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수국가로 미국 대신 영국을 택한 것은 1년 짜리 석사 과정이 있다는 것뿐 아니라, 다양한 유럽 국가를 경험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고민이 됐던건 미국 대비 비싼 물가였다.
가장 비싼 것은 월세다. 현재 사는 곳은 런던 킹스크로스역 근처다. 가장 중심부인1존으로 주거비가 비싼 지역이지만, 운 좋게 영국 교육 자선단체가 운영하는 주거 커뮤니티 ‘Goodenough College’에 지원해 입주 자격을 부여받았다. 방 3개에 전기료, 난방비, 인터넷비, 가구 지원 등 모든 비용을 포함해 월 500만원에 육박하는 월세를 낸다. 세계 각국에서 온 런던대 소속 대학원생들이 최고의 커뮤니티에서 함께 생활하며 교류하라는 취지로 만든 곳으로,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직접 후원할만큼 권위있는 시설이다. 런던대 소속 각 대학이 운영하는 기숙사와는 별개의 공간이다. 자체 선발 절차를 거치는데 영국을 비롯해 유럽, 미주, 아시아, 아프리카 등 세계 각국 출신을 고루 뽑아 다양성을 담보한다. 영국 외무성 지원을 받는 쉐브닝 장학생도 많다. 입주해보니 한국 출신도 몇 가족 있는데 언론인은 혼자이고, 나머지는 공무원 혹은 공기업 직원이다. 대영박물관(영국박물관)과 킹스크로스역이 걸어서 10분일만큼 시내 중심가로, 주변이 대학가라 분위기도 차분하고 아이들 학군도 훌륭하다. 테니스장 딸린 프라이빗 가든이 있고, 커뮤니티 안에서도 하루가 멀다하고 새로운 이벤트가 열려 회원들끼리 교류하기 좋다. 런던대로 학위 연수를 온다면 입주를 적극 추천한다.
런던은 장바구니 물가가 비싼 것으로 유명하지만, 수퍼마켓의 생필품 가격은 상대적으로 싸다. 특히 우유나 과일, 채소, 고기류는 확실히 저렴하다. 공급망이 안정적이라 그런지 농수산물 가격도 1년 내내 비슷하다. 아이들을 위해 거의 매일 사다시피 하는 우유의 경우, 집 근처 수퍼마켓 웨이트로즈(Waitrose)의 자체 브랜드 우유가 4파인트(2.27리터)에 1.55파운드(2650원)다. 테스코(Tesco)에서도 같은 용량이 1.45파운드다. 한국 이마트를 검색해보니, 4월초 현재 자체 브랜드인 피코크 우유 2.3리터가 할인가로 6120원이다. 영국의 2배가 넘는다.
한국에서 최근 사과 대란, 소위 ‘애플레이션’이 발생했다는 뉴스를 봤다. 이 곳 사과는 품종이 약간 다르지만 대략 5~6개들이 한 봉이 1.8파운드(3100원) 정도고 비싼 것도 3파운드(5100원)면 살 수 있다. 이마트는 ‘물가 안정 사과’라 이름 붙은 것이 5개가량에 8800원이었다. ‘최애 과일’인 딸기도 400g짜리 한 팩에 웨이트로즈는 2.8파운드(4800원), 테스코는 2.2파운드(3760원)다. 이마트는 500g 짜리 최저가 상품이 7480원이다. 맛이 한국 딸기에 못 미치긴 하지만, ‘반값 딸기’를 종종 사먹으며 한국에선 하지 못했던 호사를 누린다. 감자, 양파와 같은 채소류와 소고기, 닭고기도 계산대에 설 때마다 ‘싸게 샀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와인 역시 진열 상품 대부분이 10파운드(1만7000원) 안팎이라 고르는게 부담스럽지 않고 맛도 꽤 준수하다.
