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초등학교 2개월 차, 스펠링비를 만나다
만 9세 아들이 SOS를 쳤습니다. 반에서 열리는 영어 철자 경시대회 ‘스펠링비(Spelling Bee)’ 준비를 도와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학교 영어 수업만 따라가다가 별안간 미국에 떨어져 고난의 행군 중인 아이는 간절한 눈빛으로 호소했습니다.
“엄마, 나 이거 정말 잘하고 싶어.”
아직 영어로 입은 안 트였어도 철자 정도는 외울 수 있겠다 싶었던 모양입니다. 아이가 열심히 해 보겠다는데 엄마로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기에, 학교에서 나눠준 출제 예상 단어 50개의 목록을 펴 놓고 매일 저녁 30분씩 책상 앞에 나란히 앉았습니다. 사전에서 한 단어 한 단어 찾아보며 뜻과 철자를 익히게 했습니다. 저도 처음 보는 단어가 많아서 가르친다기보다는 같이 배운다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아이는 대견하게도 포기하지 않았고 학급 대표로 뽑히더니 학년에 이어 학교 대표 선발전까지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비록 학년 대표를 가리는 단계부터는 공부해야 할 단어가 450개로 늘고 수준도 엄청나게 올라가서 아이의 의지가 눈 녹듯 사라지긴 했지만요. 참고로 올해 아이의 학교 스펠링비는 5학년 학생이 우승해 지역 예선에 나가는 것으로 마무리됐습니다.

미국인의 남다른 철자 사랑
정확한 스펠링을 향한 미국인들의 열정은 뿌리가 깊습니다. ‘건국의 아버지’ 가운데 한 명인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도 1750년 문건에서 “실력이 비슷한 학생 두 명을 짝지어 서로에게 매일 10단어씩 스펠링 문제를 내고 겨루게 한 뒤, 더 많이 이긴 쪽에게 상을 주는” 교육 방식을 제시했습니다. 19세기 들어서는 학교에 다니는 어린이들뿐만 아니라 일반 성인들도 철자 맞히기 시합을 즐기게 됐습니다. 스펠링 경합을 지칭하는 용어 ‘스펠링비’는 1870년대부터 널리 퍼졌습니다. 여기서 ‘bee’는 곤충이 아닌, ‘이웃이나 친구 등이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모이는 것’을 뜻합니다.

1925년 켄터키주의 지역 신문사가 워싱턴 D.C.에서 최초의 전국 대회를 개최한 건 학교나 지역 공동체 중심의 소규모 행사에 머무르던 스펠링비의 위상을 전국 단위 대규모 행사로 높이는 계기가 됐습니다. 이후 후원사가 바뀌어 ‘스크립스 내셔널 스펠링비(Scripps National Spelling Bee)’로 불리게 된 이 대회는 올해(2025년)로 100주년을 맞았습니다. 내셔널 스펠링비는 제2차 세계대전과 코로나19 팬데믹 때를 제외하곤 꾸준히 열려, 지금까지 우승자 110명(공동 우승 포함)을 배출했습니다. 최종 라운드는 스포츠 전문 채널 ESPN 등을 통해 미국 전역에 생중계되고, 매년 수백만 명이 시청하는 ‘빅 이벤트’로 자리 잡았습니다.
‘scherenschnitte’가 영어 단어라고?
매년 5월 말, 학교와 카운티, 주 스펠링비를 통과한 실력자들이 한자리에 모인 가운데 내셔널 스펠링비의 막이 오릅니다. 만 16세가 되지 않은 8학년까지 출전할 수 있고, 2025년엔 모두 243명이 참가했습니다. 이중에 65명은 이전에 내셔널 스펠링비를 경험한 적 있는 이른바 ‘n수생’으로, 같은 대회에 5년 연속 나온 경우도 있을 만큼 학생들은 스펠링비에 모든 것을 쏟아붓습니다. 물론 상금을 받을 목적으로만 그런 노력을 기울이는 건 아니겠지만, 우승자에게는 현금 5만 2,500달러가 주어집니다.
경기 방식은 간단합니다. 참가자는 한 명씩 무대 앞에 나와 영어 단어를 듣고 90초 안에 철자를 말해야 합니다. 출제자에게 단어의 정의와 품사, 예문, 어원을 물어볼 수 있고, 단어를 다시 읽어 달라고 요청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알파벳 하나라도 틀리게 답하면 무정한 ‘땡’ 소리와 함께 바로 탈락입니다. 철자 말고 단어의 의미를 묻는 라운드도 있습니다. 이는 스펠링을 기계적으로 암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어휘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 평가하기 위한 것입니다.

