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빙(살림살이) 리스트 잘 보았습니다. 안타깝게도 저희와 잘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짤막한 편지 한 줄에 우리 집엔 비상이 걸렸다. 연수를 마무리하며 홀가분한 마음으로 떠나려 준비하던 여행 계획 짜기부터 제동이 걸렸다. 침대며 식탁, 소파 등 혼자선 들기도 힘든 미국식 가구는 어떻게 처분하고, 온갖 가전 제품이며 세기도 쉽지 않은 저 많은 부엌 세간살이와 가라지(차고)의 각종 용품들은 또 어떻게 해야하나. 하나하나 중고로 파는 것도 내다 버리는 것도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드는 일인데, ‘무빙은 당연히 받는 거 아닌가’라고 여겼던 내가 너무 세상 물정을 몰랐던 걸까. 800달러에 일괄 인계 받은 무빙을 실제로 보고 실망 아닌 실망을 하면서도 ‘잠깐 지내다 갈 건데 새 살림을 장만하는 건 오버지’라고 안도했었다. 그러면서도 ‘설마 다음 사람이 안 받는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했는데,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이 된 것이다.
낡고 해졌지만 없는 것보단 있는 게 낫다는 무빙
필자가 생활하는 노스캐롤라이나(NC)주 채플힐(Chapel Hill)의 경우 대체로 들고나는 한국인 연수자들 간에 집과 무빙 차를 대물림 하는 게 오랜 관행이다. 기존 임차인이 다음 임차인을 구하는 방식으로 공실이 없다시피하니 임대인들도 반긴다.
단편적 경험이지만 연수 예정자 입장에서도 나쁘지만은 않다. 이곳의 무빙 시세는 통상 1,000달러 안팎이어서 금전적으로 큰 부담은 아니다. 한국인의 라이프스타일에 맞춤 한 살림살이를 하나하나 구하는데 시간과 노력을 감안하면 오히려 싸게 먹힌다고 볼 수도 있다. 무빙이 없는 ‘깡통 집’을 구한 탓에 박스를 식탁 삼아 몇 날 며칠을 컵라면으로 때우며 물건을 사 채웠다는 연수자들의 ‘무용담’을 들으면 더 그렇다. 연수자들도 하나 같이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낫다”고 입을 모은다.
무빙이나 차를 안 받겠다고 하면 기존 연수자와 연락이 끊겨 점 찍어 뒀던 집을 놓치는 안타까운 경우도 있으니 이 또한 감안해야 한다.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을 부르는 이가 간혹 있긴 한데, 이런 집은 피하는 게 좋을 수도 있다. 비싼 값에 무빙을 인수한 한 연수자는 차량도 넘겨받았는데, 알고 보니 1년에 반은 정비소에 들어가 있어야 하는 차였다. 앞서 온 이웃 연수자들이 “팔아선 안 되는 차를 팔고 갔다”고 위로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다. 다음 사람에게 덤터기 씌울 수도, 팔아서는 안 되는 차를 무턱대고 넘길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내내 속앓이만 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일괄로 못 넘기면 골칫거리… 미리미리 대비해야
무빙 폭탄을 맞은 필자의 경우는 다소 이례적인 사례다. 한국인 연수자들이 선호하는 타운홈으로, 연수를 시작한 지 석 달도 안된 지난해 11월부터 무빙과 차를 일괄 인수하고 싶다는 이가 있었다. 하지만 너무 이른 시점이라 천천히 얘기하자고 미뤄뒀던 게 화근이 됐다. 임대인이 일찌감치 다음 세입자를 직접 구하면서 이어 살 연수자와 터놓고 무빙 문제를 얘기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미국에서도 한국인 연수자가 선호하는 지역은 뻔하니, 임자가 나섰을 때 넘기는 것이 괜한 수고를 안해도 되는 길이다.
다른 이유로 무빙을 못 넘기게 되는 일도 아주 없진 않으니 무빙을 넘겨받을 때 처분이 용이한 지도 미리 계산해 두는 게 나아 보인다. 일례로 채플힐과 같은 생활권으로 연수자들이 많이 찾는 캐리(Carry)의 경우 신규 한국인 연수자 수요자 줄어드는 추세라는 점을 감안하는 게 좋다. 캐리는 한국으로 치면 일산이나 분당과 같은 신도시 격으로 생활 인프라가 좋은 편인데, 최근 중국, 인도계 인구가 급격히 유입하면서 수용 정원을 넘긴 초등학교가 많아진 게 문제가 되고 있다. 집 근처 학교를 두고 차로 40분 걸리는 학교가 배정 된다니 자녀를 둔 사람들이 입주를 꺼리면서 공실이 되는 집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중고로도 못 판 무빙은 ‘Solid Waste’로
일괄로 넘기지 못한 무빙은 하나하나 중고로 팔거나, 내다 버려야 한다. 되파는 게 그나마 손쉬운 편인데 채플힐의 경우 포털사이트 다음의 ‘NC-KOREAN’ 카페와 같은 한인 커뮤니티 사이트를 이용할 수 있다. 작은 살림은 대략 10달러 내외에서, TV 등 상대적으로 비싼 가전이나 가구는 연식이나 구매 가격 등을 감안해 그때그때 시세에 맞춰 내놓는 경우가 많다.
미국식 당근마켓인 ‘Nextdoor’, ‘페이스북마켓’ 등도 있다. 특히 소파와 같이 큰 물건도 거래가 성사되면 구매자가 큰 트럭을 몰고 와 직접 가져가니 파는 입장에선 생각할 거리가 줄어든다는 장점이 있다. 무빙뿐 아니라 차도 팔 수 있다.
끝내 주인을 찾지 못한 무빙은 각 카운티에서 운영하는 ‘Solid Waste’에 직접 가져다 버려야 한다. 별도의 예약은 필요 없고, 영업시간에 맞춰 물건을 싣고가 품목별로 지정된 장소에 내려놓으면 된다.
문제는 부피가 큰 물건을 옮길 때다. 필자가 타던 차는 도요타 시에나로 상대적으로 큰 차량이지만 소파, 식탁, 침대 등은 실을 수가 없었다. 이때는 트럭을 빌려야 하는데 유홀(U-Haul) 등을 이용할 수 있다. 24시간 단위로 정해지는 렌트비와 별도로 주행 거리 비용, 기름값 등을 추가 지불해야 한다. 대략 하루 정도 빌리는데 100달러 안팎이 든다고 보면 된다. 옮겨야 할 짐이 많지 않다면 주택자재 전문매장 ‘Lowe’s Home Improvement’에서 ‘Base fee’만 내고 2시간 정도 트럭을 빌리는 것도 한 방법이다. 추가 비용 없이 50달러 가량이면 렌트가 가능하다. 차에 연결하는 트레일러는 빌려 짐을 옮기는 게 가장 저렴하지만, 트레일러 운전 경험이 없는 한국인 연수자들에게는 권하고 싶지 않은 선택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