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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바다낚시 즐기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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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에는 보우그 인렛 피어에서 과장없이 말해 방석만한 홍어를 대용량 아이스박스에 가득 채워 오기도 했다. 그날 밤 도착 직후 시 멀릿을 몇 마리 잡고 있었다. 옆에 있던 미국 낚시꾼들이 간혹 홍어를 올리더니 “갓댐”을 연발하며 그냥 버리는 게 아닌가. “나 주면 안될까”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왔으나 한국인으로서 국격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에 꾹 참았다.

그러다 직접 잡은 홍어를 아이스박스에 담으니까 옆 사람들이 “가질래”하며 갖다 주는 것이었다. 희희낙락하며 아이스박스에 담고 있는데 “그것 가져가서 먹느냐”고 물어왔다. “한국에서는 어마어마하게 비싼 생선”이라고 말했더니 외계인 보듯 쳐다보는 게 아닌가.

어쨌거나 직접 잡은 홍어 서른댓 마리에다 옆에서 얻은 홍어 열댓 마리, 시 멀릿, 스팟 피시 등을 아침에 집으로 가져갔더니 집사람이 기절초풍하는 것이었다. 아시다시피 홍어는 약간 흉측하게 생긴데다 배쪽은 콧구멍과 입이 배치된 생김새가 사람이 웃고 있는 듯하다. 손질할 엄두를 내지 못하더니 결국 내가 자는 동안 동네 아주머니들을 불러 공동 작업에 들어갔다. 일당은 홍어 4~5마리씩으로 대신했다. 그 뒤 스팟 피시와 시 멀릿을 아이스박스가 터지도록 잡아 손질할 때도 일당은 물고기로 대신했다.

그날 역시 동네 사람들과 회와 홍어 파티가 벌어졌다. 홍어는 요리를 할 줄 몰라 머리와 연골, 꼬리 부분은 다 잘라 버리고 살코기만 찜과 매운탕을 해 먹었다. 홍어 특유의 약간 톡 쏘는 맛은 있었으나 대서양에서 잡은 지 하루도 안 돼 식탁에 올린 탓에 홍어 요리에서 단맛이 났다. 특히 동네 아주머니 한 분이 해온 홍어회 무침을 입안에 넣었을 때의 행복감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피어에서는 간혹 상어도 올라온다. 한번 집으로 가져왔다 요리 방법을 몰라 버린 뒤로는 현장에서 그냥 놔주고 있다. 커다란 복어들도 가끔 잡히곤 한다. 바늘을 물고 “나 무섭지”하며 공처럼 몸을 부풀려 잔뜩 허세를 부리고 있는 복어를 볼 때면 “요걸 한번 회를 떠봐” 하다가도 역시 놔주고 있다. 복요리는 전문 요리사 자격증이 필요한데 속인주의, 속지주의를 동시에 채택하고 있는 국내법을 지켜야 할 것 같았다. 또 중국 송대의 소동파는 “죽음과도 바꿀만한 맛”이라고 복어를 극찬했다지만 그거야 당대의 거유이자 대묵객의 말이지, 소시민 입장에서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 수 없다는 이유도 한몫 했다.

피어 낚시를 즐기다 어느 순간 성이 안차는 느낌이 들었다. 눈을 돌린 게 배낚시였다. 하지만 보트 빌려 한번 나가는데 비용이 450달러 정도에 달하는 게 큰 부담이었다. 4~5명의 팀을 모으기 힘들어 고심하던 차에 지난해 11월쯤 다른 동네 사람들의 배낚시에 동참하게 됐다. 목표는 미국에서 가장 고급 생선 가운데 하나인 그루퍼(grouper) 잡이였다. 한국에서는 다금바리로 알려진 어종이다. 미국에서도 귀한 생선인지 하루 1인당 1마리로 어획량을 제한하고 있다. 또 12월~4월은 그루퍼 금어기다.

결과적으로 그루퍼는 4명이 두 마리를 잡는데 그쳤다. 더구나 한 마리는 30인치(76센티미터) 정도로 기억난다. 작아서 원래 놔줘야 하지만 어획량이 빈약한 탓에 현장에서 그냥 해치웠다. 선장이 큼지막하게 썰어준 회를 초고추장에 찍어 입안에 넣었더니 생선 살이 찰떡처럼 탱글탱글한 게 내 평생 가장 맛있었던 회로 기억한다.

한 낚시꾼이 지속적으로 그루퍼 타령을 해대자 선장이 당초 예정보다 더 오랫동안 바다 위를 헤맸다. 하지만 그루퍼는 못 잡고 농어의 일종인 시 배스(sea bass)를 원 없이 잡았다. 30~50센티미터 정도의 시 배스가 쉴새 없이 퍼덕이며 올라왔다. 특히 1미터짜리 그루퍼를 잡을 때의 황홀한 손맛이란.

