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런던에 왔을 때에는 자주 연수기를 쓰겠다고 마음 먹었는데, 첫 연수기를 쓴 뒤 시간이 어느덧 4개월이 지나버렸다. 런던에 도착한지 이제 5개월이 조금 넘었다. 정착 초기에는 모든 것이 새롭고 뭐든지 우리와는 달라 보였는데, 지금은 런던 생활에 어느정도 익숙해서인지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낯선 관찰자의 시선이 무뎌지기 전에 그간의 일을 최대한 정리해 봐야겠다는 생각에 글을 쓰고 있다.
그동안 이태리,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등을 여행했고 학교 생활은 어느덧 1학기와 겨울방학이 끝나고 2학기에 접어들었다. 학교 친구들은 수업 들으면서 어떻게 여행을 이렇게 많이 했느냐며 놀란다.영국의 석사 과정이 아무리 1년 과정이라지만, 1년간 압축해서 배우는 만큼 학교에서 요구하는 공부량이 많고, 방학 기간에도 마감을 코앞에 둔 에세이 때문에 바쁘기 때문이다. 사실 그동안 그만큼 공부에는 소홀했던 게 사실이다. 익숙치 않은 영어 수업과 쏟아지는 리딩 리스트에 좌절하면서 포기할까도 생각했다. 그런 생각에 많이 놀러다녔다.
그런데 2학기에 접어든 요즘, 공부가 재밌어지고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영어 수업에도 조금 자신감이 붙어 있었고, 책 읽는 속도도 빨라졌다. 배우는 내용 역시 기자로서 현장에서 배우는 것과는 또다른 앎의 깊이가 느껴졌다. 학위 패스 여부와는 상관 없이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학문 탐구의 기회를 즐기기로 했다. 영국에서 1년간 석사과정을 밟는 연수생활을 생각하고 있는 분들에게 지금까지 경험한 범위 내에서 런던의 석사 과정 이야기를 들려드리려고 한다.
[석사 준비과정]
사실 석사과정을 택한 가장 큰 이유는 영국에 머물기 위한 비자 때문이었다. 영국에는 미국처럼 방문 연구원에게는 비자를 내주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이참에 공부도 할 요량으로 full-time 석사과정을 지원했다. 내가 택한 과정은 런던대학 연합에 속해있는 골드스미스 런던대학의 미디어커뮤니케이션 MA(Master of Arts) 과정이다.
미디어와 저널리즘, 문화사회학 연구로 저명한 교수님들이 많은 학교인데 내가 택한 미디어 전공은 엔트리(entry) 조건으로 IELTS 4개 영역(리딩, 리스팅, 라이팅, 스피킹) 점수 모두 7.0이상을 요구했다. 나의 경우, 학교에서 요구하는 영어 조건을 다 채우기 벅차, 한달간 프리 세셔널(pre-sessional) 어학과정을 듣는 조건으로 입학 허가를 받았다. 대부분의 학교는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국제학생을 위해 장단기 프리세셔널 코스를 개설하고 있는데, 영어에 능숙한 학생들도 석사과정 시작 전에 학문적 글쓰기 요령을 배우기 위해 일부러 코스를 듣는 경우도 많다.
영국 대학들의 국제학생 영어 엔트리 조건은 대체로 (IELTS overall 6.0~7.5)에서 형성돼있는데, 학교 마다, 전공마다 조금씩 다르고, IELTS 영역마다 요구하는 점수를 조금씩 다르게 설정해 놓고 있다. 또 프리세셔널 코스 시험에서 낙방하면 엄격히 입학을 제한하는 곳도 있다. 골드스미스 프리세셔널 코스는 낙방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아, 학교에서 처음에는 겁을 좀 주지만 대체로 통과시키는 분위기였다.
영국 유학을 가려면 토플이나 토익이 아닌, 영국과 호주에서 주관하는 IELTS 라는 시험을 꼭 봐야하는데, 이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만이 경험하는 애환이 또 한다발이다. 하지만 IELTS에 대해 얘기하자면 너무길어질 것 같아 이 글에서는 생략하겠다. 혹시 영국 유학을 진정 계획하고 있는 분들 중 영어가 고민이신 분이 있다면, 따로 연락을 부탁드린다.
어떤 대학의 어떤 과정을 택할지에 대해선 일찍일찍 정보를 수집해 고민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관심분야의 영국 유학 경험자, 교수님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면 가장 좋겠지만, 찾기 힘들다면 관심 있는 학교의 홈페이지를 열심히 들춰보면 입학조건이나 커리큘럼 등 왠만한 정보는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대체로 입학 지원 시기는 학기가 시작되는 해 1~2월, 빠르면 12월부터 진행하는 것 같다. 대부분의 학교가 합격자를 한꺼번에 뽑는 방식이 아니라, 지원하는 순서대로 합격 여부를 알려주면서 자리를 채워나가는 rolling admission 방식으로 학생을 선발한다. 인기 있는 전공이라면, 될 수 있으면 빨리 지원하는 게 좋다.
선발 기준은 영어 점수 외에도 자기 소개서(personal statement)와 교수 추천서, 학점 등이 포함되며 직장 경력이 있으면 관련 이력서와 직장 상사의 추천서를 추가한다. 교수 추천서의 경우, 대학 때 자신을 지도 했던 전공 교수님의 추천서를 받는 것이 정석이지만, 직장생활을 오래해 과거 교수님과 연락하기 힘든 경우, 사회 경험을 통해 알게된 교수님의 추천서를 받아도 괜찮다고 한다.
[석사과정의 구성]
앞서 말씀 드렸지만, 영국은 대부분의 석사과정이 1년이다. 일부 상위권 대학의 MBA는 2년 과정이다. 대체로 9월~10월쯤 개강하는데, 겨울학기, 봄학기, 여름학기로 나뉘고 중간 중간에 한달 정도씩 방학이 주어진다. 한학기는 2개월 반~3개월 정도다.
