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수자가 미국에 정착하기 위해 먼저 해야 할 일들을 꼽으라면 집과 자동차 구하기, 면허증 따기,
은행계좌 만들기, 휴대폰 개통하기일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 우선 과제들을 해결하고 나면 일단
한숨 돌리며 여유 있게 미국 생활을 즐길 수 있는데, 연수기를 통해 저의 자동차 구입 경험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많은 연수자들이 ‘무빙세일’이라는 거래를 통해 살던 집과 가구, 자동차를 일괄로 사고 팝니다.
귀국자들은 한꺼번에 미국 생활을 정리할 수 있어 좋고, 입국자 역시 복잡한 거래 절차 없이 도착
당일부터 일상생활이 가능하기 때문에 많은 단기 연수자들이 선호하는 방식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이 방식을 고려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결국 가구만 무빙세일로 구했습니다.
자동차는 연수자들이 대대로 물려받으면서 주행거리 10만km를 훌쩍 넘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연수자들은 일년간 지내면서 장거리 가족여행을 다녀오는 경우가 많아 일년간 평균 주행거리가 꽤
긴 편입니다. 물론 미국에서 20만km가 넘는 차들도 멀쩡하게 잘 다니기는 하지만 저는 고물차를
사놓고 운전대를 잡을 때마다 조마조마하게 지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미국 현지 도착 후
열흘간 자동차 구입에 가장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많은 연수자의 조언에 따라 저도 처음에는 미니밴을 구입하려고 마음을 굳혔습니다. 출국 하루 전
인터넷으로 렌트카를 일주일간 예약했는데 정착 초기 많은 짐을 싣고 나르려면 큰 차가 필요한데다
구입하려는 차에 익숙해지자는 마음으로 일본 미니밴을 선택했습니다. 공항에서 차량을 받고 트렁
크에 이민가방을 꽉꽉 채울 때까지는 좋았습니다. 한국에서는 세단을 탔는데, 아이들은 다리를 길
게 뻗을 수 있다며 미니밴에 만족스러워했습니다.
하지만 운전자 입장에서는 부담스럽더군요. 미리 계약해 놓은 집까지 가는데, 구글지도를 보고 눈
으로만 운전해 본 초행길을 덩치 큰 차를 몰고 가려니 진땀이 흘렀습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미국에서도 남자들이 가장 몰기 싫어하는 차가 미니밴이라고 합니다. 픽업트럭처럼 우락부락한 차는
남자들의 로망이 되기도 하지만 미니밴은 애가 셋이 되는 순간 어쩔 수 없이 구입하게 되는 차라고
들 말하더군요.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저는 결국 SUV차량을 구입했습니다. 와이프도 미니밴을 직접 운전해보더니
부담스러워했고, 굳이 미니밴이 아니어도 여행을 다니기에 큰 무리는 없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
다. 우리가 찾는 조건에 맞는 미니밴을 찾지 못하던 중에 딱 맘에 드는 SUV 차량이 나타난 것도
이유입니다. 그래도 처음에는 미니밴을 사겠다고 일주일간 협상을 하러 다녔고 중간에 마음이 바뀌
며 다른 브랜드 딜러 매장까지 찾아다니며 열흘간 딜러 5명과 만나는 경험을 했습니다.
1명은 한국 딜러였고 4명은 미국 딜러였는데, 고생스럽다고 생각하면 고생이지만 여러 브랜드 차를
타보고 협상을 진행하는 것도 색다른 재미고 지나보니 추억입니다. 물론 초반부터 확실한 영어회화
오리엔테이션도 됐습니다.
운이 좋게도 제가 연수를 온 워싱턴주는 한국 면허증을 곧바로 미국 면허증으로 바꿔줍니다. 도착
한 다음날 면허증을 바꾸고 근처에 있는 도요타와 혼다 매장의 위치를 찾아 놓고 인터넷 검색에
돌입했습니다. 미국은 새차든 중고차든 자동차를 사려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찾아보는 사이트가
KBB(www.kbb.com)와 에드먼즈(www.edumunds.com)입니다. 이 곳에 들어가서 원하는 차량의 모델
과 연식, 주행거리 등 조건을 넣으면 차량의 상태와 거래 방법에 따른 대략적인 가격이 나옵니다.
