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에서 요코하마로 넘어가는 길목에 오타구(大田區)라는 곳이 있다. 도쿄 도심에서 급행 전철로 20여분이면 도착하는 이곳은 일본의 가장 대표적인 중소기업 단지가 위치한 곳이다. 한국으로 치면 구로디지털단지쯤 될까.
소규모 공장도 적지 않은 곳이 오타구 중소기업단지 지만, 부품을 공급받기 위해 한국과 일본의 내노라하는 대기업 임원들이 찾아와 굽실거릴 정도로 기술력 하나만은 최고로 인정받는 곳이다. 한마디로 일본 중소기업의 자존심이자 심장인 셈이다.
얼마전 오타구 중소기업 단지를 찾아가 그 곳 고위 관계자들을 만나 한참 동안 대화할 기회가 생겼다. 오타구 중소기업들의 경쟁력은 익히 알고 있던터라 한국 대기업과의 협력을 기대하고 ‘한국 대기업이 오타구의 중소기업에 투자를 하면 어떻겠냐’는 질문을 던졌다. ‘한국의 투자 환영한다’는 답을 기대하고 던진 질문이었으나 그쪽에서 정작 나에게 건넨 말은 ‘투자는 필요없다’였다.
오타구의 중소기업들은 기술력이 높은데도 양산체제를 갖추지 않아 대기업이 원하는 만큼 물량을 공급하기 어려운 경우도 적지 않다. 따라서 자금을 조달해 양산체제를 갖추면 이윤을 높일 기회가 있을텐데도 그들은 한국의 투자에 별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왜 일까. 오타구 관계자들의 설명은 이랬다.
“이곳 오타구 중소기업 사장들은 기술과 최고의 제품을 만드는데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다. 예를 들어 자기 공장의 땅이 시가로 얼마나 하는지도 잘 모르는 사장들도 많다. 그 만큼 최고의 제품을 만드는데만 혼신의 힘을 기울이는 사람들이다. 공장규모를 키우는 것도 좋지만 기술과 제품이 먼저다. 한국 대기업 투자를 받았다가 기술이 유출되거나 공장을 섣불리 키웠다가 품질이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
이런 설명을 듣는 순간 머리에 스친 것이 일본의 장인 정신인 ‘모노즈쿠리(モノづくり)’이다. 모노즈쿠리는 물건을 뜻하는 ‘모노’와 만들기를 뜻하는 ‘즈쿠리’의 합성어로 ‘혼신의 힘을 쏟아 최고의 물건을 만든다’는 의미이다. 일본의 제조업의 경쟁력과 자존심을 보여주는 말로 1950년대~80년대 일본의 고도성장기를 이끌었던 경쟁력이기도 하다. 이곳 오타구의 중소기업 사장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영원칙은 모노즈쿠리였던 셈이다.
일본 중소기업의 모노즈쿠리 정신은 얼마전 후쿠오카에서 만났던 경영자들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도쿄에서 비행기로 두 시간여를 날아온 나에게 그 중소기업 사장은 “장인 정신은 베낄 수 있는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 말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장인 정신을 가진 엔지니어는 제품을 설계할 때 나사 하나까지도 ‘왜 그위치에 있어야 하는가’를 고민하고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최고의 제품이 나온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남의 것을 베끼면 애초 장인정신을 가진 엔지니어의 모노즈쿠리 정신을 모르기 때문에 사소한 부분에서 설계를 바꾸고 그렇게 되면 품질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그의 설명에서 모노즈쿠리와 엔지니어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리고 ‘세계의 1등 제조업 국가, 일본의 경쟁력은 모노즈쿠리에서 나온다’는 말이 실감나기도 했다. 모노즈쿠리가 일본의 자존심 자체라는 생각도 들었다.
여기까지만 얘기하고 끝나면 이글의 제목은 ‘모노즈쿠리에 대한 찬사‘가 되겠지만, 나름 반전이 있다. 모노즈쿠리 정신에 대해 경탄하고 있던 나에게 어느날 만난 일본 대기업 관계자는 ‘모노즈쿠리에 대한 자만심이 일본 전자업체의 몰락을 불러왔다‘ 얘기를 들려줬다. 일본 전자기업들이 모노즈쿠리에 집착하면서 시장의 흐름을 놓쳤고 여기서 비극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즉 ‘물건만 최고로 만들면 어디서든 사줄 사람이 나타난다‘는 모노즈쿠리 경영이 일본 전자기업들의 판단력을 흐려놨고 이 때문에 시장의 수요를 무시했다는 것이다.
기업별로 모노즈쿠리에 대한 집착이 어떻게 잘못된 경영판단을 내리게 했는지 살펴보면 이렇다. 먼저 샤프. 샤프는 글로벌 전자업계에서 전설로 통하던 기업이다. 세계 최초의 트랜지스터 계산기를 비록해 ‘글로벌 제1호 전자제품‘을 무수히 쏟아냈고 LCD의 ‘종가(宗家)’로 불릴 만큼 LCD산업의 선두주자였다. 하지만 ‘100년 기업’ 샤프가 최정점에서 바닥으로 추락하는 데는 불과 3년도 걸리지 않았다.
샤프의 실패 원인으로는 리스크를 분산하지 않고 대형TV와 패널에 집중한 것을 꼽는다. 샤프는 가메야마 공장 설립을 계기로 LCD패널과 TV사업의 꽃을 피웠지만 여기에 도취된 나머지 세계 최초로 10세대 LCD공장을 짓기로 하고 4200억 엔이라는 거액을 투자한다. LCD패널은 ‘세대‘가 올라갈수록 대형TV를 만드는데 효과적일 수 있다. 기술력과 자본력이 바탕이 돼야 대형패널과 대형TV를 만들 수 있고 샤프가 경쟁사보다 여기에 먼저 뛰어든 셈이다.
‘모노즈쿠리‘에 심취해 물건만 잘 만들면 팔 수 있다고 생각한 샤프는 글로벌 시장을 겨냥하고 60인치 이상 대형TV의 생산을 크게 늘렸다. 하지만 당시 전 세계에 60인치가 넘는 TV를 볼만한 거실을 가진 가정이 얼마나 됐겠나. 샤프가 판매부진에 시달린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때마침 동일본 대지진 등으로 일본 경제가 어려움을 겪으면서 샤프의 대형TV는 국내에서도 잘 팔리지 않았고 이는 결국 경영위기로 돌아왔다.
정리하면, 모노즈쿠리에 대한 집착이 시장이 필요로 하는 이상으로 ‘과잉(過剩)제품‘을 만들게 했고 이것의 샤프의 몰락을 가속시켰다는 얘기이다. 파나소닉도 PDP, 리튬전지, 태양전지 등의 사업에서 ‘물건만 좋으면 사줄 사람은 나타난다’는 모노즈쿠리의 정신을 과신하다 낭패를 봤다는 분석들이 나온다.
세상일은 참 묘하다. 일본의 경쟁력 자체였고 우리가 부러워하던 모노즈쿠리가 어느 순간에는 일본 전자기업의 발목을 잡았으니 말이다. 또 세상 일은 한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게 아닌 듯하다. 기술에 대한 자존심으로 비춰졌던 모노즈쿠리에 기술에 대한 과신이라는 또 다른 면이 있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