한 마음이 커졌다. 나름의 스트레스가 왜 없었겠는가.


선생님의 설명이 끝나고 나는 자연스럽게 감사하다는 찬사를 쏟아냈다. Thank you를 연발하는 것도
모자라 ‘I don’t know how I appreiate your love and effort for my son.’이라고 읊조렸다. 성은이
망극하다고 머리를 조아린 것인데, 되돌아온 답이 나를 황망케 했다.


“Of course.”


‘물론’이라고?
귀를 의심하며 다시 기회를 엿보았다.


비슷한 대화가 이어지고 또다시 감사의 말을 꺼냈더니, 역시나 또박또박 ‘Of course’란다. 그리고는
입을 가린 채 하품까지. ‘선생님의 노고에 감사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말에 ‘당연하죠’라는 답
을 받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러고 보니 딸의 담임 선생님에 비해 상냥함도 떨어지는 것 같고, 짜증
도 묻어나는 듯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은가.


그렇게 면담이 끝났다. 오간 대화를 물어보는 아들에게는 대충 둘러대며 불쾌한 표정을 감췄지만 내내
서운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그런데 며칠 후 한 교포 가정에서 그 일화를 털어놓자 까르르 웃음이
터졌다. 감사말에 대한 화답으로서의 ‘of course’는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일 뿐’이라는 겸양의 뜻
이라 한다. Thank you의 답으로 You’re welcome이나 No problem만을 떠올렸으니 배가 산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화답의 취지도 모르고 면담 당시 미간을 찌푸리던 내 표정을 선생님이 읽었더라면 어쩌나
하는 염려와 민망함이 차올랐다.


이제 보험이나 은행 업무 등은 별 문제 없이 해낼 수 있을 정도가 됐어도 영어로 인한 오해와 불편은
현재 진행형이다. 내 DNA 속에 침투할 시기를 놓친 영어는 여전히 발목을 잡고 있다. 특히 위의 사례
처럼 알고 있는 단어들로 곤란을 겪을 때가 많다. 모르면 찾아보기나 하지, 친숙한 단어가 내가 아는
바와 달리 활용될 때는 나 혼자 엉뚱한 길로 빠져들기 때문이다.


안다고 생각하는 단어가 힘들기는 발음도 마찬가지.
처음 와서 어려운 것 중 하나가 까페에서 americano 커피를 주문하는 일이었다. 아’메’리카노를 달라
고 하니 도저히 알아듣지 못한다. 모음 하나하나를 똑똑히 말해도, 연음으로 굴려 말해도 반응이 달라
지지 않아 결국 발음이 쉬운 cafe latte를 시킬 수밖에 없었다. 뒤늦게 깨달은 문제는 강세였다.
한글로 굳이 적자면 ‘아메리 까~ 노’라고 해야 주문이 된다.


이곳에서 거주하는 아파트 이름이 ‘white oaks’여서 이를 말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화이트 옥스’
나 ‘와이트 옥스’라고 발음하면 십중팔구 “what?”이라는 물음이 되돌아왔다. ‘와잇옥’ 정도로 말하면
그제서야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butter의 발음은 아직도 입에 붙지 않는다. 혀에 ‘빠다’를 잔뜩
발라 ‘버러’, ‘뻐러’, ‘벋어’라고 이리저리 말해봤지만 한번에 알아듣는 현지인은 많지 않았다.


그러한 자괴감을 바탕으로 이후엔 친숙한 단어도 사전에서 찾아보곤 한다. 발음도 들어보고, 용례도
다시 확인한다. 그때마다 ‘아하!’하고 무릎을 치게 되는 내용들이 적지 않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단
어를 암기할 필요도 없이 익히 아는 단어를만 제대로 활용하면 의사소통에 무리가 없겠다는 생각이다.
have, take, get, put 등만 적절히 꿰어도 영어를 훌륭히 구사할 수 있다지 않은가. 결국 back to
the basic! 영어 정복의 왕도는,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정확히 아는 데에 놓여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