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보기

멀고도 험한 미국의 총기규제

by

미국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제일 자주 가는 곳은 월마트나 코스트코 등 대형마트일 겁니다.


저 역시 가족들과 함께 식료품과 가재도구를 사러 하루가 멀다 않고 다녔는데 쇼핑하다 움찔 놀란 적이 있습니다. 아이들 장난감 코너를 지나 생필품 코너를 둘러보는데 한가운데 떡 하니 실탄을 팔고 있는 겁니다. 아이들을 동반해 가족단위로 쇼핑을 하는 곳에 실탄이 진열돼 있는 걸 보니 미국의 총기소지가 얼마나 자유로운지를 실감하게 됐습니다. 뿐만 아니라 ‘딕스 스포츠’같은 스포츠 용품 전문 마트에 가면 어김없이 한쪽 편에 상당한 규모의 총기판매 코너가 있습니다. 사냥용 엽총뿐만 아니라 군대에서나 사용할 것 같은 소총류까지 있습니다. 또 석궁이나 단검류도 매우 많은 종류가 쌓여있어 웬만한 무기고를 방불케 합니다. 동네 슈퍼마켓을 가도 잡지코너에 가면 과장 좀 보태 반은 연예인관련 잡지고 나머지 가운데 절반은 총기류에 관한 잡지입니다.



왼쪽은 월마트에서 팔고 있는 실탄들. 일반 생필품들 옆에 버젓이 진열돼 있어 더 놀랐습니다.
오른쪽은 미국 스포츠용품점에서 흔히 찾아 볼 수 있는 총기판매 코너입니다


한번은 여행 중에 시골의 조용한 마을을 지나게 됐는데 식당과 주유소를 찾지 못해 고생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작은 마을에도 총을 파는 상점은 두 곳이나 있더군요. 나이가 지긋하신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이 엽총을 들고 들락날락하는데 어찌나 자연스럽던지 좀 무섭기까지 했습니다. 또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크고 작은 총기박람회를 연다는 광고판을 심심찮게 발견하게 됩니다. 대부분 자동소총을 전자동으로 쏠 수 있다고 광고하는데 미국의 총기마니아 들에겐 법적으로 반자동 총기류만 허용되는 상황에서 전자동 총기류를 쏴 볼 기회를 얻는 게 나름 로망인 듯 했습니다.


TV를 켜봐도 총기와 관련한 프로그램이 매우 많습니다. 요즘 인기 있는 포맷인 서바이벌 형식의 총기 경연 쇼도 있습니다. 미국 전역에서 내노라 하는 총잡이들이 모여 산과 들을 달리고 가건물에 침투하면서 각종 권총 소총 산탄총 기관총들을 차례로 사격하며 우승자를 가리는 게임인데 꽤 인기가 있습니다. 이런가 하면 곰사냥이나 사슴사냥 과정을 며칠 밤낮을 따라 다니며 취재해서 보여주는 프로그램도 있고 총을 개조해서 누가 더 성능이 좋은 무기를 만드느냐를 보여주는 건스미스에 관한 시리즈도 볼 수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을 보다가 좀 쇼킹했던 것은 아무래도 요즘 총기에 관한 여론이 나빠서인지 가족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듯한데 젊고 예쁘장한 아기엄마가 유모차에 갓난아이를 태우고 와서 코끼리도 잡을 만한 고성능 사냥총을 쏘아 본 뒤 다시 유모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이 나오더군요. 아무리 TV이지만 그 과정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마치 식료품 사러 가는 모습과 다를 것이 없어 보였습니다.



미국의 한 리얼리티 다큐멘타리 프로그램. 젊은 엄마가 아기를 데리고 총기상에 들어와 종업원들과 담소를 나누고 곧바로 아이 옆에서 고성능 사냥총을 다루는 모습을 교차 편집해 ‘평범한 주부들도 스스럼 없이 총기에 다가간다’는 이미지를 심어줍니다.


미국에서 허가 받은 총기만 전국적으로 3억 정이 넘고 또 가정당 총기보유비율은 50%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한집 건너 한집씩 총기를 소지하고 있는 셈이죠. 총기를 보유하는 과정 또한 자연스러운데 가족이나 친한 친구끼리 선물하거나 물려주는 경우도 많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소지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평온한 일요일 날 아침 산길을 산책하다 보면 곳곳에서 총성이 들리는데 보통 주말을 맞아 사격장을 찾거나 사냥을 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가끔은 전쟁터처럼 요란하게 연발로 쏘아대는데 하도 자주 듣다 보니 익숙해져 이젠 놀라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총기가 많다 보니 하루가 멀다 않고 총기사고가 잇따르는데 아침에 눈을 떠 뉴스를 켜 보면 어김없이 총기사고 소식을 전해 듣습니다. 거의 매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치 한국의 아침뉴스에 교통사고나 화재사고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아주 일상적인 사건사고가 총기사고나 범죄사건입니다. 실제로 3만명 이상이 총기사고로 목숨을 잃는다고 하니까요.