가끔 뭔가 바늘을 물기는 물었는데 어느 순간 꼼짝도 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옆 사람과 함께 번갈아 가며 낚싯대를 들고 한 15분쯤 낑낑거려도 도무지 올라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상어라는 게 선장의 설명이었다. 어느 순간 낚싯줄이 터져버려 다행이다 싶었다. 다른 동네 낚시팀은 3미터 정도의 상어를 끌어올렸다고 한다. 삭스핀만 잘라내고 버렸다나. 집에 가져간 삭스핀도 요리 방법을 몰라 냉장고 냉동실에서 말라 비틀어져 가고 있다나. 죽어간 상어는 어떡하라고.

미국 배 낚시가 재미는 있는데 한편으로는 걱정도 됐다. 한국에 돌아가면 웬만한 바다 낚시는 눈에 차지 않을 것 같았다. 집사람 눈총을 받으며 서울에서 새벽 1시에 출발해 태안반도까지 내려가 봐야 기껏 우럭 10마리쯤, 광어 한두 마리 잡아오는데 그치기 때문이다.

태안반도나 안면도 쪽은 공해상까지 나가기 때문에 씨알이라도 굵지, 인천 앞바다 쪽은 생선 크기도 작은 편이다. 조과가 형편없는 날에는 “이 조그만 우럭 한 마리 잡는데 얼마가 들어갔지. 아무리 자연산이라지만 시장에서 사먹는 게 낫겠다”라는 집사람의 핀잔을 듣기 일쑤다.

그날 그루퍼 반쪽과 시 배스 25마리 가량을 집으로 가져가 동네 사람들과 제대로 된 회 파티를 벌였다. 동네 사람들은 한국에서 다금바리로 불린다고 하니까 그루퍼를 허겁지겁 먹어댔다. 실제 맛도 한국 일식집의 회 맛은 감히 비교를 불허했다. 그럼에도 배 위에서 먹었던 그루퍼 맛에는 못 미치는 듯 했다. 아무래도 갓 잡은 생선과 6~7시간 지난 생선 맛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으리라. 시 배스도 고급 어종이란 게 선장의 설명이었다. 선장이 도매상에 그루퍼는 마리 당 60달러, 시 배스는 20달러 정도에 넘긴다고 한다.

이렇듯 바다 낚시 경험담을 주절주절 늘어 놓으니 연수 와서 낚시만 다닌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변명을 하자면 이곳에서 한달에 기껏 한두 번쯤 바다낚시를 간 것 같다. 더구나 11월 중순부터 3월 중순까지는 피어도 문을 닫는다.

수온이 내려가면 물고기가 바다 깊은 곳으로 들어가 물고기가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배낚시라도 한번 더 가고 싶었으나 1인당 120달러에 이르는 비용 탓인지 팀을 꾸리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한번 멋모르고 보트를 탔다가 뱃멀미로 내장을 깨끗이 비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절대 따라가지 않으려 했다.

간혹 나에게 “그 고생을 하면서 낚시를 왜 가는지” 묻는 사람이 있다. 집사람은 “돈 주고 가라고 해도 못 가겠다”고 한다. 나로서도 낚시할 때는 좋은데 새벽 4~5시쯤 혼자 자동차를 몰고 집으로 올 때면 사실 조금 힘들다. 특히 집에 도착하기 한 시간 동안은 깜박 졸 것 같아 의도적으로 긴장하려 노력한다.

언젠가 운전하고 돌아오다 아침 7시쯤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조금 쉴 겸 주유소 편의점에 들어간 적이 있다. 커피 하나를 계산하는데 주유소 여직원이 흠칫 놀라는 게 아닌가. 왜 그러나 싶었는데 화장실에서 문득 거울을 보는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바닷바람을 하루 종일 쇤 데다 잠도 자지 않고 운전을 한 탓에 눈이 징그러울 정도로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왜 낚시를 가는지에 대해서는 그럴싸한 답을 내놓지 못하겠다. 중국 주나라 강상(강태공)은 “때를 기다리며 세월을 낚았다”지만 그 같은 고상한 담론은 강태공처럼 천하를 움직였던 인물에나 해당되는 듯하다. 또한 단언컨대 강태공은 사이비 낚시꾼임에 틀림이 없다. 강태공은 낚시 자체에는 관심이 없고 내공이 높은 척 보여 권력자를 만나는 밑밥으로 낚시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주나라 서백(훗날 문왕)을 위수(渭水)가에서 만났을 때 강태공의 낚싯대에는 바늘이 없고 실만 있었다지 않은가. 그동안 낚시를 다니며 물고기 한 마리에 좀스러워지지 않는 낚시꾼은 단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하기는 뱁새가 대붕의 뜻을 어찌 알랴.