여담으로 영국 수퍼마켓은 ‘계급’이 존재한다. 어느 수퍼마켓의 에코백을 들고 장보러 가느냐에 따라 미묘한 계급의 신호가 전달된다는 것이 영국인들 스스로의 얘기다. 가격과 대상 고객을 기준으로, 고급은 웨이트로즈와 막스앤스펜서(M&S)를 꼽는다. 중산층 느낌은 세인즈버리(Sainsbury)와 테스코 정도다. 그 다음으로는 저렴한 가격이 무기인 아스다(Asda)나 독일계인 리들(Lidl), 알디(Aldi)다. 같은 공산품이라 하더라도 어느 수퍼마켓 브랜드에 가느냐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고, 각 지역별 소득 수준에 따라 들어서는 체인 종류도 다르다. 처음엔 멋모르고 집 근처의 웨이트로즈에 자주 갔는데, 생필품을 제외한 다른 물품이 최소 20%가량 비싸다는 점을 알고난 후로는 좀 멀더라도 리들을 종종 찾는다.
쌀이나 라면, 즉석카레 같은 한국 식재료도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데 가격이 만만치 않다. 미국에 많은 H마트가 영국에도 있다. 런던의 경우, 매장이 시 외곽에 있어 직접 가긴 어렵지만 온라인으로 주문하면 집까지 배송해준다. 대신 시내에는 ‘오세요’ ‘서울플라자’와 같은 한국식 슈퍼마켓이나 ‘티안티안’이란 중국 슈퍼마켓이 곳곳에 들어서있어 편리하다. 라면은 1.09파운드(1900원), 참이슬은 한 병에 6.89파운드(1만2000원)다. 쌀은 ‘경기미’ ‘삼수갑산’ 같은 이름이 붙어있어도 미국산이거나 베트남산이 대부분이고, 정말 한국산 쌀을 사려면 10kg에 40파운드(6만9000원)쯤 한다. 한국 가격의 최소 두 배를 낸다고 생각하면 된다.
버스는 한 번 타는데 1.75파운드(3000원), 지하철은 구간별로 최소 2.7파운드(4700원)부터 시작이다. TV를 보려면 공영방송 BBC 수신료도 필수인데, 연간 159파운드(27만5300원)다. 이발비도 30파운드(5만2000원)쯤 한다. 한국에 있을 때는 한 달에 한 번 머리를 잘랐는데, 지갑을 열지못해 자꾸 덥수룩해지는 남편을 보다못한 아내가 아마존에서 ‘바리깡’을 샀다. 경험이 전무한 사람인데 혼자 유튜브에서 동영상 몇 편을 훑어보더니 내 머리를 잡았다. 고물가와 유튜브의 폐해다. 최근 지인으로부터 ‘런던 시내의 헤어아카데미에 가서 10파운드를 내면 수련생이 머리를 잘라준다’는 말을 들었다. ‘돈을 조금 더 주면 강사가 직접 잘라준다’는 말에 반색했는데, ‘대신 학생들이 빙 둘러서서 머리자르는 모습을 지켜본다’고 덧붙였다. 매달 아내의 실력이 늘고있어 다행이다.
쇼핑을 하기에도 영국은 참 매력적이지 않은 국가다. 뭘 사도 다른 나라보다 항상 비싸다. 부가가치세도 20%나 된다. 블랙프라이데이 같은 대형 쇼핑 시즌도 세일 시늉만 하고 넘어갔다. 영국인들도 인근 유럽 국가로 넘어가서 쇼핑하고 택스리펀(세금 환급)을 받아 실속을 챙긴다. 영국은 2021년 브렉시트 이후 관광객을 위한 택스리펀 제도마저 없애, 내외국인 가릴 것 없이 굳이 영국에서 지갑을 여는 사람이 많지 않다.
단점 위주로 적었지만 그럼에도 영국은 매력적인 나라다. 하루 두 끼만 먹고 살아야 한다고 해도 런던에 살아볼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