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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영어공부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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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제발 영어 좀 하지 마세요! 창피해요.”

영어의 귀를 뚫고, 입을 열겠다는 야망을 안고 비행기 타고, 태평양 건너서 왔건만…

제 아이들이 미국에 온지 수개월동안 저한테 하는 푸념이었습니다. 가끔 미국인들과 전화를 하거나, 쇼핑가게의 직원들과 상담할 때 발음도 엉망이고, 문법도 틀린 저의 영어에 대해 아이들이 이같이 핀잔할 때마다 낙담했습니다. 늦게나마 영어를 익혀서 한국가면 ‘글로벌 리포터’로 거듭나겠다고 다짐하고 왔는데…이걸 어쩌나하는 한숨만 나왔습니다.

한국에서 그나마 유지했던 아빠의 권위가 무참히 무너지는 게 참을 수 없는 아픔이었습니다. 그래도 대학에서 실시하는 ESL(영어수업)을 같이 수강하는 일본인 아줌마들의 이상한 발음보다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제 아이들이 보기에는 일본 아줌마들이나 저나 오십보 백보였던 것 같습니다.

ESL수업 때 제가 프리젠테이션을 하거나, 대화를 할 경우 선생님한테 신물이 나도록 관사(a, an, the)를 붙이지 않는다며 주의를 받곤 했던 것이 새삼 기억에 남습니다. 그것뿐입니까? R과 ㅣ발음의 차이, th 발음 등에 대해 무수히 교정을 받곤 했지만, 여전히 고쳐지지 않고 있어 답답합니다. 청취력 높인다고 하루 수시간동안 TV채널을 켜놓고 눈이 뚫어져라 보고 듣고, 개인튜터를 구해서 영어를 익히곤 했지만 안들리고, 입이 안터지는 것을 것을 어떻게 합니까? 40대 중반에 영어를 정복하겠다는 헛된 망상은 빨리 포기하라는 어느 선배의 말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하지만 1년간의 연수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가야 하는 현재 상태를 점검하면 그래도 영어공부에 다소나마 소득이 있는 것 같습니다. 별다른 것은 아니고 서바이벌 영어라고 할까요? 1년간 서툴게나마 익힌 영어솜씨로 어떤 외국인을 만나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담력이 커진 것이 소득입니다. 특히 필드에 가서 땅을 자주 파다보니 골프장 직원과의 부킹영어나 부킹전화는 이제 ‘수준급’이 됐다고 할까요.

1년간의 연수기간은 어찌보면 짧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에겐 잃어버린 것을 회복하게 해준 소중한 기간이었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는 가정을 팽개치다시피 해서 ‘빵점아빠’, ‘낙제점 남편’의 딱지를 떼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모처럼 가족들과의 여행, 아이들의 등하교 라이드, 마누라와의 쇼핑 및 골프 등을 통해 패밀리의 중요성을 새삼 인식했습니다.

영어에 그래도 자신감을 주고, 낙제점 가장을 60점짜리 가장으로 만들어주신 LG상남언론재단과 이사진, 재단관계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