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미국에 와서 가장 막막했던 것이 삼시세끼였습니다. 미국은 대부분 일부 대도시를 제외하곤 집 근처에 식당이 마땅치 않고 배달도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물가가 너무 비싸 외식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결국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마트에서 식재료를 구매하고 직접 요리하는 게 불가피합니다. 다행히 제가 지내는 미주리주 콜럼비아의 일상은 여유롭다 못해 무료했고, 외식 물가에 비해 식자재 값은 저렴하며 종류도 다양했습니다. 지금껏 도전해보지 못했던 다양한 요리를 해 먹을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러던 중 ‘흑백요리사’라는 예능 프로그램이 선풍적 인기를 누렸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당시 무료함을 호소하던 저를 비롯한 40대 한국인 아재들의 ‘요리 부심’을 자극했습니다.
중식도가 왜 거기서 나와
저는 자취생활을 오래 했기 때문에 요리를 전혀 못하는 편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기껏해야 김치찌개나 계란말이 같은 간단한 반찬 및 술안주를 만드는 수준이었습니다. 미국에서도 딱 그 정도 수준의 음식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엌 서랍 속 깊숙한 곳에서 네모난 식칼이 발견됐습니다. 생김새가 딱 중식도(刀)였습니다. 여러 한국인들이 거쳐가면서 세간살이가 켜켜이 쌓인 집을 이어받았는데, 누군가 중식에 도전했었던 것 같습니다. 집안 구석구석에서 예상 못한 유물이 수시로 발견되던 때였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흑백요리사라는 예능 프로그램이 나왔습니다. 다양한 중식 요리사들이 중식도로 야채를 썰고 마늘을 찧는 모습이 그렇게 멋져보였습니다. 마침 제게도 중식도가 있었습니다. 중식에 도전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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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시작은 자장면이었습니다. 한국에서 가져온 짜파게티에 중식도로 썬 양파와 각종 야채를 추가해 응용하는 수준으로 출발했지만 연습할 시간이 많았던 덕분에 단기간에 완성도가 높아졌습니다. 나중에는 돼지 비계로 기름을 추출하고, 거기에 춘장을 볶아 사용하고 파기름을 내는 등 실제 중국집과 거의 비슷한 방식으로 자장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면 역시 처음에는 라면 사리를 이용했지만, 나중에는 스파게티면을 물에 불려 실제 자장면과 거의 같은 식감을 구현했습니다. 입소문이 나면서 한동안 저희 집은 자장면을 찾는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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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소육을 아시나요
자장면으로 자신감을 얻게 되자 좀 더 그럴듯한 요리에 도전해보고 싶어졌습니다. 특히 흑백요리사에 등장했던 동파육이 욕심났습니다. 아시안 식료품점들을 돌아다니며 중국산 간장, 맛술, 향신료 등 동파육에 필요한 재료들을 구비했고, 다양한 레시피를 참고해가며 동파육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여러번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먹어봤던 동파육처럼 야들야들하고 쫄깃한 식감, 반들거리는 색감은 구현할 수 없었습니다. 연습으로는 넘을 수 없는 벽이 느껴졌습니다.
그러던 중 흑백요리사에서 동파육과 비슷한 ‘홍소육’이라는 요리가 잠깐 언급됐습니다. 유튜브를 찾아보니 홍소육은 동파육보다 훨씬 난이도가 낮았고, 무엇보다 한국인 중 홍소육의 원래 맛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심리적 부담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제멋대로 홍소육을 만들었는데, 맛본 사람들은 의외로 ‘별미’라고 호평해줬습니다. 흑백요리사는 끝났지만 이후로도 저는 탕수육, 유린기, 짬뽕 등 다양한 음식에 도전하면서 중식 꿈나무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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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의 연수가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지금처럼 취미삼아 요리를 하는 일상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연수를 나오기 전 그랬던 것처럼 배달 음식과 마트 밀키트에 의존하겠죠. 하지만 이곳에서 손수 만든 요리를 지인들과 나눠먹었던 추억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올 하반기쯤 흑백요리사 시즌 2가 나온다고 하는데, 미국에서 갈고닦은 요리 실력을 한국에 계신 가족과 친구들에게도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