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생활을 하면서 가끔씩 궁금했던 것은 도대체 해외에선 한국을 얼마나 알고 있고 어떻게 생각하는 것인가 였다. 이곳 채플 힐에 머물면서 그 궁금증이 조금은 풀렸다.
듀크대 정치학과의 가을 학기 강의중 ‘국제관계학’은 초강대국인 미국이 국제 이슈에 대해 어떤 접근을 하고 있고 어떤 전략을 구사하는지를 대학생들이 입문 수준에서 공부하는 과목이다. 강좌 이름은 국제관계학인데 실제 내용은 변화무쌍한 국제 관계에서 미국의 국익이 무엇인지를 따지면서 학생들에게 ‘전략적 사고’를 키워 준다. 강의에선 독일의 비스마르크에서 아프간의 탈레반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으로 미국이 상대했고 현재 상대하는 세력에 대한 대외 전략이 나온다.
이 강좌에서 한,중,일 동아시아 3국이 거론되는 빈도를 따져보면 단연 중국이 압도적이다. 이어 일본이고 한국은 가끔씩 언급된다. 지난주 수업에서 이 강좌를 맡은 듀크대 피터 피버 정치학과 교수가 학생들에게 재미있는 질문을 했다.
“조악한 예를 들어 보자. 미국과 중국이 동시에 2%씩 경제성장을 하는 것을 선택하겠는가. 아니면 미국은 4% 성장하고 중국은 5% 성장하는 것은 택하겠는가.”
학생들의 답은 거의 절반으로 갈렸다. ‘4% 성장’을 택한 학생들과 ‘동시 2% 성장’을 선호한 학생들이 비슷비슷했다. 교수가 ‘4% 성장’에 손을 들은 한 백인 학생에게 이유를 물었다. 그는 “상대적 격차가 누적되는 가운데 중국이 차후에 미국의 경쟁자가 될 수 있다”고 답했다. 교수 역시 “경제적으로만 따지면 4% 성장이 2%보다 더 유리한게 당연하다. 반면 ‘2% 성장’을 택한 학생들은 중국과 미국의 격차 누적을 우려했을 것이다.”
수퍼파워로 성장한 중국이 미국의 경쟁자가 될지 협력자가 될지가 관건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이 강좌에선 거의 매 강의마다 ‘China’라는 단어가 강의 어딘가에서 거론된다.
이번달 뉴욕타임스 오피니언란에 실린 한 싱크탱크 소속 연구원의 중국에 대해 더욱 노골적이다. ‘미국이 아프간에서 피를 흘리며 안정과 재건을 위해 희생하는 반면 중국은 아프간에서 지리적 인접성을 이용해 경제적 이윤을 얻고 있다’는 취지다.
강의에선 일본 역시 중국만큼은 아니지만 만만치 않게 거론된다. 강의중 가끔씩 “2차대전후 미국의 안보 보장속 일본이 ‘free ride’를 했다는 분석도 있다”는 내용도 나온다. 이곳의 한 TV 드라마(The office)에선 백인 주인공들이 유도 교습소를 찾아가 유도를 배우고, 이들 백인 주인공들이 나누는 대사에선 거리낌없이 ‘센세’(선생)라는 일본어 발음도 튀어나온다. TV 만화에선 평범한 백인 가장과 새로 이사온 중국인 이웃 간에 ‘개고기’를 놓고 벌어지는 해프닝도 그려진다.
한국은 어떨까. 국제관계학 강의에서 한국은 북한이나 일본과의 비교 과정에서나 나왔다. 피버 교수가 한국을 언급한 대목은 “인공위성 사진을 보면 한반도에서 남한은 밝게 빛나는 반면 북한은 새까맣게 어둡다”거나 “동일한 인종적,유전적 특성을 지녔는데 분단된지 수십년이 지난 뒤 남한 사람과 북한 사람 들간엔 키 차이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또는 “과거 일본이 TV 산업을 독식하다가 남한에 밀려났다. 최근엔 중국이 TV 산업에 뛰어들며 남한을 위협하고 있다. 글로벌라이제이션은 이처럼 끊임없는 경쟁을 낳고 있다” 등이다.
뉴욕타임스의 정정란에 한국이 언급된 ‘정정’이 지난달 실렸다. 이탈리아의 한 의류 업체가 경비 절감 차원에서 원단 공급처를 자국 업체에서 한국산으로 바꿨다는 원래 기사에 대해 해당 업체가 ‘바꾸지 않고 계속 자국산 원단을 쓰고 있다’고 밝힌 것을 정정으로 실은 것이다.
미국의 일개 대학의 일개 강좌나 TV 드라마를 가지고 일반화의 오류를 범해선 안되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곳 3개월의 경험으로만 따진다면 미국은 이미 일본은 물론 중국에 대해서도 그 비중을 적어도 암묵적으로라도 인정하고 있는 반면 한국에 대해선 아직 중국과 일본만큼 중요한 상대로 간주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중국에 대해선 인정을 넘어서 향후 냉전시대 소련에 비견될 만한 최대 경쟁자가 될 수도 있다는 우려도 품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스스로 너무 비하할 필요도 없다. 핸드폰이나 가전 제품, 자동차와 같은 경제 분야에선 한국산 제품이 미국에서 전혀 낯설지 않다. TV 광고에선 버라이존(미국 전역을 커버하는 전화 회사)의 LG 핸드폰이 수시로 나오고 도로에선 한국산 자동차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베스트바이(가전제품 종합 판매점) 매장에 가보면 한국산 컴퓨터, 세탁기, TV 등이 HP,GE 제품 등과 함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세계 무역 규모에서 10위권 안팎을 유지하는 한국의 위상은 대표적인 ‘수출 상품’에선 어느 정도 위치에 오른 것 같다. 그러나 국제사회에서의 정치적, 외교적 비중은 이웃한 중국이나 일본에 비교하기엔 아직 무리라는게 3개월의 미국 생활에서 느낀 감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