이것이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되고 나중에 딜러를 만날 때 협상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미국은 중고차 거래가 활발하고 시장이 세분화돼 있습니다. 개인에게 거래
하는 방법이 가장 저렴하고 그 다음이 중고차 거래점, 가장 비싼 것이 공식 딜러에서 판매하는 차
량입니다. 그중에서도 딜러숍이 품질을 보증해주는 (Pre-owned certified car)가 가장 비싸게 거래
되는 차입니다. 개인간 거래로 좋은 차를 만난다면 가장 좋겠지만 차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는 저로
서는 불안한 마음이 컸습니다. 또 사기성 거래를 했다 두고두고 고생을 한 경험담들도 많이 들리고
요. 그래서 돈을 조금 더 주더라도 믿을 수 있는 차를 사겠다는 마음으로 공식 딜러매장부터 방문
했습니다.
처음 만난 차는 연식은 2년인데 주행거리가 5천km도 되지 않는 차량이었습니다. 딜러는 ‘Carfax’
라는 차의 역사가 모두 담긴 서류를 떼어주는데 사고도 없고 주인이 바뀌지도 않은 차였습니다.
미국에서는 VIN(빈)이라는 차량 고유 번호만 알면 자동차의 구매기록부터 사고기록까지 전반적인
정보를 알 수 있습니다. 개인간에 거래할 때는 수수료를 내고 carfax를 받을 수 있고, 딜러숍에서
는 무료로 떼어줍니다. 딜러는 carfax를 근거로 기업에서 사용했던 차량인데 회사 행사용으로만
사용한 것 같다고 추측했습니다. 차 상태가 깨끗하고 색상까지 마음에 드는 ‘코발트 블루’의
차량이었습니다. 조건이 좋으면 가격이 비쌀 수 밖에 없죠. 너무 서두르지 말자는 마음에 일단
딜러에게 “이 차가 우리가 본 첫 차인데, 다른 차량을 좀 더 보고 협상 진행하겠다”며 나왔습니
다. 60대 초반으로 보이는 ‘빌’이라는 딜러는 원래 증권가에서 브로커로 일했던 사람인데, 점잖고
진실해 보여 좋았습니다. 빌은 다음날부터 이틀간 휴가이기 때문에 자기 동료 딜러에게 업무를
인계하고 가겠다며 친절하게 이것저것 알려줬습니다. 이후 다른 자동차 매장에서 차량을 두 대 더
봤지만 썩 마음에 들진 않았습니다. 처음 봤던 차가 워낙 마음에 들었던 터라 다른 차들은 눈에
잘 안 들어왔습니다. 가격이 항상 문제죠. 예산을 좀 초과하더라도 마음에 드는 차를 살 것인가,
다른 차를 더 알아볼 것인가 고민을 시작했습니다.
이틀 뒤 인터넷을 검색하고 자료를 모으고 있는데 빌의 동료인 한국인 딜러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코발트 블루 차량이 이미 팔렸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지난 이틀 밤의 고민이 모두 헛된 일이었습니
다. 그 와중에 다른 매장에서 만났던 ‘마커스’라는 딜러에게서도 문자가 왔습니다. 아침에 새로
중고차량이 들어왔는데 우리가 찾는 조건인 것 같으니 매장으로 방문해달라는 내용과 함께 차량
사진이 첨부돼 있었습니다. 미국의 딜러숍들은 자동차를 구매하는 고객이 가져오는 중고차를 사주
기도 합니다. 차량 검사를 거쳐서 품질인증(certified)을 붙여 중고차를 파는 것이죠.
일단 한국 딜러를 먼저 찾아갔습니다. 너무나도 조건이 좋은 차라 그런 차들은 나오기 무섭게 팔
린답니다. 그런 차들은 딜러들이 자신의 고객에게 전화를 걸어 구매 의사를 타진하는데, 저희가
운 좋게도 그날 차량이 들어오자마자 바로 보게 된 것이죠. 매일 미국 딜러와 영어로 이야기하다
한국 딜러를 만나니 마음이 편했습니다. 차를 사진 않았지만 궁금했던 것들, 앞으로 차를 사면서
도움될 만한 이야기를 많이 물어볼 수 있었습니다. 또 다른 차량을 보여줬지만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마커스가 보여준 차도 좀 실망스러웠습니다.
렌트카 반납 날짜는 다가오는데 마음에 드는 차를 구하지 못해 조금해졌습니다. 렌트카 비용도 만
만치 않은데 돈을 아끼기 위해서라도 빨리 차를 구입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새차도 아니고 중고
차가 어디 원하는 조건대로 ‘뚝딱’하고 나오나요. 어느덧 시간은 흘러 결국 마음 편하게 렌트카
를 일주일 더 연장하기로 했습니다. 대신 비용을 줄이기 위해 렌트카 모델을 소나타로 바꿨습니다.
