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라고는 괌에 가족여행을 다녀온 게 전부인 제가 우여곡절 끝에 미국 생활을 시작한지도 벌써
석 달이 되어갑니다. 하루 하루 일에 쫓기며 살아온 제게 연수 생활은 그 자체로 축복인 것 같습
니다. 솔직히 재단과 회사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미국 연수가 결정되고 나서 이런 저런 준비의 지침서가 된 건 재단에서 나눠준 한 권의 책이었습니
다. 미국에 아이를 데리고 다녀온 분이 쓴 책인데, 여러모로 정말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그렇다고
는 해도 직접 몸으로 부딪혀보니 책과는 다른 점도 적지 않았습니다. 저자가 다녀간 뒤 그만큼 세월
이 흐른 탓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연수를 온 곳은 다른 분들이 좀처럼 찾지 않는 곳입니다. ‘The State of Lone Star, 텍사스’
입니다. 제가 텍사스로 연수를 떠난다고 하자 한 지인은, 그 곳 날씨는 ‘Hot and Hotter’ 밖에
없다며 만류하기도 했습니다. 정말 덥긴 덥습니다. 이제부터 이곳 텍사스에 오기까지, 또 오고 나서
있었던 몇 가지 에피소드들을 적어보고자 합니다.
▣ 사라진 출입국신고서
여러 선배님들이 말씀하셨듯이 가족과 함께 비행기에 오르기까지는 적지 않은 인내와 노력이 필요했
습니다. 짐을 싸고 줄이고를 반복했지만 항공사에서 정한 무게에 맞게 정리하는 건 기술(?)이 필요
했습니다. 카운터에서 짐을 부치는데 어떤 가방은 불과 100g차이로 통과되기도 했습니다. 여기까지
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부분이고.. 비행기에 오르자 맥이 탁 풀리는 게 피로가 몰려왔습니다. 하
지만 힘이 넘치는 애들 둘을 아내에게만 맡길 수도 없어 비행기 안에서도 이래저래 바쁘게 움직여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역만리 미국도 금방이더군요.
도착시간이 다가오자 책을 폈습니다. 세관신고서와 출입국신고서… 이 두 가지를 써야 한다는 걸 재
차 확인하고 승무원이 나눠주는 서류를 받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한 장 뿐이었습니다. 출입
국신고서가 없더군요.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저에게만 안주는 것도 아니고 해서 그런가 보다 했습
니다. 하지만 직업병일까요? 궁금증이 나서 지나가는 승무원을 붙잡고 물어보니 전자여권으로 바뀐
뒤부터는 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미국은 전자여권이 없으면 들어갈 수 없으니 승객 모두 출입국신
고서를 쓸 필요가 없었던 겁니다.
얼마 뒤 비행기가 미국 땅에 내렸습니다. 살짝 긴장됐습니다. 출장으로 이곳 저곳 다녀봤지만 미국
땅은 처음인데다 가족을 데리고 다녀야 한다는 게 적지 않은 부담이 됐습니다. 명색이 가장인데 말
입니다. 선배들이 몇 번이고 주의를 줬던 입국심사대가 다가왔습니다. 같은 비행기에 탔던 승객들을
따라 아무 생각 없이 우르르 따라 갔습니다. 낭패더군요. 승객 대부분은 여행 차 온 분들로 한•미
간 무비자 협정에 따라 수속을 밟는데 그 줄에 서 버린 겁니다. 나중에야 제대로 줄을 섰지만 이미
긴 줄이 늘어선 뒤였습니다. 심사관을 만나는 게 부담스러웠던 걸까요? 짜증이 날 법도 하건만 외려
이상한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심사관의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할지 궁리하다 보니 바로 다음 차례가 됐습니다. 노란 대기선을 넘어
가지 않게 아이들을 단속하면서 심사관이 부르길 기다렸습니다. 잠시 뒤 저를 향해 손짓을 하더군요.
하지만 ‘무엇을 공부하러 왔다’느니, ‘어느 대학에서 초청을 받았다’느니 하는 대답은 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인사하고 지문 찍고 하니 여권에 도장 찍어주고 그만이었습니다. 괜히 긴장한 것 같아
민망하기까지 했습니다.
▣ I-94는 어디서?
그런데 여기서 또 이상한 것 하나… 그렇게 중요하다던 I-94를 주지 않았습니다. 분명 책에서도 선
배들도 스테이플러로 여권에 찍어준다고 했는데 도장 찍어준 게 전부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출
입국신고서(I-94)를 안 썼으니 안 주는 게 당연한데, 당시에는 그저 그 종이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생각만 하고 있던 터라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질 못했습니다. 얼떨결에 이미 입국심사대는 통과했지,
I-94가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한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 살짝 난감했습니다. 당연히 없어도 되니까
안 줬겠지 싶었지만 不如튼튼이란 생각에 나가려는 승무원을 붙잡고 물어보니 역시나 전자여권으로
바뀐 뒤부터 종이로 된 I-94는 따로 주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다시금 안 사실이지만 전자여권이 됐다고 해서 종이로 된 I-94가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닙니다.
관련 정보가 전산화됐다는 것일 뿐 학교에 오리엔테이션을 가거나 운전면허시험을 볼 때 , Social
Security Card를 받을 때 등등 모두 I-94 원본을 제출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지도 않은 I-94 원본
은 어디서 받아야 할까요? 정답은 인터넷입니다. 그냥 Google에서 I-94라고 친 뒤
다시 출력할 수 있으니 예전처럼 잃어버릴까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다는 얘깁니다.