아무튼 낚시에서 개똥 철학을 이끌어낼 자신은 없고 다만 좋아하는 이유는 확실하다. 한 마리라도 어떻게 더 잡아볼까 혈안이 돼 있다 보면 온갖 잡스러운 생각이 잊어진다. 푸른 바닷물을 바라보며 몸 안의 모든 신경을 낚시대의 미묘한 떨림에 집중하다 보면 머리 속이 하얗게 비워지는 느낌을 받는다. 집사람의 잔소리도, 기자 생활의 스트레스도 훨훨 떠나간다. 시쳇말로 자유인이 된 듯 하다.

낚시 여정에는 부수적인 즐거움도 있다. 평소에는 집사람과 딸아이 눈치를 보느라 틀 수 없었던 배호, 이미자, 김용임 등의 가요를 자동차 창문이 터져 나가도록 커다랗게 듣는 것도 소소한 재미다. 비가 올 때는 백만송이 장미, 단풍, 모스크바의 밤, 머나먼 길 등 러시아 가요를 틀고 철없는 감상에 잠기기도 한다.

대서양 바다에서 돌고래 2~3마리가 한꺼번에 유영하는 모습이나 해질녘 철새들이 줄을 지어 이동하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다. 조금 낚시 욕심을 내는 날에는 같은 장소에서 일몰과 일출을 한꺼번에 보기도 한다. 밤에는 별들이 쏟아지는 듯 하다.

내 평생 가장 신비롭고 몽환적인 풍경도 목도했다. 언젠가 희뿌연 여명 아래 집으로 돌아오는데 안개가 끝없이 펼쳐졌다. 국도 옆 농장의 푸른 밭에서는 1미터 가량의 안개가 아지랑이처럼 피어 오르고 뒤편의 숲은 안개에 휘감겨 일렁였다.

그 뒤로 회색과 푸른색이 층층이 교차하는 하늘을 배경으로 막 지기 일보직전인 보름달이 창백한 은빛을 뿌리고 있었다. 구름은 햇볕이 안개에 가로막히는 바람에 붉은색이 아닌 옅은 보라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모든 사물이 고유의 색을 잃고 탈색돼 있는 게 꼭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에 온 것 같았다. 마치 현실이 아니고 꿈을 꾸는 듯 했다.

넋을 잃고 주변 풍경에 빨려 들다 문득 백 미러와 사이드 미러를 쳐다봤다. 안개가 태양 빛을 받아 주황색으로 출렁이고 있었다. 꼭 사방천지에 불이 난 듯싶었다. 자동차 앞쪽은 잿빛과 은빛, 옅은 푸른빛으로 채워져 있는데 뒤쪽을 돌아보면 태양이 거대한 황금빛 장막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 광경은 1시간 30분 가량이나 이어졌다. 문학적 재질이 일천해 그 때의 경악에 가까웠던 감동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게 못내 아쉽다. 그 같은 이질적이고 초현실적인 풍경은 앞으로도 절대 보지 못할 듯싶다.

하지만 그 이후로 낚시를 갈 때면 디지털 카메라를 항상 가지고 다닌다. 당시 광경을 담지 못한 게 너무나 억울했기 때문이다. 똑 같은 장면을 찍을 수 있다면 대한민국 사진 대전에서 대상을 받는 것은 따 놓은 당상이리라. 뭐 살바도르 달리가 별건가. 명함에다 모 신문 기자 옆에 괄호 열고 ‘사진 작가’를 박아 넣으면 폼도 날 것 같고.

낚시는 이곳 동네 사람들과 단기간에 친해지는데도 큰 몫을 했다. “회 떠 놓았다”고 하면 모두들 즐거운 마음으로 밤 10시에도 모여든다. 지금은 내가 낚시 가는 날은 당연히 저녁에 회 먹으며 맥주 한잔 하는 날로 정해져 있다. 잡아온 생선도 나눠주면 미국 가게에서는 구할 수 없는 싱싱한 것들이라 다들 고마워하고 대신 반찬을 만들어 가져다 준다. 그러다 보면 한국에서는 사라진 ‘이웃 사촌’이라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좋아하는 낚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잡설이 길어졌다. 연수 와서 여기저기 제법 여행을 많이 다녔다. 하지만 피어 앞에서 유영하던 돌고래, 입맛을 개운하게 해 준 홍어회무침, 에메랄드 아일의 아름다운 자연 늪지, 끝없이 펼쳐진 바다 위에서 보트의 출렁거림 등만큼 기억에 많이 남지는 않는다. 피어 낚시를 하다가 문득 대서양 바다를 바라보았을 때 파도가 햇볕을 받아 반짝거리던 모습은 한국에 돌아가서도 한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



[보오그 인렛 피어에서 낚시꾼들이 낚시를 즐기고 있는 모습]



[보오그 인렛 피어의 일몰]



[지난해 11월 홍어를 아이스박스 가득 잡아온 날 동네이웃들과 함께 홍어 찜과 무침, 시 멀릿 회로 새벽 4시까지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