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장대같이 쏟아지는 비에도 아이들은 태연하게 차 뒤에서 장난을 쳤다. 긴장한 필자의 손에는 땀이
났고 시선은 도로에 고정됐다. 시간이 흐를수록 온몸은 뻣뻣해 졌다. 몸에 너무 힘을 준 탓이다. 가장
빠른 속도로 올려 놓은 차의 와이퍼는 그 한계가 뚜렷했다. 전방 30~40m 앞에는 뭐가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차의 불빛과 어물거리는 형체만 있을 뿐. 그래도 고장을 모르는 와이퍼 덕에 겨우 앞차의
후미등은 볼 수 있었다. ‘이러다 정말 큰 사고 나는 것 아닌가’하는 걱정에 “차를 갓길에 좀 세우자”
고 말했지만, “다른 차들도 움직이기 때문에 흐름을 따라 함께 가는 게 더 안전하다”면서 계속 차를
운전하는 남편이 야속하기도 했다. 차 안에서의 나의 두려움은 그렇게 1시간 이상 이어졌다.
시속 70마일로 달리는 고속도로에서 하늘이 구멍이라도 난 양 퍼붓는 비를 만난 건 두 번째였다. 작년
8월 미국의 중서부지역에서 한번, 그리고 올해 3월 남부지역에서 한번. 차이라면 두 번째는 뇌우(雷雨)
가 온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 이외 차 안에서의 느끼는 공포감은 같았다. 특파원들이나 현지 교포들이
“미국에서는 가장 두려운 것 중 하나가 자연재해”라고 했던 말을 온몸으로 체득했던 순간이다.
가장 빠른 속도로 와이퍼가 작동함에도 불구하고 쏟아지는 비 탓에 운전시야를 확보하기 힘들었고 이런
상태는 1시간 이상 이어졌다.
○∙∙∙”지옥의 문이 열리는 것 같았다” : 무조건 피하는 게 상책
미국에서 삼삼오오 모여서 미국의 자연에 대해 얘기를 하다 보면 꼭 등장하는 게 각자가 경험했던 위험
순간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필자의 경험은 새발의 피였다.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한
교포는 미국 남부로의 여행 중 토네이도를 직접 목격했다고 한다. 대략 10KM 밖의 거리 추정됐고 방향도
다른 곳으로 향했는데도 토네이도의 위력 앞에 엄습하는 두려움은 상상을 초월했다고 했다. 그는 “태풍
과는 또 달랐다. 마치 지옥의 문이 열리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랜드캐년 등이 있는 서부로 여행을 떠났던 한 연수생은 순식간에 내리 깔리는, 안개의 ‘소리 없는 공
포’를 경험했던 순간을 털어놨다. 그랜드캐년, 브라이스캐년 등 자연에 취해 있던 그는 안개가 조금씩
깔리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고 한다. 눈요기를 실컷 한 뒤 호텔로 향했을 때는 안개가 제법 짙
어졌지만 숙소와는 1시간 가량 떨어져 있어 큰 걱정도 없었다. 하지만 순식간이었다. 앞을 분간하기 힘
들었고 급기야 도로를 가로 막고 있는 낙석과 충돌할 위기도 가까스로 넘겼다고 했다.
폭설이 쏟아졌던 2월에 올랜도를 갔던 한 지인은 버지니아로 돌아 오는 길에 만난 눈 폭풍으로 아찔한
경험을 해야 했다. 다행히 그와 가족은 무사했지만 미끄러운 도로는 차치하고 사고로 곳곳에 차가 널부
러져 있는 것을 보면서 운전하는 것에 대한 공포감은 한동안 뇌리에서 떠나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거대한 사막부터 산, 평야, 협곡 등 없는 게 없는 미국은 땅 덩어리가 커서인지 자연의 재해도 상상을
초월한다. 특히 작년 연말부터 올해 2~3월까지 중부와 남부지역에 폭설, 토네이도, 홍수, 산불로 수많
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고 막대한 재산상의 피해를 입었다. 기상예고를 해도 발생지역의 범위가 워낙
넓기 때문에 미쳐 대비를 못했던 게 가장 큰 이유다. 시속 300km의 토네이도 발생한 텍사스 주에서는
피해 지역의 거리가 64km에 달할 정도였다.
○∙∙∙뛰어난 미국의 재해대응시스템도 어쩔 수 없는 한계
자연재해의 위험을 충분히 경험했고 그 위험성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 미국의 대응은 작전을 방불케 한다.
눈 예보가 오면 이틀 전부터 도로는 염화칼슘으로 덮힌다. 살짝 뿌려 놓은 수준이 아니다. 도로가 뿌옇
게 보일 만큼 미국 방재당국은 살포하고 있다.
눈이 올 것에 대비 미리 뿌려 놓은 염화칼슘으로 인해 도로가 본래의 색을 잃고 회색 빛을 띄고 있다.
학교나 공공기관 등에 가입돼 있는 휴대폰 문자를 통해 수시로 토네이도 등의 기상 상황을 전파한다.
TV나 라디오를 통한 재난보도는 24시간 돌아가는 것은 당연. 눈이 조금만 내려도 학교는 휴교하거나 2시
간 늦게 수업을 시작하는데, 이를 TV의 자막을 통해 모두 알린다.
폭우에 대비한 도로시스템도 잘 돼 있다. 비가 올 때 미국의 도로를 달리다 보면 가장 놀라는 게 비가
그렇게 쏟아져도 도로에 물이 없다는 점이다. 흡수가 되는 것인지 옆으로 바로 흘러내리는 것인지는 모
르겠지만 우리나라 올림픽 대로에서처럼 앞 차량 혹은 옆 차량으로부터 물 폭탄을 맞는 일은 없다.
이 같은 준비에도 불구하고 자연재해의 피해는 매년 엄청나다. 미국에서 토네이도로 인한 피해액은 지난
해까지 매년 100억 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추산됐다. 8년 연속이다. 실제로 지난 2월 말 필자가 사는 버지
니아주 페어팩스 인근에도 토네이도가 불어 닥쳤다. 지역방송국은 분단위로 토네이도의 위치를 보도했다.
앵커는 “이것은 생사에 관한 문제다. 절대 밖으로 나가지 마라”고 경고방송을 했다. 아파트에 사는 대
부분의 한국인도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필자가 살고 있는 페어팩스 지역에 토네이도가 발생하자 재난방송 체제로 전환한 방송사가 기상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여주고 있다.
저녁 7시쯤, 그동안 좀처럼 보기 힘든 번개와 함께 비, 바람이 몰아쳤다. 그래도 ‘태풍만큼은 아니구나’
라고 생각할 무렵, 토네이도가 정면으로 훑고 인근의 한 주택은 파괴됐고, 그로 인해 일가족 3명이 참변
을 당했다는 소식이 전파를 탔다. 수많은 집과 건물이 뜯겨 나갔고 22만 가구의 전기 공급주택이 파괴됐
다는 소식과 함께.
미국으로 오는 연수생들에게 뻔한 당부 한마디. 대자연을 즐기되, 절대 맞서지 마시라. 호기도 부리지
마시라. 한국에서 보던 것 그 이상이라는 것을 명심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