▣ 미국에서 신용카드는 안 만들어준다?
댈러스 공항에서 입국심사를 마치고 짐을 찾은 뒤 다시 오스틴 공항으로 오는 길은 또 다른 도전이
었습니다. 짐은 많지 애들은 징징대지, 길은 낯설지… 뭐 그래도 그럭저럭 오스틴 공항까지 도착한
뒤 미국 땅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텍사스의 푸른 하늘과 더할 나위 없는 햇볕
이 아름다웠습니다. 하지만 공항 자동문이 열리는 순간 ‘이게 텍사스 더위구나’ 깨달았습니다.
집에 짐을 풀고 그날로 은행계좌와 휴대전화부터 열었습니다. 은행은 정말 한국과 달랐습니다. 제
전직이 은행원이라 은행은 낯선 곳이 아니었는데, 처음 들어간 미국 은행은 은행이라기보다는 사무
실 같았습니다. 계좌를 열겠다고 하자 얼마 간을 기다린 뒤에야 한 남자 직원이 다가왔습니다. 창구
업무가 기본인 한국과 달리 자신의 방으로 안내해 이것 저것 묻고 관련 서류도 달라고 하더군요.
상당히 까다롭다고 들었는데 생각보다는 괜찮았습니다. 좀 기다려서 그렇지 참 친절했습니다.
왜 이렇게 많은 서류가 필요한 건가 생각해보니 미국에는 저에 대한 아무런 신용 기록, 즉 Credit이
없었습니다. 한국에서처럼 직장에 다니는 것도 아니요, 세무서에 세금을 꼬박 꼬박 내고 있던 것도
아니니 그럴 법도 하더군요. 미국으로 떠나기 전 한 선배가 미국은 신용사회이니 Credit카드를 만들
어 쓰는 게 여러 모로 도움이 된다고 했던 얘기가 생각났습니다. 다만 그 또한 Credit이 없어 연수
끝날 때쯤에나 신용카드 만들 자격이 생긴다며 안타까워 했었습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업무
가 끝나갈 무렵 그 직원에게 혹시 신용카드를 만들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너무 쉽게 ‘Yes’라고
대답하더군요.
그 자리에서 신청서를 쓰고 몇 주 뒤 카드를 받았습니다. 사실 좀 신기했습니다. 물론 사용한도는
턱없이 낮았습니다. 그래도 일단 쓰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에 한달 동안 한도를 거의 채워 사용했습
니다. 가스와 전화요금 같은 걸 신용카드 자동결제로 해놨더니 아무래도 한도액이 너무 적었습니다.
그래서 역시나 ‘아니면 말고’라는 생각으로 은행 홈페이지에서 한도 증액을 요청했습니다. 며칠도
안돼 승인이 났다는 편지가 왔습니다. 미국에서 신용카드 만드는 거… 어렵지 않습니다.
▣ 스마트폰 단말기의 배신
은행계좌만큼이나 급한 게 휴대전화였습니다. 한푼 이라도 아껴야 했기에 단말기는 당연히 한국에서
쓰던 걸 가져갔습니다. 한국에서 떠나기 전 혹시나 Country Lock이 걸려 있지 않을까 해서 점검까지
마쳤던 터라 걱정할 게 없었습니다. 당시 서비스센터 직원은 스마트폰으로 바뀐 뒤부터는 Country
Lock이 걸려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통신사 대리점 직원과 어떤 상품이 좋을지 얘기한 뒤 바로 계약을 했습니다. SIM카드를 꽂자 단말기
에 바로 안테나가 떴습니다. 다음은 아내 스마트폰. 하지만 SIM카드를 꽂아도 아무런 신호가 없었습
니다. 몇 번이고 해봤지만 안됐습니다. 단말기는 한국에서 잘 쓰던 거라 SIM카드를 의심했습니다.
하지만 미국 중고 단말기에 꽂자 짱짱하게 안테나가 뜨더군요. 결국 원인을 찾지 못해 아내 단말기는
미국 중고 단말기를 써야 했습니다.
문제는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제 스마트폰도 한참 쓰다 보니 생각보다 너무 느렸습니다. 자세히
보니 LTE가 아닌 3G였습니다. 제 아파트가 있는 곳에서 잘 안 터지나 보다 했습니다. 하지만 시내에
가서도, 다른 주에 여행을 가서도 LTE는 터지지 않았습니다. 고심 끝에 다시 통신사 대리점을 찾아
갔습니다. 세팅을 바꿔보고 이런 저런 조치를 다 취해봤지만 안되더군요.
대리점 직원은 한국에서 스마트폰 가져온 사람들 대부분이 비슷한 장애를 겪는다고 귀띔해 줬습니다.
같은 제조사 단말기라도 통신사별로 다른 주파수를 쓰기 때문에 생기는 장애일 수 있다고 하더군요.
예상치 못했던 부분이었습니다.
참고로 한국을 떠나올 때 미리 미국 SIM카드를 사서 오시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제가 써본 적이
없어 어떻다고는 말씀 드리기 어렵습니다만 미국에서 직접 개통할 경우 유리한 점이 있습니다. 통상
부부가 개통을 하게 되는데 2명이 개통하면 1명이 할 때보다 큰 폭으로 할인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다만 개통할 때 Social Security Number가 없으면 Deposit을 걸어야 합니다.
Continu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