내가 속한 미디어커뮤니케이션 학과의 경우 180 학점을 이수해야 졸업을 할 수 있는데, 60학점에 해당하는 논문을 제외하고, 30학점이나 15학점짜리 전공 및 선택 과목으로 120학점을 채워야 한다. 나는 30학점짜리 4과목을 선택했다. 겨울학기에 2과목, 봄학기에 2과목, 여름학기는 본격적인 논문 작업으로 구성한 셈이다. 한학기에 2과목이 언뜻 여유 있어보일 수 있지만, 이런 필수과목 외에도 리서치 스킬, 크리티컬 스킬 등 academic writing을 위해 필요한 연구 방법과 글쓰기 요령 등을 가르쳐주는 수업이 개설돼, 일주일에 3~4일 정도는 학교에 가게 된다. 또 학교에 가지 않더라도 매주 읽어야할 리딩 리스트가 주어지기 때문에 어디서든 공부는 해야 한다. 공부에 열정이 많은 학생들은 관심있는 과목을 청강하느라 일주일 내내 학교에 가기도 한다.
강의는 대체로 대강의실에서 1시간~2시간 정도 교수님의 수업이 진행되고, 이후 소그룹으로 나눠 토론하는 시간인 세미나가 또 1시간 진행된다. 강의를 이해하고, 세미나 시간에 교수님의 질문에 당황하지 않으려면 미리 열심히 읽어가는 수 밖에 없다. 평가 방식은 과목마다 다른데, 5000~6000 단어 이상의 에세이를 제출해 평가를 받는 것이 대부분이나 전공과목의 경우 전통 방식의 논술 시험(written exam)을 치르는 경우도 있다.
에세이나 시험 치는 기간이 대체로 방학이 끝나는 무렵이라, 영국 석사 과정의 방학은 사실 방학이 아니다. 2학기인 봄학기가 시작되면 본격적인 논문 작업에 들어간다. 지난 학기에는 모든 학생들이 자신이 생각중인 논문 주제를 요약해 제출했는데, 이 주제에 따라 지도교수님(supervisor)이 배정됐다. 앞으로 지도교수님과 방문 약속을 잡고 20~30분에 걸친 ‘튜토리얼'(tutorial, 논문지도)을 최소 6번 이상 받아야하는 것이 학생의 의무다.
영국 석사과정은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려운 과정인 것 같다. 아직 2학기를 막 시작한 단계라 뭐라 결론 내리기는 어렵지만, 영어가 모국어인 학생들에게는 1년만에 큰 수업 부담 없이 끝낼 수 있다는 점에서 꽤 수월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제대로 하려면 뭐든 쉬운게 없다. 이곳도 그냥 석사를 패스만 해서는, 졸업 후 취업이 쉽지만은 않다고 한다. 100점 만점에 50점 이상이면 fail을 면할 수는 있지만, 최소 60점 , 즉 B는 되어야 준수한 성적으로 인정받아 원하는 곳에 취업할 수 있다고 한다.
[학교 생활]
런던의 많은 대학들은 인터내셔널 학생들로 붐빈다. 대다수가 유럽 각지에서 온 학생들이고, 이 외에도 미주, 중동, 아시아 학생들이 섞여 있다. 내가 함께 수업을 듣고 있는 학생들의 국적만 나열해도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태리, 스페인, 그리스, 오스트리아, 폴란드, 레바논, 터키, 벨기에, 덴마크, 미국, 캐나다, 에콰도르, 뉴질랜드, 중국, 대만, 일본, 태국 등 20개국이나 된다. 아시아 중에는 중국인들이 어딜가나 많고, 이 학교만의 특징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본인들은 의외로 많지 않고 한국 학생이 그보다 더 많다.
영국 현지인들의 대학 진학률은 그다지 높지 않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교육을 강조하긴 하지만, 대학 입시에 목매지 않고 고등학교 졸업 후 대부분 취업 전선에 뛰어들기 때문이다. 대신 다른 유럽 학생들이 런던의 학교를 채우고 있다. 이들이 런던에 오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대체로 런던에 기회가 많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유로존으로 묶여 있는 유럽 대다수 국가 경제가 침체기를 맞고, 극심한 청년실업에 시달리는 반면, 파운드화를 지켜내며 상대적으로 건실한 성장을 하고 있는 영국, 그 중심지 런던에는 취업 기회가 훨씬 많다는 것이다. 유럽의 젊은이들이 영어를 배우고, 스펙을 높여서 원하는 일자리를 찾아보려는 모습이 우리나라 대학생들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아보인다. 이곳 학생들은 그래선지 어딘가 모르게 센티멘탈하고 쾌활하기보다는 시니컬하다. 오후 4시면 해가 지는 요즘의 런던 날씨 때문인 것 같기도 하지만 말이다. 대다수 학생들이 이런 시니컬한 20대여서 같이 어울리기가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친구들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전혀 신경쓸 일이 아니다라고 말해주었다.
이곳 학생들에게 배우는 것은 남의 눈치 안보며 당당하게 내 방식대로 살 줄 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존중하고 간섭하지 않는다. 발표하는 것을 꺼리고, 수업중 누군가 질문을 많이 하면 너무 나선다고 생각하는 우리 문화와 달리, 이들은 궁금하거나 의견이 다르다고 생각되면 언제든 질문하고 토론한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것을 좋아하고, 그런 탄탄한 논리 위에 세워진 가치관을 높이 산다. 지금 경제는 좀 어렵지만, 그런 합리적인 문화가 유럽을 번영시킨 힘이고, 앞으로도 이들을 지탱해 줄 힘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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