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의 겨울은 유난히 추웠습니다. 얼마 전엔 6년 만에 눈이 와서 도로가 마비됐습니다. 따뜻한 지역에 눈이 오고 기온이 떨어지면 감기 환자가 늘어납니다. 저는 이번에 미국 동네 병원의 감기 진료 경험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딸의 감기 때문에 병원에 다녀 왔는데, 우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미국에 보험 없이 병원에 입원하면 5000달러(약 720만원)는 각오해야 한다’ 한 번쯤 들어봤을 얘기입니다. 저는 연수 전에 미국 의료 시스템에 대한 공포가 있었습니다. 미국 의료에 대한 악명이 높기도 하고, 2008년 개봉한 미국 다큐멘터리 영화 ‘식코(sicko)’가 각인돼 있기도 합니다. 그 영화에서는 손가락이 잘린 환자가 보험이 없어서 치료를 포기합니다.
미국 대학은 의료 보험이 없는 학생은 입학을 허가하지 않습니다. 저는 입학에 문제가 없을 정도로만 보장하는 보험을 가입했습니다. 연수생들은 1년 연수에 보험으로 큰 돈을 들이기는 아까우니, 다들 이런 종류의 보험을 가입합니다. 하지만 1년이라는 기간을 살다 보면 고비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저는 지난해 10월 딸이 기침 감기를 심하게 앓으면서 고비를 맞았습니다.
딸이 기침을 시작한 첫날에 별 걱정이 없었습니다. ‘한국에서 가져 온 감기약을 쓸 때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해열제가 잘 듣지 않더라고요. 기침은 더 심해지고요. 서울에 있었다면 야간 진료가 가능한 달빛어린이병원으로 달려가겠지만, 미국은 그런 게 없죠.
딸의 체온이 39도를 넘나들던 그날 밤 마음을 졸이다 아마존을 생각했습니다. 미국은 약배송이 합법인 나라입니다. 새벽 1시 아마존에서 새벽배송으로 기침약을 주문했더니 .오전 6시에 집앞에 배송됐습니다. 하지만 불안한 마음을 잠재울 수 없어 그날 아침 월마트에 약을 또 사러 나갔습니다. 미국은 일반 슈퍼마켓에서 처방전 없이 살 수 있는 일반의약품(OTC, Over the Counter)이 많습니다.
코로나19에 걸린 건 아닌 지 확인하려고 진단키트도 찾아 나섭니다. 마트에 키트를 사러 갔더니 미국은 약국에 가면 코로나19 진단키트 4개를 무료로 나눠준다고 합니다. 주소나 이름도 묻지 않고요. 일단 진단 키트 결과는 음성. 열이 나흘째에 접어들자 ‘갖고 온 항생제가 아이에게 안듣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의 동네 소아과 선생님이 그리워집니다. 답답한 마음에 동네 응급 의료(어전트 케어 Urgent Care) 문을 두드렸습니다.
‘어전트(응급) 케어’라고 하니 무시무시해보이지만, 동네 병원 느낌입니다. 소아과 의사는 볼 수 없었지만, 간호사로부터 항생제 처방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전문 간호사(NP)가 항생제를 포함해 항우울제 피임약까지 처방할 수 있다고 합니다. 처방약을 먹였더니 거짓말처럼 열이 내렸습니다. 병원비는 한국보다 훨씬 비싸게 나왔지만, 보험으로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 병원에 대해서 우려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오히려 새벽배송으로 일반약을 배송받고, 슈퍼마켓에서 원하는 약을 사고, 간호사에게 처방을 받을 수 있으니 한국보다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아가 미국 병원에 대한 막연한 공포는 시스템에 대한 이해 부족 때문으로 보였습니다.
한국에서는 ‘병원에 입원을 했는데 병원비를 100만원 냈어’라고 말하지, ‘병원비 총 금액이 500만원이었는데 의료보험으로 100만원만 냈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미국에서는 병원에서 병원비 총 금액만 이야기하지 환자 본인이 부담하는 금액을 말해주지 않습니다. 환자들은 이 부분에서 지레 겁을 먹게 됩니다.
미국 의료 보험사의 공포 마케팅도 있습니다. 미국 의료 보험은 ‘상품’이기 때문에 마케팅을 통해 가입자를 유치해야 합니다. 보험이 가입자를 끌어들이려면 청구액이 얼마나 큰 지 강조해야 합니다. 청구액과 보험금액 차이가 클수록, 병원이 청구하는 금액이 크면 클수록 환자는 이득을 보는 기분이 듭니다. 여기에 또 다른 변수가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의료 보험이 없다고 말하면 병원에서 병원비를 깎아줍니다. 병원 입장에서는 보험 없는 환자에게 치료비를 부풀려 받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한국의 국민 건강 보험이 사회 보장 제도 성격이라면 미국의 의료 보험은 금융 상품입니다. 미국에서는 환자가 내는 본인 부담금이 일정 수준을 넘으면, 나머지 병원비는 의료 보험사가 모두 부담합니다. 이 경우 암 같은 중증 질병에 걸리면 이 보험이 위력이 발휘합니다. 그러니 미국 사람들은 감기로 병원을 가지 않습니다. 미국의 시스템이 한국보다 좋다는 건 아닙니다. 미국에 체류할 계획이 있다면 한국 의료보험이 훨씬 좋다는 편견은 버리고 미국 의료 시스템을 이해하는 게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지난 6개월 유용하게 쓴 한국산 상비약 목록을 공유해보려고 합니다. 항생제 기침약 같은 고전 의약품 가성비는 미국이 한국을 따라올 수 없습니다. 저는 아세트아미노펜, 이부프로펜, 덱사브로펜 등 해열 진통제를 종류별로 챙겼고, 알러지약, 안약, 수면제, 의료용 붕대도 가방에 넣었습니다.
부피와 무게를 많이 차지하는 물약 대신에 가루 해열제를 넣었습니다. 항생제는 어른과 아이 모두 쓸 수 있는 세파클러 계열로 처방을 받았고, 반창고는 크기 별로 넣었습니다. 어디서든 살 수 있는 반창고까지 왜 사가냐고 할 수 있는데, 미국에서 반창고 가격은 한국의 두 배가 넘습니다. 원 달러 환율이 치솟으면서 한미 체감 반창고값 차이는 약 3배 정도 됩니다.
지난 가을 딸이 축구 연습 경기 중에 넘어져서 양쪽 무릎을 크게 다쳤는데, 이 반창고들을 잘 썼습니다. 약 준비에서 실수도 있었습니다. 성인과 어린이 다 먹을 수 있는 기침약이라고 사왔는데, 막상 뚜껑을 열었더니 ‘12살 이상’만 쓸 수 있는 약이었습니다. 제 딸은 8살이라, 이 약을 먹을 일이 없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