매일 아침 뉴스마다 어김없이 전해지는 간밤의 총기사고 소식


샌디훅이라는 끔찍한 사고의 파장이 가시기도 전에 연이어 충격적인 소식이 이어지고 있는데 얼마 전에는 조지아 주에서 두 명의 십대 강도가 유모차를 미는 엄마에게 다가가 돈을 요구하다 돈이 없다고 하니 엄마의 다리에 총을 쏜 뒤 유모차에 탄 아이의 머리를 겨냥해 총을 발사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아이를 잃은 엄마가 대성통곡을 하면서 인터뷰를 하는데 아무리 흉악하다 하더라도 유모차에 탄 아이를 정조준 해서 총을 쏘는 인간들의 뇌 구조는 도대체 어떨지 궁금하고 치가 떨립니다.


이 지경에 이르다 보니 총기규제에 대한 여론이 당연히 높아지고 있습니다. 샌디 훅 사건이후 총기규제에 대한 찬성여론은 역대 최고치인 54%에 이를 정도입니다. 그러나 정치적 사회적 현실은 좀 다릅니다. 미국 정부는 반자동 소총과 대용량 탄창의 거래를 금지하는 강력한 총기 규제안을 발의했지만 의회를 통과하긴 어려운 실정입니다. 미국의 개척사는 총의 역사와도 다름 없는 만큼 헌법에 인민의 무장권리를 명시하고 있습니다. 총은 단순한 방어무기 차원을 넘어 아직도 많은 미국인들에게 시민 권리의 상징이며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전통적 가치관의 근간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부엌에서 식칼을 없앨 지 언정 총은 포기 못한다는 목소리까지 나올 정도니까요.


여기에다 가장 강력한 이권단체인 전국총기협회(NRA)의 조직적인 로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총기 규제안에 대한 법적 모순을 치밀하게 분석하고 총기가 범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통계를 반박하기 위한 논리적인 자료를 만들어가며 이성적인 대응을 하는 한편 450만 명의 회원들을 동원해 갖가지 퍼포먼스와 규제반대집회를 열어 지역구 정치인들을 압박합니다. 예를 들어 평범한 중산층의 두 아이를 키우는 총기협회 회원인 엄마가 자기 아이를 지키기 위해 무장을 하겠다며 집에 도둑이 들면 누가 지켜주느냐며 차분하게 TV인터뷰를 하는데 일면 무시할 수 없는 설득력이 있어 보였습니다.


무엇보다 든든한 자금 줄을 이용해 매년 1억 달러가 넘는 정치헌금과 로비자금을 제공하고 있는데 이를 마다할 수 있는 정치인들은 많지 않습니다. 개혁적인 성향의 민주당 의원들 조차도 총기협회의 후원을 거절하기 힘든 현실이니까요. 이렇듯 회원들만으로도 한 나라를 만들 수 있을 만큼 자금뿐 아니라 각계 각층의 유명인사들도 넘쳐나는 총기협회는 미국 정치인들에게 적으로 돌리면 가장 치명적인 단체일 수 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민주당이 1994년 공격무기금지법 채택을 주도한 이후 다음 중간선거에서 패배해 12년 동안 장악했던 의회를 내주게 되는 데는 총기협회의 반 민주당 활동이 컸다는 평가입니다. 또한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추종하고 수호해야 할 미국 정부가 총기기업을 규제해서는 안된다는 경제철학적인 딜레마 문제도 얽혀 있어 이래저래 골치가 아픈 상황입니다. .



“나에게서 총을 빼았으려면 나를 먼저 죽여라”고 외칠 만큼 역대 가장 강력한 리더십의 소유자로 평가되는 영화배우 찰턴 해스턴 전 전미총기협회 회장


결론적으로 미국에서 총기규제는 현 상황에서는 아무리 끔찍한 범죄가 잇따른다고 해도 쉽게 이뤄질 수 없는 문제입니다. 심지어 샌디 훅 사건 이후에 선생님들을 무장시켜 범죄에 대응하자는 주장까지 제기될 만큼 총기 옹호론자들의 목소리는 수그러들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총기규제에 있어서는 이 모든 노력을 과정으로 보자는 여론이 더 현실적입니다. 미국은 정치적으로 결코 급진적인 의사결정을 하는 구조는 아닌 듯 합니다. 명백히 옳은 판단일지라도 수 많은 논쟁과 검증을 거쳐 긴 과도기를 두고 변화를 추구하는 게 익숙한 사람들이니까요. 신중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필요이상의 책임을 지기 싫어하는 관료적인 성향일 수도 있습니다.


혹자는 미국의 총기규제에 대한 희망을 보려면 미국의 흑인들이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되찾는 과정과 결코 몰락할 것 같지 않았던 담배회사들에 대한 규제가 얼마나 긴 시간을 두고 이뤄져 왔는지를 참고해야 한다고 합니다. 총기규제는 아마 미국 역사에서 가장 긴 시간 동안 논란을 거쳐 진행될 과제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