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반드시 하리라고 맘먹었던 것은 정기적으로 수업을 듣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은 지나간 시간을 그리워 한다는데, 저에겐 대학시절이 그랬거든요. 십 수년만에 학교의 공기를 느끼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던 탓에, 짐을 풀자마자 이곳 유학생에게 어떻게 강의를 청강할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영어가 딸리고, 20대 초반의 젊은 학생들 사이에서 늙수그레한 외모가 도드라질 수 있는 만큼 대형강의실에서 진행되는 수업을 듣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을 새겨듣고,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지난 학기엔 ‘Social problem’ 수업을 들었고, 이번 학기엔 ‘미국 언론사’를 청강하고 있습니다. 두 강의 모두 150여명이 참석하는 대형 강의실에서 진행되는데, 두 수업 모두 1, 2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전공입문 과목쯤으로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 첫 학기 수업은 월요일과 수요일, 이번 학기엔 화요일과 목요일에 수업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청강이라도 과정은 쉽지 않더군요. 담당 교수의 양해를 구하는 게 도리일 것 같아서 교수님들에게 메일을 보냈습니다. 말도 안되는 영어로 “한국에서 온 기자인데, 교수님이 하시는 강의가 앞으로 제 글 쓰는데 도움이 될 거 같다”면서 청강을 요청했습니다.
지난 학기 ‘Social problem’을 진행했던 여교수님은 “1학년들이 듣는 기초수업인데, 도움이 되겠느냐”면서도 청강을 허락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번 학기는 양해를 얻기 쉽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청강을 요청했던 교수님은 “강의실이 다 찼다”면서 거절했고, 또 다른 교수님은 두 차례나 메일을 보냈음에도 답장을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박사 과정을 밟고있는 미국 친구에게 부탁해 그 친구가 TA(teaching assistant)를 맡고 있는 ‘미국 언론사’ 청강 허락을 가까스로 받았습니다.
영어가 부족해 수업을 온전히 따라가기 쉽지 않지만, 그래도 재미있더군요. 파워포인트를 이용해 강의를 진행하니까 말로 이해가 안되어도, 텍스트를 보면서 그럭저럭 버텨나가고 있습니다. 지난 학기 수업을 들으면서 역시 미국의 가장 큰 사회문제는 여전히 인종문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같은 범죄를 저지르더라도 흑인의 투옥율이 높고, 흑인은 저소득층에 자리하며, 여전히 교육수준도 낮다는 갖가지 통계를 수업 내내 접했습니다.
비만도 큰 사회문제로 여겨집니다. 수업 중 각 주의 비만도를 나타내는 지도가 제시됐는데, 20여년 전 지도와 비교할 때 대다수 주의 비만도가 급증했습니다. ‘왜 미국사람들이 뚱뚱해지는가’를 분석하는 다큐멘터리도 봤는데. 옥수수와 콩 등에 너무 많은 정부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도 원인이라는 색다른 분석을 내놓았습니다. 필요소비량 이상으로 생산된 여분의 옥수수와 콩 등이 결국 각종 정크 푸드의 원료로 활용되고, 미국인들은 정크푸드를 먹어서 뚱뚱해진다는 논리를 펴더군요.
미국언론사 수업에선 미국 언론사의 주요 인물들의 생애 등을 접하고 있습니다. 시대의 메인스트림에서 어긋나는 흑인해방, 여성투표권, 노동권 등을 옹호했던 당시로선 급진적이라고 여겨졌던 언론인들의 활동 등을 배우고 있습니다. 강의는 9.11 때 미국 주류언론이 취했던 태도를 조명하는 지점에서 마무리 될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냉전’이라는 말을 만든 인물로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월터 리프만에 대해 배웠습니다. 교수님께선 저널리즘을 현대화한 인물이라며 “밑줄 쫙”을 외치셨지만, 그만 수업 대부분을 졸고 말았습니다.
대형강의실에서 진행되는 수업이지만, 정말 뻑뻑하더군요. 지난학기 수업에선 매시간 객관식 퀴즈가 진행됐습니다. 교수님께서 수업 전에 “텍스트북을 어디까지 읽어오라”는 과제를 내고, 실제 수업 도중 그 텍스트북을 기초로 계속 퀴즈를 보더군요. 학생들은 각자에게 제공되는 clicker로 파워포인트에 제시되는 퀴즈의 정답을 매시간 클릭했습니다. 따로 출석을 안불러도 결석은 꿈도꾸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퀴즈 점수의 종합, 수시로 제출한 리포트, 중간고사 기말고사 등을 모두 합산해 각자의 성적이 매겨집니다.
이번 학기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지난학기처럼 수업 도중 쉴새없이 퀴즈가 제시되지는 않지만, 수업이 시작되자마자 예고없이 쪽지시험을 진행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수업에 늦게 들어오면 시험도 못치르겠지요. 이제 한달여 지났을 뿐인데, 예고없는 쪽지시험이 세차례 정도 진행됐고, 이미 한차례 시험도 치러졌습니다.(교수님께선 세차례 시험을 치르실 예정이라고 합니다).
과제도 기가 찹니다. 3월말까지 미국 언론사의 인물들과 가상 인터뷰 기사를 작성해서 제출하라는 과제가 떨어졌는데, 반드시 현재 핫한 이슈가 인터뷰 소재가 돼야 한다고 합니다. 인터뷰 기사는 생생해야 하는데, 십 수년간 기사를 써온 저로서도 구라풀기가 쉽지 않을 것 같더라구요.
왜 이렇게 과제와 시험이 많으냐고 박사 과정의 유학생에게 물으니, “이곳에선 중간고사, 기말고사로만 학생들을 평가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설사 성실한 학생이라도 아프거나 컨디션이 나빠서 시험을 망칠 수도 있는데, 그런 상황을 방지하려면 다각도의 평가를 진행해야 한다는 게 대학의 생각이다”고 하더군요. 말로는 배려한다는 데 실제론 학생들을 잡는다는 게 맞는 말이겠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