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거주증명하기
미국에 새로 이주한 이들이 초반에 겪는 괴로움 중 한 가지는 ‘거주증명(proof of residency)’이다. 내가 나이고 내가 여기 산다는 것을 인정받아야 다음 수순이 쉽게 풀리는데, 한국 같으면 주민등록증 하나로 간단히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여기에서는 그렇지 않다.
거주증명이 되어야만 은행 계좌도 틀 수 있고, 아이를 학교에 보낼 수 있고, 운전면허증을 딸 수 있다. 심지어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는 데도 거주증명이 필요하다(도서관 중엔 요구하지 않는 곳도 있다). 때로는 집 계약과정에서 은행 계좌를 써야 하는데 은행 계좌를 트려면 집 계약이 되어 있어야 하는 그런 우로보로스 같이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를 시험에 들게 하는 상호 모순적인 상황도 왕왕 발생한다.
거주증명을 위해 흔히 요구되는 것은 utility bill이다. 거주를 증명할 수 있는 가스세 전기세 수도세 등에 관한 utility bill을 제출하라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bill이 정식으로 오프라인 레터로 우리집에 오려면 집에 살고 나서 족히 3~4주는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은행계좌를 트고 운전면허를 따고 애를 학교에 보내는 것은 도착 직후에 이뤄져야 하는 일들이다. 무작정 기다릴 수는 없다.
(1) 차량보험증을 거주증명으로
진작부터 utility bill을 빨리 받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한국에서 집도 계약하고 일부 서비스에 가입까지 해 놓은 경우에는 큰 문제가 없이 모든 게 원만하게 진행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와서 집을 구한 경우였다. 8월18일에 도착하여 즉각 집 투어를 했고, 사흘만에 집주인과 이야기가 됐다. 서로 inspection을 하고 집 계약서를 정식으로 작성하고 보증금과 한달치 집세를 보내는 데 약 1주일 가량이 소요됐다. 실제 입주는 9월1일. 9월초에는 아이를 학교에 보내려 했는데, 학교에 보내려면 거주증명이 필요하다. 교육청에 보여줄 고지서를 물리적으로 받느라 3~4주씩 기다릴 수는 없었다.
나의 경우, 가장 빨리 거주증명에 사용될 수 있는 서류는 1) Automobile insurance (자동차보험) 2) Home inurance (집 보험)이었다. 특히 와서 차량을 구입한 경우라면 이를 위해 차량 보험에 가입했을 것이고, 즉각 그 자리에서 insurance card / 영수증이 온라인으로 발급되었을 것이다. 이 보험가입 서류는 은행 등 다른 모든 경우에 거주 증명으로 유효하게 사용될 수 있다. (PG&E 등 유틸리티 서비스에 온라인으로 가입한 내역을 출력하는 것은 담당자에 따라서 거절될 수 있는 것 같으나 일단 없는 것보다 낫다.) 홈 인슈어런스는 집 계약 과정에서 요구되는 경우가 많다. (progressive에서 가입함)
(2) 휴대폰/인터넷 가입서류를 거주증명으로
휴대폰 가입 및 납부 내역도 거주 증명으로 쓰일 수 있다. 하지만 유틸리티만큼 강력한 증거는 아니다. (휴대폰 가입시 적어내는 주소가 정확한 주소가 아닐 수 있어서 그런 것 같다) 그래도 받아주는 곳들이 있다. 민간 부문에서는 큰 무리 없이 통과될 수 있을 것 같고, 교육청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이곳 마운틴뷰 교육청은 휴대폰 bill도 인정하고 있다. 휴대폰은 한국에서부터 가입해서 올 수 있으므로(알뜰폰 등) 사는 곳과 일치하는 주소로 휴대폰을 등록했다면, 아주 빠르게 거주 증명용 서류를 확보할 수 있다.