미니밴을 몰다 세단을 운전하니 어찌나 편하던지요.
KBB 사이트에 원하는 차량 조건을 입력하고 검색을 하다보니 집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매장에 마음에 드는 차가 있었습니다. 딜러에게 먼저 전화를 하고 찾아가니 일본인이었습니다. 미
국에 이민온지 30년 가까이 됐다고 하는데 일본 억양이 강한 영어를 썼습니다. 한국인 방문 학자는
처음이라며 자신은 일본인 방문학자나 주재원들과 주로 거래를 한다고 했습니다.
본격적으로 협상에 들어갔습니다. 미국에서는 판매자가 제시하는 ‘tag price’(고객이 볼 수 있
도록 전시된 차에 붙여 놓은 가격)가 있지만 이 가격을 다 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딜러와 협상을
통해 가격을 깎는 것이 통례죠. 저와 아내는 KBB 자료를 들고 가격을 낮추기 시작했습니다. 월말
이라 저희에게 유리한 점도 있었습니다. 또 자동차를 구석구석 살피던 아내가 결함을 세가지 찾아
내 이 것도 협상에 중요한 카드로 사용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흥정을 하다 보면 딜러는 새로운 가격이 제시될 때마다 “보스(매니저)에게 이야기
해보겠다”라며 방을 나갑니다. 처음부터 많이 낮춰서 가격을 불렀던 터라 딜러는 “매니저가 그
가격에는 불가능하다고 했다”며 새로운 가격을 제시했습니다. 이런 밀고당기기가 계속 이어집니다.
자동차에 대한 지식이 많으면 흥정을 할 때 유리하겠지만 평범한 구매자로서 왜 가격을 더 낮춰야
하는지 근거를 대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가격 협상에 실패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음날 딜러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7월 31일, 7월의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딜러도 월말인만큼 꼭
거래를 성사시키고 싶은 눈치였습니다. 일단 결함 중 두 가지만 수리해주는 조건으로 마지막 흥정
가격을 제시했습니다. 딜러는 매니저와 상의하겠다며 전화를 끊었습니다. 전화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사려는 차가 ‘Certified’된 차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딜러는 “거래가 성사됐
다”며 전화를 걸었지만 우리는 이 점을 따지며 다시 흥정을 시작했습니다. 여러 가지 얘기가 오
갔고 대여섯 번의 전화통화 끝에 결국 일본인 딜러와의 협상도 물거품이 됐습니다.
다시 원점부터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아내와 여러 가지 차량 모델을 놓고 논의를 한 끝에 둘다
만족하는 차량을 찾아냈습니다. KBB에서 조건에 맞는 차량을 판매하는 딜러점을 검색해 찾아갔
습니다. 열살쯤 이란에서 미국으로 이민 왔다는 딜러였습니다. 그 매장에서만 십년 넘게 일한
사람이었습니다. 한국의 테헤란로 이야기를 해주니 재미있어 하더군요.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흥정이 시작됐고, 딜러가 매니저와 상의하기 위해 두세번 자리를 비운 끝에 거래가 성사됐습니다.
워싱턴주는 소비세가 9.5%로 매우 비싼데, 자동차를 사면 소비세와 등록비용까지 차량 가격의
11% 정도 추가됩니다. 이처럼 자동차를 사는데 드는 모든 비용을 ODP(Out the Door Price)라고
합니다. ODP를 매장에서 걸었던 tag price보다 낮추긴 했지만 흥정을 더 잘했더라면 좀 더 좋은
조건에 차를 살 수 있었으리라 봅니다. 가격을 더 많이 낮추지 못한 점은 아쉽지만 부부가 모두
마음에 드는 차를 구입한데다 1년간 주요 부품에 대한 보증이 이루어지는 등 자동차의 안전과
관련된 부가 서비스가 제공되는 조건 때문에 만족스러웠습니다. 아무래도 정보력이 부족한 구매
자 입장에서는 딜러와의 협상에 불리한 입장이라는 점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거래가 성사되자 아내가 딜러에게 대뜸 물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차량을 구입하면 선물을 많이
주는데 너희는 어떤 기념품을 줄 수 있느냐?” 딜러가 웃으면서 우리를 매장 구석에 있는 자동차
로고숍으로 데려갔고 아내는 로고가 박힌 텀블러, 저는 야구 모자를 하나 골라 썼습니다. 역시
미국에서의 삶은 협상과 흥정의 연속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