강호 고수들의 대결이다 보니 내셔널 스펠링비의 치열함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내셔널 스펠링비 결선이 하루에 다 끝나던 시절(현재는 준준결승과 준결승, 결승전이 사흘간 치러집니다), 1957년 대회 결선은 가장 길었던 단일 일자 경기로 기록됐습니다. 오전 9시에 시작한 경기는 주최 측이 준비해 둔 문제가 모두 소진된 오후 6시 55분,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2명을 공동 우승자로 인정하는 것으로 종료됐습니다.
내셔널 스펠링비의 모든 단어는 미국의 대표적 사전 출판사 ‘메리엄-웹스터(Merriam-Webster)’의 사전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은 평생 한 번도 못 들어볼 법한 단어가 많습니다. 절반 이상의 어원은 라틴어나 고대 그리스어, 프랑스어고, 전문적인 과학 용어, 세계 곳곳의 지명도 단골 문제입니다. 또, 라운드가 올라갈수록 난도 역시 올라갑니다. 역대 챔피언을 결정한 단어 목록을 보면, “이게 영어라고?”라는 말이 저절로 나옵니다. 이 가운데 가장 긴 단어는 2015년 우승자가 마지막으로 맞힌 ‘scherenschnitte’입니다. 독일어에서 유래했고, ‘종이를 정교하게 오려내 장식적 디자인을 만드는 공예’를 가리킨다네요.
스펠링비와 아메리칸드림
영어에서는 철자와 발음이 1:1로 대응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같은 소리가 다른 글자로 표기되기도, 같은 글자가 다른 소리를 나타내기도, 버젓이 쓰여 있는 글자가 발음되지 않기도 합니다. 영어의 이런 특성은 철자 맞히기가 흥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맞춤법 검사 프로그램과 자동완성 기능에 의존하면 예전처럼 철자를 빡빡하게 챙기지 않아도 되는 시대에도 스펠링비의 인기가 식지 않는 데엔 다른 이유가 있어 보입니다.
2025년도 내셔널 스펠링비 챔피언 페이잔 자키(Faizan Zaki)는 우승 직후 언론 인터뷰에서 평일엔 매일 하교 후 5~6시간씩, 주말엔 7~8시간씩 사전을 찾아보고 단어를 정리하면서 대회를 준비했다고 말했습니다. 13세 소년이 학교 공부와 스펠링비 공부를 병행하는 고행을 마다하지 않은 까닭이 궁금해집니다. 재능을 바탕으로 성실히 노력하면 누구든 성공할 수 있다는 미국 사회의 ‘능력주의’와 ‘아메리칸드림’ 정신이 원동력이 되지 않았을까요. 인종이나 민족적 배경에 따라 영어 발음과 억양이 각양각색이고, 때로는 이게 차별과 낙인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 이민자의 나라 미국에서 철자만큼은 모두에게 동일하다는 것도 주목할 부분입니다. 철자를 놓고 경쟁할 때는 미국 사회의 주류 WASP(백인 앵글로색슨 프로테스탄트)보다 불리할 게 없으니, 인도계나 한국계 어린이·청소년들도 용기 내 도전할 수 있을 테니까요. J-2 비자를 들고 미국 땅을 밟은 지 몇 달 안 된 제 아들도 부지불식간에 이를 간파하고 스펠링비에 매달렸던 게 아닐지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다만, 스펠링비 대회가 얼마나 평평한 운동장인지는 의문입니다. 2003년 75회 아카데미 장편 다큐멘터리 후보에 올랐던 제프리 블리츠(Jefferey Blitz) 감독의 ‘스펠바운드(Spellbound)’는 1999년 내셔널 스펠링비 참가자 8명의 실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등장 인물 중에 흑인 노동계급 싱글 맘의 딸과 영어를 한마디도 못 하는 멕시코 이민자 부모의 딸은 스스로 공부법을 터득해 전국 대회 무대에 섭니다. 가족의 응원은 받아도 조력을 받을 형편은 못 되기 때문입니다. 반면,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선 부모가 자녀의 스펠링비 준비를 열성적으로 돕고, 더 나아가 과외 교사를 붙이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특히, 내셔널 스펠링비 경쟁이 해가 다르게 뜨거워지면서, 스펠링비 최상위권 경험자나 그들의 부모를 영입해 노하우를 전수받는 일은 점점 흔해지고 있습니다. 계층에 따라 누군가는 독학을 해야만 하고, 누군가는 다방면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다면, 과연 이들의 출발선이 같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제98회 스크립스 내셔널 스펠링비는 2026년 5월 26일부터 28일까지 열립니다. 저도 아이와 같이 결승전을 볼 계획입니다. 제가 한 문제라도 맞힐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스펠링비가 미국인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조금이라도 더듬어 볼 기회는 되리라 확신합니다.