인터넷 가입 서류는 휴대폰보다 더 광범위하게 거주 증명에 인정된다. 아무래도 ‘현장’이 있어야 하고, 가스 및 전기 등과 비슷한 유틸리티의 범주에 속하기 때문일 것이다. 집을 계약하고 인터넷 가입을 했다면 관련 서류를 거주 증명에 쓸 수 있다. 그래도 인정 여부가 기관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미리 꼭 확인을 해야 스트레스가 줄어든다.
(3) 유틸리티 서비스 웰컴 레터
이외에 utility bill은 가스 / 전기 / 상수도 / 하수도 / 쓰레기 관련 서비스에 관한 것이다. 나의 경우 상수도(water) / 하수도(sewer) / 쓰레기(garbage pickup) 서비스를 담당하는 곳이 Mountain View City였는데 9월초 가입 직후 웰컴 레터가 왔고, 영수증은 10월말에나 왔다.
(사진: 웰컴레터의 예. 가입 직후 바로 우편물을 보내왔다.)
웰컴레터는 정식 고지서나 영수증은 아니지만 초반 거주 증명 서류가 부족할 때 제출할 수 있다. 고지서가 나오기 전이지만 내가 이 서비스에 정식으로 가입한 강력한 증거이므로, 받으면 잘 갈무리해두는 게 좋다.
(4) 인쇄물을 제출해야
처음부터 온라인으로 업로드하는 것들은 상관이 없겠지만, 오프라인으로 누군가의 심사를 받을 때라면 여기서는 대체로 온라인으로 화면을 보여주는 것은 인정되지 않는 분위기다. 예컨대 온라인으로 받은 서류는 프린트를 해서 들고가야지, 그냥 휴대폰 화면 열어서 보여주는 식으로는 통과되지 않을 위험이 상당히 있다. 특별히 서류 형태가 아닌 것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특히 DMV에서는 I-94 프린트 꼭 해가야 함 / SSN 신청할 때도 각종 서류는 반드시 인쇄된 것으로.) 민간은행에서 banker가 insurance document를 휴대폰으로 확인하고 통과시켜 준 경험은 있는데, 공공부문에서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온라인으로 받은 집 계약서도 프린트를 해야 효용이 있다.
그런데 오자마자 인터넷을 깔고 프린터기를 새로 사서 설치하는 것도 상당히 시간이 걸리고 번잡한 일이므로, 주변 도서관이나 부탁할 곳을 하나쯤 생각해 두는 게 부드러운 일처리에 도움이 된다. 현금도 평소엔 사실 잘 안 쓰는데, 갑자기 도서관 프린터를 쓰게 되면 / 혹은 코인 세탁기를 쓰게 되면 (낵아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쿼터(25 cent 동전)가 없다 쿼터가! 이렇게 된다(몇 번 겪어봄). 그러지 말고 쿼터 몇 개는 just in case를 위하여 지갑에 넣어두시기를..
(5) 배우자의 이름도 함께 등록하는 게 편리
배우자가 은행 계좌를 열거나, SSN 넘버를 받거나 DMV에서 운전면허증을 발급받기 위해서는 배우자의 거주 증명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배우자의 이름으로 일부 유틸리티 서비스에 가입하거나 공동 명의를 하는 방식으로 배우자의 거주 증명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것을 고려하지 않았다가 DMV에서 애로사항을 겪은 적이 있다.)
아무튼 맨 처음에는 일단 뭐라도 챙겨보고, 들이밀어 보고, 만약 안 되면 추후에 서류를 보완하겠다고 약속할 테니 조건부로 되는지 물어보자. (밑져야 본전!) 모두 난관을 잘 헤쳐나가시기를.
(사진: SSA 홈페이지에서 안내하는 J-1 비자 소유자의 SSN 신청 방법. 자신이 속한 지역의 SSA에 전화를 해서 예약을 잡고 DS-2019와 거주증명 등 관련 서류를 (모두 원본으로, I-94 등은 인쇄물로) 찾아가야 한다. 전화시엔 30분 정도 기다릴 각오를 하고 통화하면 연결된다. 연수 당사자인 J-1비자 소유자의 경우 수월하게 SSN이 나오지만, 배우자 등 J-2는 SSN 신청 사유를 소명해야 하고 통과되지 않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